00072 뜻밖(4) =========================
"아, 하하. 페레이아 경께서 내 뜻을 오해하신 것 같군. 그저 너무 피곤해 보인다는 말이었소. 우리 군의 최고 기사인 페레이아 경이 건강해야지, 이렇게 피로해보여서야. 내가 햄을 넉넉히 갖고 왔으니 식사도 좀 든든히 하시고, 향유 목욕도 좀 하면서 피로를 푸시는 게 좋겠소."
남 탓이 몸에 밴 습관이라 한발 물러서면서 한다는 말조차 '내가 잘못 말했다'가 아닌 '네가 잘못 들었다'인 것을 케네스 본인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듣고 있는 루크는 정확히 그 부분이 아주 기분 나빴다. 그래도 그 콧대 높은 공작 각하가 몸을 낮췄으니 이 정도에서 적당히 좋게 끝내야 했다. 누가 누구에게 빚을 지고 있는 입장인지만 확실히 인식시키면 되었던 상황이었고, 무엇보다 케네스는 한번 원한을 가지면 나중에 무슨 일로 뒤통수를 칠 지 모르는 인간이었으니까.
"저도 최근 신경이 예민해져서 각하께 무례했군요. 죄송합니다. 각하께서 가져오신 햄은 식사 시간에 기대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각하께서 제게 하실 말씀이 있으셨던 것 같은데요. 아닌가요?"
루크의 목소리에서 슬쩍 힘이 빠진 것을 느낀 케네스는 미소 띤 얼굴을 유지하며 그에게 다시 자리를 권했다. 그리고 밖에서 기다리는 시종을 시켜 술상을 차려오도록 시켰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술상까지 따로 차려오게 시키십니까?"
"이쪽으로 오기 전에 마침 영지에서 올해 최초의 포도주가 진상되었다네. 오래 묵은 것보다야 고급은 아니지만, 그래도 신선한 맛에 마실 만하더군. 그런데 젊은 포도주를 보니 역시나 젊고 용맹스러운 페레이아 경과 한 잔 하고 싶다는 생각이 나질 뭔가. 하하하."
루크는 케네스의 화법에 혀를 내둘렀다. 대충 들으면 그야말로 네 생각이 나서 영지에서 진상된 술을 챙겨왔다는 내용이지만, 그 안에 숨겨진 의미를 따지자면 '오래 묵은 고급 술'은 자기 자신이요, 이제야 갓 담은 포도주는 루크를 뜻했으니 루크 더러 '풋내기'라고 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해 최초로 생산된 포도주는 아무리 잘 쳐줘봐야 고급 포도주 한 모금 값도 되지 않았으니까.
루크는 확 열이 올랐지만 밑바닥에서부터 지금 이 자리까지 기어 올라온 그 역시 이 정도의 감정 조절도 못할 수준은 아니었다.
"공작 각하께서 마음을 써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감사인사를 전하는 루크의 눈빛이 싸늘했다.
케네스는 시종이 들여온 술상을 사이에 놓고 포도주가 세 잔 째 따라질 때까지도 신변잡기적인 쓸 데 없는 얘기를 하다가, 넌지시 본론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말이네, 아무래도 우리 군에서 대마법사의 전력이 빠진 것은 큰 타격이야."
'드디어 말을 꺼내는군.'
루크가 속으로 빙그레 웃었다. 그 역시 에르논이 죽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지만 모르는 척 했다.
"그렇기는 합니다만, 이미 죽은 사람을 찾아올 방도도 없고, 지금 이 상황에서 시체를 찾아올 이득도 없으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니. 나는 에르논이 살아있다고 생각하네.
"공작께서 에르논을 공작가에 입적하실 만큼 사랑하셨다는 거야 잘 알고 있습니다만, 지금은 전시입니다. 냉정하게 판단하셔야지요. 살아있다고 믿는다는 것은 공작 각하의 부모 된 마음일 뿐, 군사를 움직이려면 확실한 증거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에르논을 공작이 입적시켰다는 것을 들먹이며 공작의 심기를 마구 어지럽히던 루크는 만족스러운 기분이 되어 포도주를 목구멍으로 넘겼다.
케네스는 호박색 눈을 무섭게 치켜떴지만 루크의 말에 대해 반박하지는 못했다. 어금니가 갈리는 소리가 나기 전에 떨떠름한 미소를 지은 케네스는 자신의 생각을 들려주었다.
"그 녀석이 살아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나만의 방법이 있네. 녀석은 살아 있어. 하지만 큰 부상을 입고 1황자 진영 깊숙한 곳에 갇혀있는 것 같네. 아마 삼엄한 감시 속에 갇혀있겠지. 하지만 나는 자네더러 에르논 자체를 구해오라 부탁하는 게 아니야. 에르논과 포로 교환을 할 수 있을만한 이를 잡아오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지 않겠나."
"그럴 수 있을만한 가치를 지닌 자라면 그 역시 삼엄한 호위로 둘러싸여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내가 자네한테 부탁하는 게 아니겠나. 그리고 이것은 나만을 위한 일도 아닐세. 우리 군이 승리하기 위해 아주 중요한 일이야. 군을 이끌고 있는 자네가 나서준다면, 전군에 아주 모범이 될 거라고 생각하네."
루크는 엉덩이에 불이 붙은 주제에 제 앞에서 혀를 살살 놀리고 있는 늙은 뱀을 쳐다보며 조소를 삼켰다. 하지만 케네스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케일런군은 그동안 에르논의 힘에 많은 부분을 의지해왔다. 검을 쓰는 기사이자 군대를 지휘하는 사령관의 입장에서야 마법에 의지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타셀이 마법을 쓸 수 있다는 걸 알아버린 지금, 에르논의 존재가치는 더욱 중요해진 상태였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로군요. 확실히, 에르논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크지요."
루크는 잔을 빙글빙글 돌리다 유리잔 벽을 타고 흐르는 붉은 액체를 가만히 응시했다. 붉어진 유리잔에 루크의 차가운 눈동자가 반사되었다.
"알겠습니다. 우선 첩자를 보내 에르논과 바꿀 가치가 있으면서 납치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은 자를 물색해보겠습니다."
그의 말에 케네스가 루크로서도 처음 보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루크는 그게 영 찜찜했지만 별 말 없이 넘길 수밖에 없었다.
*
케일런군이 대패한 이후 좀 더 밀어붙였으면 승기를 확실히 잡을 수 있지 않았겠느냐는 의견이 있었지만 타셀은 일단 전열을 정비하기로 했다. 사실 마법을 사용한 것은 타셀에게도 꽤 타격이 되었다. 몸 안의 마력과 마나를 대량으로 방출한 탓에 마나 괴물이라 불리는 그라 하더라도 다시 마력과 마나가 차오를 시간이 필요했고, 넉넉하지 않은 병사를 최대한 잘 추스르며 나아가야 했기 때문에 부상 병사의 치료에 전력을 다해야 했다. 병사들의 사기가 케일런군 보다 높다는 것 하나만 믿고 밀어붙이기에는 그 사기를 뒷받침해줘야 할 후방의 지원물자가 늦어지고 있다는 것도 발목을 잡았다.
덕분에 현재 양 진영은 불안한 평화를 누리고 있는 중이었다.
카시야는 알리시아와 같은 막사를 쓰면서 그녀를 호위했는데 호위라는 일을 맡아본 적이 없는 그녀로서는 신선한 체험이었다. 알리시아의 근처에서 주변을 경계하고 있노라면 영애를 향한 눈동자가 얼마나 많으며, 그 눈빛이 얼마나 뜨거운지 호위로 있는 카시야의 피부가 따가울 지경이었다. 도대체 어릴 때부터 이런 수많은 시선에 둘러싸여 살아왔다는 것은 어떤 기분이었을지 궁금했다. 물론 그녀를 향한 감정은 동정에 가까웠다.
알리시아의 하루는 타셀과 마찬가지로 쉴 틈이 없었다. 일찍 일어나서 하녀의 도움을 받아 간단히 씻고 옷을 입고 가벼운 아침식사를 한 뒤 간밤에 사망하거나 위독해진 이는 없는지 치료 막사를 한 번 돌았다. 병사들은 그녀에게 위로의 말 한 마디라도 더 들으려고 그녀를 불러댔고, 치료 막사를 다 돌고나면 이미 점심 식사 시간이 되었다. 또 간단히 점심 식사를 하고나면 간호부대의 상급자들과 물품의 수급과 치료 상황, 기타 급박한 일들에 대해 회의를 하고 그 결과를 가지고 타셀에게 보고를 했다. 오후에는 다음날 쓸 물품의 사용 신청을 훑어 가장 필요한 일부터 승인을 내리고 저녁 식사를 한 뒤에는 남은 물품 상황을 정리했다. 그것까지 다 마치고나면 하늘에는 별이 총총 떠있기 마련이었다.
"후우…. 아무래도 약품이 너무 모자라요. 전하께서 박쥐같은 인간들을 쥐어짜주신 덕분에 후방에서 보급품이 출발했다고는 하는데, 그게 도착하기 전에 우리가 보유한 약품이 다 떨어질 게 확실해요. 약품 도착할 때까지 소독이라도 하게 병풀은 꼭 있어야 하는데…."
저녁 식사도 뜨는 둥 마는 둥 하며 막사에서 약품의 재고를 헤아리던 알리시아가 울상을 지었다.
타셀군이 승리했다지만 치료 막사의 침상은 남는 게 없었다. 케일런군에 그보다 훨씬 많은 부상자들이 있다 뿐이지, 타셀군 내에서도 부상자는 꽤 많았기 때문이다. 변방 지역의 귀족들에게 물자가 넉넉할 리 없으니 타셀군은 약품의 수급도 빠듯했다.
"병풀이라면, 그 흔하게 생긴 풀 말씀이십니까?"
"네. 흔하게 생겼고, 어디서든 흔하게 자라는 고마운 풀이죠. 하지만 워낙 흔하게 생기다보니 일반 잡초와 구분하기가 힘들어요. 병풀이랑 비슷하게 생긴 독초도 있구요. 정확하게 그 모양을 아는 이가 아니면 병풀이 한가득한 너른 벌판에 서있다 하더라도 뭘 캐야할지 전혀 알 수 없죠. 덕분에 약초꾼이 제일 짭짤하게 수익을 올리는 약초가 바로 병풀이랍니다."
알리시아는 다시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녀는 진짜로 조바심이 난 상태였다. 상처를 치료하는 약도 급하기는 했지만 환부가 썩지 않게 매일매일 갈아 붙여주어야 하는 병풀은 치료약보다 훨씬 많이 필요했다. 타셀군 진영 후방에 펼쳐진 들과 산에 널리 자라고 있을 풀인데도 그 풀을 정확히 아는 이가 없어 캐오지를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뭔가를 곰곰히 생각하던 카시야가 대뜸 놀라운 소리를 했다.
"제가 그 풀이 어떻게 생겼는지 압니다. 비슷하게 생긴 다른 풀과 어디가 다른지도 알고 있습니다."
"예? …진심이세요? 아니, 어떻게 그걸 알고 계세요?"
알리시아는 반가움과 의아함이 뒤섞인 눈을 동그랗게 뜨고 카시야를 쳐다보았다.
"우연한 기회에 약초 도감을 본 적이 있습니다. 마침 그 얼마 전에 누군가에게 병풀 말린 것을 비상약으로 받은 적이 있어서 병풀을 특히 주의 깊게 봤었고요."
알리시아의 머릿속에서는 기쁨의 종소리가 땡그랑 땡그랑 울리고 있었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카시야의 앞까지 도도도 다가오더니 카시야의 두 손을 그러모아 꼭 쥐었다.
"이건, 주신 헤바 님께서 경을 제게 인도해 주신 거예요!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가 없어요! 세상에…. 저 지금 너무 기뻐서 눈물 날 것 같아요!"
"만약 신께서 저를 영애께 인도하셨다면, 그것은 우리 병사들을 살리는데 헌신하는 영애의 정성 때문일 겁니다."
이미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하게 채운 알리시아는 결국 진주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간호부대를 이끌고 온 대표로서 매일 부족한 약품 걱정에 속이 타던 참이었다.
"카시야 경! 저랑 조금만 일찍 일어나서 같이 병풀을 캐오면 안 될까요? 대신 낮에 낮잠을 주무시는 걸로요. 힘드시긴 하겠지만, 저를 좀 도와주세요. 아니, 불쌍한 우리 병사들 좀 도와주세요."
"편하게 명령하셔도 됩니다. 제가 우리군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영애께서도 병풀의 생김새를 아십니까?"
"네. 저도 알고 있어요. 몇 번 간호병들에게 가르쳐서 캐오게 하려고 했는데 워낙에 비슷하게 생긴 풀이 많다보니 제대로 캐오는 이가 없더라구요. 그렇다고 제가 하루 종일 나가서 캘 수도 없는 노릇이라…."
알리시아라고 노력을 하지 않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약초꾼들이나 찾는 풀을 일반 병사에게 잠깐 시간을 내어 가르친다고 제대로 캐올 수 있을 리 없었다. 독초의 진액이 묻은 병풀은 약으로 쓸 수 없었고, 바쁜 알리시아가 잡초와 병풀을 일일이 선별해내고 있을 시간도 없었다. 그래서 결국 병사들을 시킨 병풀 채집을 포기했던 것이다.
알리시아는 시종을 시켜 약초를 담을 바구니를 찾아오도록 했다.
"제발, 제발 많이 캘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병풀이 정말 많이 필요하거든요."
카시야는 기도라도 하듯 두 손을 모아잡고 소망이랄지, 의지랄지 모를 것을 옹알대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갓 전장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보드라웠던 그녀의 손끝은 그 사이에 많이 거칠어지고 자잘한 생채기들이 나 있었다. 어느 모로 보아도 귀족 영애의 손답지 않았다. 약초를 캐면 분명 저것보다 더 거칠어질 게 뻔했지만 그녀는 자신의 피부 따위를 걱정하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카시야는, 그런 알리시아에게 왠지 모르게 감동하게 되는 것이었다.
============================ 작품 후기 ============================
1. 어제 인물 설정 올려놓고 제가 사실은 부끄러웠던 거 아세요? ㅎㅎㅎㅎㅎ
처음 이 글 쓰면서 잡아놓았던 설정을 조금 손보고 올린 건데, 올릴 때부터도 너무 짐승짐승 거렸나 싶었어요.ㅋㅋㅋㅋㅋ 이렇게 취향을 까발리게 되고.....;;;;(그러나 정작 같이 사는 남자는 스윗가이~♡)
아직 인물 설정이 글에서 잘 안느껴지셨다면 그것은 제 실력이 아직 모자라기 때문입니다.ㅠㅗㅠ 앞으로 더 열심히 쓸게요. 지켜봐주세요.
2. 인물 설정 외에 기타 설정을 '작품설정' 게시판에 올렸습니다.
3. 이 글을 올림으로써 공약(?)했던 8월 일일연재를 성공시켰습니다.(할렐루야!)
내일 한 편 더 올린 뒤에 잠시 쉬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현재 비축분도 없이 너무 똥줄타는-_- 연재를 하고 있어서 저 스스로도 글의 퀄리티가 낮아질까봐 조마조마하거든요. 전체 플롯과 에피소드 다시 한 번 점검하고, 글 전체를 다시 살펴보면서 어색해지는 부분이 없는지도 확인해볼 생각입니다.
너무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예요. 저는 코멘트를 먹고 사는 자까거든요.ㅎㅎㅎㅎ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
+ 징수니 님, 후원쿠폰 감사합니다~! 매일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ㅠㅗ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