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3 뜻밖(5) =========================
다음 날 아침, 갓 동이 터오는 시간에 알리시아와 카시야는 이른 채비를 하고 벌판으로 나갔다. 알리시아의 부탁으로 근무시간 종료를 앞둔 불침번 기사들 두 명이 따라와 알리시아의 주변을 지켰다.
알리시아와 카시야는 약초를 담을 바구니를 사이에 두고 흘끗 보면 잡초인지 뭔지 알 수 없는 풀들을 하나씩 살피며 병풀을 채취해 나갔다. 병풀 자체가 소독의 효과가 있는 '잡초'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겨질 만큼 여기저기 무성하게 자라있었다. 아무거나 뽑아가도 반은 병풀일 것 같았지만 병풀 주변에는 꼭 그와 비슷하게 생긴 독초가 함께 자라 있었다. 독초의 진액이 묻은 병풀은 쓸 수가 없었기 때문에 뿌리를 캐는 낫질 역시 조심조심 해야 했다. 두어 시간을 병풀 채집에 집중하다보니 허리와 다리가 조금 저려왔다. 자신이 이 정도라면 연약한 알리시아는 지금쯤 고통을 호소해야했다. 하지만 고개를 들어 알리시아 쪽을 바라보니, 그녀는 무릎을 통통 두드리면서도 여기저기에 보이는 병풀을 캐느라 정신이 없었다. 참 재미있는 게, 드레스를 입은 알리시아는 그 누구도 감히 부정할 수 없는 고귀한 귀족 영애처럼 보였지만, 열심히 약초를 캐는 그녀는 또 순진한 시골 아가씨처럼도 보인다는 것이었다.
'요정처럼 생겨서 그런가?'
카시야는 피식 웃다가 알리시아를 불렀다.
"다리가 꽤 아프실 텐데요. 괜찮으십니까?"
알리시아는 그제야 제 다리의 통증을 느꼈는지 아야야, 하는 소리를 내며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카시야 경도 다리랑 허리 아프시죠? 오늘은 이만 할까요?"
"그러시죠. 하루 일과가 시작될 시간입니다."
카시야도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툭툭 털었다. 둘이서 말도 없이 부지런히 채집한 덕분에 바구니에는 생각보다 꽤 많은 병풀이 담겨있었다. 하지만 그 정도 양은 하루에 쓸 병풀의 1/3도 되지 않는 양이었다.
"그래도 급한 대로 요긴하게 쓰일 거예요. 고마워요, 카시야 경."
알리시아는 뿌듯하게 바구니 안을 쓸어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런 식으로 열심히 채취를 하다보면 후방에서 지원 약품이 올 때까지 어떻게든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낮잠을 자라며 자유 시간을 주었지만 그것을 극구 거부하던 카시야는 결국 산꾀꼬리에게 혼난 채 치료 막사 밖으로 쫓겨났다. 하지만 카시야는 여전히 낮잠을 잘 생각은 하지 않았다. 별로 졸리지도 않았거니와, 지금은 뭐든 일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꼭 그럴 때일수록 할 일이 없기 마련이라 카시야는 왠지 점점 초조해졌다.
그러다가 '왜 이렇게 일에 몰두하려고 하는가.'하는 의문이 생겼다. 사실 웃기지도 않은 거시적 명분 외에는 딱히 그래야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카시야는 자신이 애써 무시하려 했던 진짜 이유를 정면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자신은 에르논이 알리스타스 공작가로 돌아간다는 것 때문에 신경 쓰여 견딜 수가 없다는 것을.
그녀는 곧바로 에르논과 타셀의 막사가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하지만 막사에는 아무도 없었다. 왠지 조금 섭섭한 기분이 되어 카시야는 분대원들의 훈련 상황이나 보러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훈련장으로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어? 분대장님!"
어제 갑자기 카시야가 당분간 알리시아의 호위를 맡게 됐다는 통보만 들었던 분대원들이 카시야를 반갑게 맞았다. 하지만 카시야는 자신을 반갑게 맞이하는 화상들 사이에 방금까지 찾던 사람이 끼어있는 것을 보고 황당한 얼굴이 되고 말았다.
"에, 아니, 키샤스 경. 여기서 뭐하고 계십니까?"
에르논이 분대원들 사이에 껴서 훈련장을 뛰고 있었던 것이다.
"와…. 분대장님, 그렇게 안 봤는데 섭섭합니다? 어떻게 저희보다 키샤스 경부터 찾습니까?"
먼저 인사를 건넸던 분대원이 과장된 얼굴로 섭섭하다고 씨부렁거렸다가 카시야에게 가볍게 옆구리를 발로 차였다. 별로 아프게 차지도 않았건만, 그는 괜히 땅바닥에 뒹굴며 엄살을 피웠다.
"나 없으니까 분위기 아주 좋았지?"
겨우 하루, 이틀 못 본 분대원들인데도 왠지 반가워서 카시야는 짐짓 으름장을 놓았다. 하지만 곧바로 분대원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설마요. 미하일 경도 분대장님만큼이나 제정신이 아니…인게 아니고 엄격하신 분입니다."
기감이 꽤 발달하게 된 분대원은 자신의 뒤에서 걸어오는 미하일의 기운을 느꼈는지 재빨리 말을 바꿨다.
"어이! 카시야! 왠지 오랜만인거 같다?"
미하일은 방금 자신을 흉보려 했던 분대원의 어깨에 제 팔을 턱 걸치며 인사를 건넸다. 카시야 역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살짝 끄덕여 인사를 했다. 하지만 그때까지 에르논은 한 마디의 인사도 건네지 않은 상태였다. 그 뿐만이 아니라 아예 카시야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리기까지 했다.
'하아…. 그때 내가 너무 유치하게 굴긴 했지.'
그의 반응에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면서도 카시야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여기서 키샤스 경까지 훈련을 하고 계신 겁니까?"
"으응. 키샤스 경도 명색의 기사인데 체력이 너무 안 좋아서 말야. 내가 빡세게 굴리고 있지."
미하일이 눈을 살짝 찡긋하며 답했다. 카시야가 보기에도 에르논은 너무 약해 보였기 때문에 적절한 훈련 방향이라 여겼다.
"아나클리프 영애의 호위일은 어때?"
"뭐, 괜찮습니다. 영애께서 병풀 채집이 급하셨던 모양인데, 마침 제가 병풀을 알고 있어서 오늘부터는 새벽에 병풀도 채집하고 있습니다."
"응? 네가 병풀을 어떻게 알아?"
"아…. 제가 우연한 기회에 약초 도감을 본 적이 있어서요."
카시야는 그 대답을 하며 슬쩍 에르논을 쳐다보았다. 에르논 역시 그 때의 일이 기억났는지 순간적으로 카시야를 향해 고개를 돌렸지만 카시야와 눈이 마주치자 다시 재빨리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얼굴들 봤으니 됐습니다. 저는 다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응. 이 기회에 너도 좀 쉬엄쉬엄 하라고. 밥도 잘 챙겨먹고. 너, 살이 좀 빠진 것 같아."
미하일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카시야를 위아래로 훑었다. 안개숲에서 생환하고 아르헨의 치료를 받은 뒤 열심히 먹고 운동하며 몸을 만들었던 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조금 야위어 보였다. 물론 몸 쓰는 일을 줄이지는 않은 탓에 근육은 더 탄탄해져 있었지만 그 대신 지방이 더 빠진 탓에 '말랐다'고 느껴진 것이다. 아무리 카시야를 남자 기사들과 동등하게 대하는 미하일이라고는 해도 점점 말라가는 카시야를 보기는 안쓰러웠다. 그녀는 그 사이 쉴 틈 없이 일했다. 타셀이나 카시야나, '적당히'라는 걸 모르는 사람들 같았다.
"아, 죄송합니다. 기사로서 전투에 적당한 몸을 만드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요.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겠습니다."
"아니, 훈련을 하라는 게 아니라…! 넌 좀 요령 피우고 게으를 필요가 있어. 그렇게 바늘 찌를 틈도 없이 살면, 그게 사람이냐? 적당히 살도 좀 붙이고! 계집애가 남자같이 근육만 우락부락해서는…."
미하일 나름대로는 걱정이 많이 되는 모양이었다. 카시야는 그의 거칠지만 따뜻한 걱정에 마음이 한결 풀어지는 걸 느꼈다. 그녀는 미하일과 분대원들, 그리고 계속 딴청을 피우는 에르논에게 인사를 하고 훈련장을 돌아 나왔다. 그제야 에르논의 시선이 그녀의 뒷모습에 가 박혔다.
다시 시작된 훈련에 분대원들은 다시 헛둘, 헛둘 하며 뛰기 시작했다. 에르논 역시 헉헉 대면서도 그 뒤꽁무니를 쫓아 뛰었다. 그 사이 마나의 양이 꽤 차올랐고 타셀이 마력의 허용량을 늘려줬기 때문에 겨우 뛰는 것이지, 원래 그의 체력이라면 한 두 바퀴를 돌기도 전에 널브러졌을지도 모른다. 그는 기계적으로 뛰며 이틀 전날 밤을 떠올렸다.
카시야가 먼저 떠나버린 식사 테이블에서 남은 스프를 뒤적거리다가 결국 다 먹지도 않고 그릇을 반납한 에르논은 막사로 돌아가 잠이나 자자고 마음먹고 드러누워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었다. 하지만 카시야가 마지막으로 '당신이 죽으면 용서하지 못할 것 같다.'는 말을 하며 보였던 태도가 왠지 모르게 계속 떠올랐다.
그 자리에서는 모르는 척 딴청을 피웠지만 눈치와 이해력이 뛰어난 에르논은 그녀가 했던 말이 뜻하는 바를 전부 알아들었다. 카시야는 자신이 죽으면 죽은 자신은 물론, 자신을 죽인 이와 자신의 청을 받아들여준 타셀,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속박을 풀어준 카시야 그녀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 그녀는 아무리 달리 생각하려고 해도 대마법사인 자신을 보호하려는 모습이었다.
여성을 상대로 이런 기분을 느낀다는 게 자존심 상한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그녀의 단단하고 날카로우면서도 걱정을 애써 감추는 모습에 심장이 쿵쾅거렸다. 누군가가 자신을 보호하려 하는 것은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 당시에는 자신이 느낀 기묘한 기분의 정체를 깨닫지 못했지만, 매 초, 매 분이 지날수록 그것은 미칠 듯한 설렘을 가져오고 말았다. 그제야 깨달았다.
'나…. 아무래도 그 녀석한테 반한 것 같지…?'
아마 처음 봤던 그날부터 반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녀에게 반했음을 깨달았는데도 충격이 적은 것을 보면.
하지만 깨달음에 뒤따른 것은 한숨이었다.
'차라리 사내놈들 꼬시는 게 더 쉽지, 그 목석을 어떻게….'
자신이 보기에는 타셀 역시 카시야에게 알듯 말듯 관심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타셀 역시 자신의 감정에 둔한 인사라 스스로도 깨닫지 못하는 것 같긴 했지만, 카시야가 자신을 걱정하는 듯한 말을 할 때마다 죽일 듯이 자신을 노려보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하지만 타셀보다 더 무딘 게 카시야였다. 그녀는 아예 감정이 거의 없는 인형 같았다. 사실 그런 그녀가 자신에 대해서만 뭔지 모를 감정을 조금이나마 드러내는 게 기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뿐. 아마도 상처 입은 동물을 주워와 돌봐주는 정도의 기분이겠지. 그녀는 자신이 그녀에게 느끼는 감정 따위는 이해하지도 못할 것이다.
문득, 처음 봤을 때부터 반하고 있던 주제에, 어떻게 그녀의 나신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리는 동시에 얼굴과 어느 특정한 부분에 열이 확 몰리는 것을 느꼈다.
'이런 미친…!'
혼자 쓰는 막사라면 몰라도, 지금 자신이 쓰는 막사에는 타셀이 언제 들어올지 알 수 없었다. 그에게 이런 꼴을 들키느니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는 게 나았다. 하지만 그녀에 대한 기억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점점 더 깊어졌다.
'여자 몸이 그렇게 근육질일 수 있다는 게 꽤 충격적이었지…. 그런데 의외로 가슴이 꽤 예뻤…. 하아, 으아아아아아!'
용병이라는 말을 자연스레 믿게 될 정도로 탄탄한 몸에 비해 한 손에 뿌듯이 잡힐 크기의 우윳빛 뽀얬던 가슴이 떠오르자 에르논은 보는 사람도 없는데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끙끙 앓다가 발로 이불을 퍽퍽 찼다.
그 깨달음 이후, 그는 카시야를 미치도록 그리워했지만 막상 그녀와 진짜로 만나게 되자 차마 그녀를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녀를 바라보면 그날 자신이 했던 상상이 그대로 되살아날 것 같았다. 그래서 그녀의 시선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카시야가 조금 섭섭해 하는 것 같아 가슴이 찔렸지만, 보는 눈도 많은데 저 혼자 얼굴이 새빨갛게 익었다간 무슨 오해를 받을지 모를 일이다.
"어이! 에르, 가 아니고 키샤스 경! 지금 얼굴이 너무 빨개졌어. 저기 나무 아래로 가서 좀 쉬어. 그러다 쓰러지겠다."
미하일의 외침에 에르논은 펄쩍 뛸 만큼 깜짝 놀랐지만, 그의 오해를 지키기 위해 나무그늘 아래로 걸어가며 지친 척 했다.
============================ 작품 후기 ============================
여러분~!
쉬었다 올게요. 비축분 열심히 쟁여서 올게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