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4 뜻밖(6) =========================
알리시아와 카시야는 매일 어김없이 병풀을 채집했다. 덕분에 간호 막사에서는 조바심에 타들어가던 마음을 어느 정도 누그러뜨릴 수 있었다. 모두가 귀족 영애이면서도 험한 일에 몸 사리지 않으며 낮은 자를 돌보는 데 헌신하는 알리시아를 칭송했다. 그녀는 그때마다 늘 카시야의 공을 앞세우며 뒤로 물러섰다. 아직 열여덟 살 밖에 되지 않은 영애의 몸가짐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겸손했고, 그것은 모두가 그녀를 타셀의 반려감으로 생각하게 만들도록 했다. 폭군인 황제와 그와 비슷한 1황자에게 핍박 받으면서도 백성들을 위했던 타셀의 미담들은 알게 모르게 모두에게 퍼져 있었고, 그런 그와 알리시아는 누가 봐도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그런 생각은 비단 병사들만 하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아직 전쟁 중이기는 합니다만, 전하께서도 슬슬 반려를 물색하실 때가 되지 않으셨습니까."
저녁 식사를 마치고 평소와 같이 하루를 마무리하는 회의 자리에서 누군가가 운을 띄웠다. 타셀이 흘끗 쳐다보았지만 나이 지긋한 백작인 그는 굳이 피하지 않고 따뜻해 보이는 미소로 맞섰다.
"경 말대로 지금 전쟁 중이오. 내 혼사를 따지고 있을 때는 아닌 것 같은데."
타셀은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른 이가 말을 보탰다.
"백성들과 신하들에게는 혼인을 한 주군이 좀 더 믿음직스럽게 보인다고 하지요."
"그게 무슨…."
"아, 물론! 그렇다고 전하께서 믿음직하지 않는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다만 이 황량한 시기에 주군께서 반려를 맞이하시고 비 마마와 함께 내외로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신다면, 저희와 같은 아랫것들은 좀 더 힘을 내기 마련이라는 말씀을 드리려 했을 뿐입니다."
"아, 다 떠나서 그림이 좋죠, 그림이."
타셀이 반박하기도 전에 미하일까지 입을 열었다.
"메레디스 경. 말씀이 좀…."
"제가 틀린 말 했습니까? 전하, 제가 신하이자 오랜 친우로서 말씀드립니다. 반려를 들이십시오. 이 전쟁터에서 가장 외롭고 힘든 사람이 전하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친우라고 하는 저 조차도 그 곁을 지켜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반려 이외에는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지도자로서의 전하를 저는 매우 신뢰하고 존경하는 바입니다만, 인간으로서의 전하를 생각하자면 가끔 위태로워 보일 때가 있습니다."
미하일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타셀을 염려하자 모두의 눈길이 타셀을 향했다. 다들 하나같이 걱정과 연민이 담긴 눈빛을 하고 있어서 타셀은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갑자기 왜들 이러는 건가?"
"아오, 답답해. 전하는 정말 눈치라는 것도 없습니까? 다들 아나클리프 영애 얘기 하고 있는 거 아닙니까?"
미하일이 제 가슴을 팡팡 두드리며 말했다. 하지만 큰소리를 낸 것은 미하일 뿐, '아나클리프 영애'라는 말에 모두 타셀의 눈치만 살피며 그의 반응을 기다렸다. 엔드로스는 숨소리도 못 내고 있었다.
"…아나클리프 영애? 갑자기 왜 얘기가 그 쪽으로 튀지?"
"어휴. 여러분, 제가 말씀드렸죠? 우리 전하는 이쪽 방면으로는 무디기가 천하제일이라고. 전하. 지금 전하랑 아나클리프 영애는 우리 병영 최고의 인기 커플이란 말입니다!"
미하일의 친절한 설명에 타셀의 눈이 커졌다. 그의 경직된 얼굴을 보고서야 모두들 미하일의 말이 맞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정말로 자신과 알리시아 사이를 엮는 소문들을 모르고 있었다. 보통 무디지 않고서야 저럴 수가 있나 싶을 정도였다.
타셀은 타셀대로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알리시아를 기특하다, 예쁘다, 타의 모범이 되는 영애다, 라고 생각한 적은 많지만 자신의 반려로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아니, 사실 그 누구도 자신의 반려로 생각해본 적은 없었으니 딱히 알리시아에게 실례를 한 것은 아니리라. 다만 이 험난한 전쟁통에서 자신의 반려가 되고자 하는 이가 어디 있을까 싶기도 했고, 만에 하나 패하게 된다면, 자신의 반려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할 그 자리를 비워두고 싶기도 했다.
"그…, 그 얘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지. 지금은… 좀 당황스럽군."
타셀은 슬쩍 엔드로스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자신이 그의 소중한 딸을 거절한다는 의미로 비춰지고 싶지는 않았다. 혹시나 불쾌해하지나 않을까 걱정했지만 그는 외려 어딘지 안심하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회의가 파하고 자신의 막사로 향하는 엔드로스의 곁을 그의 측근인 러셀 라몬트 자작이 따라붙었다. 회의 중간에 말을 보탰던 이였다.
"경! 경께서 직접 말씀드려보십시오. 전하께서 경의 말씀을 허투루 듣지는 않으실 겁니다."
"하아…. 라몬트 경. 난… 난 말이오. 이게 좋은 생각인지 잘 모르겠소."
"아나클리프 경! 이제 와서 이 무슨 약한 말씀이십니까! 지금 전 제국을 뒤져도 전하의 반려에 아나클리프 영애만큼 어울리는 여인은 없을 겁니다."
"아직… 어린 아인데…."
"예? 아나클리프 영애도 이제 열여덟 살인데 어리다니요? 열다섯에 결혼하는 영애들도 수두룩합니다. 영애는 지금 딱 적당한 나이죠."
"하지만 전하의 반려는 곧 이 제국의 안주인이 된다는 말인데…. 알리시아가 과연 그 무게를 견딜 수 있을지…."
"별 걱정을 다하십니다. 드레스와 장신구에만 빠져 살던 1황자비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런 여자도 황후가 되겠답시고 궁에 들어갔었는데 아나클리프 영애가 뭐가 모자라서요? 사실 저희도 처음에는 걱정했습니다만, 영애가 간호병들을 이끌고 간호 막사를 이끌어가는 것을 보며 크게 감동했습니다. 아나클리프 영애만큼 황후에 어울리는 이는 없습니다. 전하만큼이나 큰일을 해내실 분이예요!"
제 눈에는 아직도 조그만 토끼 같은 딸인데 주변에서는 황후감이라 추어올리는 게 영 불안했던 엔드로스는 곁에서 열심히 알리시아를 칭송하는 말을 들으면서도 미간의 주름을 펴지 못했다. 난세의 왕이 된다는 것은 결코 평탄한 길이 아니다. 그 곁에서 모든 것을 감내해야 할 반려는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는 않을 고생길이었다. 타셀을 아들처럼 사랑하고 주군으로서 존경하는 엔드로스였지만, 자신의 딸을 그의 반려로 세운다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하아…. 전하 말마따나, 이 얘기는 나중에 합시다. 알리시아의 의사가 제일 중요하니까. 편안한 밤 되시길."
엔드로스는 복잡한 얼굴로 막사에 들어가 버렸다. 그의 마음을 이해하면서도 역시나 알리시아만한 영애를 찾기는 어려울 거라 생각하던 러셀은 한숨을 푹 쉬며 돌아섰다.
그리고 그 엔드로스의 막사 뒤편에서 카시야와 함께 서있던 알리시아 역시 굳은 얼굴로 아무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카시야의 낮고 조용한 물음에 알리시아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네. 괜찮아요."
"아나클리프 경의 막사 보초에게 영애가 오셨다고 알릴까요?"
"…아, 아뇨. 아버지는 내일 만나 뵙기로 할게요. 아무래도 피곤하신 것 같으니까."
"네. 그러시죠."
카시야는 본인이 없는 곳에서 이뤄지고 있는 혼사 얘기에 충격을 받은 알리시아를 배려해 천천히 움직였다. 하지만 자신 역시 타셀과 알리시아의 조합이 어울린다고 생각했으니, 이런 흐름이 억지스럽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자신의 막사를 향해 걷던 알리시아가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물었다.
"왜 하필 지금 혼사를 논하는 거죠? 전쟁 중인데…."
"승리한 이후 혼사를 논하게 되면, 아마 권력을 잡기 위한 진흙탕이 벌어질 겁니다. 승기가 우리 쪽으로 기울고 있는 이때 미리 정해놓으면 승리 후에 벌어질 논공행상에서 적어도 황후 자리를 향한 암투는 걷어낼 수 있겠죠. 물론, 그 다음에는 황비나 후궁 자리를 갖고 싸울 테지만."
카시야의 무덤덤한 대답에 알리시아는 왠지 욱하는 기분이 되었다. 마치 자신의 의사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난 황후가 되고 싶지 않아요! 내가 왜? 난 황제 옆에 앉아있는 인형 따위가 되고 싶은 게 아니란 말이에요."
"인형이 될지, 황제에 버금가는 힘을 행사할지는 모를 일이죠."
"몰라요! 나 말고 황후 자리를 원하는 영애를 생각해보라고 할 거예요."
"황후자리를 탐내는 사람과 황후를 잘 해낼 사람은 잘 일치하지가 않는다는 게 문제죠. 영애께서는 황후를 인형이나 다름없다 생각하시는 것 같지만, 그 인형 같은 황후로 인해 나라가 망하기도 합니다."
"…그래서요? 경께서도 제가 황후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저번에는 제 꿈을 응원해주신다고 했잖아요. 서로 응원해주자고…."
알리시아는 어느새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카시야는 자신이 꿈 많은 소녀에게 정치논리를 들이미는 나쁜 어른이 된 것 같아 미안해졌다. 하긴, 아직 어린 소녀에게 결혼이란 로맨틱한 일일수도, 무서운 일일수도 있다. 알리시아에게는 아마 후자인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저는 영애의 결정을 존중할 겁니다. 다만, 영애께서 외무 장관이 되시든 황후가 되시든, 그 어떤 것도 잘 해내실 거라고 믿는 것뿐입니다."
"난… 싫어요. 카시야 경이야말로 강한 분이니까 황후 자리에 어울릴 거예요. 카시야 경이 해보시지 그러세요?"
알리시아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며 새침한 어조로 말했다.
"저야말로 그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제가 저희 분대원들 굴리는 걸 한번 보셨어야 하는데…. 국무회의 때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깽판을 칠 수도 있습니다. 배 나온 귀족들을 용서하지도 못 할 겁니다. 건전한 정신은 건강한 신체에서 나온다며 연무장을 뛰라고 윽박지를 지도 모르죠. 그러다가 황후 몰아내라며 반란이라도 일어나면 어떻게 합니까?"
웃음기도 없이 자신이 황후가 된 상황에 대해 말하는 카시야를 보며 알리시아는 결국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아하하!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귀족들은 뛰라고 해서 뛸 수 있는 족속들이 아니란 말이에요. 뛰는 것 자체를 천박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인데."
"하지만 당신이라면 그들을 뛰게 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저야 윽박지르는 것 말고는 방법을 모르지만, 영애께서는 다른 방법을 생각해내실 것 같습니다."
"흥! 그렇게 꼬드겨도 싫은 건 싫은 거예요!"
"알겠습니다. 더 이상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카시야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막사의 출입구를 열어 주었다.
*
"그게 정말이냐?"
"예! 그렇습니다. 현재 2황자의 비로 거론되고 있는 영애가 매일 새벽 호위도 몇 없이 약초를 채집한다고 합니다. 그 시간은 대부분의 병사들이 아직 일어나지 않을 시간이니, 이건 마치 잡아가 달라고 부탁하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흐음…."
루크는 탁자를 톡톡 치며 생각에 빠졌다. 첩자에게 에르논과 맞교환 할 포로로 적당한 타겟을 물색하라고 했더니 의외로 꽤 괜찮은 정보를 물고 왔다. 물론 그 영애가 약초를 채집한다는 곳이 타셀 진영 뒤편에 펼쳐진 벌판이라 오가는 게 쉽지 않을 테지만, 납치 자체는 수월할 것 같았다.
"호위는 몇이나 두고 있는데?"
"첩자에게 전해들은 바로는 총 세 명 정도라고 합니다. 한 명은 영애를 늘 따라다니는 여기사라는데 아마도 시녀를 말하는 듯 하고, 진짜 호위라고 할 수 있는 나머지 둘은 불침번 병사들이라고 합니다. 불침번을 서다가 교대 시간 직전에 잠깐 영애의 호위를 맡아주고 있나 봅니다."
"하! 밤을 샌 놈들이라 동틀 무렵엔 반쯤 졸고 있을 텐데?"
"아무래도 진영 뒤편이라 마음을 놓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 사실 틀린 생각도 아냐. 납치할 놈들을 거기까지 보내는 것도 문제지만, 납치한 뒤에 여기까지 무사히 돌아오는 것도 쉽지 않을 거다. 하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루크가 빙그레 웃었다.
============================ 작품 후기 ============================
일주일간 잘 지내셨나요?
그동안 저는 회차별 에피소드도 구상하고, 글도 열심히 쓰고, 정신적으로도 좀 쉬었어요.
하지만 독자님들 코멘트는 그리웠답니당!
1. 쉬는 동안 작품 계약을 진행했습니다. 제 첫 작품 진행했던 곳과 한 번 더 함께 하기로 했어요. 아, 하지만 걱정마세요~! 조아라에서 완결까지 볼 겁니다.^^ 독자님들께 좀 죄송하다고 했더니 조아라에서 완결까지 진행해도 좋다고 해주셨어요. 대신 출간용으로 외전을 빵빵(!)하게 넣기로 했답니다.
2. 제가 조아라하고 네이버웹소설에서 연재중인데요, 9월 7일부로 네이버웹소설 베스트리그로 승격됐어요~! ^^
3. 여러분께서 주신 후원쿠폰을 치킨 대신 딱지로 교환해서 예약아이템 100회권을 구입했습니다! 180딱지나 하는 그것을! 부자가 된 기분입니다.
4. 앞으로의 연재주기는 1~3일에 1편씩이 될 것 같습니다. 일일연재를 하려고 노력은 하겠지만, 억지로 일일연재 주기를 맞추려다가는 글의 퀄리티가 낮아질 것 같아서요. 쉬는 동안 고민 끝에 결정한 사항입니다. 이해 부탁드립니다.
쉬는 동안 왠지 기분 좋은 일들이 있었는데, 결국 독자님들께서 제 글을 좋아해주셔서 일어난 일들인 것 같아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저 역시 절대 연재태만 없이 글을 써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