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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홍의 카르마-75화 (75/134)

00075 뜻밖(7) =========================

다음 날 새벽, 알리시아와 카시야는 평소와 똑같이 병풀을 캐러 나갔다. 알리시아는 간밤에 조금 뒤척거리며 잠을 설치는 듯 했지만 아침에 눈을 뜨고 마주한 얼굴은 언제나와 똑같았다. 카시야는 아직 어리다면 어린 영애가 어떻게 이렇게나 똑부러지고 현명한지 신기할 정도였다.

"여자들도 바지를 입고 다니게 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이렇게나 편한데 말야."

병풀을 채집할 때 드레스 자락은 거추장스럽기가 말도 못할 지경이라 얼마 전부터 알리시아도 여기사들이 입는 바지를 입었다. 그 때부터 매일 아침 바지 타령이다.

"제국에는 여기사가 많아 바지를 입는 여성들이 많으니, 제국민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울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카시야의 대답에 알리시아가 "맞아, 맞아."하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새벽이슬이 걷히지 않아 병풀 줄기며 이파리가 촉촉했다. 호위 기사들은 하품을 하며 두 사람을 바라보다 저들끼리 소소한 잡담을 시작했고 알리시아와 카시야는 어느새 익숙해진 손놀림으로 첫날보다 훨씬 빠르게 병풀을 캐 나갔다.

한참 바쁘게 움직이던 카시야의 손이 어느 순간 갑자기 멈췄다. 워낙 조용한 벌판이라 사각거리며 병풀을 캐던 한 쪽 손이 멈추니 금방 카시야에게로 시선들이 쏠렸다.

"카시야 경?"

"쉿-."

카시야가 그녀를 이상하게 쳐다보고 있는 기사 둘에게 알리시아를 데려가라는 눈짓을 보냈다. 하지만 주변이 평화롭기 그지없는데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기사들은 주춤거리며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얼른… 영애를 모시고… 도망쳐."

카시야가 병풀을 캐던 낫을 소리 없이 바닥에 놓고 양쪽 허리에 찬 곡도의 손잡이를 손에 쥐며 낮게 말했다. 그제서야 호위 기사들은 허둥지둥 알리시아를 데리고 병영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 순간 저 멀리에서 거짓말처럼 새카만 인영들이 일어서서 이쪽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호위 기사들은 아예 알리시아를 들쳐 메고 온힘을 다해 달렸다. 카시야 역시 다가오는 인영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곡도에 마나를 밀어 넣었다.

"절대 놓치지 마라!"

까만 옷으로 무장한 괴한들은 카시야를 아예 무시하고 도망치는 알리시아에게만 주의를 기울였다.

'여자라는 게 꽤 유용할 때가 있단 말이야. 지금처럼 방심해줄 때라던가.'

카시야는 피식 웃으며 곧 튀어나갈 용수철처럼 구부린 다리에 힘을 응축했다. 그동안 열심히 수련한 덕분에 양 손에 각각 쥔 곡도에는 금방 마나가 일렁였다.

어느새 코앞에 다가온 그들은 아직 몸을 낮추고 있는 카시야를 보며 겁도 없는 계집이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곧 그들의 칼날에 힘없이 스러져버릴 충성스런 시녀라고 말이다. 하지만 어두운 사위 사이로 날카롭게 빛나는 그녀의 눈동자를 눈치 챈 괴한들의 우두머리는 곧 그녀가 일반 시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 기척을 죽이고 있는 그들을 발견한 것도, 그들이 몰려오는데 도망치지 않고 자리를 지키는 것도 일반 시녀로는 볼 수 없는 태도다. 왜 그녀를 영애의 몸종 정도로 생각했는지….

"조심해!"

하지만 모든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이다.

카시야가 곡도를 검집에서 빼내들며 검기를 날렸다. 그녀로서는 실전에서 처음 써보는 검기였다. 아직 미하일이나 루크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상대에게 가벼운 상처를 입히고, 무엇보다 그들을 당황시키는 데는 충분할 정도의 검기였다.

"뭐, 뭐야! 계집이 아니었나?"

하지만 그들이 카시야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확인할 겨를도 없이 카시야의 칼날은 무섭도록 빠르게 그들의 다리를 그었다. 상체 위주의 칼싸움에 익숙했던 그들은 카시야가 낮게 들이치며 다리를 베자 속수무책이었다.

"으아악!"

"정신 차려! 자세를 낮춰라! 너희 둘은 타겟을 쫓아!"

당황한 가운데에서도 우두머리는 우두머리답게 빠르게 상황 판단을 했다. 하지만 그들의 계산 밖의 요소가 바로 카시야였다. 카시야를 지나쳐 알리시아를 뒤쫓으려던 둘은 곧 카시야가 품에서 날린 비수를 맞고 몇 걸음 못가 풀썩 쓰러졌다. 순식간에 이뤄진 공격이었다. 카시야는 비수를 날리느라 겨드랑이에 끼워놓았던 곡도를 다시 손에 쥐고 오른편에서 달려들던 자가 내리치는 검을 막아냈다. 자신보다 늘씬한 그녀 정도야 힘으로 누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그는 손목을 쩡, 하고 울리는 충격에 그만 칼을 놓치고 말았다. 싸움터에서 칼을 놓친 전사에게 닥칠 일은 죽음뿐이었다.

이미 알리시아를 잡으러 달려 나왔던 무리 열 명 중 여섯이 죽거나 쓰러져 있었다. 순식간의 일이라 우두머리는 당황을 넘어 황당하기까지 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품에서 작은 호각을 꺼내 삑- 하고 불었다. 그러자 그들의 뒤로 더 많은 이들이 달려 나오기 시작했다.

"제기랄!"

카시야가 낮게 욕설을 내뱉었다. 하지만 괴한들의 우두머리에게도 이것은 상당히 좋지 못한 상황이었다. 설마하니 겨우 단 한 명의 여자에게 열 명의 훈련된 병사가 막힐 줄이야. 돌아가더라도 문책을 피할 길이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아무런 수확도 없이 돌아간다면 그게 더 최악이다. 지금 눈앞의 이 여자라도 잡아가야 한다. 무슨 변명을 둘러대든 간에 살아날 구멍이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도주할 때 뒤를 맡기려 했던 무리들까지 끌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뛰어난 기사라 하더라도 수적 열세에는 별 도리가 없을 테니까.

카시야는 무섭게 벼려진 집중력으로 주변을 베고 찔렀다. 하지만 단 한 명은 결코 무장된 많은 수를 이길 수 없었다. 칼날이 그녀의 어깨를, 허벅지를, 옆구리를 베고 지나갔다.

'버텨야 해! 곧 우리 병사들이 올 거다.'

카시야는 자신의 모든 힘을 짜내어 알리시아를 뒤쫓으려는 이들을 막았다. 그 때 누군가가 뒤에서 그녀의 등에 날카로운 칼날을 찔러 넣었다.

"큭!"

그 날붙이가 빠져나가자 등 뒤로 뜨거운 피가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가볍게 베인 정도의 상처와는 비교되지 않을 출혈의 양이었다. 그 틈에 또 누군가가 칼을 휘둘러 그녀의 곡도를 내리쳤고 힘이 빠진 카시야가 칼을 놓쳤다.

"죽이면 안 돼!"

그 소리에 강한 타격이 그녀의 뒷목을 내리쳤다. 이미 피투성이가 된 카시야의 몸이 더 버티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그 때 타셀 진영 쪽에서 병사들이 뛰어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퇴각! 퇴각! 제기랄…. 이 년이라도 일단 데려가 봐야지, 별 수 없다."

검은 옷의 그들은 쓰러진 카시야를 들쳐 멨다. 반대편으로 달려가며 또 다른 호각을 부니 어디선가 말들이 뛰어나왔다. 그들의 퇴각은 그야말로 바람처럼 재빨라 뒤따라오던 타셀 군의 병사들은 별 수도 써보지 못하고 그들을 놓치고 말았다. 그들은 아직 숨이 붙어 있는 괴한들을 잡아가려고 했지만 괴한들은 잡히기 전에 품에서 뭔가를 꺼내 삼키더니 곧 숨이 끊어져버렸다.

"뭐? 지금… 뭐라고 했나?"

"죄송합니다, 전하. 방금 아나클리프 영애를 노린 괴한들의 습격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영애께서는 무사하시지만, 영애의 호위 기사였던 카시야 경이 납치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침통한 목소리의 불침번 조의 조장이 카시야의 납치 소식을 타셀에게 전했다.

"당장 라켄 산속을 뒤져라! 놈들이 돌아갈 길은 거기뿐이다!"

미미한 소란에 눈을 떴던 타셀은 흐트러진 셔츠를 제대로 여밀 생각도 않고 검대를 찼다. 엉거주춤 일어서던 조장을 밀치며 막사를 나가려던 순간 역시나 소식을 듣고 뛰쳐나온 미하일이 들이닥쳤다.

"전하께서는 여기 계십시오. 함정일 수도 있습니다. 제가 가겠습니다."

"놔! 이 버러지 같은 놈들이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가만 두지 않겠다."

타셀의 험악해진 기운이 살기가 되어 주변을 날카롭게 찔렀다.

"진정하십시오, 전하! 감정적으로 대응할 문제가 아닙니다! 여기까지 왔는데 아무런 준비도 없이 올 놈들이 아닙니다! 저를 못 믿으십니까!"

미하일이 타셀의 양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미하일도 그를 막을 수 없었다.

"놔라, 미하일 탈리온 메레디스. 너부터 죽고 싶지 않으면."

그 말을 끝으로 타셀은 미하일을 밀치고 병사가 이끌고 온 자신의 말 위에 올라탔다.

"제 1부대 전원 집합!"

매서운 기세로 1부대의 연병장으로 향하는 타셀의 뒷모습을 보던 미하일의 곁에 뒤늦게 달려온 지크가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카시야가 잡혀갔다니, 무슨 소리야?"

"…아나클리프 영애를 납치하려던 무리를 혈혈단신으로 막아내고 대신 잡혀갔다나봐."

"뭐? 미친놈들…. 여기가 어디라고…!"

"지금 그게 문제가 아냐."

"그게 문제가 아니면 뭐가 문젠데?"

"전하가… 눈이 돌아갔어. 완전 맛이 갔다고."

"엉?"

"…준비해. 전하는 나한테 맡기실 생각이 없는 모양이야. 우리는 전하를 엄호해야지."

미하일 역시 뒤돌아 시종에게 말을 데려오라고 일렀다.

타셀군의 수색조는 병영이 있는 벌판 왼쪽에 버티고 있는 라켄 산속을 이 잡듯 뒤졌다. 병영 오른편은 탁 트인 벌판이라 도망치는 놈들이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니 괴한들이 돌아갈 길은 라켄 산을 타는 길 밖에 없다는 것이 타셀의 생각이었다. 만약 그가 좀 더 냉정해질 수 있었더라면 그쯤이야 상대편 역시 생각할 수 있었을 거라는 데서 의심이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되도록 빨리 괴한들을 뒤쫓아야 한다는 조급함 때문에 거기까지 생각이 닿지 않았다. 도망치던 놈들을 목격했던 병사의 말에 따르면 이미 열두어 명이 쓰러져 있었는데도 꽤 많은 수의 괴한들이 달아났다고 했다. 그렇다면 카시야 혼자 스무 명이 넘는 이들을 상대하다가 납치를 당했다는 것인데, 팔다리를 멀쩡히 놀릴 수 있었다면 그녀가 납치를 당했을 리 없다. 곧, 지금 카시야는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라는 말이었다. 타셀의 머릿속에서는 무심하면서도 가끔 옅은 미소를 짓던 그녀의 얼굴이 빨간 피에 물들어가고 있었다.

'다 죽여 버리겠어! 한 놈도 살려두지 않고, 전부 다 죽여 버리겠어!'

하지만 아무리 기감을 멀리 뻗어 인기척을 확인해보아도 라켄 산에 무장 병사로 느껴질 만한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타셀은 입안이 바싹 말랐다.

'이미 산을 넘었나!'

그렇다기엔 너무 빠르다. 하지만 반대편 벌판으로 도망쳤을 리는 없었다. 혹시 몰라 그쪽으로는 갤리언 백작의 부대를 보내놓았지만 그쪽으로 달아났을 확률은 높지 않았다.

'설마, 그 많은 인원이 공간 이동 마법으로 움직였을 리도 없고.'

케일런군에 남은 마법사 중 공간 이동 마법을 쓸 수 있는 자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법까지 염두에 두게 되는 타셀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빠져나간 거야? 귀신이 곡할 노릇이구만."

미하일 역시 짜증난 얼굴로 주변을 살피며 짓씹었다. 그때 아까부터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던 지크가 입을 열었다.

"아예 더 뒤쪽으로 빠졌다면…?"

"뭐?"

타셀과 미하일의 눈이 동시에 지크를 향했다.

"우리가 곧바로 라켄 산을 수색할 거라는 건 놈들도 알았을 겁니다. 만약… 아예 더 후방으로 빠져서 돌아가는 다른 길을 택했다면…."

타셀이 으득, 하고 이를 가는 소리가 지크의 귀에까지 들렸다.

"후방으로 수색대 일부를 파견해. 지크, 따라와라."

============================ 작품 후기 ============================

다이어트 중인데요... 배고파요... 따흙... ㅠㅗ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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