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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홍의 카르마-76화 (76/134)

00076 뜻밖(8) =========================

"녀석들이 납치에 성공했다면, 슬슬 도착해야 될 때가 됐는데요."

간호 막사들을 둘러보며 부상자들의 치료 상태를 확인하는 루크의 곁에서 그의 심복인 알도가 불안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아, 그렇지. 뭐, 성공하지 못했다면 조만간 그 놈들 목이 창끝에 걸린 걸 구경할 수 있을 테고 말야."

루크는 피식 웃으며 대답하며 부상자들을 더 살펴보고는 보충된 무기를 확인하기 위해 무기고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페레이아 경께서는 이번 납치 작전이 실패할 거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궁금증을 참지 못한 알도는 다시 루크에게 말을 걸었다.

"반반."

"하지만 그런 것 치고는 왠지 여유로우신 것 같습니다만…."

루크가 입꼬리를 살짝 끌어당기며 웃었다. 실패든 성공이든 자신은 별 관심이 없을 뿐이었다. 그는 진심으로 성공할 확률이 반반이라고 믿고 있었다. 적진 내에서 이뤄지는 납치라, 만약 불침번들이 교대 시간까지도 빠릿빠릿한 정신으로 눈에 불을 켜고 있다면 납치는 실패다. 하지만 그 역시 오랫동안 이 바닥에서 굴렀기 때문에 잘 안다. 불침번들은 대부분 밤새 반쯤 졸고 있고, 아침 교대 시간이 다가오면 거의 넋을 놓고 있다는 것을. 타셀군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병사들의 훈련을 잘 시켰다 해도 쏟아지는 졸음을 피할 길은 없다. 그렇다면 납치는 성공할 수도 있다. 만약 성공을 한다면 문제는 돌아오는 길인데, 모두가 알고 있다시피 타셀군 진영의 오른편은 탁 트인 벌판이라 도망칠 곳이 못 된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진영 왼편의 라켄 산인데, 그쪽으로 숨어들 거라는 생각은 타셀군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남은 길은….

"땅 위가 어렵다면, 땅 아래로 가면 되지."

루크의 혼잣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알도는 결국 루크의 속내를 읽는 걸 포기했다.

루크가 납치조에게 제시한 귀환 경로는 두 가지였다.

만약 부상자나 사망자가 거의 없다면 빠르게 라켄 산맥을 넘는 것. 납치한 인질을 데리고 도망칠 두 명을 빼고 나머지는 뒤를 엄호한다. 이 방법은 속전속결이 생명인 방법이었다. 납치에도 시간이 오래 걸려서는 안 되고, 납치를 하자마자 재빨리 산을 넘어야했다.

만약 부상자나 사망자가 많다면 두 번째 경로를 택하라고 일렀다. 그것은 라켄 산 후방의 레아데르 산 속에 있는 동굴이었다. 이 동굴은 레아데르 산 깊은 계곡에서 시작되고 라켄 산 너머 케일런군 진영 근처의 미알데 산기슭에서 끝난다. 길고 돌아가는 방법이긴 했지만 동굴이 길을 잃을 만큼 복잡하지도 않았고, 이 동굴을 아는 이도 거의 없었다. 루크 역시 과거 사냥을 나갔다가 우연히 발견한 동굴이었는데, 레아데르 산에서 약초나 캐면서 살던 노인 말로는 아주 먼 옛날 그 안에 봉인되어있던 용이 오랜 잠에서 깨어 날아 가버리고 남은 흔적이라고 했다. 그 말을 믿는 것은 아니었지만 언젠가 유용하게 써먹을 일이 있을 것 같다 생각했는데, 그 언젠가가 지금일 줄은 몰랐다. 물론, 이 모든 건 다 일이 성공했을 때를 가정한 거지만.

"페레이아 님! 납치조가 돌아왔습니다!"

등 뒤에서 납치조의 귀환을 알리는 병사의 말에 루크가 또다시 빙그레 웃었다.

하지만 포로가 묶여있는 막사에 발을 들인 루크의 입에서는 미소가 사라졌다. 피투성이가 되어 의자에 묶여 있는 사람은 아무리 좋게 봐줘도 귀족 영애로는 보이지 않았다. 루크의 흉흉한 눈길이 파랗게 질린 납치조의 조장에게로 향했다.

"죄, 죄송합니다. 뜻 밖에도 영애의 시녀 정도로 알고 있었던 여자가 진짜 호위 기사였던 모양입니다. 시, 실력도 보통이 아니라서, 저 년에게 당한 우리 측 병사들이 열 명이 넘습니다. 영애는 놓쳤습니다만…, 일단 저 여자만이라도 잡아왔습니다. 분명 가치가 있는 자일 것입…."

"자네 지금, 그걸 변명이라고 하는 건가?"

"죄, 죄송, 죄송합니다!"

"내가 분명 출발시키기 전에 한 말이 있지? 실패하면, 그 자리에서 죽으라고. 그 영애를 놓쳤다는 대목에서 이미 이 작전은 실패했다. 그런데 너희들은 왜 지금 살아있지?"

루크가 그의 검을 뽑아 세운 뒤 손목을 살짝 비틀자 퍼렇게 벼려진 칼날이 반사한 빛이 긴장한 채 서있는 검은 옷의 괴한들을 스쳤다.

"부, 부디 자비를…! 부디, 저에게만 책임을 물어 주십시오. 남은 자들은 제발 살려주십시오!"

괴한들의 우두머리였던 갈색 머리칼의 기사는 재빨리 엎드려 루크에게 살아남은 제 부하들의 목숨을 구걸했다. 그러자 그의 뒤에 서있던 그의 부하들 역시 엎드려 부디 자비를 베풀어 달라 청했다. 루크의 차가운 푸른 빛 눈동자가 벌레 바라보듯 경멸의 빛을 띠었지만, 그는 결국 칼을 도로 검집에 꽂아 넣었다.

"일어서라. 자숙의 의미로 한 달 간 마구간 청소를 명한다. 칼을 차는 것도 금한다. 알아들었으면 지금 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져."

루크에게 목이 잘릴 각오를 하고 있었던 그들은 의외로 관대하게 내려진 처분에 흡, 하고 숨을 들이마시더니 곧 소리 없이 막사 밖으로 사라졌다. 괜히 루크에게 아부를 떤답시고 감사하다느니 다음번에는 실망시키지 않겠다느니 입을 더 나불댔다가는 진짜로 목이 떨어질 것임을, 그들은 다년간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조용해진 막사 안에는 피투성이의 포로와 루크, 그리고 심복인 알도만이 남았다. 막사 밖은 훈련된 기사들을 호위로 세워 아무도 들이지 못하게 해놓은 상태였다. 이번 납치 작전은 군 내부에서도 아는 이가 거의 없는 비밀 작전이었던 것이다.

"흐음. 저거, 살아있긴 한 건가?"

루크가 심드렁하게 묻자 알도가 포로의 근처로 가 목덜미에 손가락을 댔다.

"예. 맥이 뛰는 걸 보니까 아직 살아있습니다. 피가 좀 많이 났을 뿐이지, 치명상은 없었던 모양입니다."

"면상이나 한번 보자."

루크의 말에 알도가 포로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고개를 들어올렸다. 힘없이 들린 창백한 얼굴은, 루크의 기억에도 생생한 얼굴이었다.

"어…? 하, 하하…! 이런 인연이 있나."

"예? 이 자를 알고 계십니까?"

루크가 말하는 인연이 좋은 쪽인지, 나쁜 쪽인지 알 수 없어 알도는 포로의 머리카락을 슬며시 놓았다.

"음, 글쎄. 안다고 하기도 뭐하지만, 그래도 서로 안면은 튼 사이지."

자신의 검기를 쳐내던 여자의 투지 넘치던 얼굴을 떠올리던 루크가 성큼성큼 걸어가 그녀의 턱을 손가락으로 받쳐 올렸다. 이미 정신을 잃은 상태였지만 그 얼굴에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단도를 잡아 쥐던 그 날의 투지가 배어있었다.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지만 말야."

그녀의 얼굴을 가만 뜯어보던 루크는 다시 허리를 펴고 그녀의 상처를 살폈다. 팔이나 옆구리, 허벅지의 상처는 깊지 않았다. 하지만 엉성하게 붕대로 감긴 등의 상처에서는 피가 배어나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게 결정적으로 그녀를 무너트린 상처 같았다.

그 순간, 루크는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면서 기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그녀의 등에 난 상처와 흘러내리는 피, 새하얀 그녀의 얼굴….

'뭐지? 이 비슷한 일이 전에도 있었던 것 같은데….'

이런 식으로 묶여있는 포로를 심문하던 일이야 워낙 많아서, 굳이 기시감을 느낄 이유가 없었다. 이 여자를 만난 것도 이번이 두 번째라 익숙할 리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기시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등의 상처…. 흘러내리는 피…. 그리고 저 얼굴…. 뭔가 기억날 듯, 말 듯 한데….'

루크는 미간을 찡그리며 기억을 더듬었다. 하지만 아무리 자신의 기억을 뒤져도, 이 상황에서 기시감을 느낄만한 기억 따위는 없었다.

결국 떠올리기를 포기한 루크는 알도를 향해 포로의 상처를 치료하라고 명했다.

"그리고 조심해. 그 여자, 진짜 보통이 아니거든."

"예? 예. 알겠습니다."

알도는 막사를 나가는 루크의 뒤꽁무니에다 대고 대답하면서도 루크에게서 넘실대던 살기가 갑자기 사라진 게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분명 작전 실패라고 했는데, 그리고 작전에 실패한 납치조의 대원들을 금방이라도 죽일 것 같았는데 방금 막사를 나가던 그의 입꼬리에는 재밌다는 듯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착각인가? 하긴, 저 사람은 종잡을 수가 없으니까.'

알도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바깥의 병사를 시켜 치료사를 데려오도록 했다.

*

"알리시아. 네 탓이 아니야. 이제 그만 울어라."

엔드로스는 결국 카시야의 행방을 찾지 못했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부터 침대에 쓰러져 하염없이 우는 제 딸의 등을 바라보며 위로했다. 자신이 납치당할 뻔 했다는 사실도 충격적일 텐데, 자신이 일부러 곁에 뒀던 카시야가 납치됐다는 소식을 들은 알리시아는 거의 쓰러질 뻔 했다. 그 뒤로 식사도 하지 않고, 저 작은 몸에서 어떻게 저렇게 많은 눈물이 나올 수 있는지 놀라울 정도로 울고만 있었다.

"윽윽…. 으으아앙…. 어떡해요, 아버지. 아아아…."

알리시아의 망막에 마지막으로 새겨졌던 카시야의 모습은 끝도 없이 기억에서 재생되며 알리시아를 괴롭혔다. 새까만 괴한들의 무리에 마주선 외롭고 강인했던 뒷모습…. 자신은 그녀를 죽으라고 거기에 혼자 남겨놓고 도망쳤다. 물론 남아있었더라도 그녀에게 도움은커녕 짐만 됐을 것이라는 것도 알고는 있다. 그것 역시 비참하고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난, 난, 아무 짝에도 쓸모없어요! 카시야 경 혼자 거기 두고…. 아아아아…! 얼마나 무서웠을까…. 카시야 경…. 미안해요. 미안해요…. 으흐흐흑…."

엔드로스는 괴롭게 자신을 몰아대는 알리시아를 착잡하게 바라보았다. 이러다 혼절이라도 할까봐 불안해서 당장이라도 딸을 껴안고 달래주고 싶었다. 하지만 알리시아를 일으키려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그는 이를 꽉 다물고 손을 거둬들인 뒤 엄한 목소리를 냈다.

"놈들이 카시야 경을 죽였을 리 없다. 굳이 납치까지 해간 것을 보면, 분명 저쪽에서부터 뭔가 요구가 있을 거다. 반드시 카시야 경을 구해올 방도가 있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라. 넌 카시야 경의 몫까지 힘을 내야 해. 그렇지 않으면 그녀가 널 목숨 걸고 구한 의미가 없지 않느냐! 자기연민 따위에 빠지지 마라! 이 전쟁 속에서, 나라고 충성스러운 부하를 잃어본 적 없겠느냐? 누군들 친우 하나 잃지 않은 자가 있는 줄 알아? 하지만 다들 버텨내고 있는 거다."

그의 말에 알리시아가 처음으로 곡소리를 멈추었다. 그녀는 끅끅대면서도 잔뜩 젖은 눈망울을 들어 엔드로스를 바라보았다.

"알리시아 밀리 아나클리프! 너는 이 회색 늑대의 피를 이어받은 아이다. 약해지지 마라. 너보다 더 약하고 아픈 자들이 네 도움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늘 기억해. 카시야 경의 희생을 헛된 것으로 만들지 마라. 그녀가 왜 자신의 목숨보다 너를 더 살리려 했는지 생각해라. 알아들었느냐?"

엔드로스의 단호한 목소리에 알리시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눈에서는 눈물이 떨어졌지만, 애써 비탄을 참아내려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알아들었으면 얼른 추스르고 일어나라. 네가 여기서 울고 있는 동안에도 간호 막사에서는 일손이 부족해 피가 마르고 있다."

그 말을 끝으로 엔드로스는 알리시아의 막사에서 걸어 나왔다. 그의 얼굴에는 딸을 위로해줄 수 없는 이 상황에 대한 괴로움이 가득했지만 그는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멀어져갔다.

============================ 작품 후기 ============================

타셀과 에르논 주주님들의 기대에 못미쳐 죄송합니다만, 루크 강화기간 들어갑니다;;

+ 징수니 님, 후원쿠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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