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7 심연(1) =========================
타셀이 알리스타스 공작으로부터 포로 교환 제의를 받은 것은 납치 사건이 있은 지 5일 후였다.
"역시나 1황자 쪽이었나…. 귀족이 되어서 이런 비열한 수나 쓰다니, 알리스타스 공작도 이제 한물갔군요."
지크가 타셀이 던져 놓은 제의 문서를 다 읽은 뒤 도로 말며 중얼거렸다.
"그만큼 급했다는 거겠지."
대답하는 타셀의 입에서는 냉기가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지크와 2개 분대를 이끌고 후방의 마을을 뒤지다가 마주오던 상인들에게 “검은 옷을 입은 자들이라면 한참 전에 저희 앞을 지나갔는뎁쇼.”라는 말을 들었을 때, 타셀은 미칠 듯한 분노에 눈앞이 빨개지는 착시마저 느꼈었다. 처음이었다. 그렇게까지 화가 났던 것은.
"우리 진영에 상대 쪽의 쥐구멍이 있다는 게 더 위험한 일이야. 수색조는 여전히 아무 소식 없나?"
"워낙에 민가가 드문 곳이다 보니 목격자 찾기도 어려웠습니다만, 놈들이 레아데르 산으로 숨어들었다는 것까지는 알아냈습니다."
"반드시 찾아내. 이런 식으로 후방을 뚫리다니 정말 불쾌해. …아나클리프 영애는, 좀 어떤가?"
타셀의 시선이 엔드로스에게 향했다.
"…곧, 추스르고 나올 겁니다."
"경. 설마 영애를 윽박지른 건 아니겠지?"
"아닙니다. 다만… 누군가에게 목숨을 빚졌으면, 그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줬을 뿐입니다."
"우리야 전쟁터에 이미 익숙해진 사람들이지만, 영애로서는 큰 충격일거야. 위로해주게. 그녀가 여기서 마음 기댈 곳이 자네 말고 누가 있겠는가."
엔드로스는 타셀의 마음씀씀이에 짧게 목례해 감사를 표했다. 그때 막사의 출입구가 열리면서 에르논이 들어왔다. 주변의 다른 이들은 '왜 저 자가 여기에?'하는 얼굴로 타셀과 에르논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앉게. 대마법사는 내가 불렀네. 오늘 알리스타스 공작이 보낸 문서로 확실해졌지만, 애초부터 우리 쪽에서 중요한 인물을 납치하려 했던 것은 결국 대마법사의 신병을 인도받기 위함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거든."
"설마, 요구에 응하실 생각이십니까?"
알리시아가 납치되었다면 모를 일이지만, 일개 기사의 목숨은 대마법사와 맞바꿀 만한 가치가 없다 생각한 누군가가 물었다. 타셀은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에르논을 쳐다보았다.
카시야가 부상을 입은 채 적군에게 납치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에르논은, 목에 걸린 마력 구속구가 아니었으면 이 주변을 전부 초토화시켜버리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분노했었다. 분노 때문에 날뛰는 마나만으로도 막사 안이 엉망진창이 되었었으니까.
타셀에 의해 가까스로 제압된 에르논이 맨 처음 내뱉던 말도 언어적 의미보다는 평소보다 훨씬 낮고 음산해진 목소리로 그가 정말 상대를 남김없이 죽이려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날 보내줘. 다 죽여 버릴 테니까. 벌레만도 못한 놈들. 절대 가만 안 둬."
자신이 대하고 있는 자가 황자라는 것도 잊은 듯 했고, 자신이 얼마 전까지 케일런군의 최고 병력이었다는 것도 잊은 듯 했다. 가까스로 제 정신을 찾고 나서도 그저 카시야의 부상 정도와 그녀의 생사 여부만이 에르논이 궁금해 했던 것의 전부였다. 타셀은 그제야 에르논이 카시야에게 품고 있는 감정의 깊이를 알게 되었다. 그 깨달음에 왠지 속이 답답해졌지만 이유를 알 수는 없었다.
"저들이 역시나 대마법사와의 포로 교환을 요구해왔소. 대마법사의 생각은 어떠신가?"
타셀은 에르논의 낯빛을 살피며 물었다. 침착한 척 하고 있지만, 그의 눈동자에는 여전히 분노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는 것 같았다.
"바로 응하시면 안 됩니다. 그 뱀 같은 작자가 의심할 거예요. 놈들이 납치한 게 아나클리프 영애였다면 모르겠지만, 일개 호위 기사를 저와 맞교환하겠다고 하면 그들은 뭔가 꺼림칙하다고 느낄 겁니다. 저와 카시야 경을 교환하기 적합할 정도로 등가(等價)를 만들어야 합니다."
에르논은 아예 '맞교환 한다.'는 것을 전제로 두고 말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카시야가 걱정되어 죽을 것 같을 텐데도 곧바로 응하면 안 된다고 하는 게 의외였다.
'괜히 대마법사는 아닌가 보지? 아직 제대로 생각할 정신은 남아있군.'
타셀은 저도 모르게 삐딱하게 웃었다.
"우리가 당신을 어떻게 믿지? 이 납치 사건 자체가 이미 너희들끼리 짜놓은 연극인지 우리가 어떻게 믿느냔 말이다!"
갤리언 백작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에르논을 바라보며 따져 물었다.
"나를 보내겠다는 건 전하의 결정이시니까, 백작께서는 따르셔야죠."
에르논 역시 상냥한 어투는 아니었다. 타셀은 모두를 돌아보며 에르논에 대해 털어놓았다.
"대마법사 에르논이 우리와 손을 잡기로 결정해주었다. 그동안은 모종의 이유 때문에 알리스타스 공작에게 매어있을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그 이유가 사라졌네. 그리고 대마법사는 공작성으로 가서 그 안쪽부터 깨부술 계획을 갖고 있네. 우리는 거기에 맞춰 밀고 내려가고 말이야. 이번 포로 맞교환은 그 계획을 좀 더 자연스럽게 만들어줄 것 같군."
타셀이 에르논을 회유하는 데 힘을 썼다는 것은 다들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빠른 변화였다.
"배신자가 또 배신하지 못하리란 법이 어딨습니까?"
"그만! 내가 결정한 사항이다."
타셀의 목소리에는 어느새 노기가 섞여 있었다. 그 역시 카시야가 납치된 이후 속이 바짝바짝 타서 신경이 날카로워진 상태였다.
"문제는 그거지. 저쪽에서 의심하지 못할 맞교환이 되어야 한다는 것."
"…제가 초죽음 상태라고 소문을 내십시오. 오늘, 내일 한다고 말입니다. 곧 죽을 놈이니 일개 기사 포로와 바꿔도 아깝지 않다는 뉘앙스를 주어야 합니다."
에르논이 묘안을 짜냈다. 그는 피칠갑을 하고 수레에 갇힌 자신을 일부러 병사들에게 내보이며 이동시키라고 했다. 갇혀있는 막사를 바꾸는 것처럼 말이다.
"병사들도 대마법사를 본 이가 거의 없을 테니 신기해서 떠들 테고, 숨어있는 간자 역시 제 눈으로 본 것은 재빨리 저쪽으로 알릴 겁니다. 전하께서는 그러고서도 좀 더 뜸을 들이십시오. 포로로 잡힌 카시야 경의 상태가 좋지 않다면 맞바꾸지 않겠다고도 하십시오. 저쪽에서 애가 타야 의심을 못 할 겁니다."
타셀은 고개를 끄덕였다. 에르논은 생각보다 더 공사를 구분하는 이였다. 지금이라도 당장 카시야가 잡혀 있는 곳으로 날아가고 싶다는 표정을 하면서도 오히려 카시야를 걱정하지 않는 듯한 계책을 내놓는다. 물론 그것은 에르논이 케네스를 뼛속까지 잘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내놓을 수 있는 계책이겠지만 말이다.
"좋은 생각이다. 우리는 카시야 경도 빼내오고, 대마법사도 의심 없이 공작성으로 보낼 수가 있어. 마침 저쪽에서 문서가 왔으니 오늘 저녁 대마법사의 막사 위치를 바꾸는 식으로 연극을 꾸미면 좋을 것 같군."
"알겠습니다. 준비하겠습니다."
회의가 파하자 타셀은 에르논만 남기고 나머지는 다 나가있기를 명했다.
"대마법사도 의식 전달 마법을 쓸 줄 알겠지?"
에르논이 고개를 끄덕였다.
의식 전달 마법은 마법 시전자의 의식을 피를 나눈 상대에게 전달할 수 있는 마법이었다. 그는 몇몇의 섀도 워커에게 이 방법으로 지시를 내렸다. 섀도 워커들은 다들 마법을 쓸 줄 몰랐기 때문에 의식의 전달은 일방적일 수밖에 없었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타셀과 에르논은 손바닥에 작게 상처를 내고 그 상처를 마주대어 서로의 피를 나누었다. 이제 두 사람은 서로에게 의식을 전달할 수 있게 되었다.
"조만간 저쪽에서 필사적으로 매달리겠지. 멀지 않은 미래일 거야. 공작성에 있다가 보름이 되면 공작성을 파괴하시오. 우리도 그 때에 맞춰 총공격을 가할 테니. 무슨 일이 있으면 꼭 메시지를 보내고."
"알겠습니다."
짧게 대답하는 에르논의 눈빛이 형형했다. 그는 이미 자신이 일으킨 화염에 바르작거리며 타죽는 알리스타스 공작을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에르논까지 빠져나간 막사에는 타셀 혼자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지혈을 하지 않은 손바닥의 상처에서 피가 계속 배어나오고 있었지만 그는 아무 것도 느끼지 못했다.
나는 할 수 있는 일들을 해나가고 있다, 나는 한 사람만의 군주가 아니기 때문에 모두를 돌봐야 한다, 그러니 특정한 사람을 과도하게 걱정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지나갔지만 결국 돌아오는 지점은 똑같았다.
‘카시야….’
이름 밖에 없는 평민 출신 여기사가 왜 이렇게 미칠 듯이 걱정되는지 알 수 없었다. 늘 강인하던 사람. 그와 동시에 자신 못지않은 깊이의 외로움을 숨기고 있는 것 같은 사람.
분명 카시야는 이번에도 무사히 돌아올 것이다. 에르논을 돌려받고 싶어 안달 난 알리스타스 공작이 귀빈 대접을 해줬으면 해줬지, 절대 함부로 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자신이 조급해하면 안 된다. 조급해하면 오히려 그녀의 신변이 위험해질 수 있다. 그 사실을 머리로는 잘 알면서도 타들어가는 마음을 진정시키기는 어려웠다.
왜 그녀에게는 의식 전달 마법을 걸어두지 않았었는지 후회가 되었다. 걸어두었더라면 적어도 안심하라고, 꼭 구해주겠다고 메시지라도 보내 안심시켜줄 수 있었을 텐데. 그녀 혼자 버려진 게 아니라는 것을 알려줄 수 있었을 텐데. 이렇게나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줄 수 있었을 텐데.
타셀은 여전히 피가 배어나오고 있는 손바닥을 펴 가만히 쳐다보다가 허공을 쥐듯 주먹을 꽉 쥐었다.
*
루크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카시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치료는 받았지만 생각보다 피를 많이 흘렸었던지, 그녀는 여전히 창백한 얼굴로 누워만 있었다. 그때 막사의 출입구가 조용히 열고 닫혔다. 알도가 루크의 곁에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상황을 전했다.
"대마법사가 진짜 살아있기는 하답니다. 그런데 거의 죽기 일보 직전의 상태라더군요. 알리스타스 공작께서는 대마법사가 죽기 전에 반드시 돌려받아야 한다며 그 쪽에 또 서신을 보냈답니다. 아무래도 이 여자 외에 몇 명을 더 얹어주는 방안도 고려중인 모양입니다."
"흐음…. 에르논이 우리 군의 주요 병력인 것도 맞고, 그가 공작이 황자 전하의 최측근일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유일한 방편이라는 것도 알겠는데… 왜 이렇게 수상할까?"
"수상할 게 뭐 있습니까? 대마법사를 돌려받을 수만 있다면야 이런 잡병 몇 명 쯤, 넘겨줘버려도 상관은 없지요."
"2황자가 멍청해 보여? 에르논을 넘겨준다면 분명 이유가 있을 거야. 살아날 가망이 없다든지, 그 몸뚱이에 무슨 짓을 해놨다든지 말야."
"아무래도 전자의 사유 같습니다만,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 군에 큰 기여를 한 대마법사 아닙니까. 죽을 때 죽더라도 공작성에서 편안히 눈을 감게 해드리는 게 예의 같습니다."
"흥! 개소리."
루크는 진심으로 조소했다. 에르논이 공작성에서 ‘편안히’ 눈 감을 일은 없을 것이다. 그는 에르논을 더러운 것 보듯 바라보던 케네스의 눈빛을 정확히 기억했다. 그에게 에르논은 유용한 도구일 뿐, 결코 눈곱만치도 아끼지 않았다. 그 도구 덕분에 많은 것을 누리면서도 말이다. 하긴, 그에게 있어 그런 대접을 받는 게 에르논 뿐만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알았다. 또 다른 소식이 있으면 바로 바로 알려라."
"예, 알겠습니다."
알도는 깍듯이 예를 취하고는 곧바로 막사 바깥으로 나가려다 흘끗 뒤를 돌아보았다.
저 여자 포로가 잡혀온 뒤부터 루크는 하루에도 몇 번씩 그녀의 상태를 확인하러 이 막사에 들렀다. 여자는 의식도 없는데 한참이고 저렇게 가만 바라보다가 나오는 것 같았다. 워낙 잘생긴 데다 색을 즐기는 데 거리낌도 없어서 수도에서부터 여러 영애를 울리던 루크였다. 그랬던 루크가 저렇게 애틋하게 바라보던 여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알도가 알기로는 그랬다.
'허, 거 참. 취향도 가지각색이라니까. 남자나 다름없어 보이는 여자가 뭐가 좋다고….'
알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막사의 출입구를 열었다.
알도가 나간 막사 안은 또다시 조용해졌다.
루크는 에르논과 카시야의 맞교환이 곧 성사되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타셀 쪽이 튕기는 듯 보이지만 절대 거절의 빛을 띠고 있지는 않았다. 어쩌면 그들에게 카시야는 대마법사인 에르논보다 더 중요한 인물인지도 모른다.
"어서 눈을 떠라. 너하고는 왠지, 얘기를 나눠봐야 할 것 같거든."
포로의 맞교환이 일어나기 전에 루크는 카시야와 말을 섞어보고 싶었다. 여전히 그녀가 자신에게 단도를 내리 꽂으려 했던 순간의 펄떡이던 심장 소리가 기억에 생생했다. 자신이 던진 미끼에 착실히 걸려들던 그녀. 아니, 어쩌면 그녀 역시 자신이 미끼를 던졌다는 것을 알아챘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달려들었겠지. 물론 그럴 일이야 없었겠지만 조금이라도 그녀의 손목을 붙드는 게 늦었더라면 당한 쪽은 자신이었을 것이다. 무모해보이면서도 오싹할 정도로 냉철한 판단. 그 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자신의 인생에서 그 정도로 즐거웠던 적이 한 손에 꼽을 만큼도 없었으니까.
'몸이 완벽하게 건강한 상태에서 좋은 무기를 쥐어주면 어디까지 날 상대할 수 있을까.'
카시야가 단단한 강철검을 들고 자신을 상대하는 모습이 상상되자 가슴이 뛰었다. 물론 미하일 메레디스라는 호적수가 있기는 하지만, 그는 체질적으로 별로 맞지가 않았다. 만날 때마다 그냥 물어뜯어놓고만 싶어지는 놈이었다. 하지만 이 여자는 뭐랄까, 대련이 즐거울 것 같달까.
'뭐, 내가 이 여자보다 강하니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건지도 모르지만.'
이런 식으로, 그는 의식을 잃고 누워있는 카시야를 바라만 봐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거운 상상을 끊임없이 해댈 수 있었다.
============================ 작품 후기 ============================
주말 동안 제 글을 1회부터 읽는 중인데요, 출간용으로 교정을 볼 때 몇 군데 손을 대야겠다 싶은 부분들이 있더라고요. 글의 흐름이 바뀔 정도는 아니겠지만, 좀 더 매끄럽고 재미있고 자연스럽게 수정이 들어갈 것 같아요.
어쨌든 그렇게 매의 눈으로 읽고 있는데, 언제 이만큼이나 회차가 쌓였는지 열심히 읽는데도 끝이 안나요;;
그나저나, 루크 안 좋아하세요? 저는 루크 좋아하는데... ㅎㅎㅎㅎ
+ 그녀의밤 님, 후원쿠폰 감사합니다.
+ 내일은 연재 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