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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홍의 카르마-78화 (78/134)

00078 심연(2) =========================

카시야가 눈을 뜬 것은 그 다음 날이었다. 칼에 베인 상처는 잘 꿰메진 덕에 착실히 아물고 있었지만 등 뒤에서 당한 공격의 상처는 여전히 날카로운 통증을 가져왔다.

'…여긴 또 어디야?'

카시야는 아직 흐릿한 눈을 천천히 깜빡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좁은 막사 안이었다. 벽면의 기둥이 나무로 촘촘하게 세워진 것을 보면 이곳이 죄수를 잡아두기 위한 막사라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또 그렇게만 생각하기에는 대우가 꽤나 좋았다. 상처를 정성스레 치료해준데다 누워있는 침상 역시 죄수용은 아니었다.

카시야는 서서히 정신이 맑게 깨는 것을 느꼈다. 오는 도중의 기억을 더듬어보려고 했지만, 중간에 그들이 붕대로 지혈을 해줬던 것과 동굴 같은 곳으로 진입했던 것 외에는 기억나는 게 없었다.

막사 안에는 카시야가 누워있는 침상 말고는 의자 두 개와 테이블 한 개가 전부였다. 그녀를 지키는 이도 없었다. 하지만 기척으로 보건대 막사 바깥에 서있는 보초들의 무위는 농사짓다 끌려온 잡병 수준이 아니었다. 여자인 자신에 대해 방심할 법도 한데 저렇게나 신경을 썼다는 건 자신을 잡아온 놈들의 전언 때문일까, 하고 카시야는 무심히 생각했다. 하지만 마나를 많이 쓴데다 피도 많이 흘려 지금은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사실 아직도 눈앞이 뱅뱅 돌고 손발 끝이 시렸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자 기침이 터져 나왔다. 기침으로 몸이 들썩이자 몸 여기저기에서 날카롭거나 둔탁한 통증이 동시에 잠을 깨듯 살아났다. 그 소리에 보초가 막사 출입구를 열고 그녀를 살피는 듯하더니 잠시 후 큰 키의 누군가가 성큼성큼 들어왔다.

"여어-! 드디어 깨셨군 그래."

카시야는 눈알만 굴려 자신에게 시답잖게 말을 거는 이를 쳐다보았다.

"…세이지? …아, 루크 페레이아…."

카시야는 또 놀랄 뻔했지만 다행이 루크에 대한 기억을 빠르게 불러들였다. 역시나 자신은 적진에 포로로 잡혀온 것이다.

"예의를 갖춰라! 감히 뉘 안전이라고…!"

루크와 함께 들어왔던 알도가 으름장을 놓으며 험악하게 눈을 부라렸다. 하지만 루크가 손을 들어 그를 만류했다. 카시야 역시 알도를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직 다 아물지 않은 상처에서 다시 피가 배어나왔지만 그녀는 신음소리 한 번 흘리지 않고 일어나 앉았다. 루크는 피식 웃으며 의자 하나를 그녀 앞에 끌어다 놓고 앉았다.

"씨알도 안 먹힐 것 같지만, 일단 포로 심문 지침에 있으니까 물어는 볼게. 우리 쪽으로 넘어 오겠나?"

카시야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응. 그럴 줄은 알았어. …에르논은 좀 어때? 살아날 것 같아?"

카시야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 했다.

포로로 잡혀있는 자의 태도라고 보기에는 긴장감이 하나도 없었다. 건조하고 무표정하고 일말의 감정조차 드러나지 않는 눈을 하고 있지만 절대 고분고분하다고 느껴지지 않는….

'…진짜 이상하단 말이지. 분명 어디선가 이 상황을 겪었던 것 같은데….'

정신을 차린 카시야와 마주 앉은 루크는 한층 더 심해진 기시감을 느꼈다. 기억이 날 듯, 말 듯 해서 더 답답했다. 분명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분명 저 무미건조한 얼굴에 열이 뻗쳤던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문득, 처음 만났던 날 그녀가 자신을 향해 '세이지 카힐'이라고 불렀던 게 생각났다. 분명 사람 이름이었던 것 같은데, 그렇다면 분명 저 여자도 자신과 같은 얼굴을 알고 있다는 말이었다.

"알도. 잠깐 나가있어."

"예? 예. 알겠습니다. 무슨 일 있으시면 부르십시오."

나가있으라는 명령에 알도는 찜찜한 얼굴을 했지만 긴 말 덧붙이지 않고 바로 밖으로 나갔다.

알도가 나간 막사 안에서 루크와 카시야는 한동안 서로 마주보고만 있었다. 그러다 한참 만에 입을 뗀 루크가 눈을 가늘게 뜬 채 물었다.

"내가 뭐 확인해볼 게 있으니까, 괜히 머리 굴리지 말고 솔직히 대답해. 지금 몇 살이지?"

"…스물둘."

"이름은?"

"카시야."

"고향이 어디야?"

"아루엘로."

"엘리븐, 주카, 타노버 아니면 수도에서 살았던 적이 있나?"

카시야는 다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루크가 보기에도 카시야가 굳이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그녀와 자신은 접점이 없었다는 말이다. 그럼 세이지 카힐이라는 사람은 정말 자신을 닮은 사람이었을 뿐일까. 그런데 또 그렇다기에는 자신이 느끼는 이 기시감이 이상하다.

"세이지 카힐… 이라고 했었나?"

"……!"

카시야의 시선이 재빨리 루크의 눈에서 뭔가를 찾으려 하는 것을 느낀 루크는 그녀에게 조금 더 다가가 앉았다.

"내가 널 본 적이 있나? 네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어디서 만났을 리 없을 것 같긴 하지만, 분명 어디선가 본 것 같단 말이지. 게다가 너 역시 날 알고 있는 것 같고.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기억이 날 듯, 말 듯 하면서 전혀 기억이 안 나.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난 모르지만, 넌 알고 있는 것 같은데…. 그렇지?"

루크의 말에 카시야는 진심으로 놀랐다. 세이지 카힐과는 얼굴이 닮았을 뿐,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지금 자신에 대해 기시감을 느낀다고 말하고 있었다. 순간 카시야의 머릿속이 또다시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이 세계는 정말 또 다른 '삶'인가? 현실과 비슷한 환상이 아닐까? 혹시 내가 마약에라도 취해 길고 긴 꿈을 꾸는 게 아닐까?

이 세계에서 눈 뜬 이후 여기가 또 다른 현실이고, 그저 이 현실을 살아나가면 될 뿐이라 생각하려 노력했지만 한편으로는 늘 '이게 진짜 현실일까?'라는 의문이 존재했다. 하지만 현실이라는 발판을 잃어버린다면 그녀는 자신이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의문은 판도라의 상자에 넣어두고 뚜껑을 단단히 잠가둔 채로 쳐다보지 않았다. 그래서 버틸 수 있었다. 멀쩡한 정신으로라면 믿을 수 없는 죽음과 차원을 넘은 환생이라는 체험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러니, 이런 식으로 갑자기 자신이 서있던 발판에 금이 가는 것 같은 상황은 그녀를 미칠 듯한 혼란으로 몰고 갔다. 맞은편에 앉은 세이지의 얼굴을 손끝으로 건들면 균열이 생기면서 이 잘 빚어진 환상이 조각조각 잘게 부서져 내릴 것만 같았다. 환상이 부서져 내린 자리에 무엇이 남을지는 몰랐지만 말이다.

카시야가 루크를 향해 몸을 기울이며 손을 들어 올린 것은 의식하고 한 행동이 아니었다. 머뭇거리며 뻗어가던 그녀의 차가운 손끝이 마침내 그의 턱 끝에 닿았다.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듯 가만히 닿아있던 손끝은 다시 그의 뺨을 더듬었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제야 자신이 그를 더듬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카시야가 손을 거둬들였다. 다시 침상 위에 털썩 주저앉은 그녀의 공허한 얼굴에 허탈한 미소가 스쳤다. 카시야는, 갑자기 지독한 외로움을 느꼈다. 캄캄한 세계에 저 혼자 버려진 듯한 외로움이었다.

그때, 따뜻하고 단단한 손가락이 카시야의 턱 끝을 쥐고 들어올렸다.

"왜 그렇게 세상 다 끝난 표정을 하고 있어?"

카시야와 루크의 시선이 다시 마주쳤다. 환상이라기엔 너무나 또렷한 눈빛이었다. 턱 끝에 닿은 손가락의 온기 역시 지나치게 현실감이 들었다. 카시야는 눈을 몇 번 깜빡거리다 빠르게 정신을 수습했다. 판도라의 상자는 다시 단단히 닫힌 채 깊고 깊은 의식의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

"…내가 전에 알았던 사람을, 당신이 좀 닮은 것뿐입니다."

"좀? 좀 닮은 사람을 한 눈에 알아볼 정도로 눈썰미가 좋은가보지?"

루크는 분명 그녀의 단단한 껍질에 금이 가 새빨간 속살이 드러난 것을 보았다. 왜 그랬는지 원인도 알 수 없었고, 아주 잠깐이었을 뿐이지만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 속살에 비수를 찔러 넣는다면, 이 여자는 무너져버리고 말 것임을. 그래서 감히 건들 수 없었다. 그녀의 얼굴에 다시 가면 같은 무표정이 자리 잡았을 때, 그녀의 진짜 모습을 놓쳤다는 아쉬운 마음 한편으로는 안도감이 들었다.

막사로 돌아갔다가 가벼운 차림으로 연무장에 나선 루크는, 휘하의 기사들과 대련을 하면서도 카시야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카시야는 그 이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시선을 돌려버렸지만, 그의 뇌리에 남은 그녀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깨져버릴 것 같이 위태롭던 얼굴이 자꾸만 그의 의식을 침범했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시간으로 따지자면 길지도 않았던 그녀와의 첫 만남 때부터 그는 그녀에게 이성적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관심을 가졌었다. 여자로서도, 적수로서도 자신의 기준에는 한참 미달이었는데도. 하지만 그 눈빛과 분위기는 이유도 알 수 없이 가끔씩 떠올라 생각에 잠기게 했다.

이번에 다시 마주하고 보니 더욱 확실해졌다. 자신은 그녀에게 이상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이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일종의 집착을 느끼고 있었는데, 어느 누구에게도 그녀를 보여주고 싶지 않았고, 그녀를 빈사의 에르논과 맞바꾸고 싶지도 않았다. 다 죽어가는 마법사 따위는 그의 안중에도 없었던 데다가, 왠지 겨우 자신의 손에 들어온 보물을 헐값에 넘겨주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면에, 그녀의 단정한 자세, 무미건조한 얼굴을 볼 때마다 슬며시 끓어오르는 분노 같은 것도 느꼈다. 그 얼굴은 마치 '너 따위는 나에게 아무 것도 아니야.'라는 듯 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면 주먹에 힘이 들어가면서 울화가 치밀어 오르기도 하는 것이었다.

종합적으로 생각하자면 루크는 카시야에 대해 전혀 일관되지 못한 여러 가지 감정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전쟁터에서 오래 살다보니 나도 이제 슬슬 맛이 가나?'

그는 검을 떨어트리며 "졌습니다."라고 항복을 선언한 기사가 한 쪽 무릎을 꿇는 것을 다 보지도 않고 몸을 돌렸다. 이런 반복적이고 지루한 대련 따위는 하나도 재미가 없었다.

그는 결국 그날 밤에도 또 카시야의 막사를 향했다. 카시야는 치료를 받고 있었다. 치료사는 루크의 등장에 놀라 손을 멈췄지만 계속하라는 그의 고갯짓에 다시 부지런히 환부를 깨끗한 천으로 닦아냈다. 등의 상처는 크기가 크지 않았지만 꽤 깊었다.

"혹시 어딜 못 쓰게 된 건가?"

"아, 아닙니다. 운이 좋았는지, 칼끝이 폐나 내장을 찌르지도 않은데다가 힘줄이나 신경도 잘리지 않은 것 같습니다. 피를 조금 많이 흘렸을 뿐, 자상에 의한 후유증은 따로 없을 것 같습니다."

치료사의 설명에 루크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등을 내놓고 엎드린 카시야는 반대방향으로 얼굴을 돌리고 있었는데 그는 덕분에 그녀의 등을 감상할 수 있었다. 언뜻 보면 미끈해 보이는 등이었지만 기사인 루크의 눈은 그 아래 탄탄하게 짜인 근육을 가늠할 수 있었다. 저런 근육을 만들려면 꽤나 체계적인 훈련을 지속적으로 이어왔어야 했을 것이다. 조금 과장하자면, 그는 그녀의 등 근육에서 기사로서의 긍지를 읽었다. 하지만 그 멋진 등에 나있는 보랏빛 상처가 거슬렸다. 피가 계속 흐르던 상처를 꿰매놓긴 했지만 움직일 때마다 상처가 벌어져 여전히 핏방울이 맺히고 있었다.

"그 상처는 피가 멎질 않는군. 언제 낫는 거지?"

"아…. 그것이, 저, 고급 약초를 포로에게까지 쓸 수는 없어서…."

"가져와."

"예? 무, 무엇을… 말입니까?"

"내 명령이라고 하고, 그 약초 갖고 와. 대마법사와 교환될 중요한 포로다. 포로 교환일까지 상처를 다 낫게 해라."

"아, 예, 예."

치료사는 당황하여 손수건으로 이마를 닦았다.

"뭐해?"

"예?"

"지금 가져오라고."

어느새 차가워진 루크의 눈빛에 치료사는 대답할 겨를도 없이 막사를 뛰쳐나가 간호 막사 쪽으로 달려갔다. 조용해진 막사 안에서, 카시야는 여전히 미동도 없이 엎드려 있었다.

"…아프냐?"

루크의 질문에 카시야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참을 만 합니다."

다시 둘 사이에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다행이 치료사는 금방 돌아와 루크의 눈치를 보며 지혈제로 쓰이는 약초와 치료제로 쓰이는 약초를 같이 빻아 그녀의 환부에 붙여 주었다. 그리고 치료사가 붕대로 그녀의 상처를 감싸 매는 것을 보던 루크는 곧 몸을 돌려 막사 밖으로 나갔다. 왠지, '왜 또 왔냐.'는 듯할 게 뻔한 그녀의 눈과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 작품 후기 ============================

"아프냐? 나도 아프다." 라고 할랬는데 "참을 만 합니다.".... 뤀무룩.....

+ 그녀의밤 님, 징수니 님. 후원쿠폰 감사합니다~!

+ 에혀. 네웹소에서도 까인 표지... 저도 커미션 해보고 싶습니다만, 마음에 드는 일러 작가님 찾기도 어렵고, 용돈도 없고... 출간할 때는 출판사에 표지 예쁘게 만들어달라고 부탁할게요.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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