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9 심연(3) =========================
"페레이아 경! 이번에 잡아온 포로 외에 더 넘겨줄만한 포로가 있나?"
케네스가 초조한 기색을 감출 생각도 없이 루크에게 닦달하듯 물었다. 그의 손에는 포로 교환을 거절한다는 타셀 측의 문서가 쥐어져 있었다. '휴전 중 본 진영 내에서 납치 사건을 일으킨 것은 중대한 도발이며,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는 문서였다. 하지만 문서 말미에는 '잡혀간 포로 전부를 풀어준다면 에르논과의 교환을 고려해보겠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말이 덧붙어져 있었다.
"글쎄요. 노역을 시키고 있는 포로 몇이 있기는 합니다만."
루크는 강 건너 불구경하듯 심드렁했다. 거기에 또 케네스는 미간을 구겼다.
"애초에 자네의 수하들이 제대로 일처리를 했다면 내가 타셀 그 놈에게 이런 수모를 당할 일도 없었을 것 아닌가!"
케네스는 루크에게 또다시 고압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루크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그를 비웃었다.
"애초에 에르논의 상태가 좋았더라면, 그러니까 안개숲에서 겨우 살아 돌아온 에르논이 매질 당하지 않고 건강을 회복하는 데만 집중했더라면, 이 모든 귀찮은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테지요."
그 말에 케네스의 입매가 바들바들 떨렸다.
에르논이 공작성에서 매질을 당한다는 것은 밖으로 새어나가서는 안 될 비밀이었다. 에르논을 보살피는 하녀들은 그가 대마법사인 줄도 몰랐고, 공적으로 에르논을 대할 때에는 대마법사에 대한 예를 취해주는 척 했었다. 물론 에르논이 매질을 당한다는 것을 아는 이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의 입단속은 단단히 하고 있다 믿었다. 그런데도 루크가 에르논이 학대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은, 공작성에 그의 간자가 있다는 말이었다.
"네, 네 이 놈! 감히 내 성 안에 쥐새끼를 심어?"
"하하하! 아니, 알 거 다 아시는 분이 왜 이러십니까? 공작께서는 제 침의가 무슨 색인지 마저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케네스는 얄밉도록 여유로운 미소를 짓는 루크를 향해 이를 바득 갈았다. 이상하게 그에 대한 정보의 양이 전보다 줄었다 싶었는데 첩자 몇 명은 이미 발각된 모양이었다. 과거에는 유용하게 쓸 수 있는 검인 줄 알고 키워놨더니, 이제는 제 주인을 몰라보는 번견 같았다.
"후회할 날이 있을 걸세."
"누가 후회할지는 두고 보도록 하지요."
루크는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대답했다. 결국 케네스는 자신에게 기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케네스는 뭐 하나 스스로 이루는 게 없는 인물이었다. 그저 자신의 권력으로 다른 이를 부릴 뿐이었다. 어차피 자신이 없으면 케네스의 권력도 약해진다. 그는 자신을 쳐낼 수 없었다. 루크는 케네스 쪽은 더 이상 쳐다보지도 않고 부하를 향해 타셀군 포로들 중 몸이 약해져 쓸모없는 것들을 추리라고 명령했다.
"그 노인네 상대를 하고 나면 기분이 더럽다니까."
"페레이아 경! 듣는 귀가 많습니다. 부디 말씀을 좀 조심히…!"
"들으면 뭐 어때? 지금 이 상황에서 내 목을 칠 수나 있을 것 같아?"
루크는 자신을 걱정하는 알도를 향해 피식 웃어 보이며 걸음을 재촉했다.
"어, 어…! 페레이아 경, 어디 가십니까? 막사는 이쪽입니다."
"포로가 얌전히 잘 있는지 확인해보려고. 자넨 크리스탄에게 가서 회의가 한 시간 미뤄졌다고 알리게."
루크는 자연스럽게 카시야가 갇혀 있는 막사로 향했다. 그 뒤를 알도가 황당하게 쳐다보다가 갑자기 진지하게 안색을 바꾸며 턱 끝을 문질렀다. 그러다가 뭔가 생각한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몸을 돌려 어딘가로 사라졌다.
"몸은 좀 어때?"
"보시는 대로."
카시야는 이제 세이지의 얼굴을 한 루크를 보는 게 익숙했다. 여전히 가끔씩 세이지와 똑같은 표정을 짓는 그 때문에 심란해지기도 했지만, 처음과 비교하면 지금은 패닉에 빠지거나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지지는 않았다. 그가 세이지와 닮았으면서도 또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굉장히 다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무엇보다도 그는 세이지와는 달리 자신에게 관심이 많았다. 귀찮을 정도로 말이다.
"여전히 귀엽지 않은 말투군. 포로에게 이만큼 파격적인 대우를 해주는 적장은 없다고. 좀 더 감사의 마음을 담아 봐."
"애초에 이 꼴이 된 게 그쪽 때문이라는 건 알고 있습니까?"
"아아, 나도 원해서 한 일은 아냐. 뱀 같은 노인네가 하도 닦달을 해서 말이지."
카시야는 대답하지 않고 시선을 돌렸다. 루크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리를 꼬며 물었다.
"그런데 얘길 듣자하니, 검기를 날리셨다고?"
카시야는 대답이 없었지만 루크는 계속 말을 이었다.
"칼에 마나를 두르고 내 검기를 막을 때부터 알아보긴 했는데, 이렇게 빨리 검기를 날릴 수 있게 될 줄은 몰랐어. 역시나 탐나는 인재야."
"당신 역시 타셀 전하께는 탐나는 인재입니다. 전하께서는 인재들의 투항을 언제나 환영하시죠."
"뭐? 아하하하하하!"
루크는 태연하게 그를 회유하는 카시야 때문에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무심한 얼굴로 적장을 회유하다니, 정말 처음부터 그 배짱이 마음에 들었었다. 그의 웃음소리는 막사 밖을 지키고 있는 기사들의 귀에도 똑똑히 들릴 정도였다. 루크가 저렇게 즐겁다는 듯이 웃는 것을, 그들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조금 섬찟한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웃음소리 끄트머리에 묻어있는 아쉬움까지는 듣지 못했다. 루크는 타셀 측이 어쨌든 카시야의 무사 귀환을 위해 머리를 쓰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케네스야 지금 에르논을 돌려받는 것 외에는 뵈는 게 없어 모르겠지만, 한 발짝만 물러나서 바라보면 케네스가 휘둘리고 있다는 것이 빤히 보였다. 루크는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굳이 말리지 않았다. 지난번의 전투 이후 왠지 모든 게 조금 귀찮아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가 최근 흥미 있어 하는 것이라고는 카시야 밖에 없었다. 늘 그의 곁에 붙어 다니는 알도가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그 사흘 후의 밤, 루크는 조금 착잡한 마음으로 카시야가 있는 막사를 향했다. 케네스가 발발 거리며 타셀 쪽의 비위를 맞춘 끝에, 카시야를 포함한 포로 다섯 명과 에르논을 맞교환하기로 결정이 된 것이다. 이제 며칠 후면 카시야는 또다시 그의 손아귀를 벗어나 멀어질 것이다. 아직 그 세이지 카힐이라는 놈의 얘기는 더 듣지도 못한데다가, 자신이 느끼는 기시감에 대해서도 더 알게 된 바가 없는데 말이다. 속이 탔다. 그냥 우연이겠거니, 내 착각이겠거니 하고 넘길 법한 일인지도 모르지만 이상하게 관심을 끊을 수가 없었고 오히려 점점 빠져들어 가고만 있었다.
그런 생각에 잠긴 채 카시야의 막사 앞에 다다른 루크는 자신의 뒤에 서있는 알도와 막사를 지키는 기사가 서로 눈을 찡긋거리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가 막 막사의 입구를 열어 발을 들여놓는 순간, 뒤에서 알도가 그를 밀어 넣으며 말했다.
"오늘 밤 일정은 다 비워두었으니, 내일 아침에 모시러 오겠습니다. 좋은 밤 되십시오."
황당한 얼굴이 된 루크가 뒤를 돌아보았지만 알도는 누가 볼 새라 황급히 막사 입구를 닫고 사라졌다. 루크는 알도가 뭘 잘못 먹었나 생각하며 카시야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가 온몸이 굳어버리고 말았다.
'지금 이게 도대체….'
어제까지만 해도 조금 깨끗했을 뿐 포로가 잡혀있는 막사였던 그 곳은 어느새 곳곳에 최음 효과를 일으키는 향이 피워진 고급 창부의 방으로 변해 있었다. 카시야가 누워있는 침상에는 보드랍고 푹신한 이불이 덧깔려있었고, 무엇보다 그 침대 위에 누워있는 카시야의 모습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도대체 언제 씻겼는지 반질반질 윤이 나는 머리카락과 피부도 놀라웠지만 늘 셔츠와 바지 차림의 그녀가 창녀들 사이에서 유행하고 있다는 변형된 슈미즈 드레스를 입고 누워있다는 게 제일 놀라웠다. 소매도 없고 얇은데다 데콜테를 강조하느라 엄청나게 파여 있는 앞가슴 쪽은 쳐다보기가 아슬아슬할 정도였다.
한참 이게 어떻게 된 영문인지 생각하던 루크는 방금 알도가 나가면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자신의 심복에게 여자 포로가 잡혀있는 막사를 수시로 들락거렸던 자신이 어떻게 비쳐졌을지도 그제야 짐작이 되었다.
"하아…. 이 녀석이 쓸 데 없는 짓을…."
한편 루크를 막사에 밀어 넣은 뒤 누구도 들이지 말라고 보초를 서는 기사들에게 단단히 이른 알도는 뿌듯한 마음으로 제 막사를 향했다. 얼마 전 알리스타스 공작과의 만남에서 기분이 상한 듯 했던 루크가 곧바로 포로의 막사를 향하는 것을 봤을 때부터 오늘의 이 '선물'을 기획하고 준비한 그였다.
'몰래 준비하느라 힘들었지만, 페레이아 경께서 기뻐해주시겠지?'
알도는 자꾸만 비어져 나오는 미소를 숨기느라 쓸 데 없이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그가 보기에 루크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조금 쉴 필요가 있었다. 사실 이 군대를 이끄는 영웅은 에르논이나 케네스가 아니라 루크 페레이아, 그 남자였다. 그가 아니었다면 저번 전투에서도 그 정도로 끝나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 이 전쟁 자체가 끝났을 수도 있다. 하지만 루크는 미하일을 상대하면서도 제 주변의 기사들이 퇴각할 길을 만들어냈고, 부상을 입었으면서도 미하일에게 밀리지 않았다. 그렇게 힘든 싸움을 하고 온 뒤, 루크는 패전이 자신의 책임인 양 몸을 돌보지 않고 부대를 뛰어다녔다. 그를 천출이라고 낮잡아 보는 쓸모없는 귀족 기사들은 이 전쟁터에서조차 여자를 끼고 놀지 않는 날이 없는데, 수고에 대한 보상을 받아야 할 루크는 여태껏 제대로 쉬질 못했다. 그가 힘들다는 표정을 지은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그의 곁에서 그의 격무를 그대로 다 목격한 알도는 그게 안쓰럽고 화가 났다. 이번에 잡혀온 포로가 그의 취향이라는 게 다행이다 싶을 정도였다.
'그나저나, 취향이 그런 쪽인 줄은 전혀 몰랐네. 하지만 귀족 영애들이나 창녀들이나 전부 가녀리거나 풍만하거나 둘 중 하나던데 어디서 또 저런 여자를 구해오지? 아…! 그래서 이제까지 결혼을 안 했나? 저런 타입은 좀처럼 보기 힘드니까 말야.'
알도는 제멋대로 루크가 미혼인 이유까지 상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다가 풉, 하고 웃었다. 여자 취향마저도 루크답구나 싶었기 때문이다. 포로로 잡혀온 여자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은 몇 번 보지 않았어도 알 수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단련된 몸이었고 가만히 앉아 있는데도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루크가 흥미를 느낄 법도 했다. 언제나 강한 것에 흥미를 갖던 루크였으니까.
하지만 루크의 취향이 알도를 조금 힘들게 한 것도 사실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그렇게 빈틈없고 고고한 기사가 밤 시중을 들게 만들 수 있느냔 말이다. 고민하던 그는 결국 약을 쓰기로 했다. 사람이 물을 안마시고 살 수는 없으니, 그는 포로의 식사에 제공된 물에 수면제를 탔다. 무색무취의 수면제는 꽤나 비쌌지만, 그동안 자신이 루크에게 은혜를 입은 게 한 두 번이던가. 그는 제 비상금을 털어 수면제를 샀고 다행히 포로는 별 의심 없이 물을 마신 뒤 곧 잠들었다.
그 다음부터가 정말 어려운 과정이었다. 그는 포로의 막사에 적당한 크기의 물통과 해면, 고급 향유, 입이 무거운 하녀를 차례대로 '몰래' 공수해 와 포로를 씻기고 꾸미도록 했다. 하녀에게 웃돈을 더 얹어주고 제일 야시시한 슈미즈 드레스까지 얻어오도록 했다. 포로가 워낙에 근육질이라 보통 여자를 씻기는 것보다 훨씬 더 무겁고 힘들었다며 하녀가 툴툴댔지만 그 정도는 또다시 그의 주머니에서 나온 은화 몇 개로 잠재울 수 있었다. 수면제의 효과가 깰 즈음 다시 최음제로 유명한 미약을 물에 타 먹였다. 혹시나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을까봐 최음향까지 방 안 곳곳에 피워두었다. 그 정도로 공을 들였으니 그게 하마라 하더라도 발정이 안 날 수 없을 것이다.
'좀 미안하기는 하지만, 어차피 적군 포로인데 뭐 어때.'
알도는 내일 아침 루크가 무심한 척 제 어깨를 툭툭 치며 치하할 것이 눈에 보이듯 상상됐다. 그는 상쾌한 기분으로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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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선작 9,000! 감사합니다!
+ 그녀의밤 님, 징수니 님. 후원쿠폰 감사합니다~! 이 문구는 아예 매회 박아넣고 있는 것 같네요;;;;;
+ 조삼모사의 문제 : 오늘 오후 한편 더 올리고 내일을 쉬려고 합니다. 제가봐도 다들 그 담편 궁금하실것 같아서요. 오늘 2시경에 다음편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