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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홍의 카르마-80화 (80/134)

00080 심연(4) =========================

루크는 상쾌한 알도와는 달리 난감한 상황이었다. 몇 번을 다시 봐도 침대 위에 누워있는 이는 카시야가 맞았다. 주변에 피워진 향과 그녀의 상태를 보아하니 도대체 어떤 수를 썼는지 모르지만 그녀에게 미약을 먹인 것 같았다. 루크는, 그로서는 굉장히 드물게도 크게 당황한 상태였다. 하지만 지금 이 막사 안의 상황보다 더 당황스러운 건, 아무리 '돌아가자.'고 생각을 해도 떨어지지 않는 발과 여전히 그녀를 훑고 있는 자신의 눈동자였다.

"으…으음…."

카시야의 목에서 가느다란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제야 루크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정신을 잃었나 싶었는데 그녀는 이미 눈을 가느다랗게 뜬 채 가쁜 숨을 쉬며 어딘지 괴로운 듯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였다. 눈동자에는 초점이 없었다. 루크는 재빨리 주변에 피워진 최음향을 껐다. 여자를 안을 때 자주 피웠던 향이라 그에게는 익숙했지만 처음 맡는 사람에게는 최음향만으로도 반쯤 정신을 나가게 할 수 있었다.

"이봐, 정신 차려."

루크는 카시야의 뺨을 살짝 치며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슈미즈 드레스는 얇은 모슬린 재질이라 그녀의 나신이 은근히 비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몸 보다는 하얗게 감긴 붕대가 더 강조되어 눈에 띄었다.

'…아무리 내가 여잘 좋아한다고 생각했어도 그렇지, 다 낫지도 않은 환자를…!'

루크는 알도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일을 벌였는지 이해했고, 또 그 마음이 기특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이 부상을 입은 여자를 범할 정도로 짐승같이 보였던가 하는 생각에 한숨이 나왔다. 그때 또 카시야가 신음을 흘렸다. 자신도 모르게 손등을 그녀의 뺨에 댄 루크는 생각보다 훨씬 뜨거운 체온에 깜짝 놀랐다.

"흐윽…. 무… 물 좀, 하아, 하아…."

가까스로 내뱉는 듯 웅얼거리던 카시야의 입술이 다시 달뜬 숨을 내뱉었다. 루크는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물을 컵에 따르고는 그녀의 상체를 받쳐 들어 컵을 그녀의 입에 대었다. 하지만 미약 때문에 몸을 가누지 못했던 카시야는 그토록 바라는 물을 제대로 삼키지도 못하고 흘렸다.

카시야는 일렁이는 수면과 같은 의식 아래에서 몽롱한 채였다. 몸이 뜨겁고 정신이 어지러운 것도 견디기 힘들었지만 무엇보다도 아랫배가 저릿저릿한 것이 제일 낯설고 당황스러웠다.

'약을 먹였나….'

혼미한 정신으로도 카시야는 자신의 상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 조각 남은 이성이 언제 사라져버릴 지는 알 수 없었다. 방금까지 맡아지던 달큰한 향이 사라지니 조금 낫기는 했지만 지금도 위태롭기는 마찬가지였으니까. 몸이 붕 뜬 것 같고 귓가에는 낮게 웅웅거리는 소리만 들린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초점이 잘 맞지가 않아서 눈앞의 모든 게 다 뿌옇게 보였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시원한 물이 마시고 싶었다. 아까부터 몸이 너무 뜨거워 목이 타기도 했다. 그녀는 끊임없이 물을 생각했다. 그때 누군가 자신의 등을 받쳐 일으켰다. 그리고 입술에 컵의 감촉이 느껴지더니 곧 차가운 물이 입 안으로 흘러들었다. 하지만 마음 먹은 대로 그 물을 마실 수가 없었다. 최선을 다해 꿀꺽, 하고 넘기려 했지만 마치 물 마시는 방법을 잊어버린 듯 입 안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그게 너무 답답해서, 입술에 남은 차가운 컵의 감촉이 아쉬워서 그녀는 물기가 남은 아랫입술을 물었다. 입가에서 샌 물이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그 물방울을 핥아 마시고 싶을 정도로 목이 탔다.

"하아, 하아…. 무울…, 물을…."

그녀는 최선을 다해 자신을 붙들고 있는 누군가에게 물을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떨어져나간 컵은 좀처럼 입술에 다시 닿지 않았다. 제발 물을 달라고 빌고 싶어질 즈음, 따뜻하고 말랑한 무언가가 제 입술 위에 닿았다. 그리고 그 맞물린 사이로 시원한 물이 흘러들었다. 카시야는 혼미한 상태에서도 그게 누군가의 입술이었음을 깨달았다. 그 누군가가 자신의 고개를 살짝 뒤로 젖혀준 덕에 그녀는 타인의 입에서 전해진 물을 목구멍 너머로 삼킬 수 있었다. 그게 너무나 기쁘고 고마웠다. 하지만 두어 모금의 물로는 그녀의 갈증을 달래줄 수 없었다. 그녀는 떨어져나간 입술을 또다시 재촉하듯 자꾸 제 입술을 빨았다.

"하아…. 이건 좀… 진짜 곤란한데…."

카시야에게서 입술을 떼고 물을 더 달라는 듯 빠끔거리는 그녀의 모습을 내려다보던 루크는 낮게 중얼거렸다. 왠지 자신의 목까지 말라오는 것 같았다. 그는 미약을 먹지 않았지만 진하게 피워져있던 최음향은 그 향에 익숙한 그라 하더라도 쉽게 끓어오르게 만들 정도는 되었다.

점점 위험해지는 것 같긴 했지만, 녀석들이 미약을 얼마나 먹여놨는지 물마저 제대로 넘기지 못하는 카시야를 그냥 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사실, 저에게만 오롯이 기대오는 그녀의 모습이 꽤나 만족스럽기도 했다. 이 고고한 여자의 약한 모습을 또 언제 볼 수 있겠는가. 루크는 피식 웃다가 다시 차가운 물을 가득 머금고 그녀의 입술에 제 입술을 마주 댔다. 그의 입술을 반갑게 맞아들인 그녀는 잘 움직이지도 않는 목울대를 꼴깍거리며 그의 입에서 전해지는 물을 달게 받아 마셨다. 그렇게 몇 번 물을 먹이자 카시야는 만족했는지 더 보채지 않았다. 하지만 촉촉하게 적셔진 입술에서는 여전히 뜨겁고 가쁜 숨이 들락날락 거리고 있었다.

밀착되었던 입술 사이에서 새어나와 흐른 물이 그녀의 턱과 목을 지나 가슴골 사이로 흐른 자국이 보였다. 그게 왜 그렇게 야하게 보이는지, 루크는 자신도 모르게 그 물방울들이 흐른 길을 따라 입을 맞추었다.

"흑…."

그의 입술이 살갗에 닿자 카시야의 몸이 움찔했다. 자신의 입술에 반응하는 것이 분명한 그 움직임에, 그의 몸에는 갑자기 불길이 이는 듯 했다. 그의 입술이 닿았던 흔적을 예민하게 느끼면서도 신음을 내지 않으려 참는 게 눈에 보였다. 하지만 신경계를 교란시키는 미약은 그녀의 인내심을 비웃듯 모든 감각을 최대치로 올려놓은 상태였다. 그의 혀가 얇은 피부 위를 핥고 지나가자 그녀의 입술 사이에서 터져 나온 다급한 호흡에는 흐느끼는 듯한 신음이 섞여있었다.

그 애처로운 목소리에, 방금까지 루크의 머릿속에 남아있던 점잖은 생각들은 하얗게 산화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는 다급하게 허리띠를 풀고 셔츠를 벗었다. 그녀의 몸에 감겨있는 붕대는 더 이상 눈에 보이지 않았다. 다만 혀끝에 닿은 피부가 꿀을 발라놓은 듯 달다는 느낌만이 뇌리를 지배했다. 맨살끼리 마주 닿은 부분에서 시작된 간질거리는 느낌이 몸통으로 타고 올라와 미칠 것만 같았다. 그런 와중에도 자신이 느끼는 야릇한 감각을 참으려 이불을 그러쥔 그녀의 손이 안쓰러웠다. 그는 그 꼭 쥔 주먹의 손가락 하나하나에도 입을 맞추며 그녀를 살살 달랬다.

*

다음 날 아침, 가벼운 두통과 함께 서서히 정신이 든 카시야는 눈을 감은 채 어젯밤의 기억을 더듬었다. 곧이어 형편없이 드문드문하긴 하지만 기억이 돌아왔다.

식사 후 의식을 잃었고 정신이 돌아올 무렵부터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리고 굉장히 목이 탔었다. 그런 자신의 곁에서 누군가가 물을 '입으로' 먹여줬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몸에 입을 맞추고 손을 대자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지면서 육체적 쾌락을 간절히 바랐던 것이 떠올랐다. 그 다음 어떻게 되었더라….

'아무래도 약에 취해 당한 것 같군.'

카시야는 자신이 강간을 당했을 거라 생각하면서도 상대방이 폭력과 함께 거칠게 대하지 않아주었음을 다행으로 여겼다. 지금처럼 부상이 다 낫지 않은 상태에서 거칠게 당했더라면 상처가 다시 벌어졌을지도 모른다. 상처에 대해 생각하던 카시야는 문득 관계 후라면 느껴져야 할 아랫도리의 통증 같은 게 전혀 느껴지지 않음을 깨닫고 순간 정신이 확 들어 눈을 떴다.

자신은 여전히 뭔가를 입은 상태로 누워 있었고 침대 곁에 누군가가 앉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쪽으로 고개를 돌린 카시야는 셔츠 단추 두어 개가 풀렸을 뿐 단정한 차림새인 루크를 발견했다.

'어제 내 옆에 있었던 사람이 이 자였나…!'

당황스럽게 그를 쳐다보는 카시야에게 루크는 한숨을 내쉬더니 사과했다.

"내 심복이 충성심이 과해서 너에게 무례를 저질렀다.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 아무 일도 없었다." 라던 루크의 시선이 카시야의 어깨에 가 닿았다. 어젯밤 미처 참지 못하고 그녀의 어깨를 깨물어 생긴 멍이 보였다.

"아무 일도, 라고는 말하기 어렵지만… 아니, 아무 일도 없었던 거나 마찬가지야. 내 모든 인내심을 다 끌어 모아서 참았으니까 그 정도는 좀 봐줬으면 좋겠어. 어쨌든 미안하게 됐다."

그는 다른 편 의자 위에 새로 마련된 셔츠와 바지를 턱 끝으로 가리켰다.

"지금 일어나서 갈아입어. 그 모습으로는 대화하기가 좀 곤란하군."

그제야 카시야는 제 차림을 살폈다. 아무런 속옷도 입혀지지 않은 맨몸에 걸친 얇은 모슬린 드레스…. 그 상태 그대로를 보고 앉아있기는 힘들었던지 루크가 쇄골 언저리까지 이불을 덮어놓긴 했지만 아마 그는 어젯밤 그 얇은 드레스 아래의 맨살을 다 보았을 것이다. 그 정도의 기억은 있었다. 카시야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입고 있던 옷을 벗고 준비된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 사이 루크는 민망해하면서도 시선을 돌려 기다렸다.

그녀가 옷을 다 입자 둘은 다시 평소와 똑같이 마주 앉았다. 루크는 왠지 낮게 침잠한 듯한 눈빛으로 천천히 입을 뗐다.

"아무리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궁금하단 말이지. 그 '세이지'란 놈이 도대체 누군지 말야."

"저번에도 말했듯이, 과거에 알던 사람일 뿐 당신과는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루크는 여전히 달라지지 않은 눈빛으로 카시야의 표정을 관찰했다.

"넌 어젯밤 끊임없이 날 세이지라고 불렀어. 연인이었나 싶었는데, 갑자기 '왜 나를 죽였냐'고 묻더군."

그 말에 카시야의 눈이 커지며 말문이 막혔다.

간밤, 루크는 그 말 덕분에 자신의 행동을 멈출 수 있었다.

그의 살갗을 간지럽히는 카시야의 뜨거운 날숨과 간간이 터져 나오던 신음 소리에 '이러면 안 되는데.'하면서도 그녀의 드레스를 끌어내려 탐스러운 가슴을 핥던 루크는, 가슴 아래로 동여맨 붕대가 안타까우면서도 그녀가 너무 사랑스러워 거의 이성을 잃을 뻔했다. 그가 그녀의 몸에 키스하면서부터 그녀는 그를 '세이지'라 불렀다. 거부하는 듯도 하고, 재촉하는 듯도 한 달뜬 목소리에 그는 자신의 이름을 세이지라 생각하자 마음먹고 그 부름에 응했다. 그녀가 세이지라 부를 때마다 루크 역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카시야-."라고. 그 이름을 부를 때마다 흥분이 고조되었다. 안 그래도 그가 올라타면서 벌어진 그녀의 다리를 타고 말려 올라온 드레스 치맛자락을 더 끌어올렸다. 그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목에 팔을 감는 모습에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지어졌다. 그는 그녀의 몸 위로 엎드리며 그녀의 목덜미에 입술을 지분거렸다. 바로 그 때였다. 그녀가 "세이지…. 왜 나를 죽였어?"라고 물었던 것이.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머릿속을 잠식하던 흥분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약에 취한 헛소리라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그 순간에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어떤 전율이 온몸을 흘렀다. 그래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미약에 취한 채 제정신도 아닌데다 아직 부상이 다 낫지도 않은 여성 포로를 자신이 겁탈하려고 했다는 사실을 자각한 순간, 알량하다고만 생각했던 그의 자존심이 무섭도록 아파왔다. 거기서 멈출 수 있어 다행이었다. 만약 분위기에 취해 그녀를 안았더라면, 그 다음날 그녀의 시선을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허탈한 웃음을 짓고는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침상에서 내려왔다. 흐트러진 그녀의 옷매무새를 고쳐준 뒤 이불을 덮어주고는 아직 다 식지 않은 몸의 열기를 애써 내리 눌렀다. 눈앞의 그녀가 여전히 달뜬 숨을 내뱉을 때마다 아래쪽이 욱씬하게 아팠지만, 그는 정말 자신의 모든 인내심을 끌어 모아 참아냈다.

어쨌든 그는 그녀가 했던 말의 앞뒤 사정을 알고 싶었다. '왜 날 죽였냐'는 말은 곧, 그녀는 이미 죽었었다는 말이다. 그럼 지금 자신의 앞에서 이토록 펄떡펄떡 뛰는 심장을 지닌 채 존재하는 인간은 누구란 말인가. 미약 덕분에 접신이라도 했다는 말인가. 루크는 해명을 원하는 눈으로 그녀를 집요하게 쳐다보았다.

============================ 작품 후기 ============================

제가 조금 늦었죠? 한번 더 글을 손보느라고....(분까지 재가며 기다리고 계실줄은 몰랐....;;;)

어쨌든 진카 첫 15금씬. 하아... 노블의 욕구가 있찌만, 이 글을 제 친구가 보고 있기 때문에 차마 흑역사를 만들지 못하고 있다는....

+ 그녀의밤 님, 엘린s00 님. 후원쿠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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