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1 심연(5) =========================
카시야는 당황했다. 설마 그런 말까지 지껄였을 줄이야. 미약 때문에 헷갈렸던 게 분명하다.
전생에서 그녀는 세이지의 침대를 몇 번 데웠던 적이 있었다. 그는 그녀의 주인이었으니, 그의 명령이라면 따라야 했으니까. 왜 예쁘고 흉터 따위 하나 없는 여자들을 부를 능력도 되는 그가 자신을 불러다 동침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는 굳이 묻지 않았다. 가끔 별미로 전투식량을 먹는다는 사람들도 있으니, 그것과 비슷한 심리겠거니 하고 말았다. 주인의 행동에 이유를 따지지 않고 움직이는 것이 도구 아니던가.
하지만 자신을 안던 세이지는 정말 이해되지 않는 행동을 하곤 했다. 분명 동침 명령을 내린 것은 그이고, 그 명령에 따라 군인이면서도 창녀 취급을 받는 것은 자신인데, 자신을 원하는 대로 안으면서도 그의 눈동자는 비참함이 가득했다.
가끔 감정을 이기지 못한 그가 폭력을 행사할 때도 있었다. 자신은 '임무'가 끝났으니 일어나 돌아가려던 것뿐인데 방금까지 자신을 안고 파정했던 그가 갑자기 머리채를 잡고 바닥에 내동댕이치며 발로 차고 뺨을 때렸다. 그때는 그저 간밤의 잠자리가 별로 만족스럽지 못해 그러는가 했다. 하지만 성관계에 대해 좋은 기분이라곤 느껴본 적도 없고, 뭘 제대로 배운 적도 없는 자신은 나무토막처럼 누워있거나 그가 명령하는 대로 할 일을 할 뿐, 그 이상으로 그를 기쁘게 해 줄 방법 따위는 알지 못했다. 적극적으로 그를 기쁘게 해주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창녀 취급을 당한다고 해서 진짜 창녀인 것은 아니었으니까.
뭐, 종 된 입장으로서야 그런 불만을 입 밖으로 낼 수 없었지만, 이 쪽 역시 기분 좋았던 건 아니었는데 그렇게나 화를 낼 이유가 있었을까 싶었다. 여하튼 그의 기분은 늘 종잡을 수가 없었다. 아마 캠프 X 출신들이 다 그렇듯 그 역시 감정 어딘가가 망가져서 그랬겠지, 하고 넘겼을 뿐이다.
다만, 자신은 맷집이 있으니 그 정도 맞고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것이지, 다른 연약한 여자들까지 이렇게 때린다면 좀 문제가 되지 않을까 싶어 저답지 않게 한 마디 했던 적은 있었다.
"다른 여자를 안으실 때는 이렇게 때리시면 안 됩니다. 저야 괜찮지만, 훈련받지 않은 여자들은 버티지 못할 겁니다. 괜한 문제를 일으켜 좋을 것은 없지 않습니까."
그때 세이지가 어떤 표정을 지었더라.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아마 황당해 했을 것이다. 그 말을 했을 때 자신의 얼굴은 여기 저기 멍들고 코피를 흘리고 있었으니까. 그런 주제에 남 걱정이라니, 우스울만도 했지.
"건방진 소리 하지 말고 솔직히 말해. 널 이렇게 때리지 말아달라고. 하고 싶은 말은 사실 그거 아냐?"
"저는 괜찮습니다. 당신이 만족하신다면야."
"…그래? 내가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할 수 있겠어? 내 만족을 위해서라면?"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명령을 내리시면, 저는 그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다는 걸. 당신이 저에게 죽으라고 명령을 내리시면 저는 죽는 시늉이 아니라, 죽을 겁니다."
인정한다. 그 대답에 조금 불만이 섞여 있었음을. 그래서 자신도 다시 구타당할 줄 알았다. 그런데 그는 의외로 어금니만 꾹 다물며 한참 노려보더니 휑하니 침실 바깥으로 나가버렸었다.
그때, 묻고 싶었다. 왜 날 그렇게 미워하느냐고. 그리고 날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하는 주제에 도대체 왜 그런 얼굴을 하느냐고.
"이봐. 이 상황에서 딴생각 중이야?"
루크의 부름에 카시야는 회상에서 깨어났다. 여전히 그의 눈은 그녀에게 대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꿈이라고 생각하고 제멋대로 나불거린 것 같은데, 이 상황을 어떻게 모면해야 할지 난감했다. 어떻게든 이야기를 꾸며내야 했다.
맞은편에 앉은 루크는 머리를 짜내고 있는 게 분명해 보이는 카시야의 잘게 흔들리는 눈동자를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집요하게 관찰했다. 그녀는 분명 무언가를 알고 있다. 자신의 감이, 그녀와 자신은 분명 어떤 인연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자신은 전혀 기억에 없다. 한 가지 더 신경 쓰이는 부분은 '왜 죽였냐.'는 물음이었다. 이 여자는 지금 멀쩡히 살아있으니 헛소리였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말을 들었던 순간에 느껴졌던 전율이 잊히지가 않았다.
"그는…."
마침내 카시야가 입을 열었다.
"예전에 절 살해하려다가 결과적으로 미수에 그친 자였습니다. 기묘하게도 페레이아 경과 꽤나 닮았어요. 머리카락이나 눈동자 색이 달라서 그일 리가 없는데, 그에게 죽을 뻔했던 기억이 워낙에 강렬해서 그러는지 몰라도 자꾸 제가 경을 그 사람이라고 착각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당신과 관계없는 사람이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더 자세하게 말해봐. 그 놈이랑 친했나? 이름만 부를 정도면 친한 사이였겠지?"
"더는 당신이 알 필요도 없는 일이고, 저도 말해줄 생각이 없습니다."
마음을 단단히 먹은 듯 그녀의 말에는 의지가 서려있었다. 루크는 찜찜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더 물어 볼 수 없었다. 묻는다고 해서 대답이 나올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그런 그에게 카시야가 딱 한 마디를 더했다.
"당신이 그보다는 훨씬 나은 사람입니다."
카시야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세이지와 닮았고 언뜻 비슷한 분위기를 풍길 때도 있었지만, 어떻게 생각해도 그는 세이지와는 다른 사람이다. 훨씬, 더 나은 사람.
"…내가 적장인데도?"
"네."
그 말에 루크는 자신이 어린애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기분이 좋아졌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잠시 후, 아침이 되었는데도 막사에서 나오지 않는 루크를 데리러 알도가 왔다. 그는 바깥에서 한참 목을 가다듬으며 헛기침을 해대었다. 막사의 출입구를 돌아보는 루크의 눈이 매섭게 가늘어졌다.
알도는 그날, 루크의 심기를 크게 어지럽힌 죄로 오랜만에 연무장 바닥을 한도 끝도 없이 굴러야 했다.
*
한편 타셀군에서는 그동안 에르논이 곧 죽을 것 같다는 소문을 돌게 하려고 애썼다. 일부러 피칠갑 분장을 한 에르논을 실은 수레를 병사들이 보는 앞으로 끌고 지나가기도 했고, 분대장이나 연대장들을 중심으로 "그 대단하다는 대마법사도 조만간 죽을 것 같다."는 말을 흘리도록 했다. 부대 내에 첩자가 있는 것이 분명한지, 상대 쪽에서는 부리나케 포로 교환 협상을 타진해왔더랬다. 타셀은 부글부글 속이 끓으면서도 침착하게 그들의 제안을 쳐냈다. 감히 이쪽으로 넘어와 납치를 해간 것도 주제를 모르는 짓이었으며 얌전히 포로를 넘기지 않으면 쑥대밭으로 만들겠다고 협박하는 척했다. 그러자 그쪽은 마음이 급해졌는지 끈질기게 에르논의 임종이라도 고향에서 할 수 있게 해달라고 몇 번이고 졸랐다. 결국 타셀은 마지못해 수락하는 척했다.
"어떻게 죽여야 이 원한이 풀릴까요?"
소등하고 깜깜해진 막사 안에서 에르논이 타셀에게 물었다. 대답을 바라고 한 질문인지, 스스로 고민하느라 입 밖으로 새어나온 질문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정확히 뭐에 대한 원한인데?"
"잘 아시지 않습니까."
"글쎄. 요즘 보면 공작에게 잡혀 살았던 세월보다 카시야가 납치당한 걸 더 화내는 것 같아서."
"그건 전하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만."
"…그 납치가 그동안 쌓여왔던 분노를 폭발시켰다는 게 맞는 말이겠지."
타셀의 대답에 에르논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제 어미가 죽었어도 침착했다던 인간이 겨우 이 정도에? 까놓고 말해, 아나클리프 영애가 납치를 당한 쪽이었더라도 그토록 분노했을까?
그러다 문득 에르논은 깨달았다. 아무리 둔한 작자라 해도 갑자기 눈이 뒤집히고 속에서 불길이 치솟는다면 그 이유를 모를 리 없다. 자신도 그렇지 않았던가. 카시야가 부상을 입은 채 납치를 당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녀의 얼굴 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그녀를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미쳐버릴 것 같았다. 대마법사의 칭호가 다 무어냐, 가장 아끼는 한 사람마저도 지키지 못한 인간에게….
자신이 그랬으니 타셀은 어땠을까. 평소에 감정 기복이 심했던 자신조차 자신이 느끼는 분노가 그녀를 향한 마음 때문임을 알았는데 과연 타셀이 몰랐을까? 심지어 미하일까지 타셀의 마음을 눈치 챈 것 같았을 정도이니 말이다. 그러니, 이 똑똑하다는 황자가 제 마음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은 그가 둔해서가 아니다. 그 마음을 인정하면 안 되는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에르논은 그에게 동정심을 느꼈다.
"케네스 알리스타스 그 작자는… 절대로 한 번에 죽이지 마.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 끔찍한 고통을 느껴야 해."
타셀의 낮은 음성에 에르논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당연하죠. 한 번에 죽인다는 건 선택지에 없었습니다. 제가 왜 그런 자비를 베풀어줘야 합니까?"
"케일런과 그 비는 되도록 관대하게 죽여주길 바란다. 그들은 어쩌면 황제에 의한 피해자라고 볼 수도 있으니까."
"피해자요? 피해자의 뜻은 알고 계십니까?"
꽤나 건방진 말투였는데도 타셀은 픽 웃고 말았다. 왠지 처음으로 에르논과 자신의 의견이 아주 일치하는 것 같았다.
"막상 돌아갈 때가 다가오니, 기분이 조금 이상합니다.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구속을 벗고 복수를 할 수 있게 돼서 기쁘기도 하지만, 제 인생의 한 막이 내리는 것 같아 싱숭생숭하기도 합니다."
"막을 내리는 것보다 새로운 막을 올릴 것을 생각하게. 그동안이 자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휘둘렸던 암울한 시대였다면, 앞으로는 자네의 진정한 가치를 알아가는 시대가 될 거야. 그러니 공작성에서 너무 힘을 빼지는 마. 우리가 도착할 때까지 버텨야하네. 보름이 되면 전방위적으로 군사를 남하시키면서 공작성 쪽으로는 따로 사람을 보내 놓겠지만, 그들이 도착할 때까지 자네가 살아남아야 해."
"풉. 걱정 마십시오. 이 속박만 벗으면 그 정도는 일도 아니니까. 우선 알리스타스 공작가 인간들을 하나씩 저며 놓은 다음에 성을 무너트리면서 1황자와 측근들을 다 매장시켜 놓죠. 일이 끝나면 근처 숲으로 공간 이동을 해서 쉬고 있겠습니다."
"뭐? 공간 이동이 가능한가?"
"아…. 말씀드리는 게 좀 늦었군요. 예, 가능합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공작의 속박이 더해질까봐 못 하는 척 하고 있었습니다."
"…카시야도, 알고 있었나?"
"예? 아…. 그게…."
"알고 있었군."
에르논은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 역시 카시야가 진짜로 타셀에게까지 말하지 않았을 줄은 몰랐다.
에르논의 얼굴을 마주보고 있지 않아서인지, 어두운 밤이어서인지, 타셀은 충동적으로 물었다.
"둘이 무슨 사이야?"
막상 입 밖으로 내고 보니 너무 유치한 질문 같아 타셀은 후회했다. 자신의 말에 질투 같은 감정이 뒤섞여있지 않았었기만을 바랐다.
"무슨 사이라고 할 만 한 건 없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짝사랑인가?"
그 말에 타셀의 가슴 안쪽이 왠지 답답해졌다. 대마법사의 입에서 '짝사랑' 같은 간질거리는 단어가 튀어나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의외로 감정에 솔직하군 그래."
"별로 그러질 못했습니다. 좋아한다는 걸 깨달으니까, 눈도 못 마주치겠더군요. 우습지 않습니까? 대마법사라는 작자가 말이죠."
타셀이 쿡쿡 웃었다. 하지만 웃음이 지나간 자리에는 자기 자신을 향한 쓰디쓴 비소만이 남았다.
그는 에르논이 부러웠다. 이렇게 자신의 감정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있다는 게,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인정할 수 있다는 게 부러웠다. 자신은 아마도 눈 감을 때까지 자신의 마음을 죽이면서 살아야 하리라. 그러니까, 그 죽이면서 살아야 할 마음을 굳이 꺼내 확인해보지 않기로 했다. 알아버리면 더 힘들 것 같았으니까.
*
에르논이 매일 알리스타스 공작가 사람들을 어떻게 죽여야 속이 시원할지 즐거운 고민을 하는 동안 케네스는 포로 교환을 위한 날짜와 장소가 적힌 타셀의 친서를 받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황제 쪽으로부터는 하루가 멀다 하고 독촉이 오고 있었다. 슬슬 황제가 의심을 하는 것 같았는데 드디어 시원스런 확답을 내줄 수가 있게 되었다.
"열흘 뒤에 보낼 테니 데리러 오시오. 그리고 미리 우리 쪽에 추가 군사를 보내고, 에르논을 데리러 올 때에는 전에 말했던 밀약서와 보석 한 관을 꼭 갖고 오시오."
"이번엔 확실하신 겁니까?"
"우스운 걱정을 하는군. 내가 에르논을 건네주지 않으면 그 쪽도 나에게 약속했던 것들을 주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니오? 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거요."
"알겠습니다. 그리 전하겠습니다."
밀사는 그린 듯 단정한 미소를 띤 채 조용히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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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연참입니다. 80회 맞이(?) 외전을 올려봐요. 다음편도 있으니 확인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