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홍의 카르마-82화 (82/134)

00082 [외전] 헬라스 =========================

황제의 침실에는 이국적인 향이 감돌고 있었다. 어느새 배가 많이 부른 멜라니아는 황제의 침대에 편안히 기대 앉아있었고 황제는 그녀의 배를 쓰다듬으며 입을 맞추었다.

"알리스타스 공작이 에르논을 보내겠다고 확답을 주었다죠? 이번엔 확실히 성공할 수 있을까요?"

자신의 배에 입을 맞추는 황제의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어 만지작거리며 멜라니아가 걱정된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확실해. 이제까지 실험체가 잘못 되었던 거다. 이런 것까지 내가 다 알아내줘야 한다는 게 짜증스럽긴 하지만, 어쩌겠느냐. 어리석은 것들을 깨우치는 것도 황제의 소임이 아니더냐."

"실험체의 문제인 것이 분명한가요? 폐하께서 모르실 리 없으시겠지만, 어리석은 저는 걱정이 되어…."

"오, 걱정마라, 사랑스러운 멜라니아. 이번에는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나는 다시 카라볼그를 들 것이고, 우리의 아이들에게 온전한 이 제국을 물려줄 거야. 허허허."

알테리온은 마치 다정한 노인처럼 부드러운 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그의 눈빛에 광기가 번뜩인 것은 바로 그 다음 순간이었다.

"그나저나 헬라스에게는 여러모로 신세를 지는군. 그 놈이 이런 방법을 연구해 놓은 것이니 말이야. 정말 아까운 인재였지"

"그러게 말예요. 고분고분 황명을 받들었다면 제일 위대한 대마법사로 남을 수 있었을 텐데, 어리석게도…."

"뭐, 되었다. 제가 제 복을 차버린 것을 어쩌누. 얻을 것은 다 얻었으니까 내가 아쉬울 것은 없지."

알테리온은 어리석었던 대마법사 헬라스를 비웃으며 멜라니아에게 이불을 꼼꼼히 잘 덮어주고는 그녀를 다정히 안았다.

하지만 황제는 헬라스에 대해 많은 부분을 모르고 있었다.

헬라스는 까만 고수머리에 깡마른 남자였다. 추남까지는 아니었지만 인사치레로도 잘 생겼다고는 하지 못할 외양에 책을 읽고 연구를 하는 것 이외에는 별 관심이 없어, 꽤나 세력가인 리치엘 백작가의 차남이면서도 파티에 얼굴을 드러낸 적은 거의 없었다. 영애들이 음침한 그를 피해 다녔기 때문이라는 소문도 있고, 파티 자리에서 사람들이 광대 취급을 하는 통에 그가 다시는 나가지 않았다는 소문도 있고, 리치엘 백작이 내성적인 차남을 부끄러워하여 밖으로 나돌지 못하게 막았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그 따위는 사실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그가 파티에 나오고 말고는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그가 대마법사라는 게 중요했을 뿐이다.

헬라스는 리치엘 백작가의 중요한 재산이었다. 그의 외양이 대단치 않은 것과는 별개로 그 보라색 눈동자만큼은 언제나 화제가 되고는 했다. 리치엘 백작가는 그들이 아주 희귀한 보석을 갖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헬라스가 마력과 마나 연구에 독보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자 그들의 탐욕 역시 드러나기 시작했다.

리치엘 백작은 장사에 꽤나 소질이 있는 자였다. 대단치 않은 핏줄의 가문이 꽤나 이름을 날리게 된 것도 다 그의 뛰어난 장사 수완으로 벌어들인 막대한 부가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리치엘 백작이었으니 차남의 능력이 보통 귀한 것이 아님은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문제는 이 차남이 그다지 세속적인 욕심이 없다는 데 있었다.

그는 그야말로 순수한 학문의 탐구에만 주력했다. 즉, 돈이 될 만한 연구를 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마나와 마력은 무엇인가.' 따위는 리치엘 백작이 궁금한 게 아니었다. 그것이 돈이 될 만한 무언가가 되지 않는 이상 말이다.

물론 가끔 누군가의 부탁에 의해 술식을 개발해주기는 했다. 예를 들어 알리스타스 공작이 자신의 사나운 노예들을 속박하는 데 필요하다며 꽤나 거친 술식의 개발을 주문하기도 했었다. 마침 리치엘 저택에서 잠시 머무르고 있던 대마법사 카르가스가 말렸지만, 헬라스는 그런 것 정도는 취미 삼아 만들어주었다. 그 술식의 악마적인 면보다는 세계 최초로 속박과 처벌이 동시에 가능한 마법을 개발한다는 것에 더 가치를 두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알리스타스 공작은 꽤나 후하게 값을 치러 주었고, 그것을 본 리치엘 백작은 차남을 더욱 더 구슬렸다.

하지만 헬라스의 고집 역시 만만치 않았다. 대마법사들은 날 때부터 비상한 머리를 타고 난다. 그 역시 너무나 똑똑했기 때문에 대마법사라는 자신의 지위가 어느 정도의 위치인지는 어릴 때부터 파악하고 있었다. 가주마저도 자신에게 함부로 하지 못할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래서였다. 리치엘의 가주가 좀도둑처럼 그의 연구 일지를 뒤진 것은.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득이 될 만한 것을 내놓지 않는 아들을 차마 어쩌지도 못하고 답답한 가슴만 두드려대던 리치엘 백작은 어느 날 거리의 소매치기를 보고 묘안을 떠올렸다.

'그 녀석의 연구일지를 뒤져보자! 분명 뭔가가 나올 거야.'

그리고 그는 헬라스가 서른 번째 생일을 맞아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한 달 간의 연구 여행'을 고심 끝에 허락하는 척하며, 기뻐하는 그에게 좋은 마차, 넉넉한 돈 주머니, 호위 기사와 시녀까지 딸려 보내고는 그의 식구 전체가 달려들어 헬라스의 연구일지를 뒤졌다.

한 달 간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헬라스는 너무 즐거웠다며 제 아비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동안 백작이 원하는 것은 하나도 해준 게 없는데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여행에 넉넉한 돈까지 내어준 것이 내심 미안하기도 했다. 그래서 조만간 뭔가 돈이 될 만한 연구를 해야겠다고 다짐한 상태이기도 했다. 황제에게서 온 친서를 받아들기 전까지만 해도, 그는 진심으로 제 아비를 위해 뭔가를 하려 했었다.

「친애하는 대마법사 헬라스.

그대의 제안은 굉장히 흥미롭게 받아 보았소. 그대의 충심이 우리 칼리스토니아 제국의 부흥에 크게 이바지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바이오. 황실은 그대의 연구에 적극 지원할 것인 바, 원하는 바를 알려주기 바라오.

- 알테리온 타노스 에반 아마리스」

자신은 보낸 적이 없는데 황제는 자신의 제안을 받았다고 하니, 그가 얼마나 당황했을지 보지 않아도 빤하다. 그가 제 아비에게 달려가 자초지종을 설명받길 원하자 백작은 활짝 웃으며 <반 가사 상태 인간의 마력을 통한 행동 조작 연구>라는 제목이 붙은 연구 일지를 꺼내들었다.

"헬라스! 나는 네가 분명 큰일을 해낼 거라 믿고 있었다! 황제께서 굉장히 흥미를 보이셨어. 자랑스럽다, 아들아!"

황당해하는 그를 향해 리치엘 백작은 그때까지 단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환한 미소와 단 한 번도 해준 적 없는 뜨거운 포옹을 제 둘째 아들에게 아낌없이 퍼부었다. 그 연구일지의 사본을 넘겨주는 대가로 어마어마한 황금을 얻어냈으니, 그의 아들이 얼마나 사랑스러웠겠는가.

"그… 그 연구가… 무엇인줄 아시고요!"

헬라스가 외쳤지만 리치엘 백작은 잔머리가 아주 잘 돌아가는 인간이었다. 황제 역시 그랬고 말이다.

"여러 방면으로 사용할 수 있겠지만 가장 좋은 것은 두려움을 모르는 군대를 양성하는 것 아니겠느냐?"

헬라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동화 속의 꼭두각시를 마법으로도 만들어낼 수 있을지 궁금해서 연구해봤던 것이었는데 그것이 살상 병기를 만들어낼 방법이 되어버리다니.

고민하던 그는 일부러 지원내용을 과도하게 부풀려 황제에게 답신을 보냈다. 황제가 도저히 거기까지 해 줄 수는 없다며 두 손 들길 바랐다. 하지만 황제에게서 돌아온 답신은 정확히 그가 필요한 만큼인 2/3까지의 지원을 약속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마치 그가 빠져나가려고 했던 노력을 비웃는 것 같았다.

헬라스는 진리의 탐구를 위해 마나와 마력, 정신계열 마법의 연구를 한 것이고, 거기에 따른 부수적인 연구 역시 호기심의 충족 이상으로 바란 것이 없었다. 하지만 황제와 아비의 욕심에 맞닥뜨려보니, 자신이 이제까지 해왔던 연구가 지나치게 위험하다는 것을 깨닫고 말았다. 과거 카르가스가 그의 연구를 말렸던 이유를 그는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차마 자신의 피와 땀이 어려 있는 연구 결과들을 불사를 수는 없었다. 그리고 거기서 자신이 도망쳐버릴 경우, 대단한 사랑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가족들이 황제를 능멸한 죄로 큰 벌을 받을 것이란 것도 그의 발목을 잡았다. 그래서 그는 울며 겨자 먹기로 신이 허락하지 않을 실험을 진행하게 되었다.

'죽음의 기사'.

헬라스는 자신이 이것을 만들어냄으로써 지옥에 떨어질 것임을 알고 있었다. 멀쩡한 사람들을 몇 푼의 돈으로 유혹해 죽지도, 살지도 못한 상태로 만들어내는 작업이 즐거웠을 리 없다. 그는 매일 울었다. 죄 없는 사람들에게 미안해서, 역겨운 자신이 괴로워서 매일을 울었다. 하지만 황제와 백작의 독촉에 결국 의지도, 생명도 없는 군사가 탄생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는 무서운 사실에 또 맞닥뜨려야 했다.

'이건, 존재해서는 안 되는 군사다!'

두려움을 모르는 강력한 기사는 실로 무시무시했다. 의지를 잃을 수준으로 마나를 빼낸 뒤, 그 빈 공간에 자기 자신에게서 추출한 마력의 씨앗을 심은 기사들은 헬라스가 외우는 주문에 따라 아무런 머뭇거림 없이 돌격했다. 마력의 씨앗은 의지를 잃은 인간의 몸에서도 무럭무럭 자라나 준마법사 정도의 힘을 뿜어냈다. 이 군사가 그대로 황제의 손에 들어간다면, 제국은 물론 이 세계가 위험해질 것임을 헬라스는 직감했다.

그때부터 그는 기사들에게 심은 마력의 씨앗을 약화시키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들의 힘 자체를 일반 병사들보다 약해지게 하면, 황제의 명을 거부하지 않으면서도 최악의 상황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상황은 헬라스를 파국으로만 몰고 갔다.

뻐기기 좋아하는 그의 여동생이 황실의 파티에서 '오라버니가 이미 죽음의 기사를 완성했다.'고 말해버린 것이었다. 물론 그 사실은 황제의 독촉장을 받고 나서야 알았지만 말이다.

빨리 죽음의 기사를 내놓지 않으면 반역으로 간주하겠다는 반협박에 헬라스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마력의 씨앗을 약화시키려면 아직 시간이 많이 필요한데, 이대로 황제에게 넘기는 것은 너무나 위험하다. 그는 결국, 가문의 이익과 황제의 욕망을 채우는 대신 자신이 만들어낸 추악한 결과물과 함께 자신이 저지른 짓을 덮어버리기로 마음먹었다.

황제가 제시한 기한을 넘겨서까지도 죽음의 기사를 넘기지 않자 황제는 그를 반역자로 규정하고 그를 토벌할 제국군을 파견했다. 헬라스를 어르고 달래다 지친 리치엘 백작가의 가솔들은 이미 귀중품과 돈을 갖고 내뺀 상태였다. 제국군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는 자신의 연구실이자 서재이자 리치엘 백작가의 도서관인 그 자리에 앉아 빽빽이 들어찬 자신의 저서들을 둘러보았다. 어린 시절부터 단지 '알아간다'는 즐거움에 빠져 미친 듯이 연구했던 많은 것들. 그는 자신이 이 세상에서 사라진대도 자신의 열정만은 남아있어주기를 바랐다. 어차피 가장 위험한 연구의 저서들에는 조금씩 손을 써둔 상태였다.

죽음의 기사가 제국군을 맞이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동시에 그는 미리 바닥에 그려둔 마법진 위에 올라섰다. 그리고, 자신을 산화시키는 마법의 주문을 외웠다. 자신의 정신과 영혼이 자신이 가장 좋아했던 이곳의 구석구석에 스며들기를 바라며, 그렇게 공기 중에 서서히 산화되어 갔다. 그리고 명령을 내릴 주인을 잃은 죽음의 기사들은 제국군에 제대로 칼 한 번 휘두르지 못한 채 완파되었다. 물론, 황제는 그가 완파시킨 죽음의 기사가 사실은 얼마나 가공할만한 위력을 가진 군대인지를 전혀 몰랐다. 쓸데없는 곳에 돈을 쏟아 부었다는 실망감과 분노, 모두가 비난하는 죽음의 기사에 대한 책임을 헬라스에게만 뒤집어씌울 수 있어 다행이라는 안도감만이 그가 느낀 전부였다.

"그 망할 녀석이 마력 추출 부분은 첫 페이지만 빼놓고는 다 삭제해버렸지 뭐냐. 다행이 제롬이 삭제된 부분을 복구하는 데 성공해서 망정이지, 큰일 날 뻔했다니까."

알테리온은 킬킬대며 말했다.

"마력 추출이 계속 실패해서 그 복원이 잘못된 것인가 했는데, 문득 내가 생각해낸 것이다. 애초에 그 마력 추출은 헬라스 본인을 대상으로 했던 것임을 말이야. 그렇다면 실험체가 대마법사여야 한다는 게 아니겠느냐."

"폐하께서는 실로 영명하십니다."

"큭큭큭. 제롬 그녀석이 나에게 고마워해야 할 부분이지. 명색이 황궁 제 1 마법사라는 놈이 멍청하기 짝이 없어."

알테리온은 멜라니아의 달콤한 아부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며 으스댔다.

그는 과거의 영광을 떠올렸다. 푸른빛을 흘리며 신의 권능을 빌려주던 카라볼그, 자신의 아래 무릎 꿇은 적들, 개선식에서 드높던 찬양의 목소리…. 늘 잊지 못하던 그것들이 곧 다시 재현될 거라는 생각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설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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