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3 분몌(1) =========================
포로를 교환하는 날이 밝았다. 양 진영은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르는 무력 충돌을 대비해 아침 일찍부터 군사들을 도열시키고 초조하게 약속 시간을 기다렸다.
포로 교환 장소에 나가기 전, 타셀이 에르논의 목에 걸려있던 마력 구속구를 풀어주었다. 그는 그동안 억눌려있던 마력이 갑자기 증폭되는 것을 느끼며 잠깐 휘청거렸다. 그의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더 진한 보랏빛을 띠었지만 그는 그것을 숨기기 위해 눈동자 색깔을 조금 옅은 보라색으로 바꾸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무엇보다 그대의 무사 귀환이 가장 중요하네."
에르논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 전쟁이 끝나고 나면 그때는 활짝 웃는 카시야를 볼 수 있을 테니, 그때까지는 멀쩡히 살아있고 싶었다.
대마법사가 거의 죽어간다는 소문에 맞추기 위해 그는 작은 수레에 몸을 구겨 넣은 채 옮겨질 예정이었다.
'한 마디라도 나눌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건 무리겠지?'
수레에 실어진 채로는 카시야와 눈조차 마주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그게 제일 아쉬웠다.
해가 정확히 하늘의 한가운데 걸린 시각, 양 진영의 안쪽에서부터 대표자와 함께 포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수레에 누워있던 에르논은 고개를 살짝 들어 빠르게 상대편을 훑었다. 비틀거리는 몇 명의 포로 뒤에 카시야가 서 있는 게 보였다. 걱정하던 것보다는 괜찮았지만 역시나 안색은 별로 좋지 않았다.
곧이어 양 진영에서 히드레이 교 사제가 한 명씩 걸어 나와 양쪽 군대가 비워둔 벌판 한가운데에 섰다. 그들은 서로 허리를 숙이며 히드레이 교 사제들만의 인사를 나누고는 적당한 간격으로 물러나 큰 소리로 포로 교환의 시작을 알렸다.
수레가 덜컹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하자 에르논은 힘없는 척 수레에 가만히 누웠다. 하늘이 참 파랬다. 그는 속으로만 카시야를 향해 작별 인사를 했다. 어차피 곧 만날 수 있겠지만, 다친 그녀에게 괜찮냐고 말 한 마디 건넬 수 없는 처지라는 게 조금 괴로웠다.
그런데 수레 끄트머리 쪽에 히드레이 교 사제의 머리통이 조금씩 보이던 순간, 갑자기 수레 위로 카시야의 얼굴이 드리웠다. 돌발적으로 수레를 향해 뛰어든 그녀는 에르논의 멱살을 잡더니 귓가에 뭐라고 속삭이다가 히드레이 교 사제에 의해 몸이 떨어져나갔다.
"뒈져버려! 네 놈 때문에 내가 왜!"
카시야는 마치 대마법사 때문에 고생한 게 억울한 듯 욕설을 내뱉었다. 그 모습을 보던 양쪽 진영의 병사들이 잠시 검을 뽑아드는 것 같았지만 히드레이 교 사제의 엄숙한 중재로 인해 상황은 빠르게 마무리되고 에르논은 케일런군 쪽으로, 카시야는 타셀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양 진영은 모두 포로의 돌발 행동에 당황했지만 아무 일 없이 종료된 상황에 가슴을 쓸어내렸고, 에르논은 미칠 듯이 뛰는 가슴 때문에 표정을 갈무리하느라 애쓰고 있었다.
'구하러 갈 테니까, 절대 죽지 마!'
철옹성이라 불리는 공작성을 깨부술 작정으로 떠나는 대마법사에게 아직 검기가 제대로 여물지도 못한 일개 기사가 속삭였다. 그 말이 우스우면서도, 숨을 쉬지 못할 만큼 가슴을 벅차게 만들었다.
포로 교환식은 무사히 끝났다. 양쪽 군대는 서서히 물러서며 끝까지 경계를 늦추지 않았지만 험악한 분위기는 조성되지 않았다. 포로들을 위해 마련된 수레를 타고 병영으로 돌아온 카시야를, 하도 울어서 눈가가 빨개진 알리시아가 발을 동동 구르며 맞이했다. 카시야 이외의 포로들 역시 오랜 노역으로 몸이 약해진 상태라 곧바로 간호 막사로 실려 갔지만, 카시야는 알리시아와 함께 머무르는 막사에서 그녀의 정성 가득한 간호를 받게 되었다.
"카시야 경, 미안해요…. 저는, 저는…. 저 때문에…."
카시야의 등에 난 상처를 살피며 다시 조심스레 소독을 해주던 알리시아는, 결국 또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자신으로서는 상상조차 하지 못할 부상을 입고도 아프다는 말 한 마디 하지 않는 카시야를 보며 그녀는 또다시 죄책감에 시달렸다.
"아나클리프 영애…. 저는 괜찮습니다. 이건 당신 때문에 일어난 일도 아니고요. 만약 그 때 당신이 납치를 당했더라면, 저는 지금보다 훨씬 더 괴로웠을 겁니다. 호위 기사는 지키는 대상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니까요. 제가 제 존재 이유를 잃지 않게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러니, 울지 마세요."
카시야는 미소까지 띠어가며 알리시아를 달랬지만 그녀의 말은 오히려 알리시아를 더 울리고 말았다. 할 수 없이 카시야는 제 침상 곁에 엎드려 우는 알리시아의 머리를 가만 가만 쓰다듬으며 그녀가 스스로 추스를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녀가 너무 오랫동안 울고 있으면 어쩌나 걱정됐는데 다행이 알리시아는 억지로 눈물을 꾹 참으며 눈가를 닦았다.
"영애…. 바깥에 전하께서 와 계신 듯합니다. 죄송하지만 처치를 마저 해주시겠습니까?"
카시야가 부드럽게 부탁했다. 알리시아는 그걸 어떻게 아느냐는 눈을 했지만 카시야는 그저 미소를 띨 뿐이었다. 알리시아가 부지런히 움직여 소독과 치료를 끝내고 꼼꼼하게 붕대를 감아주었다. 카시야는 눈썹 한 번 찡그리지 않고 기다리다가 치료가 끝나자 벗어두었던 셔츠를 입고 단추를 잠갔다. 때를 맞춰 바깥에서 병사가 타셀의 방문을 알렸다.
막사를 방문한 것은 타셀과 미하일이었다. 미하일은 왠지 타셀의 눈치를 살피는 것 같았고, 타셀은 기억보다 훨씬 수척한 얼굴이었다. 수척해진 얼굴보다 낯선 것은 그의 눈빛이었다. 청회색의 눈동자가 카시야의 얼굴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고생 많았네."
그는 한참을 말을 고르고 있더니 겨우 그 한 마디를 던져놓고는 다시 하염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닙니다. 에르논과 교환될 포로라 그랬는지 꽤나 좋은 막사에서 편하게 쉬다 왔습니다.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죄송하긴. 무사해줘서 고맙네."
"추후 작전은 어떻게 됩니까? 에르논을 그냥 보내신 건 아니실 테고요."
"…이번 달 보름에, 우리가 밀고 내려가는 것과 맞춰 에르논은 공작성을 파괴하기로 했네. 아귀만 잘 맞으면, 순식간에 쓸어버릴 수 있어."
"보름이면,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았군요."
"자네는 이번 일에서 빠지게. 부상을 완치하는 게 더 중요해."
"예? 하, 하지만…!"
"이건 명령이야. …사실은 부탁이지만, 자네는 명령이라고 해야 내 말을 들을 테니까."
카시야는 말문이 막혔다. 그의 두 눈이 너무나 괴로워 보여 차마 항명하겠다고 할 수가 없었다.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는 카시야를 뒤로 하고, 타셀은 잘 쉬라는 말만 남긴 채 나가버렸다.
*
귀환한 에르논 역시 조심스러운 대접을 받았다.
"다친 곳을 봐야 하니, 옷을 벗어주시면…."
치료사의 걱정 가득한 목소리에 에르논은 무심한 눈으로 그를 한 번 쳐다봤을 뿐이었다.
"겉으로 드러나게 다친 곳은 없다. 2황자에 의해 마력을 구속당했던 데다가 내상을 크게 입어 아직 마법을 제대로 쓸 수 없을 뿐이야."
“예? 저, 저기, 소문으로는, 피투성이가 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아아, 몇 번 피를 토했었거든. 그땐 진짜 죽는 줄 알았는데…. 운이 좋았지.”
"그 정도로 안 좋으셨다니! 곧바로 내상에 좋은 약을 달이도록 하겠습니다."
“괜찮아. 지금은 마나와 마력으로 내상을 돌보고 있다. 타셀 놈은 내 마력이 더 이상 안 생길 줄 알았던 것 같지만, 내가 누구냐. 대마법사가 겨우 그 정도에 마력을 다 잃었겠느냐.”
“아…. 다, 다행이십니다!”
“알아들었으면 이제 귀찮게 하지 말고 나가거라. 더 이상 네 말에 답해줄 기력도 없으니.”
치료사는 할 일이 없어져버린 상황이 조금 민망한 듯 했지만, 그의 보고를 받은 케네스는 겉으로 보기에 다친 곳이 없다는 에르논의 상태에 크게 만족했다. 그로서는 에르논의 속이 어떻게 망가졌든 간에 황제에게 넘길 때 멀쩡해 보이기만 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2황자가 대마법사라고 대접을 해준 모양이군.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으하하하하!"
치료사의 보고를 들으며 케네스는 신이 나서 웃었지만 곁에서 듣고 있던 루크의 표정은 심각했다. 카시야가 멀어지는 꼴을 보기 싫어 포로 교환식에 참석하지 않았던 루크는, 초죽음 상태라던 에르논이 소문과는 달리 지나치게 멀쩡한 상태로 돌아온 것을 보고 꺼림칙한 기분을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왜 케네스가 의심을 하지 않는지 어처구니없을 정도였지만 루크는 뭐라고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모든 게 다 의미 없게 느껴졌다.
'이 전쟁은… 졌다.'
그 생각이, 지난 번 전투 때부터 계속 들었다. 이 반란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반란을 일으킨 지 석 달 내로 황궁을 향해 들이쳤어야 했다. 석 달 내로 이 싸움이 끝났더라면 그 사이 수탈했던 마을들을 복구하고 민심을 달래는 것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워낙에 급박했었음을 핑계 댈 수 있었고, 황권만 쥐었다면 현 황제의 탓으로 다 뒤집어씌울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전쟁이 너무 길어졌고, 자신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케일런은 석 달이 넘어간 이후에도 지나가는 마을을 다 털어냈다. 만약 정말로 운이 좋아 이 전쟁에서 이기더라도 민심을 되돌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민심이 돌아섰다면 제국을 온전히 지배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실 케일런이 욕심만 좀 덜했더라면, 그래서 제국의 1/3 정도를 차지한 데 만족할 수 있었더라면 상황은 훨씬 나았을 뻔 했다. 하지만 그는 겁은 많은 주제에 욕심은 제 아비 못지않게 컸다. 자신은 안전한 공작성 안에 있으면서 루크를 향해서만 이 전쟁의 승리를 바랐다.
그래서 루크는 엔킬로스 항구 시찰을 핑계로 케일런에게서 거리를 두고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았던 것이다. 여차하면 외국으로 떠나버릴 준비를 하고 말이다. 하지만 황제가 연합을 제의한 상태에서 타셀이 제 3세력이 되어 황제를 등지자, 루크는 마지막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황제의 연합 제의를 통해 그는 타셀을 뺀 황제라면 승리가 가능하다고 여겼고, 황제와 연합을 한다면 타셀을 이기는 것 역시 무리는 아닐 거라 계산했다. 다만, 이 기회의 끝에는 공작위를 받든가, 반역자로서 처형을 당하든가 둘 중 하나 밖에 남지 않으리라는 것도 알았다.
'이 상태라면 목이 떨어지는 것밖에 남지 않은 것 같지만…. 기왕 목이 잘릴 거라면 그 녀석한테 잘라달라고 하고 싶군.'
그는 습관적으로 카시야를 떠올리며 생각했다.
'또 보자.'
그것이 그가 카시야에게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분명 언젠가는 다시 만나게 될 것 같았다. 그게 자신의 목이 잘리는 그 날이라 하더라도.
루크가 이 상황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는 상관도 없는 것처럼 케네스는 돌아온 에르논을 살피지도 않은 채 제 심복과 함께 막사에 틀어박혔다. 애초부터 에르논의 상태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는 듯이, 죽지만 않았으면 되었다는 듯이 말이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망조가 들어도 단단히 들었군.'
케네스의 수하들을 가만히 살펴보고 있자니, 그들은 서둘러 공작성으로 떠날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케네스는 이 전장의 상황 따위는 관심도 없는 것이었다. 루크는 이를 바득 갈았다. 공작 작위고 뭐고 간에, 다 뒤집어엎고 싶었다. 천출 사생아에서부터 이 자리까지 오는 동안 별별 더러운 꼴을 다 봤지만, 저 자신 역시 누가 죽건 말건 그다지 신경 쓰지도 않았었지만, 그래도 이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루크는 문득 고개를 돌려 에르논이 있는 막사를 쳐다보더니, 굳은 얼굴을 하고는 그쪽으로 곧바로 향했다.
"에르논!"
막사 안으로 거칠게 들어온 루크가 에르논을 불렀다. 에르논은 모로 누워 있다가 힘겹게 몸을 돌렸다.
"아…. 페레이아 경. 죄송하지만, 제가 지금 손님을 맞을 상태가 아니라서…."
"수작부리지 마. 너, 무슨 속셈이냐?"
"경. 지금 말씀이 지나치시군요. 제가 지금 마법을 쓸 수 없다고, 곧바로 하대하시는 겁니까?"
"하…! 천출 사생아들끼리 같잖은 예법 따윈 집어치웁시다!“
루크는 에르논의 침상 앞 의자에 앉아 에르논의 코앞까지 얼굴을 디밀었다.
“여기까지 오면서 정리한 내 생각을 말씀해드릴까? 2황자는 절대로 이렇게 멀쩡한 상태의 대마법사를 돌려줄 리가 없어. 원래 잡아오기로 했었던 귀족 영애였다면 모를까, 일개 여기사랑 맞바꿀 리가 없지. 그렇다면 말야, 그러니까 네 놈이 사지도 멀쩡하고, 놈들이 네 몸뚱이에 무슨 짓도 하지 않았고, 타셀이 미친 것도 아니라면 말이야, 네 놈이 그 사이에 배신을 한 게 아닐까? 2황자는 대단한 인도주의자인 척 하면서 사실은 우리 쪽에 재앙을 보낸 거지. 어때, 내 생각이?"
에르논은 역시 케일런군에서 가장 조심해야 될 인물은 루크 페레이아였다고 다시금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서 이 자를 죽여 후환을 없애야할지 고민했다. 카시야를 '일개 여기사'라고 표현한 것도 상당히 마음에 안 들었고 말이다. 하지만 에르논은 일단 참기로 했다. 알리스타스 공작가를 향한 복수가 눈앞이다. 여기서 흔들려서 복수의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내가 겉보기에 상처가 없으니 멀쩡해 보이시나 본데, 지금 내 속이 어떤 상태인지나 알아? 네 놈들 도망갈 시간 벌어주느라 마력과 마나를 한꺼번에 다 쏟아낸 나에 대해, 총사령관이라는 작자가 할 말씀이 그것뿐이신가? 은혜를 몰라도 유분수지…. 그래, 네 말대로 차라리 배신해서 저쪽에 붙을 걸 그랬어. 이따위 모욕적인 말을 들으려고 거기서 그 수모를 버텼다니…. 내가 바보 같은 짓을 했군 그래."
에르논은 분노로 불타는 눈을 들어 루크에 맞섰다. 루크는 그의 말을 다 믿지 못하겠다 싶으면서도 반박할 말이 없어 그를 한참 노려보기만 하다가 결국 자리를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케네스의 이상한 행동과 전보다 여유로운 에르논으로부터 촉발된 불길한 느낌은 점점 짙어졌다. 막사로 돌아온 루크는 자리에 앉아 단숨에 편지 두 통을 쓰고는 각각 봉투에 담아 씰로 봉했다. 그리고는 이 병영 내에서 그가 유일하게 아끼는 인간인 알도를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페레이아 경."
"음. 이거 받아."
그는 알도에게 작은 주머니 하나를 건넸다.
"이게… 뭡니까?"
"알도. 네 고향이 엘리븐이었던가?"
"예? 예…. 그렇죠. 그건 갑자기 왜 물어보십니까?"
"고향에 가족이 있나?"
"부모님이야 오래전에 돌아가셨고, 여동생이 하나 있습니다만 몇 년 전에 시집을 가서 피엔 근처에 삽니다."
"그래? 그럼 여동생이나 오랜만에 만나러 갔다 와."
"예? 전투가 언제 벌어질지 모르는데 지금 여동생이나 만나러 갈 때입니까?"
"가면서 내 심부름 좀 하라고."
"아…. 그럼 그렇다고 미리 좀 말씀하시지 그러셨습니까. 무슨 일이십니까?"
루크는 빙긋 웃으며 방금 쓴 편지 두 통을 건넸다.
"봉투 겉면에 J라고 쓰인 편지는 엘리븐의 내 어머니에게 전하고, 아무 것도 쓰이지 않은 편지는 피엔의 네 여동생에게 전해라."
"예? 제 여동생한테는 무슨 일로…?"
"가서 전하라면 전해. 언제부터 내 명령에 토를 달기 시작했지?"
"아, 아, 아닙니다. 전하겠습니다."
"오늘밤 떠나라."
"예? 그, 그 무슨…."
또 토를 달려는 알도를 향해 루크가 험악한 눈빛을 보냈다. 그제야 알도는 꼬리를 말고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준 주머니에 여비로 쓸 돈을 담았으니까 중간 중간에 튼튼한 말로 바꿔 타라. 여관도 좋은 데서 묵고. 아, 주머니에 있는 루비는 쓰지 말고 가져가. 돌아올 때 써야할 일이 있으니까. 그 일은 네 여동생이 말해줄 거다."
"아, 예…. 그런데 저기,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불안하게…."
"…큰 전투가 있을 거야.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다녀오는 휴가일 테니, 충분히 즐기다 오라고."
그 말에 알도의 눈빛에도 장난기가 사라졌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알도는 루크가 엘리븐의 어머니에게 전하는 편지가 그의 마지막 편지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비장해졌다. 그리고 사실 그 생각이 맞기도 했다. 루크가 마련해준 엘리븐의 저택에서 넉넉한 노후를 보내고 있는 그의 노예 출신 어머니인 줄리안에게는 평소와 같이 퉁명스럽고 살갑지도 않은 내용의 안부 편지를 보내는 것이었다. 물론 그 다음 장에 그가 숨겨둔 재산을 어떻게 찾아야할지 상세하게 설명한 것이 평소의 안부 편지와 다를 뿐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편지의 봉투를 뜯으면 봉투 안쪽 면에 '이 편지를 알도에게 전해주십시오. 그리고 알도가 절대 전쟁터로 돌아가지 못하게 막으십시오.'라는 글이 쓰여 있었다. 그 편지는 결국 루크가 알도에게 남기는 편지였던 것이다. 그동안 고마웠으며, 운이 좋다면 언젠가 다시 만나자고. 주머니에 들어있는 루비는 꽤나 값어치 있는 것이니 그것을 새로운 삶을 위한 밑천으로 삼으라고 말이다. 다시 돌아올 생각은 절대 하지 말라고, 네가 돌아왔을 때 나 역시 거기 없을 거라고도 적었다.
루크는 멀어지는 알도의 뒷모습을 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제 자신의 운명도 바람 앞의 촛불과 같으니, 그 촛불이 꺼져버리기 전에 제 유일한 혈육과 심복 정도는 살리고 싶었다.
============================ 작품 후기 ============================
* 분몌(分袂) : 서로 작별함.
어디서 끊어야할지 애매해서 20kb나 나와버렸네요.
월, 화요일은 연재 쉽니다.
+ 그녀의밤 님, 징수니 님. 후원쿠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