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4 분몌(2) =========================
케네스는 마치 도망이라도 치듯 재빨리 공작성으로 돌아갈 채비를 마쳤다. 정말, '도망치듯이' 라는 표현이 이렇게 어울릴 수가 없다고 생각하며 루크는 조소를 삼켰다. 어쨌든 그는 아직 이 제국의 공작이었고, 1황자의 최측근이었다. 1황자가 기대고 있는 이가 그와 자신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케네스가 자신을 밀어주지 않았다면 지금의 위치는 어려웠다. 그동안 그의 속을 실컷 할퀴어댔으니 돌아가는 길 정도는 예의바르게 보내주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공작 각하."
그의 인사에 케네스가 눈을 흘겼다. 또 무슨 꿍꿍이인가 살피는 시선이었다.
"내가 황제를 압박해 지원군을 약속 받았으니 조만간 2개 부대가 더 도착할 거요. 다음 번 전투에서는 실망스럽지 않은 소식을 전해 듣길 바라겠소."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황자 전하께도 안부 전해 주십시오."
가시 돋힌 대답을 돌려받을 줄 알았었는지 케네스는 루크의 고분고분한 대답에 눈을 가늘게 뜨고 그의 의중을 살폈다. 하지만 아무것도 발견한 게 없는지 이내 고개를 돌리고 출발을 명했다. 케네스와 다른 마차에 타고 있던 에르논은 그런 케네스와 루크 사이의 균열을 몰래 바라보다가 이내 흔들리기 시작한 마차의 진동에 몸을 맡겼다. 한순간 루크와 시선이 마주친 것 같았지만 에르논은 곧 고개를 돌려버렸다. 지금은 루크를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돌아가서 공작을 어떻게 죽이면 좋을지 아직 결정을 못했기 때문이다.
'공작과 그 징글맞은 두 아들 새끼, 그리고 할망구. 이 넷은 결코 얌전히 죽여주지 않겠어.'
에르논의 눈동자에 잔인한 빛이 떠올랐다.
*
"후방에서 물품 지원이 도착했습니다. 알토냐 백작가와 벨린 백작가에서는 결국 전하와 함께 할 마음을 먹었는지, 이전과는 확실히 다른 태도를 보였더군요. 두 백작가에서 식량과 약품을 넉넉히 보내줘서 한숨 돌릴 수 있게 되었어요."
보고 시간을 저녁 시간으로 옮긴 알리시아는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로 타셀에게 물품 지원 상황을 보고하고 있었다. 하지만 타셀은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일 뿐, 왠지 딴 생각에 빠져있는 것 같았다.
"…저기, 전하?"
"……."
"전하!"
"…아! 그래, 알토냐 백작과 벨린 백작이 마음을 정해줬다니 다행이야. 저번에 생환한 포로들 치료는 순조로운가?"
딴생각을 하고 있었음에도 놓친 얘기는 없다는 듯 타셀의 대답은 자연스러웠다.
"…카시야 경이 걱정되세요?"
알리시아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타셀은 순간 알리시아의 눈을 마주치며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알리시아는 그의 태도에 움츠러들지 않았다. 시선을 먼저 피한 쪽은 타셀이었다.
"카시야 경뿐만 아니라 생환한 포로 모두가 걱정스럽네. 특히 카시야 경을 제외한 나머지는 상태가 정말 좋지 않아 보였으니까 말이야."
"…그렇죠. 하지만 다행이 큰 외상이나 질병은 없었습니다. 푹 쉬고 영양식을 먹이면 곧 회복될 거예요."
"음. 그렇다면 다행이군."
"전하의 생각과는 달리 문제는 카시야 경이에요. 다행이 그쪽에서도 꼼꼼히 치료를 해준 덕분에 상처가 아물고 있기는 한데, 흉터가 많이 남을 것 같아요. 등의 상처는 아직 속까지 다 아물지 못했고요."
타셀의 눈빛이 여지없이 걱정으로 물들었다.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는 염려였다. 하지만 타셀은 다시 무심한 척 억양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기사가 되어서 몸에 흉터 하나 없는 자가 있을라고. 그녀 역시 훌륭한 기사니까 그 정도는 영광의 훈장처럼 여길 거야. 피부 미용을 걱정하는 귀족 영애들과는 달라."
"네. 그럴 테죠. 그걸 걱정하는 게 아니에요. 다만, 그녀는 정말 놀라울 정도로 자신이 입는 상처나 고통에 무심하거든요. 아직 다 낫지도 않은 몸을 이끌고 또 체력 단련을 한다면서 연무장을 뛰질 않나…."
"뭐?"
알리시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타셀이 노기 띤 눈을 하며 험악하게 말을 잘랐다.
"전하. 바쁘시겠지만 한번만 더 카시야 경에게 휴식을 명해주시면 안 될까요? 제 부탁은 정말 귓등으로도 들어주질 않아요. 지금도 아마 연무장에 있을 걸요?"
"연무장? 그 녀석, 도대체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말이 나온 김에 단단히 일러야겠어. 밖에 누구 없느냐!"
타셀의 부름에 바깥에 서있던 보초가 냉큼 막사 안으로 들어와 예를 취했다.
"카시야 경을 찾되, 만약 막사에서 쉬고 있다면 그냥 놔두고, 연무장에서 훈련을 하고 있다면 당장 불러와라."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10분이 채 지나지 않아 카시야가 타셀의 막사로 들어왔다.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뭔가 임무가 주어지지 않을까 기대하는 눈빛이 아주 반짝거리기가 눈부실 정도였다. 타셀과 알리시아의 표정이 동시에 흉흉해졌다. 그제야 카시야는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느꼈다. 타셀은 단단히 화가 난 것 같았고, 그 곁의 알리시아 역시 고운 미간을 찌푸린 채 눈을 흘기고 있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알리시아였다.
"카시야 경. 정말 제 말은 경께 아무런 가치가 없는 거예요?"
"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왜 얌전히 누워 요양을 해야 한다는 제 말을 무시하시는 거예요?"
"영애의 말씀은 감사하지만, 이 정도쯤은 뛰면서 땀 좀 흘리고 잘 먹으면 금방 낫습니다."
"전하, 들으셨죠? 이런 식이라니까요. 저도 기사님들께서 가벼운 상처나 근육통쯤은 훈련으로 이겨내시는 걸 알고 있어요. 하지만 지금 카시야 경의 상처는 늘 깨끗하게 소독하지 않으면 곪아서 썩을 수 있는 상처입니다. 저렇게 땀을 흘리고 다 낫지도 않은 근육을 무리하게 쓰는 건 좋지 않아요."
카시야는 이 상황이 어리둥절했다. 알리시아가 마치 타셀에게 저가 한 나쁜 짓을 일러바치는 것 같은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저기, 영애. 상처는 거의 나았습…."
"카시야 경."
타셀이 무거운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감히 반박할 수도 없을 만큼 위압적인 목소리였다.
"예, 전하."
"내가 진짜 자네를 낫게 하기 위해 감금이라도 해야겠나? 그래야 좀 쉬겠어?"
"…아닙…니다."
"다시 한 번 알리시아 영애로부터 자네가 치료를 태만히 한다는 보고를 받게 된다면, 그때는 진짜 감금하겠네. 기사로서의 명예를 안다면 그런 꼴사나운 일이 벌어지지 않게 해주길 바라겠네."
"예. 알겠습니다."
고개를 숙였다 들자 드디어 이겼다는 표정의 알리시아가 벌떡 일어났다.
"자, 그럼 저와 함께 막사로 돌아가시죠. 땀난 것도 닦아야 하고, 환부에 열을 내리는 약초도 또 붙여야겠어요."
"꼭 그러시지 않아도…."
카시야가 알리시아의 호의를 거절하려는 순간, 또 두 쌍의 매서운 눈이 카시야를 노려보았다. 카시야는 결국 알리시아의 말에 고분고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정말 두 분이 여러모로 잘 어울리시는군 그래.'
카시야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알리시아의 뒤를 따랐다.
카시야는 침상에 누워 치료를 받으면서도 한참동안 알리시아의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처음 돌아왔을 때 보았던 눈물 젖은 얼굴보다야 나았지만,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누군가의 잔소리를 듣는 게 처음이라 그녀가 화를 내고 있는 건지 걱정을 하고 있는 건지 잘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녀는 알리시아의 잔소리를 대부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왜 이렇게까지 자신을 몰아가는 거예요? 좀 쉬셔도 돼요. 하늘이 무너지거나 하지 않는다구요."
"죄송합니다. 영애께 심려를 끼쳤군요."
"…또 그런 식으로 얼버무리시네요. 경은 정말 속을 요만큼도 내보여주시질 않는군요. 그게 저는 정말 섭섭해요."
나름대로는 대충 무난한 대답을 하고 있다 생각했는데 알리시아가 서글픈 얼굴을 하고 바라보았다.
"전…. 전, 카시야 경과 저 사이에 그래도 뭔가 통하는 게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경께서는 그런 제가 불편하셨나요? 동지를 만난 것 같고, 오래 오래 사귀게 될 친구를 만난 것 같은 기분은 저 혼자 느끼는 거였나요?"
"아… 나클리프 영애…."
"제가… 경께 많이 부담되는 사람인가요?"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저 역시 영애를 특별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카시야는 당혹감을 느끼면서도 울상을 짓고 있는 그녀를 달래줘야 한다는 생각에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녀의 말을 대충 흘려들은 게 미안해졌다.
"그러시다면 앞으로 저를 알리시아라고 불러주세요."
"영애. 저와 영애의 신분차가 있는데 어찌 감히…."
"그, 그럼 최소한 아나클리프 영애라고는 하지 마세요. 그리고 나중에 경이 작위를 받게 되면, 그때는 서로 이름을 부르기로 해요. 영애들끼리 모이면 정말 친한 사이는 서로 이름을 부른단 말이에요."
"푸후…. 예. 알겠습니다. 영애께서는 그게 부러우셨던 모양이군요."
그 말이 정답이었는지 알리시아의 얼굴이 빨개졌다. 하지만 그녀는 왠지 고집스러운 표정으로 또 약속을 받아내려 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면, 제가 여는 살롱에도 초대할게요. 문학이랑 외국 문화에 대한 주제로 얘기를 나누는 자리지만, 나라 돌아가는 얘기나 본인이 관심 있는 주제에 대해 얘기를 해도 상관없어요. 경께서 꼭 와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런 곳에 제가 감히 끼어도 될런지요."
"당연히 되죠. 사실, 손님이랄 사람이 아직은 오라버니랑 어머니랑 제 선생님들 밖에 없거든요."
"그럼 감사히 참석하겠습니다."
"경께서 오시면 늘 미르바하라 산포도 와인을 대접할게요."
"아…. 그거 정말, 거절하지 못할 초대군요."
행복할 미래를 그리며 웃는 알리시아는 정말 아름다웠다. 카시야 역시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전쟁이니, 카르마니 하는 것들을 다 잊고 그녀가 그리는 따뜻하고 달콤한 미래의 환상을 함께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밤이 되어 사위가 어두워지자 카시야의 머릿속은 다시 번잡해졌다.
'이번 달 보름이라고 하면, 아직 열흘 정도가 남았다. 일주일 안에 몸이 다 나아주면 좋으련만. 전하께서는 정말 내 발을 묶어두실 참인가. 답답하군.'
답답하다는 생각은 곧 호흡이 힘들어지는 실제적인 현상을 만들어냈다. 카시야는 알리시아가 깨지 않도록 조용히 몸을 일으켜 신발을 신었다. 늘 훈련하느라 신지 않았던, 알리시아가 마련해준 부드러운 가죽신이었다. 가죽신은 질이 좋은 탓에 바닥을 밟는 소리도 거의 나지 않았다. 카시야는 치열한 하루를 마치고 깊이 잠든 알리시아를 다시 한 번 바라보고 나서 조용히 막사 밖으로 나왔다.
어느새 밤공기는 많이 쌀쌀해져서, 답답한 속을 비워낼 심호흡을 하기에는 좋았다. 차가운 공기 때문에 팔뚝에 소름이 돋았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천천히 막사 사이를 거닐며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이 세계에서 눈뜬 뒤 처음으로 강렬한 인상을 받았던 게 바로 저 별들이었다. '쏟아질 듯하다'는 표현이 왜 생겼는지 단박에 이해될 정도로 지나치게 반짝거리는 별들이, 겨울이 가까워오자 더욱 선명해지는 것 같았다. 밤의 병영은 군데군데 타오르는 모닥불 소리, 잠을 쫓기 위해 작은 목소리로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는 불침번병들의 잡담 소리, 주변에서 쉴 새 없이 울어대는 풀벌레 소리, 멀리서 간간이 말들이 투레질하는 소리로 채워져 있었다. 그 평화로운 가운데를 카시야는 천천히 걸었다.
"정말 말을 안 듣는군 그래."
뒤에서 나지막이 울리는 목소리의 주인을, 카시야는 돌아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아까부터 제 뒤를 따라붙는 그 기척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으니까.
"전하께서도 잠이 오지 않는 모양이시군요."
"응. 막 잠들 찰나였는데, 말을 지지리도 안 듣는 여기사 하나가 또 몰래 빠져나가는 기척이 느껴져서 깨버렸지."
카시야는 피식 웃었다. 그와 저의 막사 사이의 거리가 얼마나 먼데 제 기척 핑계를 대다니.
"밤 산책도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렇군. 잠시 걷지."
둘은 한참동안 아무 말도 없이 병영 외곽 쪽을 향해 걸었다. 그를 알아본 불침번 병사들이 경례를 붙였지만, 그와 카시야가 왜 이 시간에 함께 걷고 있는지에 대해서 의심스럽게 쳐다보는 이는 없었다. 그가 기사 한둘을 데리고 불침번병을 둘러보는 게 낯선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그들은 고즈넉한 기분을 흐트러트리지 않고 산책을 할 수 있었다.
인적이 뜸해진 곳에서 문득 타셀이 말했다.
"에르논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연락이요?"
"의식 전달 마법이지. 짧은 메시지를 상대에게 전달할 수 있어. 어쨌든, 그가 보내온 메시지가 심상치 않아."
"무슨 일입니까?"
"이틀 뒤, 공작이 에르논을 황제에게 보내기로 했다는군."
"예? 설마, 우리 쪽의 계획을 눈치 챈 건…!"
"그런 것 같지는 않아. 에르논이 보기에는 공작과 황제 사이에 뭔가가 있는 것 같다는데."
"그래도 아직 황제와 1황자 둘 다 황권을 포기한 게 아닌데, 공작이 바보 천치가 아닌 이상 제 군대의 최고 병력을 황제에게 보낼 리가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공작은 바보 천치가 아니지. 분명, 그를 황제에게 보내서 얻는 게 있을 거다. 그게 황제와 케일런의 합의인지, 아니면 황제와 알리스타스 공작만의 합의인지가 문제지만."
두 사람 사이의 대화는 다시 잠시 끊겼다. 서로 각자의 생각에 잠겨있느라 발걸음이 병영과 하염없이 멀어지고 있다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했다.
============================ 작품 후기 ============================
월, 화요일 쉬기도 하고, 오늘은 왠지 연참을 하고 싶은 기분이라서 뜬금없이 한 편 더 올립니다. 왠지 흐물흐물한 일요일 오후에 조그만 재미라도 드렸으면 좋겠네요.
+ 그녀의밤 님, 하얀사슴 님, sodamm 님. 후원 쿠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