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5 분몌(3) =========================
"그럼… 남하 계획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안 그래도 고민이야. 갑자기 케일런군에 추가 병력이 도착했거든. 애초부터 우리가 그쪽보다 적은 병력이라는 핸디캡을 갖고 있었는데 수비하는 쪽에 추가 병력까지 배치되었으니,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어."
"…에르논을 황제에게 보내기로 한 것과 추가 병력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있었던 걸까요? 너무 시기가 들어맞지 않습니까?"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절대 그것만이 다는 아닐 거야. 내가 알리스타스 공작이라 해도 분명 추가 병력보다 훨씬 더 큰 무언가를 요구할걸세. 그 공작의 성향을 생각해보자면, 굉장히 사적인 이익을 추구할 확률이 높고 말야."
"왠지 굉장히 꺼림칙합니다. 황제는… 분명 마법과 관련한 뭔가를 꾸미고 있어요. 저는 아직도 그 비쩍 마른 마법사 시체가 잊히지 않습니다."
"나도 사실 그 생각을 했어. 퍼즐 조각이 맞춰지는 것 같지 않나? 마력 추출과 대마법사라니…. 황제가 마력을 대량으로 추출해서 뭔가에 쓰려고 하는 것 같기는 한데, 그 뭔가가 뭐냐는 게 문제지. 그리고 에르논을 무엇에 쓰려고 하느냐는 것도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고."
타셀의 말에 카시야가 한숨을 내쉬었다. 에르논은 왜 자꾸 위태로운 상황에만 빠져드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그런 카시야를 타셀이 내려다보고 있었지만 카시야는 그 시선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에르논이 황제에게 넘어가게 하면 안 됩니다. 황궁에는 마법사들이 엄청나게 몰려 있습니다. 일반 마법사 몇 십 명이 대마법사 하나만도 못하다고는 하지만, 그렇게 많은 수가 한꺼번에 공격한다면 에르논이라 할지라도 위험해질 겁니다."
"…나도 그렇게 얘기했어. 그런데 본인이 황궁으로 가겠다는군."
"예?"
"알리스타스 공작과 그의 큰아들만 죽인 뒤, 황궁으로 가서 황제가 무슨 속셈인지 알아 오겠다더라고."
"하…! 말려야 합니다! 설마, 이것까지 허락하실 생각은 아니시지요?"
"…이제 자네가 자네 몸을 돌보지 않을 때의 다른 사람 기분을 좀 이해하겠나?"
"……!"
카시야는 말문이 막혀버리고 말았다. 에르논 얘기를 하다 갑자기 화살이 제게로 돌아오니 당황스러웠다.
그런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자신은 아직도 누군가의 걱정을 받는 게 어색했고, 그 누구도 그녀의 죽음을 걱정하지 않던 전생의 감각이 몸에 남아 있었다. 자신이 험한 일에 투입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여겨왔다. 그러기 위해 길러진 인생이었으니까.
"제가 작전에 투입될 때…. 전하께서도 이런 기분이셨습니까?"
카시야는 충동적으로 물었다.
전생의 주인들은 모두가 계산이 빠르고 정확한 판단을 했지만 단 한 번도 자신에게 다정하지는 않았다. 그들이 고도로 머리를 쓰는 체스 선수들이었다면 카시야는 그저 체스판 위의 강력한 체스말일 뿐이었다. 물론 그들도 카시야를 일개 폰(pawn) 취급 하지는 않았다. 아끼고 아끼다 꺼내는 비장의 무기. 카시야는 자신의 존재 이유를 거기서 찾았고, 딱히 불만을 품은 적도 없었다.
그래서 주인들은 다 그런 줄 알았다. 그동안 타셀이 몇 번인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긴 했지만 카시야는 자신의 선을 철저히 지켰다. 그는 주군이고, 자신은 그의 비장의 무기가 되고자 했다. 물론 전생과 조금 다른 게 있다면 이번 주인은 무기의 생각도 존중해주었다는 것 정도였다. 그 정도로도 카시야는 굉장히 벅차올랐었다.
하지만 그가 자신을 쓰는 데 걱정을 했다면 그건 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원래 맡기로 했던 임무에 투입되는 건데, 그걸 왜 말리려고 한단 말인가. 동지애? 전우애? 충성스런 신하를 향한 걱정? 카시야에게는 그 무엇도 이 전쟁의 승리보다는 중요하지 않았다. 전생처럼 승리 자체를 맹목적으로 바라서 그런 게 아니었다. 이 전쟁이 길어질수록, 많은 죄 없는 사람들의 삶이 피폐해지기 때문이었다.
타셀의 답을 기다리고 있는 카시야에게, 타셀은 오히려 물어왔다.
"'이런 기분'이 어떤 건데? 자네는 지금 어떤 기분을 느끼고 있나?"
"어…, 그건…."
"에르논에게 가해질 여러 종류의 공격이 머릿속에서 그려져? 그가 단신으로 수많은 적에게 둘러싸이는 모습이 자꾸 상상되나? 다치면 그걸 치료할 방법은 알고나 있을까 걱정돼? 자다가도 갑자기 안 좋은 기분이 들면서 눈이 뜨여? 언제 올지도 모르는 그를 여기서 가만히 기다려야하는 자신이 무력하게 느껴지나? 혹시 지금 위험한 상황에 처한 건 아닌지 시도 때도 없이 가슴이 조여와? …그렇다면, 맞아. 그런 기분이었네."
카시야는 거의 숨 쉬는 것도 잊고 타셀을 쳐다보고 있었다. 타셀 역시 카시야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렇게까지 심려를 끼치고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카시야는 숨 막힐 듯한 공기를 깨고 타셀의 청회색 눈동자를 피했다. 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니라면, 타셀의 눈빛은 왠지 '다정'을 넘어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곧 타셀이 여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군주가 자신의 기사들을 못 믿어서 품에 안고만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지. 모두가 무사하길 간절히 기원하지만, 그게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도 알고. 그래도 알아주었으면 해. 나는 살아있는 그대들과 함께 새 시대를 맞고 싶다는 것을. …그러니, 몸 좀 챙기게."
타박하는 듯하던 마지막 말과 함께 타셀의 입매가 유려한 호선을 그렸다. 카시야는 그제야 긴장됐던 어깨에서 힘을 빼고 어색한 미소를 그렸다. 새삼스럽게 그가 잘 생겼다고 느껴졌다. 음심을 동하게 하는 외양이라기보다는 기품 있고, 존재감 있고, 경애할만한 모습이랄까. 아름다운 검은 사자의 모습이 오버랩되는 것 같았다.
"의식 전달 마법이라는 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 겁니까?"
카시야는 화제를 돌리기 위해 아무 말이나 주워 담다가 의식 전달 마법을 입에 올렸다. 그러자 타셀은 '아!'하며 그녀를 향해 빙글, 돌아섰다.
"얘기 잘 꺼냈네. 자네에게도 의식 전달 마법을 걸어둬야겠어. 지난번에 자네가 잡혀갔을 때, 미리 걸어두지 않은 걸 후회했다니까."
"그건 어떻게 거는 건가요?"
"자네의 피 한 방울이면 족해. 내 손바닥에 피 한 방울을 떨어트려보게."
그 말에 카시야는 허리춤에 찬 단도를 꺼냈다. 그리고 그 칼로 손바닥을 그으려는 찰나, 타셀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한 방울이면 족하다니까."
하지만 '그러니까 손을 그으려고 하는데 왜 이러시나?'하는 표정을 지우지 못한 카시야를 보며 타셀이 골치가 아프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거 이리 내."
그는 카시야의 단도를 대신 쥐고 그녀의 손끝을 살짝 찌르려 했다. 하지만 칼끝은 그녀의 손 여기저기를 살피다가 결국 어디도 찌르지 못했다. 단 한 방울의 피를 위해서라지만, 그는 이미 온몸 곳곳이 상처투성이인 그녀에게 조그만 상처조차 더 내고 싶지 않았다.
그가 난감해하는 것을 눈치 챈 카시야는 불시에 손을 움직여 칼날을 스쳤다. 타셀이 깜짝 놀라 칼을 떼었지만 그녀의 손바닥에서는 붉게 피가 배어나왔다.
"전하. 부디 손을…."
타셀은 또 제멋대로 자기 자신에게 상처를 낸 카시야를 힐난하는 눈빛을 하며 마지못해 오른손바닥을 폈다. 그 위에 카시야의 붉은 핏방울이 두어 방울 떨어져 내렸다. 주머니에 있던 손수건을 꺼내 손을 대충 싸맨 카시야는 그의 손바닥 위를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타셀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손바닥의 핏방울을 바라보며 낮게 주문을 읊조렸고, 그의 손바닥 위에는 무슨 문양 같은 게 나타나는 것 같더니 곧 핏방울과 함께 사라졌다.
[앞으로는 제발 제멋대로 몸에 상처를 내지 말게.]
"어!"
머릿속에 그대로 울리는 듯한 타셀의 음성에 카시야는 놀란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마력이 있어야 자신의 의식을 상대에게 전달할 수 있어서, 지금 자네와 내가 맺은 의식 전달 마법으로는 내 의식을 자네에게 전달하는 것 밖에는 할 수가 없어. 이런 방식으로 제국 내에 퍼져있는 섀도 워커들에게 지령을 내리고는 하지. 하지만 에르논과는 서로 의식을 전달할 수 있어서 좀 더 유용해."
"정말 편리한 마법인 것 같습니다."
"마법이라는 건 늘 양날의 검이야. 이렇게 서로 메시지를 주고받는 데에 쓴다고 생각하면 단순히 유용한 마법인 것 같겠지만, 이 마법으로 세뇌를 할 수도 있고, 상대에게 정신적인 고통을 가할 수도 있어. 사실 꽤 위험한 마법이지."
"그렇습니까?"
"예를 들어 말이야…."
타셀의 말이 멈춤과 동시에 카시야의 머릿속에는 엄청난 울림이 쏟아졌다. 그것은 언어가 아니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애정…?'
카시야는 방금 자신이 한 생각이 어이가 없었지만 지금 자신의 머릿속을 점령한 타셀의 의식은 그 단어 말고는 다른 것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였다. 아니, 어쩌면 조금 슬픈 것 같기도 하고, 아픈 것 같기도 한….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몸의 피부가 간질거리는 듯한 설렘과 아련한 느낌은, 무딘 카시야라 할지라도 '사랑'이나 '애정'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그런 느낌이었다.
"이… 이게… 허억…."
마치 머리통이 터질 것 같았다. 그의 감정으로 꽉 차서, 더 이상 스스로의 생각을 이어나갈 수가 없을 정도였다. 카시야의 무릎이 꺾이며 몸이 허물어지려던 순간, 타셀이 그녀의 몸을 재빨리 받쳤다. 그리고 그 순간 마치 거짓말처럼 울림이 사라졌다.
"허억…. 허억…."
"…알겠지? 얼마나 위험한 마법인지…. 알리스타스 공작이 마법사였다면 에르논을 통제하기 위해 이 마법을 썼을 거야. 물론 상대의 의식을 점령하기 위해서는 그 상대보다 마력이 강해야 하지만. …괜찮나? 나도 이런 식으로는 써본 적이 없다보니 조절을 잘 못해서…."
카시야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 마법의 위험성보다는 방금 자신의 머릿속을 울리던 그의 감정이 도대체 뭐였는지가 더 궁금했지만 그녀는 묻지 않았다. 왠지, 물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복잡한 기분을 티 나지 않게 정리하느라 머릿속이 분주한 카시야와는 달리, 타셀은 조금 후련한 기분이었다.
'이걸로 됐어. 이제 미련을 끊자.'
아무리 노력해도 자꾸만 그녀의 모습을 그리던 머리가 꿈에서까지 그녀의 모습을 비추었다.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는 그를 향해 카시야가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을 때, 그는 그게 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현실이라면 그녀가 그런 식으로 저에게 다가올 리 없으니까…. 꿈이라는 것을 깨달았어도 깨고 싶지 않았다. 꿈에서라도 그녀에게 입 맞추고 싶었고, 많이 걱정했노라고, 그대 때문에 내 가슴이 터질 것 같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이를 꽉 물고 자신을 향해 오는 그녀를 등졌다. 꿈에서 깨려 노력하자 곧 희미하게 정신이 들었고, 침상에서 일어난 그는 머리를 흔들어 그녀의 잔상을 털어냈다.
타셀에게 있어서는 첫사랑이었다. 자신의 지위, 입장, 상황, 의무, 책임, 그 모든 것이 단단히 막고 있던 심장으로 부지불식간에 스며들었던 그 사랑은, 외면하려 할수록 더 강하게 심장을 옭아매었다. 모른 척 하려고, 나는 이 마음을 확인해보지 않았으니 모르는 것이라고 애써 자신을 기만했지만 결국은 처참하게 패배했다.
사랑했다. 그 어떤 이도 그녀만큼 강렬하게 와 닿았던 적이 없었다. 그래서 곁에 두고 싶었다. 하지만 안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바람 같은 그녀를 제 옆에 묶어둘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는 제 마음을 접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궁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보다는 훨씬 더 많은 삶의 행복을 느껴야 할 사람이다. 그러니 욕심내면 안 된다. 그래, 이런 사랑도 있는 법이다.
그렇게 마음은 먹었지만 심장이 쥐어 짜이듯 아픈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서 찬바람이라도 맞으며 정신을 차릴까 하고 막사 밖으로 나왔던 것이다. 그리고 운명의 장난인 듯, 제 앞에서 조용히 걸어가는 카시야의 뒷모습을 발견한 것이고 말이다.
절대 대놓고 입 밖에 낼 수는 없었던 자신의 마음을 그녀의 마음으로 빗대 고백하고, 절대 들키면 안 될 자신의 감정을 '예를 들면'이라는 말로 비겁하게 덧칠해 그녀의 머릿속에 부어 넣었다. 카시야가 감정에 둔하다지만, 이쯤 되면 자신이 저에게 어떤 감정을 품고 있었는지 대충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서로 공식적으로 언어화하지 않았으니, 그것은 그저 심증일 뿐이고, 그래서 조용히 덮어둘 수 있다. 카시야가 조금 당황한 것 같긴 하지만 그녀는 이미 자신의 의도를 알아챈 것 같았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저 자신의 뒤를 따르고 있는 것을 보면.
"고맙네."
"…아닙니다."
무엇이 고마운지 말하지 않는다. 무엇에 대해 겸양하는지 말하지 않는다. 그래도 두 사람은 그 행간에서 많은 대화를 나누었고, 그러면서 타셀은 카시야에 대한 감정을 재정립했다. 다시는 자신이 버린 감정을 돌아보지 않기로 다짐했다.
"앞으로도 나의 든든한 검이 되어주게."
"영광입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타셀이 그린 시원스런 미소에는 더 이상 아픔의 부스러기가 남아있지 않았다.
============================ 작품 후기 ============================
쉴라고 했는데... 화요일 연재, 수요일 휴재로 갈게요.
왜냐고 물으신다면, 이틀을 쉬는 건 너무 오래니까요...?
변덕스러워서 죄송합니당. (;ㅁ;)
그나저나... 타셀 주주님들께서 광광 우시는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
+ 그녀의밤 님, 엘린s00 님. 후원쿠폰 감사합니다~!
+ 유키노 님 > 타셀이랑 루크를 엮어달라고요? 카시야랑 루크를 엮어달라는 것처럼 말씀하시다가 타셀과 루크라니.... 본심 튀어나오신건가요?ㅋㅋㅋ 누가 공이고 누가 수인지도 가늠이 안되는 강 vs. 강 커플이라니... 하드코어*-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