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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홍의 카르마-86화 (86/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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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시야 경! 카시야 경! 괜찮아요?"

카시야는 알리시아의 목소리에 눈을 떴다. 주변이 이미 환했다. 눈앞의 알리시아를 한참 바라보면서도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가 싶었다. 자신이 늦잠을 잤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던 것이다.

"괜찮으신 거죠? 경께서 저보다 늦게 일어나신 적이 없어서, 어디가 많이 안 좋으신가 했어요. 정말, 괜찮아요?"

"아…. 예. 괜찮습니다."

카시야는 아직 멍한 머리를 꾹꾹 누르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아니에요. 누워있어요. 어제 전하 말씀 잘 들었죠? 또 몸을 혹사하면 진짜 가둬버릴 거예요. 얌전히 누워서 푹 쉬고 있어요. 응?"

"알겠습니다. 그럼… 영애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알리시아는 카시야의 대답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며 그녀 위로 다시 이불을 꼼꼼히 덮어주고는 아침 식사를 가지러 나갔다.

'늦잠이라니….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어젯밤 타셀과의 산책을 마치고 막사로 돌아온 것은 아직 하늘이 깜깜한 새벽이었다. 몸을 무리하게 쓴 것도 아니고 수면 시간이 평소보다 많이 부족하지도 않았는데 왜 늦잠을 잤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문득 평소와 달랐던 어느 이유 하나로 의심이 몰렸다. 타셀이 그녀의 머릿속에 그의 감정을 가득 채웠던 사건 말이다. 그가 의식 전달을 거둬들인 이후에도 방금까지 느꼈던 달콤한 의식의 잔여물 때문에 그녀는 생전 느껴본 적 없었던 노곤 노곤한 기분에 빠졌었다. 세상 무엇보다 귀하게 대접해주는 것 같은 느낌. 모든 위험에서 보호해줄 것만 같은 느낌. 오로지 그녀의 행복만을 중요하게 여기는 듯한 느낌….

그녀는 기분 좋은 피로감과 편안함을 느꼈고, 막사로 돌아온 뒤 곧바로 잠에 빠져들었다.

눈을 뜨자 어제와 같은 감정적 동요는 사라지고 없었지만 그동안 미처 눈치채주지 못했던 타셀의 마음에 대한 부채감이 새로이 떠올랐다. 도대체 그가 왜 자신에게 그런 감정을 가져 주었는지 이해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말이 아닌 그의 감정 그대로를 느꼈던 어젯밤, 그 이유 따위는 상관없어질 만큼 고마웠다. 누군가 자신에 대해 그런 감정을 가져 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모두가 우러르는 그가 자신의 속내를 저에게 오롯이 보여주었을 때, 그게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했었을지 이해했다. 벌거벗은 속내를 까발린다는 것은 나체로 돌아다니는 것보다 더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법이다. 하물며 그 감정의 대상에게 직접 드러낸다는 데야….

그랬으니 그에게 뭔가 보답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가 이런 것을 바라고 한 행동도 아닐 테고, 이 부채감을 달가워하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가 아무리 잘 생기고 멋진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제 와서 그를 향한 낯간지러운 감정을 품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가 버려야 했던 감정의 크기만큼 커다란 신의를 주고 싶었다. 넓은 범주로 보자면 그것도 사랑의 한 종류가 아닐까. 그게 그의 감정을 우습게 만들지 않을 길이라 여겼다.

'당신의 충성스러운 검이 되겠습니다.'

카시야는 눈을 스르르 감았다. 누군가를 이렇게 진심으로 주군으로서 받아들인 것은 처음이었다.

*

[최대의 적은 황제입니다. 제가 이런 식으로 황궁에 잠입할 수 있는 게 기회일지도 모릅니다.]

여전히 황궁으로 가보겠다는 에르논의 메시지에 타셀은 초조하게 손끝으로 테이블을 톡톡 쳤다. 그에게 거사를 앞당기라고 할 만한 상황도 아니고, 황궁으로 가라고 하기에도 꺼림칙하다. 사실 결론은 이미 나 있었지만 에르논에게 빚을 지는 것 같아 가라는 말을 꺼내기가 껄끄러웠다.

"왜 그러십니까?"

타셀이 갑자기 초조해보이자 미하일이 의아하게 물었다.

"에르논이 황궁으로 향하게 된 이 상황이 어떤 변화를 불러일으킬지 확신할 수가 없어."

"하아…. 거참, 적응 안 되네요. 에르논이 진짜 아군이라는 게…."

"우리로서는 하늘이 주신 선물인 거지. 아니, 그 역시 카시야 경이 회유한 인물이니까, 카시야 경이야말로 하늘이 주신 선물인가."

반쯤 농담조의 말이었는데 미하일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전하…. 저기…. 진짜 카시야를 마음에 두고 계시는 겁니까?"

"응?"

"전하. 카시야는 좋은 녀석입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지만 믿을 수 있고, 강하고, 의지가 되죠. 뭐, 뜯어보면 못난 얼굴도 아닙니다. 아, 그래요. 예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꽤나 매력적이라는 것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카시야는… 기사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황후나 황비감은…."

점점 목소리가 줄어드는 미하일을, 타셀은 한결 여유로운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아직 식지 못한 심장이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생각보다 버틸 만 했다.

"미하일."

"예, 옙!"

"…너 말고 또 누가 알고 있지?"

타셀의 청회색 눈동자가 미하일을 부드럽게 스쳤다.

"글쎄요.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놈이 있을 수도 있지만, 제가 보기에는 딱히 없어 보입니다. 솔직히, 다들 카시야가 여자로 보일 거라는 생각들을 하지 않으니까요."

"하하…. 다행이네. 괜히 카시야 경에게 피해가 가는 게 아닌지 걱정했는데…."

타셀의 웃음소리가 아프게 들렸다. 미하일 역시 알고 있다. 카시야가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안 그랬으면 자기 자신부터가 그녀에게 그렇게 순식간에 홀렸을 리 없다. 물론 그는 기사로서의 그녀에게 홀리고 만 것이지만, 매력의 근원은 마찬가지다. 그녀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갈증을 느끼게 한다. 가슴을 뛰게 한다. 잡고 싶게 만든다. 그런 그녀라서 오히려 작은 새장에 잡혀있지 않길 바랐다. 귀족들의 정치논리가 점령한 궁에서 그녀가 시들어 갈까봐 걱정이 되었다. 다른 일이었다면 제 주군이자 친우인 타셀의 감정을 최우선했을 테지만 이번 일은 아니었다. 두 사람의 미래를 아무리 좋게 그려보려고 해도 잘 되지가 않았다.

쓴웃음을 짓던 타셀은 나직하게 그의 걱정을 달래 주었다.

"자유로운 바람을 어떻게 잡아두겠느냐. 네가 걱정할만한 일은 벌어지지 않을 거다. 그녀를 궁에 잡아놓는다면 그거야말로 재능 낭비지."

그의 대답에 미하일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괜…찮으신 겁니까?"

"응. 괜찮아. 괜찮아질 거다. 그러니… 이 얘기는 다시는 꺼내지 마라."

"…예."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아군 쪽 병사 상황을 정리한 문서를 뒤적이는 타셀의 눈빛이 짙은 물색을 머금은 것 같아서 미하일은 차마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자신의 가슴 속에 차오르는 욕망 하나 이룰 수 없는 왕이라니….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야 하는 자신이라니…. 미하일은 가슴이 아려왔지만 짐짓 씩씩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지크 녀석이 지금쯤 막사로 돌아왔을 겁니다. 불러 오겠습니다. 저보다는 그 녀석 머리가 좀 더 좋지 않습니까. 그 녀석은 좀 다른 생각을 할지도 모르죠."

고개를 끄덕이는 타셀을 뒤로 하고 미하일은 막사를 나왔다. 쇠 냄새가 바람에 섞여있는 전쟁터의 공기가 그의 뺨을 때리는 것 같았다.

'그래. 전하는 반드시 이 제국의 황제가 되실 테고, 분명 또 다른 사랑을 만나게 되실 거야.'

미하일은 다시 단단해진 눈빛을 하고는 지크를 찾으러 그의 막사로 향했다.

미하일이 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타셀은 자신이 단단히 중심을 잡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다시금 떠올렸다.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 제 측근들까지 불안하게 하면 안 되었다. 그는 정신을 집중해 에르논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자신 있나? 만에 하나 일이 잘못 되었을 때, 황궁에서도 바깥으로 공간 이동해 나올 수 있나?]

그러자 곧 에르논으로부터 답신이 왔다.

[제 공간 이동 마법을 방해하려면 저보다 더 강력한 마법사가 결계를 쳐야 하는데, 아시잖습니까? 제국에 그럴 수 있는 놈이 없다는 거.]

[재수 없어.]

타셀은 겉모습은 비실비실한 주제에 자존심 하나는 꼿꼿한 에르논 때문에 피식 웃었다. 하긴, 그 자존심을 받쳐줄 만큼 그의 마력은 어마어마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난 전투에서 그를 막을 수 있었던 것은 천운이었다. 어쩌면 그를 회유하라는 주신 헤바의 안배였을까.

[황궁으로 가. 우리도 그쪽으로 분대를 파견해두겠다. 일이 잘못되면 곧바로 궁 밖으로 공간 이동해 나와라. 분대장에게 그대를 엄호하라 이르겠다.]

[알겠습니다. 알리스타스 공작이 죽고 나면 케일런 진영 내에서 내부 분열이 일어날 겁니다. 상황을 주시하십시오.]

그 메시지를 끝으로 두 사람은 마음을 굳혔다. 그리고 때마침 미하일이 지크를 데리고 막사로 돌아왔다.

"전하. 지크를 데리고 왔습니다."

"들어와."

똑같이 생긴 두 사람이 차례로 막사에 들어섰다. 그리고 그들이 뭐라고 입을 떼기도 전에 타셀이 먼저 말을 꺼냈다.

"에르논은 모레 밤, 황궁으로 떠난다. 혹시 모르니 1개 분대 정도를 수도로 보내두게. 그리고 그가 떠나기 전 알리스타스 공작을 죽일 거다. 그로 인해 케일런 진영 내에서 변화가 생길지도 모르니 전열을 가다듬고 긴장하도록."

"예? 그를 보내실 겁니까?"

"방법이 없지 않나. 저쪽에 추가 병력이 지원된 지금, 우리는 함부로 선공격을 할 수가 없어. 에르논 혼자 공작성을 파괴하는 건 가능할지 모르지만 군대까지 에르논을 잡기 위해 파견되면 우리의 지원 없이는 무리다. 한번 쓸려나간 마력이 다시 차오르려면 시간이 걸려. 에르논 말마따나 이 기회에 내 빌어먹을 아버님이 도대체 무슨 짓을 벌이려는지 확인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어차피 최대의 적은 황제야."

어차피 애초부터 선택지가 다양한 문제는 아니었지만 막상 에르논이 알리스타스 공작을 죽이고 황궁으로 들어간다고 하니 지크나 미하일 역시 뭔가 일이 너무 수월하게 풀리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해졌다.

"정말… 괜찮을까요?"

"괜찮아야해. 대마법사까지 못하는 일이라면 누가 하겠나?"

"하아…. 그럼, 황성으로는 어느 분대를 보내는 게 좋겠습니까?"

"…카시야 경의 분대를 보내. 1개 분대 병력으로 그 이상의 역할을 해낼만한 분대가 거기 밖에 없잖아."

"카시야도… 보냅니까?"

지크의 질문에 타셀의 입에서는 곧바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욕심 같아서는 위험한 곳으로 가지 못하게 잡아 두고 싶었다. 심지어 그게 시커먼 악의 소굴 같은 황궁이라는 데야…. 하지만 안다. 그녀는 뼛속까지 기사임을. 그녀에게 얌전하게 자리나 보전하라는 명령은 절대 그녀가 바라는 것이 아님을.

"분대장이 가지 않으면 누가 가게?"

"알겠습니다. 전하겠습니다."

"미하일, 자네는 아나클리프 경, 라몬트 경, 갤리언 경과 함께 우리 쪽에서 동원 가능한 모든 병력과 물자를 파악하게. 공작의 죽음이 케일런의 마음을 급하게 만들 수도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곧 준비하겠습니다!"

쌍둥이 기사와 함께 막사를 나온 타셀은 파랗게 높아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뭔가가 시작되려는 기운이 너른 벌판 위를 맴도는 것 같았다.

============================ 작품 후기 ============================

지난 회차에 100개가 넘는 코멘트가 달려있더군요.

그 숫자를 보고 대충 무슨 내용일지 짐작이 가서 코멘트창을 열어보는 데 꽤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타셀의 포기가 너무 빠르다는 의견에는 저도 고민이 좀 되더군요. 제 머릿속에서는 자연스럽게 이뤄진 일인데 글로 옮기며 생략하는 부분이 많다보니 섬세한 감정선 설명이 부족했나봐요. 출간 원고에서는 그 부분이 자연스럽게 느껴지도록 손을 더 봐야겠네요.

햇병아리 자까는 이렇게 여러분께 배워갑니다. ㅎㅎㅎㅎ

+ 추가: 엌ㅋㅋㅋ 타셀 감정선 괜찮다는 코멘보고 가슴 쓸어내렸어욬ㅋㅋㅋ 내 머릿속에서만 자연스러웠나 싶어서 사실 당황했었는데. ㅎㅎㅎ

+ 그녀의밤 님, 하양사슴 님. 후원쿠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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