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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홍의 카르마-87화 (87/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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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셀로부터 황궁으로 가라는 허락이 떨어진 뒤, 에르논은 드디어 코앞으로 다가온 공작에 대한 복수를 기쁘게 기다리며 이틀을 버텼다. 사실 애초에 계획한대로 공작 일가를 전부 응징하지 못하게 되어 아쉽기는 했지만, 황제의 꿍꿍이를 알아낼 수 있는 이번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어차피 속박 마법만 풀면 1황자쯤이야 손가락 하나로도 죽일 수 있는 것이니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았고, 알리스타스 공작만 치우고 나면 나머지는 타셀이 처리해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 사이 황궁으로 가서 황제를 칠 수 있는 열쇠를 찾아보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공작에게 내 신병을 요청했다는 것을 보면, 황제 역시 나와 공작 사이의 속박을 알고 있는 거겠지? 아니라면 나를 직접 찾아낼 생각 먼저 했을 테니까. 그럼 내가 속박에 걸려 있으니 제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다 귀찮은데 그냥 황궁으로 들어가서 바로 황제를 죽여버릴까?'

잠시 동안 에르논은 황제를 곧바로 죽여버리는 안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 편이 속도 시원하고, 일도 빨리 마무리될 것 같기는 했지만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황제가 없어지면 타셀이 케일런을 다 해치우고 황성으로 진입하기 전에 황궁은 제일 안쪽 곳간까지 탈탈 털릴 거야.'

곳간도 곳간이지만 혼란한 틈을 타 황제를 지지하던 귀족들이 중요 문서나 황제의 인장,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 신검 따위를 들고 도망갈지도 모른다. 자신이 아무리 마력과 마나가 많다고 해도 궁내의 모든 사람을 다 없애버릴 수 있을 만큼 무한하지는 않다. 궁내 사람들을 단지 황제파의 귀족이나 신하라는 이유로 다 죽여도 안 될 것 같았고. 그렇다면 타셀이 케일런을 치우는 사이 얌전히 황제를 어르고 달래다가 타셀이 황궁으로 진격해올 때를 맞춰 황제를 없어버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전쟁 영웅으로 역사에 기록되는 거 아닐까?'

에르논은 속으로 큭큭대며 우스운 생각을 했다.

하지만 사실 그는 역사에 기록되고 싶은 게 아니었다. 아무리 공작의 속박에 의한 짓이었다 하더라도 자신은 용서받지 못할 짓을 많이 저질렀다. 타셀이 이 제국의 황제가 되고나면 그가 도와달라는 것까지만 대충 마무리해주고, 자신은 멀리 떠날 생각이었다. 카시야가 따라와 준다면 바랄 게 없겠지만, 그녀에게 그것을 강제하고픈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녀는… 어딘가 정착해 남들과 같은 행복을 누리며 살아도 좋을 것 같았다. 그녀의 곁에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가 서 있는 모습을 상상만 해도 가슴이 짓눌리는 것 같았지만 그녀만 행복할 수 있다면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되면, 적어도 내 덕분에 전쟁에서 이겼다고 실컷 들먹이자. 그거라도 기억하라고 우겨야지. 그렇지 않으면… 날 잊어버릴지도 모르잖아.'

쓸쓸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으며, 이제 잠시 후면 영영 볼 일이 없어질 그의 방을 둘러보았다.

어린 시절 성으로 들어 온 이후 이 방에서 줄곧 지냈다. 성의 한 쪽 구석, 공작가 사람들이나 이 성에 기거하는 권세가들의 방과는 멀리 동떨어진 곳에 있는 허름한 방. 시종의 방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햇볕도 들지 않는 방이었다. 이 방에서 그는 많이도 울었다.

별 시답잖은 이유로 지하의 체벌실에 끌려가 등이 터지도록 채찍질을 당하거나, 단지 그가 벌레 같아지는 모습이 보고 싶다는 아들들의 요청에 공작이 속박 마법의 '처벌'을 발동하거나, 며칠 동안이나 독방에 갇혀 굶주리거나, 남색을 즐기는 공작의 손님에게 차마 말 못할 짓을 당했을 때, 그 피폐해진 몸을 이끌고 돌아와 누울 수 있는 곳은 이 방 밖에 없었다.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울었고, 울면서 제 몸 속에 흐르는 마력을 저주했다. 그 마력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끌려올 일도 없었을 텐데…. 아무리 굶주렸다고 해도 차라리 피엔의 뒷골목이 나았다. 하지만 심장을 뽑아내고 몸속의 피를 다 빼내지 않는 한 대마법사로 태어난 자신의 마력을 없앨 수는 없었고, 그 빌어먹을 마력은 짓이겨진 그의 상처를 빠르게 아물게 했다. 그렇게 해서 멀쩡해지면 며칠 뒤 또 매질을 당하는 것이었다. 끝나지 않는 악몽이었다.

1황자가 반란을 일으키고 알리스타스 공작에 의해 그동안 공부하고 연구했던 공격 마법을 펼쳐 보인 뒤로는 겉으로나마 그를 대마법사 취급을 해줘서 그나마 나아졌지만, 어린 시절의 그 지옥 구덩이 같던 경험은 영혼에 잔인한 상처를 남긴 채였다. 그 상처는 아물지도 않았다. 시도 때도 없이 피를 흘리며 오갈 데 없는 분노를 만들어냈다. 제 목줄을 쥔 알리스타스 공작가로 향하지 못했던 그 분노는 아무 죄 없는 다른 이들에게 향해졌다. 타셀이 자신을 받아들였지만 아마 그의 병사들은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 전쟁만 끝나면 떠나야했다. 타셀에게 해가 되지 않도록, 카시야에게 해가 되지 않도록….

그의 아픈 상처에서 흘러나오던 피를 처음으로 멈춘 것이 카시야였다.

그녀는 그녀 자신의 고통마저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게 말해서,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상대적인 안도감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그녀가 이 방에 딸린 욕실에서 목욕을 하고 나오며 했던 얘기들은 듣는 순간 그게 꾸며낸 얘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남 일처럼 얘기했지만, 차라리 남 일이었다면 그렇게까지 건조하게 얘기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때 알았다. 나보다 더 아픈 사람이 있다는 것을. 그렇다면 도대체 이 여자는 얼마나 지독한 고통을 겪어온 것일까, 하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그녀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하아…. 왜 어떤 생각을 해도 그 녀석 생각으로 마무리되는 거지? 중증이네….'

에르논은 침대에 풀썩 누워 아예 카시야 생각을 시작했다. 그녀의 무심한 얼굴, 낮고 중성적인 목소리, 심드렁한 말투, 매혹적인 에메랄드 빛 눈동자, 탄탄한 몸매, 가끔… 아주 가끔 내보이는 미소….

'보고 싶다.'

눈을 감아도 떠오르는 그녀였지만, 직접 마주하고 있는 기분은 말로 설명할 수가 없다. 포로 교환식 때 갑자기 수레 위로 드리워졌던 그녀의 얼굴과 뜨거운 입김이 지금도 이렇게 심장을 뛰게 하고 있으니….

그때 방으로 목욕 하녀가 들어왔다.

"에르논 님. 공작 각하께서 에르논 님의 목욕과 단장을 시작하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그녀의 말에 에르논의 눈빛에 생기가 돌았다.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공작가와의 연을 끊을 시간인가!'

에르논의 목욕과 단장은 꽤나 공들여 행해졌다.

하녀들이 가져온 의복도 마치 진짜 '대'마법사나 입을 법한 고급스러운 로브였다. 그의 눈동자 색을 더 강조하는 듯한 보랏빛 벨벳 로브는 군데군데 금사로 수가 놓아져 있어 한눈에도 비싸보였다.

'상품을 포장하는 데 공을 들이는군. 공작이 황제에게 잘 보여야 될 일이 있나보지?'

삐딱하게 웃는 그의 뒤에서 하녀 둘이 부지런히 그의 치장을 도왔다. 마치 귀족 영애의 치장을 하듯 쇄골을 넘어서는 그의 하얀 머리카락을 여러 번 빗질하고 창백한 그의 안색을 조금이라도 건강하게 보이게 하려고 분홍빛 분까지 발랐다. 그쯤 되니 자신이 황제에게 침노로 보내지는 게 아닌가 의심이 될 정도였다.

보랏빛 로브 위에는 짙은 남색 망토가 얹어졌다. 고급 벨벳이라 부드럽기 그지없었다. 거기까지 일을 마친 하녀들은 '잠시 후 시종이 모시러 올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방을 빠져나갔다.

이제, 그가 그토록 기다려온 복수의 순간을 맞이할 차례였다.

에르논은 카시야가 전해줬던 속박 술식을 천천히 뒤집어 읊었다. 천천히라고는 하지만 고작 1분 남짓한 시간이었다. 그토록 오랫동안 그를 괴롭히던 저주를 벗어나는 것이라기엔 지나치게 짧은 시간이라 우습다고 여겨질 지경이었다. 명치께의 기분 나쁜 문양이 사라지는 느낌은 굳이 옷을 벗어서 확인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명확했다.  이제 그는 자유였다. 카시야가 그에게 전해준 자유. 자신은 이것 하나만으로도 그녀에게 평생을 갚아도 다 갚지 못할 은혜를 입었다.

빙긋 웃던 에르논은 고개를 들어 거울을 바라보았다. 제대로 갖춰 입고 단장까지 한 에르논은 누가 보아도 대마법사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물론 그 오라(aura)를 만든 것은 방금 얻게 된 '자유'였지만 말이다.

그는 기감을 펼쳐 제 방 주변 상황을 파악했다. 아직 방 근처로는 아무도 다가오는 것 같지 않았다. 전해들은 출발 시간도 밤 10시 즈음이었으니 아직 시간은 충분했다. 그는 케네스의 방으로 공간 이동을 했다.

케네스는 침실에 있었다. 한 번도 들어와 본 적 없었던 그 방은 화려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지만 지금 케네스는 그 침실에 제 부인이나 첩도 들이지 않고 시종이나 하녀까지 물린 뒤 방문을 걸어 잠근 상태였다. 이 자가 죽을 때가 되니 알아서 준비를 하는가 싶었는데, 정작 그는 침실 안에 있는 작은 응접실에서 뭔가에 집중하느라 에르논이 방 안에 나타났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에르논은 기척을 죽이고 그의 곁으로 다가가 보았다.

'…하! 겨우 이 정도 인간이었나….'

그는 에르논을 데리러 온 밀사가 건넨 보석함을 곁에 놓고 그 안에 담긴 보석을 하나, 하나 돋보기로 확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도 믿지 못해 제 아내나 아들, 집사까지 들어오지 못하게 한 채 숨어서 그 보석들을 챙기고 있는 작태가 우스웠다. 그동안 이런 인간이 무서워 벌벌 떨었다니…. 새삼 억울해서 미칠 것 같았다.

"공작 각하. 많이 바쁘신 모양입니다."

낮게 울린 에르논의 목소리에 케네스는 펄쩍 뛸 듯이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앞에는 '빛이 난다'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성장(盛裝)한 에르논이 서 있었다. 순간 그는 이게 꿈인지 의심이 되어 제 눈을 비볐다. 그러나 눈앞의 에르논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존재감을 더하는 중이었다.

"너… 너… 어떻게…!"

"아, 그동안 말씀은 안 드렸는데, 사실 저는 공간 이동 마법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제가 어떻게 안개 숲에서 살아 돌아왔겠습니까."

케네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가 곧 뱀 같은 차가움을 띠었다.

"네 이놈! 날 알현하려면 청을 넣고 기다려야지, 감히 곧바로 내 침실로 오다니! 행동도 그렇고 방금 그 말투도 그렇고, 아주 건방지기 짝이 없구나! 곧 손님들을 따라 떠날 놈이라 하면 내 '처벌'을 내리지 못할 것 같으냐?"

"네? 아하하하하하!"

공작의 말에 에르논은 해맑은 얼굴로 웃음을 터트렸다. 공작 앞에서 처음으로 소리 내어 웃는 것이었다. 에르논 자신마저도 자기가 이렇게 기분 좋게 웃는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하지만 앞으로 벌어질 일이 상상이 되어 진심으로 기분이 좋았다.

"네 이놈…. 이젠 완전히 실성한 것이냐? 감히 뉘 앞이라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게야?"

케네스는 진짜 화가 난 것 같았다. 에르논은 아직 웃음기가 남은 목소리로 의아하게 자신을 쳐다보는 케네스에게 공손히 말했다.

"그럴 리가요. 잠시 후면 제 태도가 굉장히 예의바른 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실 겁니다."

그 말을 끝으로 에르논은 부드럽게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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