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8 분몌(6) =========================
"아, 미리 말씀드리는 게 좀 더 공포심을 극대화할 수 있을까요? 저는 지금부터 공작 각하를 고문하다가 죽일 생각입니다."
에르논은 오른손에 마력과 마나를 모으며 음전한 말투로 제 행동을 설명했다. 그러자 케네스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웃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으흐… 으하하… 으하하하하! 네 놈이 진짜 타셀한테 붙잡혀 모진 고문이라도 당했나보구나. 이 정도로 미쳐버렸다니. 크크큭. 주인에게 이를 드러낸 개새끼는 몽둥이맛을 봐야 정신을 차리지. 네가 아무리 미쳤어도 이 고통을 잊지는 않았을 것이다."
케네스 역시 오른손을 치켜들며 '주인의 문양'을 드러냈다. 마력이 없는 '주인'이 마법사인 '노예'의 마력을 차용해 그를 속박하고 처벌할 수 있게 한, 헬라스 같은 자가 아니었다면 만들어낼 수 없는 최고 수준의 마법! 케네스는 평생 살아오면서 이것 이상으로 마음에 드는 마법은 본 적이 없었다. 마치 자신이 대마법사가 된 기분이었으니까. 그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익숙한 주문을 외웠다.
"담나빌리타스!"
그가 이 주문을 외우며 제 손바닥에 있는 '주인의 문양'을 드러내면 에르논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내리꽂히는 고통에 짐승 같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져 바들바들 떨었었다. 고통이 너무 심하면 비명도 잘 나오지 않을 때가 있었고, 어느 쪽으로 몸을 말아도 정신을 놓아버릴 듯한 고통이 밀려들었기 때문에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렇게 바닥에 쓰러져 눈물과 침을 흘리며 꺽꺽대는 그를, 공작의 아들들은 발로 차고 밟으며 즐거워했다. 그 위로 채찍질을 하기도 했다. 이 '처벌'의 가장 악랄한 부분은, 그 고통을 받는 동안 정신을 놓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인내의 한계치를 넘어선 고통에 맞닥뜨려도 기절하지 못했다. 온몸의 통점이 느끼는 최고치의 고통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했고, 공작이 처벌을 거두는 순간에야 겨우 암전에 빠져들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케네스가 예상했던 그 익숙한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에르논이 흘린 체액으로 바닥의 카펫이 더럽혀질 것을 각오하고 내린 처벌의 주문이었는데, 아무 일도 벌어지지가 않았다.
"…어?"
케네스의 얼빠진 목소리를 들으며 에르논은 활짝 웃었다.
"하아…. 정말… 이렇게까지 예상대로 움직여주시니 오히려 상쾌할 지경입니다. 그 어떤 거리낌도 없이 당신을 죽일 수 있게 돼서 정말 기쁩니다."
그가 내뱉는 언어의 의미를 몰랐더라면 더없이 화사한 분위기의 에르논이었다.
"각하. 각하께서 내리시던 그 '처벌'의 고통이 어떤 것이었는지 궁금하시지 않습니까? 어떤 고통이길래 저렇게 옴짝달싹 못하는가 궁금하지 않으셨나요? 이제부터 제가 알려드리겠습니다. 아, 걱정 마십시오. 일단 지금은, 그 이상의 고통은 가하지 않겠습니다. 정확히 제가 느꼈던 만큼만 느끼게 해드리겠습니다."
그 말에 드디어 케네스의 눈동자가 두려움에 물들기 시작했다. 에르논은 그 눈동자를 바라보며 낮게 주문을 읊조렸다
"이미토르담나빌리타스-!"
"흐악! 흐아아아아아아아악!"
에르논이 주문을 외우자마자 케네스의 몸이 갑자기 펄떡이듯 경직되더니 '쿵!'하는 소리가 날만큼 크게 바닥에 넘어지며 바르르 떨었다.
"으갸아아아악! 그, 그만! 그마안!!!"
케네스는 벗어날 수도 없는데 자꾸만 발로 바닥을 밀어대며 바르작거렸다.
"아…. 이런 기분이셨나요? 당신이 고통스럽게 바닥을 기는 모습을 보니까, 기분이 너무 좋네요. 그래서 고통에 몸부림치는 제게 채찍질을 더하셨던가요?"
그 말끝에 에르논의 보랏빛 눈동자가 잠깐 반짝, 하고 이채를 더했다. 그러자 케네스는 마치 채찍을 더 얻어맞는 것 같은 고통을 추가로 느껴야 했다.
"흐악! 아악! 그! 그만! 제발! 으아악!"
"저도 그렇게 빌었었죠. 제발 그만해달라고…. 그때 제 기분, 이제 좀 이해하시겠어요?"
에르논은 순간적으로 고문 마법을 거뒀다. 케네스는 바닥에서 오줌을 지리며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 모습을 에르논은 가만히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아직, 멋대로 죽어버려서는 안 된다. 아직 그가 맛봐주어야 할 고통이 많이 남아있었다.
"흐윽…. 흐윽…. 워, 워, 원…하는 게… 무, 뭐냐. 보, 보석! 그래, 저, 저기 있는 거, 다 가져 가거라. 내, 성의, 아니, 사, 사죄의 표시로, 바, 받아주렴."
케네스는 방금 전까지의 기세등등하던 모습은 어디 갔는지, 그저 공포로 점철된 눈을 들어 빌듯이 기고 있었다. 그 말을 듣고 에르논은 천천히 공작이 앉아있던 소파에 앉아 그가 내려다보던 보석들을 집어 들고 무미건조한 눈으로 훑어보았다. 공작은 그것을 긍정적인 반응으로 받아들인 것 같았다.
"내가 다 확인해보지는 않았…는데, 대충 본 것만으로는, 지, 진짜, 귀중한 보, 보석들이다. 너, 다 주마. 그래, 우리 군의 영, 웅이신데 그 정도, 보석을 받을 가치는 있지…."
"가치…?"
발발 떠는 케네스를 향해 에르논이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가치라고? 당신이 내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 과연 알고 있을까?"
에르논이 다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케네스는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전 세계의 인구가,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략 6억 명 정도 된다고 합니다. 칼리스토니아 제국의 인구가 1억 2천명이라고 하고요. 그런데 대마법사는 전 세계 6억 인구 중에 단 일곱 명 있습니다. 이게 무슨 소린지 아십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마법사를 구경도 못해보고 죽어요. 하긴…. 희귀한 건 아셨을 테죠. 그러니 창녀의 자식을 잡아왔겠지…."
에르논의 발걸음이 천천히 케네스를 향했다. 케네스는 "히익-!"하는 소리를 내며 침실 문 쪽으로 기어갔다.
"대마법사 따위, 내가 바라고 된 것도 아닌데…. 아, 참. 그러고 보니 저 이전에 저희 어머니도 괴롭히셨지요? 어머니가 공작성에 한 달 동안 잡혀 계시면서 차마 입에 올리지도 못할 일들을 당하셨다던데…. 그런데 그것보다 더 이해가 안 되는 건, 왜 당신이 원해서 잡아온 여자면서 그렇게 매질을 해서 버렸어요? 응? 어머니는 그 후유증으로 정신도 반쯤 나가버렸고, 고통스럽게 앓다가 돌아가셨대요. 참… 아름다운 분이셨는데."
케네스는 침실 문에 당도하여 잠금장치를 풀려고 노력했지만 아무리 문고리를 돌려보아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흐음…. 아, 어머니 얘기하느라 깜빡 했는데 말이죠, 그 문, 열리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그 밖으로는 아무런 소리도 새어나가지 않아요. 사람이 저 죽을 날을 아는 건지, 공작 각하께서 알아서 사람들을 물리셨더라고요? 일을 쉽게 만들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사실, 죄 없는 사람 몇 죽이게 될까봐 걱정했거든요."
에르논은 다시 활짝, 선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물론 케네스에게는 그 웃음이 이 세상 가장 악랄한 미소로 보였겠지만….
"자, 충분히 쉬신 것 같으니, 다시 시작해볼까요? 이번엔 어머니가 느끼셨을 고통을 제 나름대로 상상해서 선보여 드리겠습니다. 사실, 그 고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지만, 각하께 꼭 전해드리고 싶었어요. 이제 각하께서도 제 어머니가 어떤 기분이셨을지 절감해보도록 하세요. 카웨르노!"
에르논의 말이 끝나자마자 케네스는 제 항문이 지나치게 굵은 무엇엔가에 뚫리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으, 으, 으아아아아아!!"
"어머니를 고문하면서 그랬댔죠? 창녀 주제에 이렇게 돈이 많이 드는 유희를 즐기게 된 것을 감사히 여기라고…. 각하. 6억 명의 인구 중에 제 마법의 대상이 된 것을 감사히 여기세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마법사를 보지도 못하고 죽는다니까요? 이 얼마나 특별한 체험입니까? 안 그래요?"
에르논은 고통과 분노와 희열이 뒤섞인 눈빛을 하고 케네스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여전히 비명을 지르고 있는 케네스에게 말했다.
"아직 시간 많아요. 저와 제 어머니의 25년간의 고통을 속성 주입해드리죠."
*
몇 시간 뒤, 에르논은 침대에 반듯하게 누운 케네스의 몸 위로 붉은 비단 이불을 잘 덮어주었다. 다정하기 그지없는 손놀림이었다. 케네스의 얼굴이나 몸에 겉으로 드러난 상처는 없었다. 그래서 턱 아래까지 이불을 덮어주고 나니 마치 평화롭게 잠든 모습처럼 보였다. 하지만 케네스의 몸 안은 다져진 고기와 다를 바 없는 상태였다. 아마 그의 몸에 걸어둔 주술의 지속 시간이 끝나면, 그의 시체는 제 몸에 나 있는 모든 구멍으로 피를 철철 흘릴 터였다.
'그 모습까지는 보지 못해 아쉽지만, 할 수 없지.'
에르논은 몇 시간의 흥분 때문에 살짝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생각했다. 그리고 곧바로 제 방으로 돌아가려다가 테이블 위에 여전히 벌려진 보석들에 눈길을 주었다. 멈칫거리다 다시 테이블로 향한 그는 보석함에 보석들을 집어넣었다. 다만, 굉장히 질 좋은 에메랄드 원석 하나만은 제 품 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 보석함을 타셀의 막사로 공간 이동시켰다. 그리고 곧장 타셀에게 메시지를 전달했다.
[알리스타스 공작이 저보고 가지라던 보석입니다. 지난 세월에 대한 위자료로 보기에는 턱없이 적지만, 전하께서 필요하신 곳에 써주신 다면 그나마 기분이 좀 나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상쾌해진 마음으로 공작성 구석구석, 인적이 없고 어두운 곳만 돌아다니며 기둥이 되는 부분에 작은 마법진을 마력으로 새겨 넣었다.
똑똑-.
모든 일을 마친 에르논이 방에 도착하자마자 노크 소리가 났다.
"들어와."
에르논의 허락에 처음 보는 시종이 들어와 고개를 조아렸다.
"출발하실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밑에서 큰 공자님과 손님들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가자."
에르논은 순순히 시종의 뒤를 따랐다. 시종은 몇 시간 동안 방에서 계속 대기했을 에르논이 약간의 홍조를 띠고 있는 게 의아했지만 이윽고 하녀들이 분홍빛 분을 발랐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분을 너무 바른 게 아닌가? 남사스럽게….'
시종은 속으로만 혀를 차며 그를 손님들에게로 안내했다.
에르논은 다행이 시간을 맞춘 것에 대해 가슴을 쓸어내렸다. 케네스에게 오랜 울분을 풀어대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던 것이다. 그가 따라가야 할 '손님'들은 남의 눈에 띄어서는 안 되었는지, 메인 홀이 아닌 성의 쪽문과 가까운 테라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시종과 함께 계단을 내려오는 에르논을 발견한 공작의 큰 아들 카벨이 눈을 부라렸다.
"빨리 빨리 튀어오지 못해? 손님들을 기다리시게 만들다니, 이 돼지만도 못한 천것이!"
그는 일부러 황제의 밀사들 앞에서 에르논에 대한 자신의 우위를 드러내고 있었다. 에르논은 이제 그 꼴이 우습기까지 했다. 평소 같으면 제 고함에 고개를 푹 숙이며 빠른 걸음으로라도 다가왔을 에르논이 오늘따라 왠지 굉장히 여유로운 모습으로 내려오자 카벨은 눈을 까뒤집듯 노려보다가 그의 명치 쪽으로 주먹을 날렸다. 그 모습에 황제의 밀사들까지 깜짝 놀랐을 정도였다. 하지만 에르논은 괴로운 척하면서 그의 주먹을 할퀴어 손톱 밑에 그의 피를 묻혔다. 그에게 내릴 징벌 마법을 위해서는 그의 피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물론 카벨은 에르논이 자신의 손을 할퀸 것에 거품을 물것처럼 화를 냈다.
"내가 손님들 앞이라고 네 놈에게 채찍질을 못 할 것 같으냐! 캐스터! 채찍을 가져와!"
에르논은 어떻게 아비와 아들이 이렇게 똑같을까 싶어서 웃음이 나올 뻔했다. 다행이 에르논을 데리고 갈 손님들이 카벨을 말렸다.
"대마법사를 채찍질하시는 것은 공작가의 권한이십니다만, 저희는 지금 빨리 출발해야 합니다. 처벌은 돌아와서 내리시지요."
씩씩대던 카벨은 그 말에 겨우 분을 억눌렀다.
"이 건방진 새끼, 데려가다가 말 안 들으면 말채찍으로 내리쳐도 좋습니다. 허락하겠소."
황제의 밀사들은 카벨을 달래면서 에르논을 마차에 태웠다.
깜깜한 밤, 알리스타스 공작성의 쪽문으로 말 네 마리와 마차 한 대가 빠져나와 황궁이 있는 아르카나로 향했다. 마차 안에서 에르논은 제 손톱 밑에 낀 카벨의 피를 가지고 그에 어울리는 처벌의 주문을 외웠다. 카벨은 앞으로 살이 짓이겨지는 것 같은, 그러니까 채찍질을 당하는 것과 같은 고통을 죽을 때까지 느끼다가 숨이 끊어질 것이다. 채찍을 유난히 사랑한 그에게 아주 어울리는 죽음이라고 생각하며 에르논은 미미하게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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