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홍의 카르마-89화 (89/134)

00089 결심(1) =========================

에르논이 황궁을 향해 떠나기 전날, 타셀 진영에서도 에르논의 행보에 발맞추기 위한 물밑 작업이 조용히 진행되고 있었다. 타셀에게서 분대를 이끌고 황성으로 가 있으라는 명을 받은 카시야는 타셀이 마음을 바꿔줘서 고맙다고 생각했다. 전생에서의 버릇이긴 했지만, 아무 임무에도 투입되지 않으면 제 자신이 쓸모없게 느껴지는 것은 여전했다. 다시 한 번, 자신의 가치를 확인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카시야는 타인으로부터의 애정을 갈구하지 않는 대신 쉴 새 없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는 강박증을 갖고 있었지만 본인은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것은 어쩌면 이미 버렸다고 생각했던 생존본능일지도 모르고, 이미 포기했다고 생각했던 애정의 욕구일지도 모른다.

알리시아는 카시야의 출격 소식에 말도 안 된다며 펄쩍 뛰었다.

"정말… 전하께서 그리 말씀하신 거예요? 잘못 들으신 거 아니구요?"

"네. 저는 기사입니다. 이 정도 부상은 어떤 장애도 되지 않으니, 영애께서도 걱정을 거둬주십시오."

카시야의 단단해 보이는 눈매에도 알리시아는 어물어물 거리며 뭔가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결국 그녀는 자신의 카시야의 출격을 막을만한 그 어떤 권한도 없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럼 가시기 전까지만이라도 부디 무리하지 말아주세요. 아직 다 낫지 않은 등의 상처가 덧날까봐 걱정돼요."

눈물이라도 흘릴 것 같은 알리시아의 청을 물리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카시야는 점심나절까지 분대원들을 둘러보고 저녁 전까지 막사에 돌아와 푹 쉬겠다는 약속을 하고서야 알리시아에게서 풀려날 수 있었다.

카시야는 곧장 분대원들이 있는 막사로 향했다. 오늘의 훈련을 취소하고 모두 막사에 모여 있으라고 전언해둔 터였다. 그녀가 남자들의 퀴퀴한 체취로 가득한 막사 문을 열고 들어가자 다들 무슨 일인가 하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동안 훈련들 열심히 받았겠지?"

"예!"

카시야의 질문에 다들 군기가 바싹 든 모습으로 대답한다. 몇 달 전까지의 오합지졸은 이제 이곳에 없었다. 물론 아직도 멀었지만, 카시야는 짧은 시간동안 이만큼이라도 성장해준 그들이 대견했다.

"우리는 내일 아침, 지역을 돌아다니는 상단으로 꾸미고 아르카나로 향한다."

그 말에 모두의 눈동자가 일제히 빛난다. 기왕 '기사'라는 칭호를 달고 전쟁터에 나왔으니 공을 세우고 싶은 것은 이처럼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아르카나에서는, 무슨 임무를 수행합니까?"

"…별 일 안 하게 되는 게 제일 좋고…."

"예?"

그들은 '별 일 안 하게 되면 좋겠다.'는 카시야의 말이 고차원적인 농담인지, 아니면 비꼬는 말인 건지 가늠하느라 서로 눈알들을 굴리며 머리를 짜냈다.

"우리는… 만일을 대비하기 위해 아르카나로 가는 거다. 만약 계획대로 일이 돌아가게 된다면 1황자군을 무찌른 우리 군사가 황제를 치기 위해 아르카나에 당도할 때까지의 상황을 살피는 정도의 일을 하면 되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죽음을 각오하고 어떤 이의 안전을 확보해야 한다."

"누, 누구… 말입니까?"

드디어 우려했던 순간이 왔다. 그들에게 원수나 다름없을 에르논을 구해야 한다고, 사실 너희들이 살갑게 대해주었던 키샤스 경이 바로 그 에르논이었다고 말해야 한다. 과연 그들이 에르논을 받아들일지는,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가 될 수 있다 생각했던 카시야라고 해도 100% 확신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부디 그들이 받아들여줬으면 했다. 카시야는 습관적으로 왼손 집게손가락의 묵주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우리가 구출해야 할 사람은, 대마법사 에르논이다."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정적이 감돌았다. 다들 이게 무슨 소린지 이해가 안 되는 것 같았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에르논이라면… 1황자군의 마법사 아닙니까? 게다가 엄청난 힘을 가진 괴물이라던데, 그 사람을 우리가 구출한다고요?"

의아한 목소리가 조심스레 터져 나왔다.

"그는 이제 적군도 아니고 괴물도 아니다. 너희도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고."

그때 스윈델이 갑자기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설마 진짜로, 키샤스 경이…!"

경악으로 물든 스윈델을 보며 카시야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저 둔탱이…. 모르는 척 하고 있나 했었는데 진짜 모르고 있었군. 저런 눈치로 어떻게 암살을 한다고….'

다른 분대원들은 스윈델과 카시야를 번갈아 보다가 키샤스 경이 뭐 어떻다는 거냐고 스윈델의 옆구리를 찔렀다.

"키샤스 경이… 에르논이었던 거죠?"

스윈델의 말에 주변에서 피식 웃는 소리가 났다.

"뭐? 그 비실비실 예쁘장한 양반이?"

"뭔 소리 하는 거여? 그럴 리가 있냐?"

분대원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를 가만 듣고만 있던 카시야는 다시 그들의 주목을 끌었다.

"스윈델 말이 맞다. 너희들과 며칠간 함께 지냈던 키샤스 경이 알리스타스 공작 휘하의 대마법사 에르논이었다. 그는 지난 번 전투 때 타셀 전하께 생포되었고, 전하의 끈질긴 설득과 회유에 타셀 전하께 투항했다. 그리고 그는 현재 전하의 명에 따라 현 황제의 계략을 파악하기 위해 혈혈단신으로 황궁에 들어가기로 했다. 그가 강력한 마법사임에는 틀림없지만, 그 혼자 황궁의 마법사들과 병사들을 다 물리칠 수 있는 건 아니야. 그는 전하께 꼭 필요한 인재다. 개인적으로 원한이 있더라도 이 전쟁의 승리를 위해 임무에 집중해주기를 바란다. 혹시,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는 이가 있다면 손들어라. 중요한 순간에 감정적이 되어 일을 망칠 수는 없으니, 도저히 그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 두고 가겠다."

카시야의 말에 막사 안은 순식간에 당혹감으로 또다시 조용해졌다. 다 떠나서, 저들이 지난 며칠간 봐왔던 그 비리비리한 미청년이 악마 에르논이었다는 사실에 다들 엄청난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악마라는 위명을 갖고 있는 자치고는 그 얼마나 수줍던 자태였는가 말이다. 분대원들과 비슷한 또래였지만 척 보기에도 예쁘장하고 하얗던 그는 마치 어미를 잃고 잔뜩 털을 세운 채 사람을 경계하는 아기 고양이 같았더랬다. 그 눈동자 안에 어린 불안감이 애처로워서 다들 친절하게 대했다. 처음엔 말을 걸어도 무시하고 눈도 마주치지 않던 이가 하루하루 지날수록 미소를 짓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때마다 다들 티내지는 않았지만 내심 뿌듯해했었다.

게다가 그가 카시야를 대하던 태도는 어떻고! 마치, 그래, 연약한 발톱으로 주변 사람들을 할퀴며 하악대던 아기 고양이가 마침내 제 주인으로서 한 인간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보는 듯했다. 다들 뒤에서는 카시야가 저 순진한 남자 어르고 달래는 꼴 보소, 하며 낄낄댔더랬다. 조만간 잡아먹힐 것 같다면서 말이다. 아마 아기 고양이니, 잡아먹힌다느니 하는 얘기를 에르논이 들었더라면 참지 못하고 모두를 불덩이로 날려버렸을지 모른다.

"어… 아니, 그게… 허, 참…."

"진짜, 아니, 그러니까 농담하지 마시고, 진짜, 키샤스 경이 에르논이라고요?"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와, 말도 안 돼."

“어쩐지, 그러고 보니 며칠 전부터 보이지 않더라니. 포로 교환이 돼서 안 보이는 거였어?”

다들 현실을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았지만 카시야가 보기에는 뭔가 핀트가 어긋난 느낌이 들었다.

"한 가지만 물어보자. 너희들 지금, 키샤스 경이 에르논이었다는 게 놀라운 것뿐이냐? 우리가 에르논을 구출해야 한다니까?"

"아 좀, 가만 있어보세요! 와… 이런 반전이…."

"하긴, 그러고 보면 좀 이상하긴 했지. 귀족 기사라기엔 우리랑 어울리는 데 거리낌 없었고, 평민 기사라기엔 그 뭐냐, 생긴 게 아주 귀족 같았잖아? 특이한 사람이다 싶긴 했는데…."

"그러고 보니까 뭐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체력도 젬병인 사람이 전쟁터에서 아직 살아있다는 것도 이상하긴 했어. 그지?"

"맞어, 맞어."

분대원들은 이제 카시야는 안중에도 없었다. 키샤스가 에르논이었다는 사실이 카시야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큰 충격이었던 것 같았다. 에르논은 절대 구할 수 없다고 버틸까봐 걱정했던 카시야는 뭔가 조금 허탈해졌다.

"어…. 그러니까, 일단 다들 황성으로 가서 임무를 수행하는 건 문제 없겠다 이거지?"

"예? 아, 예…. 명령인데 당연한 거 아닙니까."

카시야는 순간 피식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때 뒤쪽에서 누군가가 야유를 했다.

"에헤이~ 우리 분대장님, 왠지 그 키샤스 경인지 에르논인지가 마음에 드신 모양이네요? 우리가 안 가겠다고 할까봐 걱정 하셨쎄요~?"

얄밉게 놀리는 그 말에 다들 와하하- 하고 웃음을 터트리며 본격적으로 카시야를 놀리려 덤벼들었다.

"어디서 고양이를 주워온다는 소릴 들은 적은 있어도, 남자를 주워오는 여잔 처음 봅니다."

"의외로 잘 어울리십니다. 미모는 우리 분대장님이 조금, 아니, 좀 많이 떨어지시는 것 같지만, 키샤스 경은 아마 확 휘어잡는 여자가 취향인 것 같으니 걱정 마십쇼."

"살살 다루십쇼, 살살. 우리 같지 않게 연약한 미남 아닙니까?"

"낄낄낄. 야, 살살 다루긴 뭘 살살 다루란 말이냐?"

"몰라서 묻냐? 거시기, 그, 알잖어~?"

모두가 이때다 하고 낄낄대며 들고 일어났는데 스윈델만큼은 서서히 뒤로 물러나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카시야와 몇 번 같이 다녀봤다고 이제는 분대원들 중 제일 먼저 카시야의 심기를 읽는 스윈델이었다. 그의 예감에 따르면, 자리에서 일어나 까불대는 저 놈들은 곧 후회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예감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

알리시아는 그날 하루 종일 말수가 적었다. 아직 다 낫지도 않은 몸을 이끌고 임무를 떠나면서도 기뻐보이던 카시야 덕분에 얼마 전부터 그녀의 머리를 어지럽히던 한 가지 문제가 다시 또 고개를 들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문제가 더 복잡해질 수 있다는 생각이 그녀의 결심을 재촉했다.

'전하의 반려….'

다시 곱씹어 봐도 긴장되는 단어의 조합이었다.

자신이 그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도 기쁘지 않았던, 도망치고 싶었던 그 자리를, 지금은 저 자신이 먼저 타셀에게 청하려고 하고 있다. 갑자기 그가 좋아졌다거나 권세가 탐이 나는 것도 아니었다. 어린 아이 응석 같던 고집을 치워놓고 보니, 현재 타셀에게 자신이 가장 힘을 실어줄 수 있는 길이 그것이었고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기에도 현실적으로 가장 가까운 선택지였기 때문이다.

망설여지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이 선택하려는 자리는 미래에 단두대 아니면 보좌의 곁, 둘 중 하나 밖에 마련해두지 않은 자리니까.

하지만 라몬트 자작에게 지금 변경 귀족 연합 내의 미묘한 분위기에 대해 듣고 말았다.

변방 지역, 그러니까 시골 촌구석의 노귀족들은 여전히 미혼인 남성을 애 취급 했고, 그게 주군이라 해도 예외가 없었다. 처음에야 황제나 케일런에 대한 반감으로 의기투합했던 그들이 이제 슬슬 회의 때마다 타셀의 말에 되도 않는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는 얘기를 듣고는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던가. 고작 변방의 귀족 나부랭이가 감히 황제가 될 완벽한 재목 앞에서 제 짧은 식견을 '어른의 충고'라는 식으로 미주알고주알 주워 담다니.

그 분위기를 틈타 혼인 적령기의 딸이 있는 귀족들은 도박이라도 걸듯 제 딸들을 앞세워 타셀에게 약혼에 대한 압박을 넣는 중이란다. 어차피 전쟁 중이니 제대로 된 혼인식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약혼의 형태로 임시 혼인의 상태를 만들자는 것인데, 이 생각이 참으로 교활한 것이, 타셀이 승리하면 잭팟이 터지는 것이요, 패배로 끝난다 하더라도 도마뱀 꼬리 자르듯 딸 하나만 버리면 가문은 부지할 수 있다는 생각에 기반 했기 때문이다.

케일런도 스무 살이 되자마자 혼인을 했는데 타셀이 아직 미혼인 것은 그의 탓이 아니었다. 귀족들에게는 황제에게 버려지다시피 한 황자 따위, 사위로 만들 가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역시 위태로운 자신의 지위 때문에 애먼 희생자를 더 만들지 않기 위해 혼인하지 않은 것도 있었고 말이다. 그랬는데 지금 귀족들은 타셀에게만 책임을 묻고 있었다. 심지어 친하게 지내는 미하일과의 엄한 소문을 만드는 작자들도 있다던가.

어쨌든 지금 이 상황에서 황제파나 제 1황자파에 비해 느슨한 변경 귀족 연합을 단단히 묶기 위해서는 그의 혼인, 최소 약혼이라는 이벤트가 있어야 했다. 노귀족들에게 어른 대접을 받고, 타셀의 최우방인 엔드로스의 지위를 공고히 해 타셀의 의견에 힘을 실어줘야 했으며, 황제의 장인 자리를 노리는 승냥이 떼가 헛물을 들이킬 기회 자체를 박탈해 쓸 데 없는 분란을 잠재워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알리시아가 마음을 먹기에는 걸리는 문제가 두 가지 있었다. 자신이 타셀의 반려가 된다면 자신의 부모 형제는 영영 살얼음판 위를 걷는 듯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과, 다른 이를 마음에 품고 있는 타셀이 괴로워할 것이라는 것.

'날 미워하실까…? 괘씸하게 생각하실까…?'

카시야가 돌아온 날 막사를 찾아왔던 타셀의 눈빛과 태도는 보는 이가 고통스러울 정도로 제 사랑을 억누르고 있는 한 남자의 모습일 뿐이었다. 그의 괴로운 사랑을 눈치 채지 못할 수가 없었다. 그가 왜 자신의 사랑을 억누르고 있어야 하는지 역시 잘 안다. 황족과 평민 출신 여기사의 사랑이라니, 그의 측근들부터가 격렬하게 반대할 것이다. 특히 귀족들 중에는 평민 출신 여기사라고 하면 창녀나 다름없다 생각하는 이들이 많았다. 평민 여아가 기사가 됐다는 것은 집안에서 버려졌다는 얘기이고, 비빌 언덕 없이 싸움터를 전전하는 여인들의 삶이야 험난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카시야가 처녀이든 아니든 그들은 그녀를 창녀로 매도할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카시야가 황후가 될 수 있는 확률이란 기적을 바라야 할 만큼 희박했다. 물론 타셀이 밀어붙인다면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아마 그는 카시야에게 그런 경험을 겪게 하고 싶지도 않을 것이다. 그의 성정이라면 그녀에게 고백 한 번 하지도 않고 제 마음을 죽일 것이다.

하지만 얼마나 가슴이 아플까. 자신의 혼인 요청에 그는 아직 다 포기하지 못했을 그 사랑을 완전히 놓아야 한다는 선택의 강요를 받을 수 있었다. 지금의 그로서는 딱히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을 모르는 게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그에게 혼인을 요청할 것이다. 이 전쟁에서 타셀이 승리하기 위해, 자신을 포함해 그의 승리를 위해 운명을 건 모든 이를 위해….

알리시아는 긴 고민을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타셀에게 보고를 하러 갈 시간이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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