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1 결심(3) =========================
혹시 이전 회차를 25일 새벽에 보셨던 분들은 다시 한 번 열람 부탁드려요.
제가 실수로 퇴고 전 원고를 올렸다가 삭제 후 오후 2시 반쯤에 새로 올렸거든요.
칠칠치못해 죄송합니다.ㅠㅗ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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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심(3)-->
에르논이 알리스타스 공작성을 떠난 다음날 아침, 카시야는 분대원들과 함께 피엔으로 향했다. 타셀이 에르논에게 만일의 사태 때에는 피엔으로 공간 이동 하라고 전해두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황제의 영향력이 강한 아르카나에서는 몰래 움직이기도 어려울뿐더러, 어차피 에르논이 공간 이동이 가능하다면 피엔으로 이동해 오는 편이 그를 빼돌리기에도 수월했다. 카시야로서도 툴라나 다른 섀도 워커들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피엔이 더 편했다.
분대는 지방에서 새로 생긴 상단으로 위장했다. 스무 명 가량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움직여도 이상해보이지 않을 집단은 현재 제국을 떠돌며 물자를 사고파는 상단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전쟁이 난 뒤 물자가 부족한 지역들이 생기고 그 사이를 다니며 물건을 팔면 꽤나 쏠쏠한 이익을 챙길 수 있었기 때문에 제국 각지에서는 허가받지 않은 상단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었다. 제국도 그들을 일일이 통제할 상황이 못 되었고, 그들이 없다면 굶어죽는 지역이 생길 게 뻔하다보니 일단은 눈감아주고 있는 분위기였다. 스무 명이면 인원이 조금 많은 것 같기는 했지만 조를 나눠 움직여도 될 테니 큰 문제는 없었다. 카시야와 그녀의 분대원들은 다들 허름한 평복 차림을 하고 품 안에 자잘한 무기를 숨긴 채 수레와 말을 몰았다.
"에르논은 마차에 태웠다니까 부지런히 달리면 우리가 조금 더 일찍 도착할 수 있을 거다. 직선거리로도 우리가 더 가까우니까."
"수레에 변변한 물품도 없는 걸 의심하지는 않을까요?"
"지방을 돌며 물자를 다 판 뒤 수도에서 다시 물건을 사려 한다고 둘러대면 될 거야. 상단들은 주로 피엔에 몰린다고 하니까 막상 가보면 어색해보이지는 않을 거다."
스윈델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지붕이 달린 수레에 앉아있는 분대원들을 흘끗 바라보았다. 너무 대규모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21명이 떠나는 길에 말 열두 필, 수레 두 대를 끌고 출발한 상태였는데 서로 돌아가며 수레에서 쉬며 체력을 유지했다. 다들 진짜 상단 건달패들이나 된 듯 저들끼리 낄낄대며 수다를 떠느라 이쪽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저기, 분대장님. 솔직히 말씀해보십시오. 우리가 감히, 그 대마법사를 구출씩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음? 왜, 겁나냐?"
"겁이 난다는 게 아니라 혹시 또 무슨 숨겨진 임무 같은 게 있냐는 거죠. 솔직히, 그 대마법사도 어쩔 수 없는 정도의 상황이라면 우리 스무 명이 들어가서 판을 뒤엎을 수 있겠냐 이겁니다."
"에르논은 공간 이동 마법이 가능하지만 먼 거리로의 이동은 불가능해. 우리는 그가 황궁에서 바깥으로 빠져나온 이후를 책임져야 하는 거다. 물론 만에 하나, 그가 빠져나오지도 못하는 최악의 상황에는 황궁 잠입까지 고려해봐야겠지. 그때는 아마… 살아나올 생각은 하지 않는 게 마음 편할 거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최악의 상황이고, 만약 에르논이 임무에 성공해서 황제를 칠 수 있는 약점을 잡았을 때에는 황궁으로 향해 올 우리 군대를 맞이할 역할을 하게 될 거다. 그러니 가서 타셀 전하와 우리 군에 대한 긍정적인 소문을 퍼트려야 해. 그것도 중요한 임무다."
잠시 동안 스윈델은 말이 없다가 갑자기 깨달은 듯한 목소리로 낮게 말했다.
"그 말씀은… 모든 게 잘 맞물리기만 하면, 이 전쟁도 끝날 수 있다는 겁니까?"
"…변수들이 몇 가지 있지만, 불가능한 얘기도 아니지."
"하아…. 후우…. 와, 이거…. 갑자기 긴장되네요."
카시야는 긴장과 기대가 뒤섞인 얼굴을 하고 있는 스윈델을 흘끗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그녀 역시 희망적인 전개를 바라고 있었지만, 그 '몇 가지 변수들'이 가벼운 문제들은 아니라서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
"전하! 전하!"
우아하게 아침 식사를 들려던 케일런의 미간이 대번에 확 찌푸려졌다.
"아침부터 이 무슨 무례한 짓이냐!"
케일런의 호위 기사들이 알리스타스 공작의 집사를 가로막았다. 그러나 집사의 창백하게 질린 얼굴이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공작가의 집사인 크레바스 아닌가. 도대체 무슨 일이냐."
케일런은 귀찮다는 듯이 물었지만 크레바스는 제 행동을 고칠 생각을 하지 않고 오히려 호위 기사들을 밀치며 케일런의 앞에 나섰다.
"공작 각하께서, 알리스타스 공작 각하께서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그 순간 케일런의 우아한 아침 식사 자리가 산산조각 나버리고 말았다.
"그, 그게 무슨 말이냐! 어제까지 멀쩡하던 공작이, 도대체 왜? 암살이냐?"
"모르겠습니다! 기침 시간이 지나셨는데도 침대에 누워계시기에 깨워드리려 했는데,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지 않으시더니, 방금 전부터 갑자기 몸에 나있는 구멍이란 구멍에서 피가…! 으흐으으윽…. 그 모습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곁에 있던 시녀 둘은 그 자리에서 기절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이…럴 수가…. 이럴 때가 아니다. 여봐라! 당장 공작의 거처로 향할 준비를 해라! 내, 내 눈으로 봐야겠다."
케일런의 목소리는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알리스타스 공작은 케일런의 안전한 방패였다. 그가 깨어졌다는 것은, 자신에게 역시 똑같은 칼날이 향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급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황자로서의 치장을 거르지 않는 케일런이었다.
"이, 이쪽입니다."
발을 동동 구르는 집사 크레바스의 안내를 따라 케네스의 침실로 들어서자 지독한 피 냄새가 확 끼쳤다. 케일런은 손수건을 꺼내 코를 막고는 떨리는 다리를 움직여 케네스가 누워있는 곳을 향했다. 시녀 둘이 기절을 했다는 말이 거짓은 아닐 것 같았다. 그 정도로 케네스의 시체는 참혹한 모습이었다. 구멍이 많은 목 위쪽은 아예 피투성이였고 하반신 역시 붉게 물들어있었다.
"사인(死因)은 전혀 짚이는 바가 없는가?"
"지금 의사가 오는 중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피가 나기 전, 제가 뵈었던 모습만 보자면 외상이 전혀 없었습니다. 아마 독이나 마법에 당하신 것 아닌지…."
"사인이 밝혀지는 대로 보고하고, 어서 큰 공자를 데려오게! 공작이 죽었으니 큰 공자가 그 작위를 이어야 할 것이 아닌가. 지금은 전쟁 중으로 급박한 상황이니, 정식 작위 승계는 조금 미루고 당장 알리스타스 공작이 주도하던 일을 맡아줘야 하니까."
"예. 알겠습니다."
그러나 케네스의 큰 아들 카벨을 데리러 갔던 시종이 파랗게 질린 채 뛰어왔다.
"크, 크, 큰일입니다! 큰 공자께서 발작을 일으키고 계십니다!"
"이건 또 뭐야!"
케일런은 황자의 체면도 잊고 카벨의 방을 향해 뛰었다. 그러나 그 방에 닿기도 전에 끔직한 비명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끄아악! 으악! 으아악! 그, 그만해! 제발! 으악!"
멀리서 보기에도 제 정신이 아니어 보이는 카벨이 방바닥에 쓰러져 뙤약볕 아래의 지렁이처럼 미친 듯이 꿈틀대고 있었다. 그 광경이 너무도 공포스러워서 아무도 그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로 매질을 당하는 것 같았다.
"무, 뭣들 하느냐! 큰 공자를 침대에 누이지 않고!"
크레바스의 호통에 시종들이 머뭇머뭇 다가갔지만 카벨의 몸에는 손 하나 댈 수 없었다. 그가 펄떡이듯 그들을 물리쳤기 때문이다. 그가 몸을 이리저리 비틀어대는 사이, 그의 셔츠나 바지는 점점 피에 물들었다. 살갗이 터지는 게 보이는 듯 했다.
"으아악! 아파! 아파! 살려주, 사, 살려줘!"
그러나 발광하는 듯하던 그의 몸부림이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펄떡이는 횟수가 줄어드는가 싶더니 곧 그의 몸이 축 늘어졌다.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가는 모습을 생생히 지켜본 기분은 끔찍하기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때 누군가의 입에서 새어 나와버린 작은 목소리가 조용해진 복도에 울렸다.
"저… 저주다."
그 작은 속삭임의 반향은 컸다. 시종과 시녀들은 몸을 덜덜 떨며 카벨의 시체에서 멀어졌다. 하지만 그 누구도 케일런만큼 이 사태가 저주스럽게 느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극심한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누, 누구냐! 누구야? 타셀! 타셀이 보낸 암살자가 숨어 있나?'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자신의 호위 기사들 뒤로 슬금슬금 숨었다. 그가 공포에 질린 것을 눈치 챈 호위 기사가 재빨리 그를 엄호하고 황자의 방을 향해 물러났다.
알리스타스 공작과 후계자의 죽음은 케일런군의 정치 역학 관계에 즉각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동안 케네스가 독차지하고 있었던 케일런이 다른 귀족들의 앞에 노출된 것이다. 케네스는 케일런을 제 성안 깊은 곳에 숨겨놓고 그에게 흘러들어가고 나오는 모든 정보를 독점해왔다. 케네스의 측근이라 하더라도 직접적으로 케일런을 알현하기가 어려울 정도였으니, 케일런에게 붙은 많은 귀족들의 불만은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위태로웠다.
그래서 케네스의 암살자를 찾기는 더 어려웠다. 케일런파의 많은 귀족들이 알리스타스를 향해 이를 갈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습게도 그들은 에르논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포로 생활로 몸이 약해져 마법을 쓸 수 없는 에르논의 회복을 위해 요양을 보낸다던 공작의 말을 믿기도 했거니와 겉으로 보기에는 알리스타스 공작에게 고분고분하던 그의 모습을 기억하기 때문이었다.
그와 공작 사이의 진실을 알고 있던 극소수의 사람들 역시 에르논이 걸린 속박 술식은 공작가를 공격할 수 없도록 제약이 걸려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애초부터 그를 용의선상에 올리지 않았다. 그에 따른 증거는 케네스의 둘째 아들이 살아있다는 것이었다. 만약 에르논이 속박을 벗어났다면 둘째 아들이나 공작의 어머니, 아내조차 살려둘 리가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 죽은 것은 공작과 그 후계자, 딱 둘이고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최소의 공격으로 이뤄낸 공작 세력의 깔끔한 몰락’이었다. 둘째 아들이 어부지리로 공작 작위를 계승하겠지만, 그동안 승계를 준비하던 쪽은 큰 아들이었기 때문에 둘째 아들은 많은 면에서 부족했다. 아직 어리기도 한 공작의 둘째 아들 정도야, 이 바닥에서 구르고 구른 귀족들에게는 한입거리도 되지 않았다.
"알리스타스 공작에게 불만을 품은 누군가가 총대를 맨 것 같군. 아마 마법사를 쓴 것 같아. 에르논이 사라지자마자 저렇게 이상한 방법으로 죽은 것을 봐. 그동안은 에르논의 마법에 대항할 수 없었던 게지."
"뭐가 어떻게 됐든 우리로서는 고마운 일이죠. 그 교활한 작자가 죽으니 속이 다 시원합니다."
"잠깐. 아직 안심하기는 일러. 루크 페레이아가 있지 않은가! 그 놈은 알리스타스 공작의 개야. 그 놈을 빨리 제거해야 해. 놈은 공작 덕에 그 자리에 앉은 데다가 욕심이 많으니, 이번에는 공작의 자리를 탐낼 거야."
"저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황자 전하께서 황제가 되시면 자기 앞으로 공작위 정도는 떨어지지 않겠냐고요. 루크 그 녀석이 이 기회를 놓칠 리 없습니다. 그 전에 우리가 먼저 쳐야 합니다!"
“하지만 녀석이 없으면 전력의 상실이 클 텐데요.”
“걱정 말게. 어차피 에르논도 금방 돌아올 테고, 내 영지에 남아있는 기사들을 더 데리고 올 테니. 사실 내 휘하의 기사 중 제일 우수한 이들은 영지에 남겨두었었거든. 클클클. 아직 새파란 놈이 잘난 척하는 꼴도 더는 못 봐 주겠어. 저가 아니면 큰일이라도 날까봐? 흥.”
작은 방에 모여 알리스타스 공작의 부재를 어떻게 제 이익으로 만들 것인지 의논하던 귀족들은 자신들이 전면에 나서기 전에 루크 페레이아를 먼저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
"아직 공작의 죽음은 성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았으니, 루크 그 녀석을 성으로 불러들인 뒤 죽입시다! 전선에 있는 병영 안에는 그 녀석의 수하들이 많을 테니까요."
"아무리 검귀라 해도 머릿수에서 밀리면 별 수 없을 겁니다."
"좋아. 이번 일이 성공하면 밀런 경, 자네가 우리 군의 총사령관이 되는 것이네! 그러니 꼭 성공시키게."
"감사합니다, 알반 공작 각하! 반드시 성공시키겠습니다!"
음험한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그 방의 바깥에서 시중을 들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시종 하나가 다른 이에게 제 자리를 부탁하고는 가만히 성의 마구간으로 향했다. 어딜 가느냐는 마구간지기에게 황자 전하께서 늘 드시는 과일이 마침 똑 떨어져서 급하게 사러 갔다 와야 한다며 발 빠른 말을 구했다.
하지만 그는 성을 빠져나온 뒤 곧장 루크 페레이아가 있는 전장으로 미친 듯이 말을 몰았다. 전령새는 믿을 수 없었다. 이제 막 루크에 대한 암살 계획이 나온 상태니 곧바로 그에게 향하는 것이 제일 빠를 터였다. 한 시라도 빨리 전장에 도착해 루크에게 위험을 알리고 도망치게 해야 했다. 루크 페레이아의 위명(威名)은 대단하지만 출신 자체가 한미한 그로서는 알리스타스 공작의 뒷배가 없다면 끈 떨어진 뒤웅박 신세였다. 루크의 첩자로 일하던 시종은 부디 자신이 알반 공작의 전령보다 먼저 전장에 도착할 수 있기를 바라며 달리는 말에 채찍질을 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