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2 결심(4) =========================
"페레이아 경! 공작성에서 누가 찾아왔습니다."
한참 황제가 추가 파병한 군사와 기존 군사의 배치를 고민하며 지도를 바라보던 루크에게 보초병이 손님의 당도를 알렸다.
"들어오라고 해."
고개도 들지 않고 심드렁하게 대답했던 루크는 그의 막사를 찾아온 이를 흘끗 보더니 태도가 바뀌었다.
"페르난도! 네가 여기는 무슨 일로…! 아…. 그런가. 네가 여기까지 급하게 왔을 일이라면 뭔가 큰 일이 터져도 터진 모양이구나."
루크에게 페르난도라 불린 이는 3일전 공작성에서 전장을 향해 출발한 공작성의 시종이었다. 보통 5일이 걸릴 거리를 3일 만에 당도했으니, 급하게 달려온 그 몰골이 엉망이었다. 제대로 잠도 자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눈빛을 형형하게 빛내며 낮은 목소리로 루크에게 말했다.
"경! 한시라도 빨리 도망치셔야 합니다!"
"도망? 내가?"
"알리스타스 공작과 큰 공자가 살해당했습니다. 불만에 차 있던 귀족들이, 에르논 님이 요양을 떠나심과 동시에 마법사를 이용해 저주를 내린 것 같습니다. 문제는, 새롭게 황자 전하의 측근이 되려는 이들이 알리스타스 공작의 측근이라 여겨지는 페레이아 경을 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경의 자리를 자야드 밀런 경에게 주려고 합니다."
루크는 순간 멍해졌다. 에르논이 돌아오면서부터 느껴지던 불길한 예감이 이것 때문이었을까.
에르논을 데리고 공작성으로 돌아가던 날의 케네스가 떠올랐다. 그 탐욕스럽고 교활하던 모습은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죽임을 당하더라도 납득이 갈만큼 정나미 떨어지는 것이었지만 그게 설마 그의 성에서 이뤄질 줄은 몰랐다. 에르논에 대해 이상하게 굴던 것도 떠올랐다. 분명 비밀리에 어떤 일을 꾸미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건 이번 살해 사건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경! 지금 이러고 있으실 때가 아닙니다! 제가 공작성을 떠나온 게 3일 전이니 이미 제가 없어진 것을 알아챘을 겁니다. 제가 경의 사람이라는 걸 모른다 하더라도 이상하게 여길 수는 있습니다. 그쪽에서 일을 서두를 수도 있으니 어서 도망치십시오. 황자 전하는 이미 저쪽에 넘어갔습니다."
페르난도의 낮은 외침에 루크는 정신을 차렸다. 이제까지 거침없이 살아왔고 위태로운 출세 가도에 언제나 몰락의 순간을 대비했던 그였지만 막상 닥친 몰락의 순간은 씁쓸했다. 케일런군의 영웅이자 제국의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기사라 칭송받던 자신이 이제는 도망자 신세가 되어야 한다니. 하지만 어처구니없게 뒤통수를 맞고 허무하게 죽어줄 생각은 없었다. 그를 위해 달려와 준 페르난도를 위해서라도.
"지금 바깥에 있는 놈들 중에 이 사태를 알고 있을만한 놈이 있나?"
"알반 공작과 그 측근들이 몰래 회의하고 있는 것을 엿듣고 바로 달려왔으니 아직 이 병영에서 알고 있는 이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도 빠르게 움직일 겁니다. 기다려온 순간일 테니까요."
"알았다. 고맙다, 페르난도. 넌 이제 어쩔 셈이냐?"
"저는 이 길로 형님이 계시는 키렐에 갈 생각입니다. 어차피 공작성에 낸 제 서류야 죄다 조작된 것이니, 절 찾기가 쉽지는 않을 테지요. 경께서는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루크는 잠시 입을 다물고 고민했다.
어머니가 있는 타노버로 향할 수는 없었다. 그녀의 생사조차도 철저히 숨긴 그였기에 만에 하나 자신이 발각되어 그녀까지 위험해지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그렇다고 연고가 있는 지방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케일런 쪽으로도, 타셀 쪽으로도 갈 수 없다면, 향할 수 있는 곳은 황제 쪽 밖에 없겠지. 수도는 위험하니 피엔에서 적당히 몸을 숨기고 있겠다. 넌 이거라도 갖고 가거라. 내 목숨을 살려준 값 치고는 약소하다만, 지금 당장 줄 수 있는 게 이것 밖에 없구나."
루크는 품 안에 넣고 다니던 돈주머니를 페르난도에게 건넸다.
"아, 아닙니다, 페레이아 경! 경 덕분에 저희 가족이 살았는데 이것으로 조금이나마 은혜를 갚을 수 있게 되어 다행입니다."
페르난도는 루크가 페레이아 남작위를 차지한 뒤 남작가의 시종들을 제 사람들로 물갈이하며 고용한 이였다. 그 당시 그의 가족은 길바닥에 나앉아 굶주림에 죽어가고 있었다. 우연히 지나다 그들의 처참한 모습을 본 루크가 그의 형제를 시종으로 고용하고 그 가족들이 지낼만한 곳을 마련해주었다. 루크로서는 완벽히 제 사람이 될 만한 처지라 계산하고 거둬들인 것이었지만 페르난도는 그 속셈을 알고 난 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에게 충성을 바쳤다. 루크가 아니었으면 제 가족들이 길거리에서 썩어가는 시체가 될 것이었음은 자명한 일이었으니까.
그 은혜를 조금이나마 보답하게 되어 기쁘다고 한사코 사례를 거절하는 페르난도에게, 루크는 끝까지 돈주머니를 건네주었다.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재물인지도 모른다. 얼마 되지도 않아. 받아주었으면 좋겠다."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부디 몸조심 하십시오."
루크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여상한 태도로 그를 배웅했다. 알리스타스 공작에게 안부 인사 전하라며 그에게 새 말을 내어주는 루크를 의심스럽게 바라보는 이는 없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제 막사로 가서 간단한 짐을 꾸리고 다시 마구간으로 향했다.
"엇, 대장님! 이 시간에 어디 가십니까?"
"음. 속이 좀 답답해서 근처를 달리다가 오겠다. 금방 올 테니 내 시종에게 시간에 맞춰 내 막사로 식사를 갖다놓으라고 전해라."
"예, 알겠습니다."
그가 가끔씩 답답한 속을 달래기 위해 말을 달리다가 오는 것을 알고 있던 마구간 지기는 아무런 의심 없이 그의 말을 내어주었다. 그가 작은 짐 하나를 말 등에 얹는 것이 좀 이상하다 싶긴 했지만, 루크의 태도가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그냥 그러려니 하고 말았다.
루크는 천천히 병영 안을 둘러보다가 황성의 방향을 향해 말머리를 돌렸다. 이제부터 그는 케일런군의 최고 사령관이 아니라 도망자가 되었다. 하지만 말을 달리며 시원한 바람에 머리칼이 나부끼자 왠지 속이 개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도망자이기도 했지만, 이제 아무 곳에도 소속되지 않은 자유인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
[알리스타스 공작의 죽음으로 케일런군 수뇌부가 교체되고 루크 페레이아 역시 사라졌다. 죽은 건지, 도망친 건지는 알 수 없다.]
식사 중에 타셀로부터 전해진 메시지에 카시야는 들고 있던 포크를 떨어트릴 뻔 했다.
"왜 그러십니까."
그녀의 모습에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스윈델이 낮게 물었다. 하지만 카시야는 다른 질문을 던졌다.
"…케일런군에서 루크 페레이아를 빼면 미하일에게 대적할만한 기사가 있나?"
"예? 흐음…. 글쎄요. 메레디스 경께 대적하기는 무리겠지만 크리스탄 하멜이나 자야드 밀런 역시 강한 기사이기는 합니다. 그 둘 외에도 강한 기사들이 많지요. 아무래도 그쪽에는 신흥귀족 출신들이 많고, 신흥귀족 중에는 젊은 기사들이 많으니까요."
하지만 카시야가 보기에 미하일이나 루크는 전혀 다른 수준의 기사들이었다. 그들이 날리는 검기를 눈앞에서 봤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 케일런군에 숨겨진 기사가 얼마나 될지는 모르지만 루크 정도 되는 이가 더 있었다면 아직까지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을 리 없다.
"그렇군. 하지만 내 생각에는… 케일런군이 예상보다 더 쉽게 무너질 수도 있겠어."
그 말에 스윈델의 눈이 커졌지만 카시야는 아직 확실치 않은 일이니 입 다물고 있으라고 일렀다.
"그나저나, 이제 내일 오후쯤이면 피엔에 도착합니다."
"음. 일단 피엔에 도착하면 상점가가 몰린 뮈소 거리부터 들르겠다. 신규 상단이라는 이미지를 먼저 얻어둘 필요가 있어. 피엔에서 묵을 숙소는 그쪽 지인에게서 추천을 받으면 되겠지."
카시야는 툴라를 떠올리며 말했다.
에르논이 만약 피엔으로 피신해 온다면 툴라와 아주 오랜만에 재회할 수 있을 터였다. 카시야는 그가 피엔으로 왔으면 하는 마음 반, 그러지 않길 바라는 마음 반이었다. 에르논이 피신해올 상황이라면 작전이 실패한 것일 테고, 그렇다면 일은 이상하게 꼬이게 되니 좋은 일이 아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차라리 그가 눈앞에 있으면 안심이 될 것 같았다. 카시야는 서로 정반대의 상황을 원하는 두 마음이 난감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에르논을 황성으로 데려가는 무리의 속도가 느리다는 것이었다. 에르논을 데리러 갔던 황제의 밀사들이 행정관과 마법사들이라 오랜 이동 시간을 버틸 체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카시야는 에르논이 아르카나에 도착하기 닷새 전에 피엔에 도착할 수 있었다. 분대원들이 피엔에 스며들어 동태를 살피기에는 넉넉한 시간이었다.
"와! 저, 이런 대도시는 처음 와봅니다!"
"사, 사실은 저도요."
카시야의 분대원들 중 태반은 시골이나 다름없는 지역 출신이라 피엔에 도착하니 정말 시골뜨기들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바빴다. 그 모습이 도저히 기사들이라고는 보이지 않아서 카시야는 안도를 해야 할지, 한심해 해야 할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피엔의 상단 골목에 들어서자 자신들의 규모가 의심을 사지 않을까 했던 걱정은 싹 날아갔다. 같은 상단 소속임을 알리는 특정 색깔의 두건을 쓴 이들이 정신없이 물건을 흥정하거나 수레에 싣고 있었는데 얼추 보아도 카시야 분대만하거나 그 이상의 인원이 있는 상단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어서 오십셔! 소금은 저희 집보다 싼 곳이 없습니다!"
"밀가루! 밀가루 안 필요하십니까! 저희는 절대 이상한 거 섞지 않은 순수 밀가루만 판매합니다!"
"광폭 원단 있습니다! 소폭 원단보다 훨씬 저렴합니다요!"
주변 상인들의 활기찬 외침 소리에 분대원들은 신나는 기분이 되어 들썩였다. 그들은 상단이라는 이미지를 얻기 위해 각 가게들을 돌며 상품 가격을 파악하고 물량을 어느 정도 조달할 수 있는지 물었다. 신규 상단이라는 소개에 가게 주인들은 새 거래처를 얻기 위해 샘플까지 내주며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카시야 대신 앞에 나서서 모든 얘기를 해나가던 스윈델도 처음에는 쭈뼛거렸지만 카시야에게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다음부터는 능숙하게 상인다운 톤으로 흥정을 했다.
그들이 향신료 노포를 들렀을 때였다. 젊은 가게 주인이 나와 스윈델을 반갑게 맞으며 각 향신료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고 있는데, 가게 안쪽에서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노인이 신발을 끌며 걸어 나오더니 한참 설명하는 젊은 가게 주인을 저지했다.
"이놈아. 내가 그렇게 얘기했지 않느냐. 모든 거래는 상단 주인과 하라고."
"예? 아, 아부지. 이 분이 상단 주인이신데요."
하지만 노인은 클클 웃더니 스윈델의 한참 뒤에 서있던 카시야를 향해 공손히 인사했다.
"제 아들놈이 아직 일을 물려받은 지 얼마 안 돼서 몰라뵈었으니 너그러이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상단의 주인이시지요? 저희는 여성분이라고 절대 무시하거나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 저희를 믿고 직접 상담 부탁드립니다."
노인의 말에 분대원들은 한순간 숨을 멈추고 카시야를 쳐다보았다. 건장한 장정들이 그녀의 눈치를 보고 있음을 그제야 깨달은 젊은 가게 주인도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카시야는 역시 이 바닥에서 잔뼈가 굵은 상인은 무시할 수가 없구나, 생각하며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아닙니다, 주인장. 저 역시 제 오른팔인 이 녀석에게 일을 가르치느라 대신 시키고 있는 것이니, 이 녀석을 상단 주인으로 여기고 상담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말에 노인은 스윈델을 바라보며 알아 모시겠다고 인사하고는 직접 향신료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을 해주고 가격을 제시했다.
그들이 지나간 뒤 가게 주인은 제 아비에게 물었다.
"아니, 아부지는 어떻게 아셨대요? 저는 그 여자, 그러니까 그 상단 주인이 거기 있는 줄도 몰랐어요."
"쯧쯧. 남자 장정들 사이에 여자가 단 한 명, 그것도 절대 그들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은 태도를 가진 여자가 한 명 섞여 있다면 상단 주인이든, 상단 주인의 여자이든 둘 중 하나 아니겠느냐. 그런데 앞에 나서서 거래하는 그 남자는 상단 주인이라기에는 모든 말이 단정적이질 않더란 말이지. 그럼 그 여자가 상단 주인인 게 분명한 게지. 게다가 그 눈…. 젊은 나이에 그런 눈빛은 보기 힘들다. 절대 신참 상단 주인의 눈이 아니었어. 굳이 장사 바닥이 아니더라도 어디선가 산전수전 다 겪은 이일 게 분명하다. 만약 우리와 거래하러 온다면 조금 손해 보더라도 가격을 깎아주거라. 오늘 온 손님들 중 제일 큰 고객을 고른다면 바로 그 신규 상단이니까."
“아아…. 그렇구나. 예, 잘 알겠습니다, 아부지.”
피엔의 젊은 상인은 오늘도 그렇게 아버지의 지혜를 배워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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