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3 우군(1) =========================
피엔의 뮈소 상점가 거리를 돌아본 카시야는 분대원들에게 근처 식당에서 식사를 하라고 하고는 곧바로 툴라를 찾아갔다. 오후 해가 오렌지색으로 물들기 시작하는 무렵이라 툴라의 가게는 개점 준비로 바빴다. 나이든 여자들과 어린 아이들은 건물과 그 주변을 쓸고 닦느라 정신이 없어보여서, 카시야는 하품을 하며 걸어 나오는 문지기들에게 예의 그 건조한 목소리로 방문 목적을 얘기했다.
"툴라를 만나러 왔다. 툴라에게 카시야가 왔다고 얘기하면 알 거야. 안내해."
"뭐? 이 년이 미쳤나? 툴라 님이 늬 친구야? 아주 간땡이가 배 밖으로 나온 년이네.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가게에 손님이 찾아오기에도 이른 시간인데다 찾아온 이가 허름한 옷을 입은 여자이기까지 하니 우락부락한 남자들이 험한 욕설을 뱉어냈다. 자신의 남편이 여기서 재산을 탕진한다고 항의하러 가끔 부인들이 찾아오기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의미도 모를 욕설들을 가만히 듣고 있던 카시야는 문지기들에게 다시 한 번 또박또박 말했다.
"툴라의 아이들한테 손대기는 싫으니까 적당히 알아 처먹고 움직여줬으면 좋겠어. 난 툴라의 친구다. 툴라에게 안내해." .
그 말에 다들 코웃음을 치더니 이내 카시야에게 손바닥을 내리칠 기세로 달려들었다. 다행이 전에도 그녀를 툴라에게 안내해주었던 남자가 달려 나와 그들을 말렸다. 곱상한 외모와는 달리 꽤 실력자인지 거구의 팔을 자신의 팔로 그대로 막아내고는 당황한 남자들을 험악한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그러자 덩치 좋은 남자들의 기세가 일시에 줄어들었다.
"죄송합니다. 저희 애들이 몰라 뵙고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바로 툴라님께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카시야는 별 말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그제야 남자들은 자신들의 위협에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던 그녀에게서 위화감을 느꼈다. 카시야를 툴라에게 안내하고 나온 남자는 제 문지기 동생들에게 '너희들 아까 죽을 뻔했다는 걸 알기는 하냐.'며 그들의 뒤통수를 한 대씩 쳤다.
"오랜만입니다, 툴라."
"카시야! 기다리고 있었어요."
툴라는 반가운 얼굴을 하며 카시야를 껴안았다. 타셀에게서 카시야가 에르논의 속박을 풀어줬다는 얘기, 에르논이 황궁으로 향한다는 얘기,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카시야가 자신의 분대를 이끌고 피엔으로 갈 거라는 얘기 등을 전해 듣고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카시야만 기다리던 툴라였다. 카시야는 툴라가 포옹하는 바람에 갈 곳 잃은 두 손을 허공에 띄웠다가 툴라가 하는 식으로 그녀의 등에 가만히 올렸다. 근육이 붙은 자신의 몸통과 비교해 훨씬 가녀린 그녀의 몸이 제 품 안으로 쏙 들어오는 것 같았다. 등에 댄 손으로 전해지는 툴라의 체온이 어색했다. 다행이 툴라는 금방 몸을 떼며 그녀에게 자리를 권했다.
"분대원들을 이끌고 오셨다면서요? 몇 명이나 데리고 온 거죠?"
"스무 명입니다. 여기에 머물면서 타셀 전하에 대한 긍정적인 소문을 퍼트리고 황궁의 동태를 살필 겁니다. 만약 에르논이 여기까지 공간 이동해 온다면 그를 안전하게 피신시킬 임무도 맡고 있죠. 위급한 상황은 벌어지지 않길 바라고 있지만요."
"…당신이 정말로 그 애를 자유롭게 해 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바라기는 했지만 설마, 진짜로 그럴 수 있을 줄은…."
"그게 잘 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덕분에 더 위험한 곳으로 가게 되었으니까요."
"무슨 말씀이세요? 황궁에 가기로 한 건 그 애의 선택이었잖아요. 노예로서 안전한 삶보다 자유인으로서 위험한 삶이 훨씬 나아요. 그러니까, 당신은 그 애를 구한 거예요."
툴라의 확신에 찬 목소리에 카시야의 기분도 그나마 조금 나아졌다. 카시야는 툴라를 찾아온 목적을 얘기했다.
"분대원들이 묵어야 할 곳이 필요한데, 황제의 선이 닿는 여관이 있을지도 몰라 아직 숙소를 정하지 않았습니다. 남들 의심을 받지 않고 묵을만한 곳을 추천해주시겠습니까? 인원이 꽤 되다보니 몇 명씩 나눠서 묵어야 할 것 같습니다. "
하지만 미리 카시야의 분대가 올 것을 알고 있었던 툴라 역시 그들을 맞을 준비를 철저히 해 둔 상태였다.
"분대원들이 묵으실 곳은 제가 마련해뒀어요. 제 소유의 여관 하나를 완전히 비워놨으니 그쪽에서 편하게 머무르시면 돼요. 남들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저희 애들도 여관에 묵는 척 할 텐데 심부름이나 저에게 전할 소식 같은 건 그 애들에게 시키시면 돼요."
"감사합니다. 염치없지만 당신의 도움을 많이 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걱정 마세요. 저 뿐만이 아니라 피엔에 있는 섀도 워커들은 다 이번 작전에 적극 협조할 거예요. 타셀 전하의 승리를 위해 존재하는 섀도 워커들이니까, 당신이 미안해할 필요는 없어요."
말을 마친 툴라가 시종을 부르더니 아멜을 데리고 오라 일렀다. 그러자 카시야를 툴라에게 안내해주었던 남자가 들어왔다.
"아멜. 카시야 경과 함께 가서 이 분이 데리고 오신 분들을 여관으로 안내해드려. 참, 밖에서도 카시야 경이라 부르는 건 신원이 알려질 위험이 있군요. 혹시 가명이 있나요?"
"에텔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아, 그래요. 에텔…. 그런데 이건 제 개인적인 호기심인데요, 그 이름, 카시야 경 본인이 지으신 거예요?"
"…아뇨. 에르논에게 받은 이름입니다."
그 말에 툴라의 얼굴이 잠시 경직되었다. 하지만 노련한 그녀답게 언제 그랬냐는 듯 상냥한 미소를 짓고 아멜과 함께 나가는 카시야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에스텔의 아들인 에르논이 지어준 이름이 에텔이라…. 무슨 뜻으로 지어준 이름일까?'
툴라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드리웠다.
"우와~! 여관 좋은데요? 꽤 비싸 보여요."
"나, 여관에 처음 묵어봐. 신기하다."
아멜의 안내로 도착한 툴라 소유의 여관은 아주 화려하지도, 그렇다고 허름하지도 않은, 그야말로 평범한 외양의 여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촌뜨기 분대원들은 감탄사를 그치지 않았다. 아멜이 아무리 여관 구조를 설명하려 해도 집중하질 않아서 결국 카시야가 나서야 했다.
"전체 동작 그만."
낮게 울리는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을 법 한데, 큰 소리 치던 아멜의 목소리도 무시하던 분대원들이 그녀의 목소리는 귀신같이 알아듣고 재빨리 제자리에서 열중 쉬어 자세를 잡았다.
"너희들 지금 여기 놀러온 거냐?"
"아닙니다!"
"내가 네 놈들 도시 유람이나 시키려고 데리고 나온 줄 알아?"
"아닙니다!"
"잘 알고 있으면, 지금 나 열 받으라고 제멋대로 구는 건가?"
"시정하겠습니다!"
"한 번만 더 속아주겠어. 앞으로 또 이 따위로 기강이 해이해지면 말로 하지 않겠다. 알았나?"
"예! 알겠습니다!"
"이제부터 아가리는 닥치고 귓구멍만 열어놔. 아멜 씨. 죄송하지만 다시 한 번 설명해주시겠습니까?"
자기도 모르게 분대원들을 따라 열중 쉬어 자세로 서 있던 아멜은 건장한 장정 스무 명을 완벽히 통제하는 카시야의 모습을 보고 절대 이 여자한테는 밉보이지 말자고 다짐하며 서비스 정신 투철한 목소리로 여관 구조 설명을 시작했다.
"이 여관은 1층은 식당 겸 카운터, 2층과 3층은 객실이며 화장실과 목욕탕은 여관 뒷문으로 나가시면 마련돼 있습니다. 여러분들께서는 여관의 2층에 준비된 방에 4인 1조로 묵으시면 됩니다. 에텔 님께서는 여성분이시기 때문에 계단과 가까운 2인실을 혼자 쓰시면 되겠습니다. 혹시나 모를 의심을 피하기 위해 저희 쪽 사람들이 여행객인 척 여관에 묵을 겁니다. 그들이 웬만한 청소나 시중은 다 들어드릴 테니 편히 말씀하시고, 아침 식사는 오전 8시에 1층으로 내려오셔서 하시면 됩니다."
아멜은 친절한 설명에 덧붙여 저녁 7시부터 새벽 1시까지는 언제나 1층에서 저녁 식사를 할 수 있다고 안내하고는 돌아갔다.
방금까지 분대원들을 무섭게 위협하던 카시야였지만, 처음 대도시에 나와 신기한 문물을 접해 신난 젊은이들을 무조건적으로 억누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닐 것 같았다. 최악의 경우, 그들로서는 이게 마지막 여행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아멜이 자리를 뜨고도 카시야의 눈치만 보며 부동자세를 풀지 않던 분대원들을 향해 카시야가 한결 누그러진 말투로 얘기했다.
"네 명씩 알아서 방 잡고 들어가 짐 풀고, 오늘 저녁은 푹 쉬어라. 이 주위를 둘러보고 와도 좋지만 술은 절대 이 여관 안에서만 마시고, 술 마신 뒤에는 밖으로 나가지 마라. 잘못 놀린 입 하나 때문에 우리 분대 전체가 위험해질 수 있다는 생각을 늘 하도록! 그럼 이만 해산."
사실상 나가 놀아도 좋다는 허락이나 다름없는 카시야의 말에 다들 신나서 2층으로 뛰어갔다. 서로 이 방을 쓰겠다는 둥, 저 침대를 쓰겠다는 둥 어린애들이나 할 법한 실랑이가 벌어지는 것 같았지만 즐거운 분위기였다.
"스윈델. 나는 이 주변을 돌아보고 오겠다. 식사들은 먼저 해. 그리고 방이 정해진 그대로 4인 1조를 만들어서 각 조장을 뽑아둬라. 만일의 경우 다섯 개의 조로 흩어져 임무를 수행할 수도 있으니까."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대원들한테 1실버씩 쥐어줘. 처음 보는 음식도 많을 텐데 얼마나 먹어보고 싶겠냐."
"아… 예! 감사합니다!"
감동하는 스윈델의 눈빛이 부담스러워 카시야는 대답도 하지 않고 곧바로 여관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 보니 전생의 자신이었다면 절대 방금과 같은 호의 따위는 베풀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꽤 많이 변한 것 같군. 점점… 전생의 나와 지금의 나를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지조차 확신할 수가 없어….'
카시야는 발길이 닿는 대로 걸었다. 아직 해가 다 지지는 않았지만 원래 볕이 잘 들지 않는 뒷골목에는 깜깜한 밤이 내려앉은 거나 다름없었다. 다닥다닥 붙은 가게들은 노란 등불을 밝히고 지나다니는 손님들을 유혹했다. 아직 저녁식사를 마칠 때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한 잔 걸친 채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술집 안으로 들어가는 무리가 있는가 하면, 집에 있는 가족들을 먹일 식사거리를 사는 이도 보였다. 가슴을 훤히 드러낸 거리의 여인들이 슬슬 치맛자락을 살랑이며 지나가는 남자들에게 추파를 던졌고, 골목골목에는 어느새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기기 시작했다.
카시야는 촛불의 일렁임에 따라 흔들리는 뒷골목의 풍경에서 그리움과 외로움을 동시에 느꼈다. 그게 참 이상하다고 여겨졌다. 이런 풍경 안에서 살아본 적도 없는데 향수를 느끼는 것도, 애초에 제 곁에 누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쓸쓸함을 느끼는 것도….
그녀는 어제와 똑같은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애증 가득한 삶의 단편을 구경하며 정처 없이 걸었다. 술은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는데 왠지 취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근처에 있던 허름한 여관 2층의 창문가에 붙어선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길고 긴 추석연휴가 시작되었군요.
모두 연참을 바라고 계실 것은 알고 있습니다만, 장도 보고 음식도 하고 인사도 하러 다니고 연휴를 맞아 여행도 가게 될 저는 꽤 바쁠 것 같습니다.ㅠㅗㅠ
추석 연휴 기간동안 휴재 시간을 가져야 할 것 같아요.
일요일까지는 정상 업로드 될 거고요, 월요일부터는 휴재하게 될 것 같습니다.
얼마나 바쁘게 될지 몰라 정확한 연재 일자를 알려드리지 못하겠어요. 양해부탁드립니다.
즐거운 추석 연휴 되세요~!
+ 그녀의밤 님, 말것냥 님. 후원쿠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