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4 우군(2) =========================
루크는 지금 이 상황이 어처구니없을 정도였다.
'저 녀석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페미도르 근처의 케일런군 진영에서 빠져나와 말을 달린 루크 역시 그날 피엔에 도착해 막 여관방에 발을 들인 참이었다. 주변에 수상한 자는 없는지 창가에 몸을 붙이고 밖을 살피는데 멀리서부터 걸어오는 늘씬한 인영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왠지 낯익은 반듯하고도 절도 있는 걸음걸이가 누군가를 연상시켰다. 그 인영이 바로 지근까지 다가왔을 때 루크는 제 눈을 의심했다. 불과 얼마 전 제 손에서 놓아주었던 포로, 카시야였으니까.
'언제고 다시 만날 것 같긴 했지만, 설마 이렇게 빨리 만나게 될 줄이야.'
루크는 반가움과 장난기가 뒤섞인 마음으로 창문 밖으로 몸을 날렸다. 높지 않은 건물이라지만 2층에서 뛰어내렸는데도 그의 착지는 가볍기 그지없었다. 두건을 눈 밑까지 끌어올린 그는 조용히 카시야의 뒤를 밟았다.
카시야는 깊은 생각에 빠진 듯했다. 루크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거나 제 곁을 스치는 가게를 살피는 카시야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어딘지 외로워 보이는 그 뒷모습에 마음이 왠지 급해졌다. 그는 주변을 면밀하게 살피다가 어느 골목 안으로 사라졌다.
카시야는 술이 마시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여자 혼자 들어가서 마셔도 눈에 띄지 않을만한 술집을 찾고 있는 중이었다. 괜히 눈에 띄거나 말썽을 일으켜서 좋을 것은 없기 때문이다.
전생에서는 술을 자주 마시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언제나 준비되어 있기 위한 '직업적 사유'로, 그녀 자신은 사실 술을 꽤 좋아했다. 가끔 심신이 많이 지쳤다고 생각되면 혼자서 바에 들어가 적당히 취기가 오를 때까지 마시기도 했고, 엉망진창으로 취하고 싶을 때는 집에서 주종에 상관없이 아무 거나 꺼내 들이붓기도 했다. 이 세계에서 깨어난 뒤에는 취기가 오를 때까지 양껏 술을 마셔본 적이 없었지만, 오늘은 왠지 조금 취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모습을 분대원들에게 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라 혼자서 거리를 쏘다닌 것이다.
적당히 크고, 시끌벅적하며,술과 함께 요리를 파는 술집을 찾았다. 그런 정도의 술집이라면 취객과 시비가 붙을 확률이 적을 것 같았으니까. 원하던 술집의 모습과 딱 맞아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적당히 타협할만한 곳이 마침 보이기에 그 쪽으로 발걸음을 향하려던 순간이었다.
'흡!'
카시야는 갑자기 골목에서 튀어나온 단단한 팔뚝에 사로잡혀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끌려들어갔다. 흥청거리는 길과 바로 붙어있는 골목이라기엔 굉장히 어둡고 조용했다.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그 팔뚝에 사로잡히기 직전까지 그녀가 자신을 노리는 기운을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상대는 보통이 아닌지, 그 와중에 단도를 꺼내 든 그녀의 오른손목까지 잡아챈 상태였다.
"우린 보통 인연이 아닌 모양이야."
잊을 수 없는 목소리가 귓가에 낮게 울렸다. 느슨해진 팔뚝 안에서 뒤돌아보는 카시야의 놀란 얼굴을 살피며 루크의 푸른 눈동자가 즐거운 빛을 띠었다.
"당신이 왜 여기에…!"
"알리스타스 공작이 죽고 나서 내가 팽 당했다는 소문, 아직 못 들었나?"
"정확히 어떻게 된 겁니까?"
"이런 얘기는 술 한 잔 하면서 나눠야 제 맛이지."
그녀를 붙들고 있던 팔을 완전히 풀어주며 루크가 마치 오랜 친구 대하듯 말했다. 카시야는 잠시 갈등했지만 딱히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의 상태를 파악하는 것 역시 중요할 것 같아서 루크의 뒤를 따랐다. 그들은 흥겨운 분위기의 한 선술집으로 들어가 구석에 있는 작은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뭐 드려여?"
"맥주 두 잔과 추천 메뉴 하나…."
커다란 가슴을 출렁이며 주문을 받으러 왔던 껄렁한 태도의 여인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네에-."하며 뒤돌아 가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게 불쾌하기는커녕 왠지 이 세계 사람들의 삶 속에 녹아든 기분이라 카시야는 괜히 뿌듯했다. 그날의 추천 메뉴는 미리 넉넉히 만들어 두는 건지 음식과 술은 금방 서빙 되었다. 따끈따끈한 감자 요리와 황금빛 갈색을 띠는 맥주의 자태는 없던 식욕마저 불러일으켰다. 루크는 그제야 얼굴을 가리고 있던 두건을 내렸다.
두 사람은 서로를 살피며 손에 든 잔을 부딪치고는 맥주를 들이켰다. 카시야에게 있어 이 세계에서 제일 아쉬운 점이라면 시원한 맥주를 마실 수 없다는 것이었다. 냉장고가 없으니 모든 술이 미지근했다. 사실 미지근한 맥주는 그녀가 알던 맥주와는 상당히 다른 느낌이라 다른 종류의 술을 마시는 것 같았다. 미지근한 대신 잡향이 진해서 그게 또 다른 풍미처럼 느껴졌다.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카시야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루크는 그녀의 질문에 저어하는 기색도 없이 술술 대답해주었다.
"알리스타스 공작과 그의 큰 아들이 죽었다. 누구 짓인지는 몰라. 알리스타스 공작가의 몰락을 바란 이가 한 둘이었어야 말이지. 어쨌든 나는 알리스타스 공작 쪽으로 줄을 섰었거든. 그러니 새로 1황자의 측근이 되려는 놈들 눈에는 나 역시 치워버려야 할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는 거지. 난 운 좋게 그 계획을 한 발 앞서 알게 됐고, 그대로 병영에서 빠져나와 피엔으로 왔지. 방금 도착했어."
당연한 일이겠지만 루크는 공작과 공작의 아들을 죽인 게 에르논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케일런군과 완전히 연이 끊겼다는 말입니까?"
"뭐, 그렇게 됐지. 하지만 그렇다고 타셀 쪽으로 들어갈 마음도 없어. 꼬드기려고 하지 마."
할 말을 뺏긴 듯 카시야의 입매가 굳게 닫혔다.
"그나저나 너는 왜 여기 있는 거지? 바로 얼마 전에 포로 교환되었던 네가 여기 있다는 말인즉슨,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질 거란 얘긴데…."
"당신이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확신 없이는 대답해줄 수 없습니다."
"흐음…. 그럼 말하지 마. 사실 별로 관심도 없어."
루크의 미련 없다는 말투에 카시야는 조금 초조한 기분이 되었다. 우연히 마주치긴 했지만, 이대로 눈앞의 '전속계약 풀린 에이스'를 놓치기는 아쉬웠다.
"케일런군을 위해 그토록 노력했는데도 결국 버려졌잖습니까. 그렇다면 우리 쪽으로 넘어오십시오. 아니면 설마, 황제가 이길 거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황제는 이미 공공의 적입니다."
진짜로 자신을 포섭하려 드는 카시야를 보고 루크는 유쾌하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하. 넌 진짜 재미있어.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정말 보통 계집이 아냐."
그는 다시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잔은 금방 비워졌고 머리 위로 흔드는 빈 잔을 보고 새로 채운 잔을 가져오던 아까 그 아가씨는 두건을 내린 루크의 얼굴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머, 어머머머! 오늘 눈 호강 제대로 한다앙. 처음 보는 얼굴인데, 어디서 왔어여?"
큰 가슴을 테이블 위에 얹듯 하고는 루크에게 노골적으로 비비적대는 꼴이, 보는 이가 다 민망해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루크는 불쾌한 듯 싸늘한 시선을 던졌다.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살기에 기가 질린 종업원은 겁먹은 얼굴로 주춤주춤 물러서다가 황망히 주방 쪽을 향해 도망가고 말았다. 하지만 다시 카시야를 향해 시선을 돌린 루크의 얼굴에는 방금의 차디찬 살기 따위는 한 조각도 남아있지 않았다.
"참고로 말하자면 난 지나치게 큰 가슴보다는 한 손에 가득 잡히는 크기가 좋아."
짓궂은 미소를 띠며 루크가 농을 걸었지만 카시야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왜 이 시점에서 경의 취향 얘기가 나오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부디 그런 여성을 만나길 빈다고 말씀드려야 하나요?"
그 말에 루크는 다시 한 번 경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처음 만난 날에는 이렇게 잘 웃는 사람일 줄 몰랐는데 의외라 여기며 카시야는 맥주를 들이켰다.
그들의 테이블 위에는 빈 잔이 쌓여갔다. 이 세계의 맥주는 전생의 맥주보다 도수가 훨씬 높아서, 술이 센 편인 카시야도 아까부터 제가 알딸딸하게 취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피로가 쌓여서 그런지 취기가 빨리 오르는 것 같았다.
그 사이 그들은 마치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신변잡기적인 얘기를 나누었다. 적군이라 생각했을 때는 날 선 경계심에 억지로라도 심리적 거리감을 유지했지만, '적'이라는 벽이 허물어진 루크와 카시야는 의외로 말이 잘 통했다. 그가 답변을 재촉한 것도 아닌데, 카시야는 왠지 모를 편안한 기분에 평소보다 말이 많아졌다.
하지만 여전히 심리적인 마지노선을 허물지 않은 카시야로부터 나오는 얘기가 많지는 않아서, 주로 루크의 과거사를 듣는 쪽이었다. 노예 출신 어머니에게서 태어나 지독한 무시를 받던 어린 시절 얘기, 제 아비인 남작을 향한 복수심과 이런 구질구질한 삶을 청산하겠다는 의지로 악을 쓰고 그의 아들로서 입적되었던 얘기, 운 좋게 검술에 대한 재능을 가졌다는 것을 깨닫고 피나는 수련을 거듭해 황실 기사단에 입단했던 얘기, 마차 사고로 남작과 그의 아들들이 한꺼번에 사망한 덕분에 남작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얘기, 다루기 쉬워 택한 제 1황자와 황자의 측근이 되기 위해 전략적 동맹을 맺었던 알리스타스 공작 얘기….
들으면 들을수록 루크와 세이지가 분리되었다. 루크는 루크, 세이지는 세이지였다. 만에 하나 루크가 세이지의 환생이라 하더라도, 전생을 아예 기억하지 못하는 이를 전생의 인물과 동일하다 여겨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만약 그가 전생의 세이지 그대로였다면 그는 제 노예 출신 어미부터 살려두지 않았을 것이다. 세이지는 자신의 약점이 되는 것은 모조리 없애버렸으니까. 물론 비슷한 점이 없지는 않았다. 특히 남작과 그의 아들들이 한꺼번에 사망했다던 마차 사고는, 100% 확신하건대 루크의 작품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세이지였다면 그 얘기를 하면서 복잡한 감정을 내비치진 않았을 터이다.
취기가 꽤 오른 채 아무 말 없이 루크의 얘기를 듣고만 있던 카시야에게 루크가 불쑥 물었다.
"세이지란 놈 얘기 좀 해봐."
"…예? 왜… 그 사람 얘기에 집착하십니까?"
"네가 날 처음 봤을 때부터 자꾸 세이지라고 부르니까 궁금해지더라고."
이름을 알 수 없는 말린 열매 안주를 주워 먹으며 가볍게 질문하는 루크는 별다른 속셈이 있어보이지는 않았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평소의 카시야였다면 세이지나 전생에 대한 것은 절대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맞은편에 앉은 이가 세이지와 똑 닮은 루크만 아니었어도 모르쇠로 일관했을 것이다. 하지만 술과 노란 불빛과 흥청거리는 분위기와 기분 좋은 피로감에 취한 카시야는 잠시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그는…. 그는… 제 상관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보자면 친구이기도 했죠.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으니까…. 친하진 않았습니다. 다만 서로를 굉장히 잘 알고 있을 뿐이었어요. 비슷한 구석이 많았거든요. 하지만 동류라 혐오했던 것인지, 그는 저를 꽤 많이 괴롭혔습니다."
루크는 생각 외로 순순히 나오기 시작한 세이지의 이야기에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집중했다.
"그는…. 후우…. 가끔 굉장히 종잡을 수 없는 행동을 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굉장히 이성적이고 계획적이고 냉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날 사지로 내보낼 때, 다른 사람들은 내가 거기서 죽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저만은 알고 있었어요. 내가 거기서 죽지는 않을 거라는 걸. …대신 딱 죽기 직전까지 고생은 했죠. 그는 그만큼 계산이 철저했습니다. 내 능력을, 내가 어디까지 해낼 수 있는지를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이었어요. 그랬던 사람이니까, 아마… 마지막 명령은 계산 착오였던 것 같습니다. 그가 날 죽이려고 보낸 곳에서 내가 살아 돌아와 버렸거든요."
술과 이야기에 점점 깊이 취하게 된 카시야는 루크가 전혀 취하지 않은 눈빛을 하고 제 이야기를 듣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살아 돌아온 게… 기분이 나빴던 모양이에요. 보고를… 보고를 하러, 그의 방에 들어갔더니 이미 나를 죽일 마음을 먹고 있더군요. 하아…. 등에 총알이 박혔을 땐 진짜 아팠다고요. 쯧…. 아무리 그래도 옛정이 있는데, 한 번에 깨끗하게 죽일 것이지…. 나쁜 새끼."
"…그래서? 넌 어쨌는데?"
루크의 목소리가 자장가처럼 부드럽게 귓가에 감겼다.
"블루딘… 이라는 독약이 있습니다. 임무에 실패했을 때… 자살하라고 지급했던 거였는데, 뭘 섞은 건지는 모르지만 고통 없이 순식간에 죽을 수 있다는 독이었죠. 후우…. 늘 그게 어떻게 작용하는지 궁금했는데… 그날 확인할 수 있었죠. 입안의 독주머니를 씹었더니, 어디선가 '퍽'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고 퓨즈가 끊긴 것처럼… 눈앞에 불꽃이 튀기는 것 같다가 갑자기 캄캄해지더니 온몸이 제 통제를 벗어나더군요. 뭐…. 고통이 없는 건 아니더라고요. 소올직히, 엄청 아팠어요…. 총알보다 더 아팠어…. 그래도… 순식간에 끝났으니까, 뭐, 그 정도면…."
카시야는 자신이 하면 안 되는 얘기를 하고 있다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멈춰지지가 않았다. 그냥 누군가에게 다 말해버리고 싶었고, 말하는 중에는 후련함을 느꼈다. 하지만 그녀의 훈련된 이성 마지막 한 가닥이 그녀의 입을 가로막았다.
"…어쨌든 저는 그렇게 죽을 뻔하다가 겨우 살아난 거죠. 살아난 게 좋은 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루크는 포크로 선술집 추천 메뉴인 감자 요리를 찔러대고 있는 카시야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방금 그녀가 했던 얘기는 기묘했다. 마지막에 왠지 어색하게 덧붙인 말이 아니라면 그녀는 죽었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그것보다 이상한 것은 총알이니, 블루딘이니, 퓨즈니 하는, 의미도 알 수 없는 단어까지 섞여있었다는 것이다.
'뭐지? 뭔가 석연치가 않은데….'
루크가 고민에 빠져있는 사이 카시야는 제 뜻대로 잘리지 않는 감자 요리와 나름의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포크로 찌를 때마다 바스라져 버리는 감자 덩어리 때문에 슬슬 짜증이 나려 했다. 그 모습을 본 루크는 감자를 알맞은 크기로 잘라 포크 끝에 찌른 뒤 카시야의 입 앞에 갖다 댔다. 뭐하는 짓이냐고 노려보지나 않을까 싶었는데 카시야는 멍하니 그 감자 조각을 보다가 날름 포크를 입에 물었다.
루크는 방금 전까지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 잠시 잊어버리고 말았다. 자신의 처지나 그녀의 임무, 알 수 없는 과거 따위는 다 때려치우고, 지금 당장 자신이 묵고 있는 방에 카시야를 데려가 눕히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 작품 후기 ============================
모두의 염원대로, 루크 군이었습니다!
그나저나 이번 편을 쓰면서 가장 괴로웠던 점은, 미지근한 맥주를 마시는 카시야를 상상해야 했다는 것입니다. 시원하지 않으면 맥주가 아니지요! 걍, 보리술?
+ 그녀의밤 님, 후원쿠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