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홍의 카르마-95화 (95/134)

00095 우군(3) =========================

하지만 루크는 이번에도 제 욕망을 꿀꺽 삼켜버리고는 그녀와의 대화를 이어갔다. 포크에서 감자를 빼내어 오물거리는 그녀의 입술에서 끈적해지려는 눈길을 떼어내기가 힘들었지만, 한순간의 욕망을 채우는 것보다 그녀의 비밀스러운 얘기를 듣는 게 더 구미가 당겼다.

"너 아까, 굉장히 이상한 얘기를 했다는 거 알아?"

루크의 질문에 카시야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한 얘기가 이상하면 어떻고, 아니면 어떻습니까. 뭐가 달라지는 것도 아닌데…. 안 그렇습니까?"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는 것 같기도 하고…."

루크는 카시야가 자신의 진실을 가리는 벽을 다시 쌓아올리기 시작했음을 깨달았다. 그녀가 방금 한 말들은 어떻게 봐도 거짓말이라거나 헛소리처럼은 들리지 않았다. 등에 '총알'이라는 게 박혔다는데 '총알'이 뭔지는 몰라도 등에 뭔가가 박혔다면 가벼운 부상은 아니었을 것이다. 게다가 순식간에 죽을 수 있는 독을 씹었다고 했는데 거기서 살아났다는 말은 앞뒤가 맞지 않았다. 하지만 정말 그렇게 죽었다면 지금 그녀가 여기 앉아있는 게 말이 안 되는 소리이기도 하다.

루크는 결국 세이지와 카시야의 사이에 살인과 피살의 관계에 필적하는 어떤 일이 있었고, 카시야가 거기서 살아남았던 게 아닐까 하는 추측을 했다. 독을 먹었다는 얘기가 이해가 안 되긴 했지만, 지금 그녀는 확실히 이전의 모습보다는 굉장히 흐트러진 상태였고, 그녀의 술버릇이 ‘멀쩡한 척 헛소리를 하는 것’일지도 모르니까.

"…만약 정말 그렇게 죽어버렸다면 억울해서 눈도 못 감았을 것 같긴 하네."

루크가 아무렇지도 않게 던진 말에 카시야가 잠깐 멈칫했다. 몽롱한 녹색 눈동자는 전생의 기억을 더듬느라 허공을 응시했다.

"…딱히, 억울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굳이 죽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없었고, 그 녀석을 미워할 이유도 없었으니까…."

"미워할 이유가 왜 없다는 거지? 네가 성녀 알리나야? 매일 사랑과 용서에 밥 말아 먹고 사는 인간이냐고."

그건 위선이라는 루크의 말에 카시야는 자신보다 더 외롭고 상처투성이였을 게 분명한 세이지를 떠올렸다. 자신이 일부러 외면했던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을….

"하나 남은 동족이었으니까….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 녀석에게 애정 비슷한 게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날 죽이려고 한 것도 더 윗선에서의 명령이었을 테죠. 그 계산적인 남자가 충동적으로 벌인 일이었을 리 없습니다. 어쩌면 그는… 내가 저더러 살려달라고 말해주길 바랐는지도 모르죠…."

루크는 쓸쓸한 눈빛의 카시야를 보며 저를 꼭 닮았다는 그 세이지란 남자에 대해 질투심이 솟구쳐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질투심이라는 표현이 우습지만, 그것 외에는 딱히 알맞은 단어가 없었다. 물론 지금 카시야가 하는 말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서부터가 거짓인지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지금도 그녀가 세이지라는 인간을 전적으로 믿고 있다는 것이다. 그게 배알이 꼴렸다.

"그따위 개자식이 뭐가 이쁘다고 미안해? 혹시, 그 자식 좋아했어?"

"푸흐흐…. 그딴 낯간지러운 감정 따위 잘 모릅니다. 아마 자기연민에 더 가까웠겠죠."

카시야가 대답을 하고는 다시 맥주를 들이켰다.

밤은 점점 깊어갔다. 그들은 오랜 친구들처럼 욕설 섞인 말을 주고받으며 시시껄렁하게 잔을 부딪쳤다.

"하아…. 그런데… 루크."

"하! 이것 보게? 이젠 페레이아 경도 아닌 거냐? 평민이 귀족 호칭을 생략했다간 모독죄로 혀가 잘릴 수도 있다고."

"뭐, 이젠, 도망자 신세 아닙니까?"

"어이, 도망자가 아니라 어디에도 매이지 않은 자유의 몸인 거지. 그리고 내 남작 작위는 아직 멀쩡해."

루크는 큭큭대면서도 카시야가 술이 깨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 있었다. 아까부터 술 마시는 속도가 느려진 그녀는 자신의 과거에 대한 주제 역시 교묘히 피해갔다. 어쩌면 술에 취해 마구 나불댄 것을 후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카시야가 꽤 귀엽게 느껴졌다.

"네, 네. 그럼, 페레이아 경. 도망자든, 자유의 몸이든…. 진짜 우리 쪽으로 올 생각 없습니까?"

"내가 그 쪽으로 가서 얻는 게 뭔데? 앞서도 말했잖아, 내가 왜 케일런을 선택했는지. 그는 구워삶기 편했거든. 반란이 성공만 하면 이것저것 뜯어낼 수 있었지. 하지만 타셀은 달라. 지나치게 똑똑하고 현명하지. 나 같은 하이에나가 썩은 고기 몇 점 얻는 것도 빡빡하게 굴 인간이야. 게다가 그에게는 이미 지크와 미하일 메레디스 형제가 있지. 미하일과 나는 포지션이 너무 겹친다고 생각하지 않아? 타셀이 날 받아들인다 해도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나는 늘 미하일에 한참 뒤쳐진 대우를 받을 거다. 내 자존심에 그 꼴은 또 못 보지."

"하지만 이대로라면 타셀 전하께서 승리했을 때 당신의 안전을 지킬 수 없을 겁니다."

"내 몸 하나 건사 못할까봐? 걱정 마. 이 세상에 칼리스토니아만 있는 것도 아니고."

얄밉도록 당당한 태도에 카시야도 할 말이 없어졌다. 그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다. 루크 페레이아 정도 되는 인재라면 다른 나라에서도 충분히 환영받을 것이다. 굳이 제 자존심을 굽혀가며 타셀 군에 투항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그래서 그녀는 결국 순순히 납득했다.

"그렇긴 합니다만…. 그래도 좀 아쉽기는 하네요. 당신과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왠지 인연이 닿을 거라 생각했는데…."

카시야가 '굳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며 말끝을 흐렸다. 절대 안 넘어오겠다는 놈에게 더 볼 일은 없다는 듯한 태도에, 당황한 것은 루크 쪽이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하지만 당신의 재능이라면 굳이 칼리스토니아가 아니더라도 잘 살아나가시겠죠. 저로서는 당신이 무사히 제국을 빠져나가시길 바라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군요. 적군이었지만 당신이 싫지는 않았습니다. 당신의 무위 역시 존경했고요."

"…어, 그것 참 고맙군 그래. 고맙긴 한데…."

"아쉽지만 이제 정말 작별인사를 해야겠군요. 다시 만날 일이 요원하긴 합니다만, 오늘 저녁은 덕분에 즐거웠습니다."

"……."

"…페레이아 경? 슬슬 일어나야 할 것 같은데요."

루크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카시야를 쳐다보았다. 사람이 적을 포섭하려면 적어도 세 번은 물어봐야 하는 것 아닌가. 이쪽도 자존심이 있는데 의향을 물어보자마자 수락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말이다. 꼴랑 두 번 물어봐놓고는 아니라니까 그럼 됐단다. 애초에 회유할 마음이 있기는 했던 것인지 의심스러워지면서 왠지 분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고 제가 먼저 돕겠다 말하기도 민망하다. 하지만…. 하지만 여기서 그녀와 영영 헤어지고 싶지는 않았다. 작별인사를 건네는 그녀를 붙들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었다.

"하아…. 너…. 사람 갖고 노는 재주가 대단한 거냐, 앞뒤가 꽉 막힌 거냐?"

"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연애도 한 번 못 해봤지?"

"여기서 그 얘기는 왜 나오는 겁니까?"

"딱 보면 알겠거든. 사람이 그렇게 매사 칼로 자르듯이 하면 될 일도 안 되고 그러는 거야. 사람을 포섭하려고 마음을 먹었으면 상대방이 설득당할 때까지 정성을 들여야지, 겨우 두 번 물어보고 아니라니까 끝이야?"

그 말에 이번에는 카시야가 그를 어이없이 바라보다가 이내 피식 웃었다.

"저는 쓸 데 없는 시간 낭비를 싫어합니다. 당신이 이유 없이 시간을 끌 거라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한 번만 더 여쭤보겠습니다. 저희와 함께 하시겠습니까?"

루크는 순식간에 뒤바뀐 위치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 여자, 의외로 꽤나 영악하다. 루크는 피식 웃으며 그녀가 내민 손을 턱 잡았다.

"타셀 밑으로 들어가는 건 아냐. 내가 돕는 건 너 하나다. 그냥 너 개인에 대한 호의일 뿐이야."

"그렇다면, 절 도와주시는 것에 대한 보답으로는 뭘 원하시는 겁니까? 저 개인으로서는 당신에게 부나 지위를 드릴 수가 없는데요."

"…죽지 않고 살아남는다면, 그 때 요구하지."

그렇게, 피엔 뒷골목의 시끌벅적한 선술집에서, 케일런군의 총사령관이었던 루크 페레이아와 타셀군의 분대장인 카시야의 협약이 비밀리에 체결되었다.

*

"분대자임! 분대자임! 이제 오심미까!"

술을 깨려고 피엔 거리를 좀 더 걷다가 여관으로 돌아온 카시야를, 술독에 빠졌다가 나온 거나 다름없는 분대원들이 꼬인 혀로 맞이했다. 이미 테이블 위에 엎어져있는 놈들도 있었지만, 술 깨나 한다는 녀석들은 여전히 부어라, 마셔라 하며 술잔을 놀리질 않았다. 분대원들 앞에서 취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노력한 자신이 우스워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오늘은 그녀가 허락한 날이라 뭐라 혼쭐을 낼 수도 없었다.

"후우…. 적당히 마시고, 이제 그만들 들어가 잠이나 자라."

"에헤이! 우리 분대자임도 한 잔 허셔야죠! 자자, 받으십쇼!"

평소라면 카시야 앞에서 꼼짝 못했을 분대원들은 술기운을 빌어 그녀를 억지로 의자에 앉힌 뒤 커다란 잔에 술을 가득 부었다.

"지금 다들 죽으려고 작정했나?"

"아이코, 거참 빡빡하시네에."

"분대장님이 그거 원샷 하시면 들어가 자겠슴돠!"

카시야는 한숨을 푹 쉰 뒤, 손에 쥔 커다란 잔을 들고 마시기 시작했다.

"오오오오오오!!!"

“역시 화끈하네!”

"마셔라! 마셔라!"

꿀떡꿀떡 넘어가는 목울대를 보며 주변의 분대원들이 환호하며 소리 질렀다. 하지만 아무도 카시야가 진짜로 그 잔을 비울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잔의 크기가 작은 오크통만 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중간에 도저히 다 못 마시겠다며 잔을 내려놓으면 낄낄대며 놀리려고 분위기를 잡던 분대원들은 그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잔이 점점 비어져가자 조용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다 비워진 잔이 쾅, 하는 소리를 내며 테이블 위에 놓였다.

"다들 지금 즉시 방으로 들어가 취침한다. 실시."

낮게 깔리는 음성에 설풋 술이 깬 분대원들은 널브러져 있는 제 동료들을 들쳐 메고 서둘러 2층의 방으로 들어갔다. 얼핏 '사람도 아녀.', '술고래구만.' 하는 소리가 들린 듯도 했으나 카시야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다들 들어가 식당이 조용해지자 그녀는 곧바로 뒷문을 열고 나와 방금 마신 술을 토하기 시작했다. 급하게 들이부은 거라 머리가 빙빙 도는 것 같았지만, 가끔은 이런 식으로 압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한참 토하고 난 뒤 여자 목욕탕에 들어가 옷을 훌훌 벗고 냉수를 뒤집어쓰자 어질어질하던 정신이 제대로 돌아오는 것 같았다. 발가벗은 채 작은 목욕탕 벽에 기대어 정신을 수습하고 있노라니 갑자기 지금 제 꼴이 우스웠다.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술에 취해 뒷감당 못할 말을 내뱉어버리기도 하고 우스운 꼴이 되기도 하는 자신의 모습이 꽤 '보통 사람'처럼 보이는 것 같아서 마음에 썩 들었다. 얼른 전쟁이 끝나서 좋아하는 사람들과 사이좋게, 즐겁게 살아갈 수 있게 되었으면, 하는 소망이 마음속에서 점점 자라나는 것 같았다.

============================ 작품 후기 ============================

1. 다네미 님 > 전회 10페이지의 '저만은'은 오타가 아닙니다. 카시야 본인만은 죽지 않을 것을 알았다,는 의미로 쓴 것입니다.

2. 린킴 님 > 네. 후후. 남자 손에 꽉 차면... 좀 크죠. 허허허.. 우리 카시야가 좀... 그렇습니다. (코 쓱-)

3. 루크는 인내의 아이콘으로 등극할 각.

+ 그녀의밤 님, 후원쿠폰 감사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