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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홍의 카르마-96화 (96/134)

00096 우군(4) =========================

허름한 여관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털썩 누운 루크는 느지막이 올라온 술기운에 살짝 어지러움을 느끼며 카시야가 했던 세이지의 얘기를 곱씹었다. 카시야의 말처럼, 왜 이렇게 그 남자의 얘기에 집착하게 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미약에 취한 그녀가 자신을 보며 '왜 날 죽였냐'고 물었던 그날 이후부터 자신의 얼굴을 한 남자가 카시야를 죽이려 하는 모습이 자꾸만 상상되어 기분이 나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니, 사실은 세이지라는 남자보다는 카시야에게 더 집착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그녀에 대해서는 왠지 끝도 없이 호기심이 생긴다. 왜 그러는지는 알 수 없다. 제 마음인데도, 카시야에 대한 것은 하나부터 열까지 죄다 불확실한 것투성이였다. 특히 세이지와의 과거와 죽을 뻔 했다던 순간의 얘기를 듣고 나자 혼란은 더욱 심해졌다.

'여자한테 휘둘려보기는 또 처음이네….'

루크는 혼자서 큭큭 대며 웃다가 비몽사몽 잠이 들었다.

사흘간 거의 쉬지도 않고 말을 몰았던 탓에 피곤에 절여진 육체는 술기운까지 더해지니 금방 무의식의 세계로 떨어졌다. 하지만 루크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피곤한 육체와 늘 긴장하고 있는 정신이 부딪히니 자각몽을 꾸는 결과가 나온 것이다.

눈앞에 빨강, 초록, 하양, 노랑의 빛의 향연이 펼쳐지더니 점점 어두워지며 암전에 빠져들었다. 그러다가 다시 시야가 서서히 밝아졌지만, 이상하게도 사람들의 목 위로는 흐릿한데다 전반적인 시야 자체도 어두침침했다.

'왜 이렇게 침침하지? 눈 좀 비비고 싶은데….'

하지만 자신의 시야를 통제하는 건 자신이 아니었다. 마치 누군가의 시선을 빌려 세상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는 어딘가로 걸어가고 있었고, 그와 마주친 사람들이 절도 있는 태도로 손날을 이마에 붙이며 뭐라 말했다. 해괴한 동작이었지만 어렴풋이 그게 인사의 일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와 마주치는 사람들마다 그런 식으로 인사를 하는 데 반해 그는 상대를 향해 같은 식의 인사를 하지 않았다. 사실 거의 무시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시야의 주인이 꽤나 높은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왠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악몽 같지는 않은데도 기분이 나빠서 얼른 꿈에서 깨고 싶었다. 루크는 눈을 깜빡여보기도 하고 몸을 뒤흔들어 보려고 힘을 주기도 했지만 자신의 몸이 전혀 통제가 되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들어 점점 더 불안해졌다.

그때 몸의 주인이 어떤 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복잡해 보이는 잠금장치를 볼록 튀어나온 어떤 것 하나를 누르는 것으로 간단히 채웠는데 자꾸 잠갔던 것을 풀어 다시 잠그거나 문간을 만지작거리며 시간을 끄는 듯이 보였다.

'하아, 미치겠네. 무슨 꿈이 이래? 내가 귀신이라도 들렸나?'

루크는 이 상황이 굉장히 기묘하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꿈 자체를 자주 꾸는 편도 아니었고, 꾸더라도 아는 사람과 아는 장소가 나왔을 뿐인데 지금 이 꿈에서는 모든 환경이나 상황이 다 낯설었다. 자꾸만 문 앞에서 꾸물거리는 몸의 주인이 살짝 정신이 나간 게 아닐까 싶어질 즈음, 그가 크게 심호흡하더니 뒤를 돌았다. 등 뒤에는 짧은 복도가 나 있었고 그 끝의 왼편으로 방이 이어지는 것 같았다. 방은 이 세상이 것이 아닌 것처럼 반듯했다. 벽도 반듯하니 판판했고, 울퉁불퉁한 곳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이 곳에서 산다면 미치광이가 된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군. 소름끼쳐.'

루크는 잠에서 깨려는 노력을 포기한 채 시야의 주인을 관찰하는 듯한 태도로 상황을 주시했다. 문에서 이어진 짧은 복도를 지나 왼쪽으로 꺾자 어두침침한 방 안에 침대가 놓여 있었고, 그 침대의 곁에 있는 의자에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의자에 앉아있던 이가 일어나 바깥에서 마주쳤던 사람들처럼 인사하더니, 시야의 주인이 뭐라고 말을 하자 옷을 벗기 시작했는데, 그것보다 더 당황스러운 건 그 사람의 얼굴만큼은 똑똑히 보였다는 것이다.

'어? 어? 잠깐! 카시야? 이, 이거 뭐야?'

물론 그가 아는 카시야와는 어딘지 조금 다른 것 같기도 했다. 새카만 머리카락과 까만 눈동자, 그리고 지금보다 훨씬 차가워 보이는 얼굴….

무표정하게 옷을 벗는 카시야를 보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당황스러웠다. 그녀의 속살을 본 적이 있다는 것은 지금 이 상황에서 하등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녀와 다른 사람의 침실 사정을 엿보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눈이라도 감고 싶은데 그것마저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정도는, 그 다음 벌어진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몸의 주인은 예상대로 카시야와 함께 침대 위로 올라갔는데, 그와 카시야의 끈적끈적한 정사 장면도 보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가 카시야의 기분은 전혀 배려하지 않은 채 그녀를 거칠게 다루는 모습은 더더욱 바라던 바가 아니었다. 몸의 주인이 그녀의 목을 조르며 관계를 하는 장면에서는 무슨 짓을 해서라도 이 미친놈을 죽여 버리고 싶었다.

카시야가 누군지 알 수 없는 놈에게 무참히 당하는 장면을, 그 누군가의 시선에서 꼼짝없이 전부 바라봐야 하는 것은 고문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괴로웠다. 가학적인 강간을 당하면서도 앓는 소리조차 흘리지 않는 카시야를 보는 것은 더욱 더 가슴이 아팠다. 가슴 한가운데가 미칠 듯이 아려와서 숨쉬기가 힘들 정도였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게 끝이 아니었다. 관계를 마친 뒤에도 몸의 주인은 가만히 일어나 옷을 입으려는 카시야의 머리채를 잡고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나체인 그녀의 배를 발로 차고 밟다가 다시 머리채를 잡고 일으키더니 엄청난 힘으로 그녀의 뺨을 쳤다. 그녀의 고개가 돌아가는 방향으로 핏방울이 날렸다.

전장에서 오랫동안 온갖 살육의 장면을 봐온 루크였지만, 그 어떤 기억도 지금 이 상황보다 끔찍하지는 않았다. 자신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 때문에 더 미쳐버릴 것 같았다. 열심히 카시야의 이름을 외치려 해봐도 신음조차 나오지 않아서 그저 머릿속으로만 외칠 수밖에 없었다.

'그만 둬, 이 미친 새끼야! 그만 두라고! 제발!'

카시야를 마구잡이로 폭행하던 남자가 거친 숨을 내쉬는 것이 느껴졌다. 남자의 호흡도 굉장히 흐트러져 있었다. 그가 한참 숨을 고르고 있는데 바닥에 널브러져있던 카시야가 조금씩 움직이더니 겨우 상체를 들어올렸다. 남자를 향해 카시야가 고개를 돌린 순간 루크는 숨 쉬는 것조차 잊었다. 아까 이 남자가 얼마나 세게 쳤는지 오른쪽 얼굴 전체가 완전히 부풀어 올라 눈도 제대로 못 뜨고 있었고 뺨에는 벌써부터 보랏빛 멍이 번지고 있었다. 코피는 뚝뚝 떨어져 바닥에 빨간 원을 점점이 그리다가 그녀가 상체를 듦에 따라 그녀의 하얀 나신 위에도 붉은 핏자국을 흩뿌렸다. 그녀가 다 터져 피가 배어나오는 입술을 머뭇거리다가 열었다.

"다른 여자를 안으실 때는 이렇게 때리시면 안 됩니다. 저야 괜찮지만, 훈련받지 않은 여자들은 버티지 못할 겁니다. 괜한 문제를 일으켜 좋을 것은 없지 않습니까."

아까까지는 모든 대화가 웅얼거리는 듯해서 알아들을 수가 없었는데, 이상하게 방금 그 말은 똑똑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말을 알아들었다고 해서 그 말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루크는 만약 지금 자신의 얼굴을 거울로 볼 수 있다면 분명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으리라 확신했다. 그만큼 카시야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납득할 수가 없었다. 지금 그런 말을 할 때인가! 그때 몸의 주인인 남자가 말을 했다.

"건방진 소리 하지 말고 솔직히 말해. 널 이렇게 때리지 말아달라고. 하고 싶은 말은 사실 그거 아냐?"

이 남자는 가학적 성향이 있는 미치광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뻔한 얘길 억지로 상대방에게 시키려 할 이유가 없잖은가. 하지만 남자가 내뱉은 말에 분노한 것은 자신뿐이었다. 카시야는 여전히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당신이 만족하신다면야."

"…그래? 내가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할 수 있겠어? 내 만족을 위해서라면?"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명령을 내리시면, 저는 그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다는 걸. 당신이 저에게 죽으라고 명령을 내리시면 저는 죽는 시늉이 아니라, 죽을 겁니다."

그 대답에 루크는 아아악,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이 남자뿐만이 아니라 카시야 역시 미친 게 틀림없다. 죽으라는 명령을 내리면 죽겠다고?

'도대체 이건 뭐지? 저건 분명 카시야인데… 카시야가 노예인 상황인가? 나, 난 이 따위 상상 해본 적도 없어! 왜 이런 꿈을 꾸는 거지? 어떻게 하면 깰 수 있는 거야!'

마치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은 독방에 갇혀 울부짖는 죄수처럼 루크는 또다시 옴짝달싹하지 않는 몸에 힘을 주며 꿈에서 깨려 노력했다. 이 남자가 다시 카시야를 폭행하는 모습을 도저히 더 이상은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다행히 남자는 바지를 주워 입고는 방 밖으로 향했다. 루크는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눈앞에는 아까 잠그고 들어왔던 문이 보였고 문 옆의 벽에는 동그란 거울이 달려있었다.

'거울…? 아까 들어올 때에도 저기에 거울이 있었나?'

이 남자가 문을 향하는 걸음걸음마다 루크의 심장이 무섭도록 두근댔다. 불길한 기분이 말할 수도 없이 빠르게 차올랐다. 문 옆에 걸린 거울이 신경 쓰여 참을 수가 없었다.

'아니야…. 아닐 거야….'

하지만 루크의 창백한 소망과는 다르게, 거울 옆을 지나던 남자가 거울을 흘끗 쳐다보았고, 거울에는…!

"으헉!"

루크는 숨을 들이키며 잠에서 깨어났다. 좁은 여관방 안에, 무시무시할 정도의 거친 숨소리가 가득 찼다.

"허억, 허억, 허억…."

분명 자신이 잠들었던 여관방이었다. 방금까지 본 것은 단지 꿈이었다는 사실도 확실히 자각했다. 하지만 입 밖으로 튀어나올 듯이 뛰어대는 심장은 가라앉을 줄을 몰랐다. 마지막에 본 거울 안의 모습이, 정말 찰나였는데도 잊히지가 않았다. 거울에는, 눈물을 흘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비쳤던 것이다!

잠에서 완전히 깨기 위해 루크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세이지 그 개자식…! 그 놈이 분명해. 하아…. 하아…. …그런데, 잠깐. 세이지라고?'

그는 침대에서 반쯤 몸을 일으키다가 굳어버렸다. 방금의 꿈이 세이지와 카시야의 기억이라는 확신이 듦과 동시에 자신이 들어본 적도 없는 그 상황을 어떻게 꿈꿨는지 의심이 들었다. 안 그래도 혼란스럽던 머릿속이 아주 엉망진창이 된 느낌이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 없던 그 기묘한 방의 풍경이나, 상상도 해본 적 없는 희한한 인사 방법 등, 모든 게 다 이상하기 짝이 없었다. 예지몽이라기에는 과거의 일이라는 느낌이 강했고, 단순한 악몽 취급하기에는 섬뜩하리만치 구체적인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뭐라고 해야 한단 말인가.

결국 루크는 창 밖에서 동이 터올 때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뜬 눈으로 지샐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고민해도 간밤의 꿈이 무엇인지 설명할 길이 없었지만, 설명할 길 없는 그 꿈이 신경 쓰여 미칠 것 같았다.

'카시야에게 그런 일이 있었느냐고 물어볼까? 하지만… 있었다면 어쩔 거고, 없었다면 또 어쩔 거야? 하아. 미치겠네, 진짜. …정말 내가 귀신에라도 씌었나? 신전에 가서 축복이라도 받아봐야 하는 건가?'

한참을 고민하던 루크는 결국 간밤의 꿈을 일단 악몽이었다고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나중에 전쟁이 끝나고 살아남는다면 그때, 카시야에게 이 꿈 얘기를 해주면서 떠봐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카시야가 이 얘길 듣고 나서, 도대체 어쩌다가 그런 말도 안 되는 개꿈을 꿨냐며 비웃어주길 바랐다. 꿈이 아니라기엔 너무나 잔혹한 상황이었으니까.

하지만 만약에 카시야가 그런 식으로 학대당했던 과거가 실재했다고 한다면, 그 세이지란 작자를 무슨 수를 써서든 찾아내서 죽여 버리겠다고 다짐했다.

============================ 작품 후기 ============================

마테챠 님 > 세이지 외전은 출간용 외전으로 준비할 예정입니다. 조아라에서 무료로 완결을 볼 수 있게 해준 출판사에 대한 예의로, 외전을 넉넉히 준비해드리기로 했거든요;;

나는 휴재를 선언했는데 왜 연재를 하고 있는 것인가.... 코멘트 보는 낙으로 사는 자까라서 업로드를 멈추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ㅠㅗㅠ

하지만 내일부터는 진짜 진짜 휴재... 지, 진짜로...;

+ 그녀의밤 님, 박하사탕99 님, 자고싶당 님. 후원쿠폰 감사합니다.

+ 제 블로그에 오셔서 외전 아이디어 남겨주시면 그 중 스토리 진행에 무리가 없는 것들은 추후 출간용 외전으로 넣겠습니다. (오늘 쓴 '외전 고민'이라는 글에 답글로 달아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http://blog.naver.com/lemonfrog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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