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7 황궁(1) =========================
자고 있던 대신관 아르헨은 눈을 번쩍 떴다.
한밤중이라 주변이 지나치게 고요한 탓에 아르헨의 심장이 뛰는 소리가 방 안에 울리는 것만 같았다. 그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숨을 고르며 잠시 고민하다가 로브를 걸치고 조용히 문을 열었다. 심장이 아플 정도로 거칠게 뛰는 탓에 숨이 가빠올 지경이었지만 그는 최대한 침착하려고 노력했다.
그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성녀 알리나의 처소였다. 창문으로 약한 불빛이 새어나오는 것을 보니 그녀 역시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가 그녀의 처소에 다다르기가 무섭게 알리나가 문을 열고 그를 맞았다. 테이블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이 두 개 놓여있었다. 하지만 문 안으로 들어간 아르헨은 앉을 생각도 않고 알리나에게 말했다.
“카시야 경이 칼에 무참히 찔리는 꿈을 꾸었습니다. 너무도 생생한 느낌에, 단순한 꿈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알리나 님.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요.”
긴장에 찬 아르헨의 표정만큼이나 어두운 안색의 알리나가 천천히 창가를 향해 다가가 어둠이 장악한 바깥을 응시했다.
“때가… 도래한 것이니, 우리도 준비를 해야겠지요.”
그녀의 말에 아르헨이 주먹을 꽉 쥐었다.
*
느리고 긴 여행길에 에르논의 짜증이 폭발하기 직전, 황제의 밀사 일행은 아르카나에 도착했다. 에르논 혼자였다면 한 번에 아르카나까지는 못 되더라도 가까운 곳까지 공간 이동을 해 가며 움직일 수 있었는데, 느리고 약해빠진 황제의 밀사들을 달고서는 어떤 마법도 쓸 수 없었다. 그들은 그가 건강을 잃어 마법을 제대로 쓸 수 없다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방심을 유지해야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에르논은 치밀어 오르는 마법 욕구를 꾹 눌러 참았다.
공작성에서 아르카나까지는 거의 열흘 남짓한 기간이 걸렸다. 그 기간 동안 황제의 밀사들은 에르논에게 제대로 된 말 한 마디 걸지 않았다. 그저 식사를 건네주고, 오늘은 여기서 묵는다 말해주는 것 뿐, 황궁으로 가서 뭘 하게 될지는 전혀 말 하지 않았다. 그들이 몰라서 말을 못하는 건지, 아니면 에르논이 미리 알아서는 안 될 일이라 그러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 길고 긴 지루함도 이제 끝이었다. 에르논은 마차 창문 바깥으로 보이는 황궁의 위용을 바라보며 기지개를 켰다.
'이 커다란 궁 안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포로로 교환되기 전, 에르논은 타셀로부터 황제의 기행에 대해 전해 들었다. 언제부턴가 자취를 감춘 신검 카라볼그 얘기며, 어느 날 갑자기 대신관을 살해한 뒤 그것이 타셀의 짓이라고 발표한 얘기며, 황궁과 가까운 '사형수들의 묘지'에서 발견된 비쩍 마른 마법사이 시체 얘기며….
에르논은 그 모든 얘기가 결국 한 곳을 가리킨다고 생각했다. 신검 카라볼그. 황제가 쥔 마지막 카드이자, 이 전쟁 최대의 변수.
'카라볼그를 들기 위해 뭔가 일을 벌이고 있는 것 같은데 말야….'
하지만 카라볼그에 대한 많은 것이 비밀에 감춰져있어 에르논의 비상한 머리조차도 모든 퍼즐을 맞출 수가 없었다. 애초에 퍼즐 조각이 모자란 퍼즐 판이라고나 할까. 그러니 그 모자란 퍼즐 조각을 찾기 위해 누군가가 황궁 안으로 들어가야 했고, 에르논은 그 기회가 자기에게 온 것이 다행이라 여겼다.
"도착했습니다, 에르논. 조심히 마차에서 내리시면 됩니다."
마차가 멈추더니 곧 밀사들이 마차 문을 열고 그의 하차를 도왔다. 하도 오래 마차에 앉아 있었더니 온몸이 쑤시는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서야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며 쑤시는 곳을 쭉쭉 펴고 싶었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대마법사'의 이미지에 맞춰 행동하기 위해 태연한 척 해야 했다.
밀사들은 에르논을 데리고 황궁의 비밀 알현실로 향했다. 그곳으로 가는 길은 미로처럼 이리저리 꼬였지만 에르논은 모든 길을 외웠다. 어디든 시종과 시녀로 넘치는 황궁 안에서 기묘하게 아무도 얼씬하지 않는 곳에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알현실이라기에는 작고 간소한 방이 나타났다. 방 안에는 기분 나쁜 정적이 감돌고 있었다.
"긴 여정에 피곤하시겠지만 저희도 에르논 님의 신병 인도를 오래 기다렸던 터라 곧바로 황제 폐하를 알현한 뒤 폐하의 명령을 따라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에르논을 방 안으로 인도한 남자는 나름 공손한 태도를 유지한답시고 노력한 것 같았지만 그가 건넨 말에는 에르논을 공작의 사유물로 보는 시선이 깔려있었다. 너 따위는 시키는 대로 움직이기나 하라는 속뜻을, 예민한 에르논이 알아채지 못했을 리 없다.
"글쎄요. 무슨 일이냐에 따라 다르지요."
공작성을 출발한 뒤 처음으로 에르논이 내뱉은 말에 밀사가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그보다 더 차가운 에르논의 시선에 부딪혔다. 공작의 큰 아들에게 주먹질이나 당하던 때와는 전혀 다른 기세의 에르논에게 밀사는 조금 주춤했다.
"폐하를 거스를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황제께서는 알리스타스 공작의 협조로 속박 마법의 주인된 문양을 공유하고 계십니다."
에르논은 그 말에 박장대소하고 싶었다. 이미 줄에서 풀린 맹견 앞에서 빈 목줄을 흔들어대며 위협하는 꼴이라니. 하지만 아직 황제에게 고분고분한 태도를 보여야 했다. 그의 비밀을 캐내기 전까지는 말이다. 에르논은 웃음을 꾹 참으며 분하다는 척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알현실의 다른 쪽 문이 열리며 들어온 시종이 "황제 폐하께서 드십니다."라고 고했다. 에르논은 밀사가 하는 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괴수의 우두머리나 다름없는 황제를 기다렸다. 곧, 기골은 장대하나 이미 늙수그레해진 남자가 화려한 벨벳 망토를 끌며 방 안으로 들어와 앞쪽에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에르논은 내키지 않았지만 허리를 숙여 그가 자리에 앉을 때까지 바닥을 바라봐야 했다.
"고개를 들라."
황제의 목소리는 과연 황제라고 해야 할지, 아직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었다.
"먼 길을 와주어 고맙소, 대마법사 에르논. 이렇게 만나게 되어 반갑군."
"…황공하옵니다."
알테리온은 입으로는 황공 운운하면서 눈으로는 저를 차갑게 바라보고 있는 에르논이 우스웠다. 어차피 제 손에 들어온 먹잇감이면서 아직 제 처지를 깨닫지 못하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 역시 제 속을 감추었다. 그의 마력을 짜내기 위한 마법진 위에 그를 세우기 전까지는 그의 얌전한 태도가 필요했다.
"어차피 우리의 공동의 적은 타셀 그 녀석이오. 물론 그깟 녀석쯤이야 별 것도 아니지만, 의외로 케일런 녀석도 타셀을 치는 데 애를 먹는 것 같더군. 지난 번 전투에서 희생자나 부상자도 많았다고 들었소. 그리하여 공작과 나는 부상자들을 위한 빠른 치료 마법을 개발하기로 했지. 사안이 급하니 내일부터 곧바로 황궁 마법사를 도와 그 마법을 위한 연구에 박차를 가해주길 바라네."
에르논은 황제가 그를 데리고 온 이유가 웃기지도 않는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저 황제는 죽어가는 병사들을 걱정할만한 위인이 아니다. 분명 어딘가에 덫을 쳐놓고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런데 황제가 한 마디를 더 덧붙였다.
"원래는 그 전투 직후 바로 그대를 청하였는데 공작이 어떤 이유에선지 차일피일 미뤄서 일이 많이 지연된 상태요. …그런데 도대체 왜 늦은 거지?"
황제의 눈에는 짜증 비슷한 것이 어려 있었다. 에르논은 그 모습이 고까워서 금방이라도 그의 몸을 불살라버리고 싶었지만 이번에도 주먹을 꽉 쥐며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 전투 때 제가 마력과 마나 고갈이 심했습니다. 그 이후로 사경을 헤매다 정신을 차렸지만 운신이 힘들 정도로 마력과 마나가 바닥나서 폐하를 뵐만한 모양새를 갖추느라 시간이 걸렸습니다. 아직도 마력은 적은 상태지만, 폐하를 더 기다리시게 할 수 없어 급히 왔습니다. 부디 너른 아량을 베풀어 주십시오."
그 말에 알테리온은 눈을 크게 홉떴다. 그의 마르지 않는 마력을 짜낼 생각이었는데 현재 마력이 적은 상태라니, 그의 계획이 뜻밖의 곳에서 벽을 만나고 만 것이다.
"허… 허허…. 이런, 대마법사가 고생이 많았군. 마력이 모자라면 마법사들은 몸이 힘들다지? 이거 어쩐다? 나야 물론 그대에게 넉넉한 휴식 시간을 주고 싶지만, 자네도 알다시피 타셀 놈이 또 언제 반격을 할지 알 수 없는 급박한 상황 아닌가. 휴식 이외에 그대의 마력을 차오르게 할 방법이 있다면, 어려워말고 말해보게."
에르논은 황제가 저에게 원하는 게 마법의 연구 따위가 아니라 마력 그 자체라는 것을 깨달았다. 마력이 거의 없다 말하니 갑작스레 안절부절 못하는 눈동자를 보라. 에르논은 속으로만 빙그레 웃었다.
"마력의 회복은 보통 사람들의 체력의 회복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차오르지만 좋은 음식을 먹고 적당한 운동을 하고 푹 자는 생활을 하면 좀 더 빨리 차오릅니다. 그 외에 대단한 방법은 따로 없습니다. 하지만 마법의 연구는 굳이 마력이 많이 필요한 일도 아니니 곧바로 황궁 마법사들의 연구에 힘을 보태겠습니다."
하지만 예상대로 알테리온은 손사래를 쳤다.
"아니, 아니네. 귀한 손님을 모셔놓고 그럴 수는 없네. 상황이 급박하긴 하나 병사야 내 쪽에서 추가 파병을 해도 될 일이니, 우선은 자네의 체력을 먼저 회복하는 것이 좋겠네. 나도 마음이 급해 그대의 몸 상태도 살피지 않았군. 여유기간을 많이 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쉬지 않는 것보다야 낫겠지. 크레인! 대마법사가 체력을 회복하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게."
알테리온은 에르논을 방까지 데리고 온 남자에게 명령했다. 에르논은 자신은 마력이 모자랄 뿐 연구를 도울 정도의 체력은 된다며 몇 번 더 사양해보았지만 알테리온은 완강히 그의 휴식을 명했다.
에르논이 안내받은 방은 귀빈실이라 불러도 손색없을 정도로 화려하고 큰 방이었다. 침대가 얼마나 큰지, 그 한가운데에서 자다가 바깥으로 빠져나오려면 한참 몸을 굴려야 할 것 같았다. 방에는 대리석으로 된 욕탕과 화장실, 화려하게 꾸며진 응접실과 서재까지 붙어있어 웬만한 귀족 저택 한 층을 갖다놓은 것 같았다.
"목욕물을 준비해놓았습니다."
아리따운 시녀들이 그를 욕실로 데려가기 위해 들어왔다. 그는 오랜만에 제대로 된 시중을 받으며 목욕을 할 수 있었다. 명치 한 가운데에는 과거의 그 저주스러운 문양 비슷한 것을 마법으로 만들어둔 상태였다. 분명 그의 목욕 시중을 든 시녀들은 이 방을 빠져나가자마자 자신에 대해 보고를 할 테니, 아직 그들의 눈을 속일 필요가 있었다. 어차피 제 마력을 빨리 채우려 하는 황제가 속박 마법을 발동할 일은 없을 테니, 이 문양이 가짜라는 것은 탄로 날 일이 없었다.
시녀들은 에르논이 고른 향유로 그의 어깨와 등, 팔을 부드럽게 마사지해주었다. 황제가 무슨 의도로 그러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의 목욕 시중을 드는 시녀들은 하나같이 아름다웠고, 그들이 입고 있는 옷 역시 얇디얇아서 그의 목욕 시중으로 옷이 젖어들자 속살이 비치기 시작하고 있었다. 마사지하는 손이 슬쩍슬쩍 예민한 부분을 스치고 있었다.
'이걸 어쩔까나….'
에르논은 심드렁하게 그녀들이 하는 양을 바라보며 어떻게 하면 이 여자들의 야시시한 손놀림을 멈추게 할 수 있을지 생각하다가 문득 헛웃음이 나왔다. 예전의 자신이었다면 시녀들의 이런 접대를 능숙하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어차피 유희거리가 제한된 공작성 안에서 그에게 허락된 감정적 탈출구라고는 여자를 안는 것 말고는 없었으니까. 희한하게도 공작은 그에게 여자를 넣어주는 것만큼은 인색하지 않았는데, 에르논 역시 자신에게 제공되는 여자를 거절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안고난 뒤에는 언제나 자괴감에 시달렸으면서도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제 주변에서 촉촉이 젖은 맨살을 드러내기 시작하며 점점 적극적으로 자신을 유혹해오는 시녀들이 전혀 달갑지가 않았다. 그녀들의 뽀얀 살결, 달콤한 향기, 팔랑거리는 속눈썹과 붉은 입술, 풍만하게 차오른 가슴과 잘록한 허리가 음심을 동하게 할 법도 한데, 지금은 고자라는 소리를 들어야 하는 게 아닌지 걱정될 정도로 전혀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단 하나의 여자로 각인되어 버린 이는 흉터가 남은 피부, 탄탄한 근육, 무심한 눈빛과 메마른 입술, 건조한 흙냄새나 비릿한 쇳내로 기억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무심하게 위안을 주고,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을 해방시켜준 사람. 그가 원하는 여자는 그녀 단 한 사람이었다. 어쩌면 영영 이뤄지지 않을 사랑일지도 모르지만, 그녀를 향한 제 감정을 통제할 수는 없었다.
그러다 문득, 지금 이 욕탕 안에 있는 게 저와 그녀 단 둘이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야릇한 상상이 피어올랐다. 향유를 푼 욕조 안에서 벌거벗은 채 서로의 입술을 탐하는 상상을 하자마자 방금까지 나른하게 퍼져있던 몸에 갑자기 힘이 들어갔다. 열심히 그의 몸을 문지르는데도 아무 반응이 없어 내심 속이 타던 시녀들은 드디어 그가 반응을 하자 대놓고 기쁜 기색을 나타냈지만, 누구에게랄 것도 없는 창피함에 얼굴이 빨개진 에르논은 벌떡 일어나 수건으로 몸을 감고 방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욕탕에 남겨진 시녀들만이 서로 쳐다보며 어리둥절해있을 뿐이었다.
============================ 작품 후기 ============================
1. 여러분. 추석 잘 지내셨나요? 며느리 도짜님들은 수고 많으셨어요~!
2. 휴재는 추석 연휴 휴재를 말씀드린 거였는데 아예 휴재로 아시는 분들이 계셨던 거 같네요. 아닙니다. 추석 연휴 지나면 다시 성실 연재 할거예요. 투베 1위는 못해도 성실 연재 1등은 하고 싶은 자까입니다! 연휴 때만 조금 농땡이 피우겠습니다.^^;
3. 벌써 이동될 연재처를 물어봐주시는 분들이 계시네요. 감사합니다.ㅠㅗㅠ 하지만 아직 연재처 이동에 대해서는 출판사 담당자님과 얘기를 나눈 바가 없어서요.(아직 원고 교정도 한참 남았고....;;) 정해지는대로 알려드리겠습니다.
+ 그녀의밤 님, 징수니 님. 후원쿠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