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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홍의 카르마-99화 (99/134)

00099 황궁(3) =========================

카시야와 루크, 에르논이 황제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동안 타셀은 혼란에 빠진 케일런군을 쓸어버릴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알리스타스 공작이 죽고 루크 페레이아가 사라져 지도부의 공백이 생겼을 때가 절호의 기회였다. 그 빈자리가 순식간에 알반 공작과 자야드 밀런으로 대체되었다고는 하지만 기존 수뇌부와는 전혀 성격이 다른 그들이 귀족들과 군사를 장악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꽤나 필요할 터였다. 물론 케일런군을 쳤을 때, 마음이 급해진 황제가 에르논에게 무슨 짓을 벌일지 예상하기 어렵다는 게 걸리기는 했지만 지금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우리는 곧 케일런군을 칠 예정이다. 황제가 무리하게 뭔가를 하려고 들지 모른다. 위험하다고 여겨지면 바로 피신하도록.]

타셀은 케일런과의 대치를 끝내기 위한 총공격을 감행할 결심을 하고는 에르논에게 한 번 더 주의를 바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에르논이 황제의 흉계를 파악하고 그것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게 어렵더라도 지금의 이 기세로는 황제에게 질 것 같은 기분은 들지 않았다.

[그건 걱정 마십시오. 그리고 때가 되면 알려주십시오. 공작성을 폭파시키겠습니다.]

에르논으로부터 온 답신은 타셀의 마음에 한결 더 여유를 드리웠다. 우선은 1황자나 1황자파의 귀족들을 회유해보기는 해야겠기에 공작성의 폭파를 미뤄둔 것이었지만, 그들의 저항이 완강할 때에는 타셀 역시 더 이상 용납할 마음이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백성들의 삶을 엉망으로 만들어 놨다. 케일런군이 머물렀던 지역을 수복할 때마다 속으로 이를 바득바득 갈았더랬다. 인간이 어떻게 같은 인간에게 이렇게까지 모질 수가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제 그의 만행을 끝내야할 시간이었다.

타셀군이 공격을 위한 정비를 마쳤다는 것은 첩자를 통해 케일런군에도 알려졌다. 꿈에 그리던 총사령관의 자리에 앉은 자야드 밀런은 달콤함에 취하기도 전에 부랴부랴 전투 준비를 해야 했다. 하지만 전쟁이 시작되던 시점부터 루크의 관리를 받아왔던 병사들에게 그의 숙청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자야드 역시 유명한 기사이기는 했지만 그것은 자야드 개인의 전투 능력에 따른 유명세일 뿐, 그에게는 루크 같이 군 전체를 아우르는 능력이 모자랐다. 하지만 그는 그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자신보다 어린데다 기사로 지낸 기간도 짧은 루크가 해냈다면 자신은 그보다 더 잘 해낼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게다가 그동안 사사건건 자신을 무시하던 루크에 대한 반발심 때문에 이미 루크가 기틀을 잡아놓은 시스템을 뒤바꾸려 했다. 하지만 자야드가 오랜 고민도 없이 생각해낸 방식은 여러모로 루크의 방식보다 효율이 떨어졌고, 결국 병사들만 혼란 속으로 몰아넣은 채 다시 루크의 방식을 따라야 했다. 그러면서도 깃발의 색을 바꿨다든가, 배식 시간을 조금 조정했다든가 하는 것으로 루크보다 훨씬 효율성을 높였다고 강조하는 자야드였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우왕좌왕하는 동안 타셀의 군사가 벌떼같이 일어나 선전포고를 했다.

*

"폐하! 2황자군이 1황자군을 쳤다고 합니다! 현재 1황자군이 룩센 지방까지 밀렸으며, 2황자군은 파죽지세라는데,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멜라니아 황비의 오라비인 트레온 백작이 알테리온에게 급변한 상황을 전했다. 하지만 알테리온은 당황하지도 않고 위험하게 번들거리는 눈빛을 하며 음흉한 미소를 띨 뿐이었다.

"흐… 흐흐흐…. 그 놈이 드디어 움직이는군 그래. 자식이 되어서 아비에게 반역하다니, 쳐 죽일 녀석 같으니라고. 그 놈이 어렸을 때부터 더 엄하게 다스렸어야 했는데…. 뭐, 다 내 성격이 모질지 못한 탓이지. 하지만 이제 몸 사릴 것 없소, 트레온 백작. 아니, 놈이 알아서 이쪽으로 와준다니 마침 잘 되었달까. 내가 우리 군대를 이끌고 멀리 가기도 귀찮으니까. 여봐라, 황실 마법사 제롬을 불러오너라."

황제가 시종에게 명령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접견실에는 곧 제롬이 나타났다.

"부르셨습니까, 폐하."

"음. 그래, 에르논은 좀 어떤가?"

"충분한 휴식을 취해 전보다 상태가 좋아 보입니다."

"마력 증폭을 시키면 충분한 양이 될 정도로?"

"그럴 것이옵니다. 마력 증폭을 거치면 그의 완전한 마력량에는 못 미치겠지만 마력 이식에는 충분할 양일 것입니다."

"타셀이 케일런을 쳤다. 아마 수일 내로 황궁을 향해 쳐들어올 것이다. 슬슬 준비를 해야 하네."

제롬의 눈빛이 번득였다. 대마법사 헬라스에게 오랫동안 열등감을 갖고 살아온 그는, 같은 대마법사인 에르논을 그저 '마력을 짜낼 재료'로써 취급하게 될 이번 일을 내심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의 마법진으로 에르논을 쥐어짜낼 수 있다면 그 얼마나 짜릿할지…. 제롬은 비어져 나오려는 미소를 애써 감추며 고개를 더 깊이 숙였다.

"마법사가 아닌 이상 몸에 받아들인 마력은 생성되지 않고 소모만 될 뿐이니, 2황자가 수도를 향해 진격해온다는 소식이 들리면 곧바로 실행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좋아. 준비는 완벽하겠지?"

"이미 시험 가동으로 확인하시지 않으셨습니까?"

"흐흐흐흐…. 그렇지. 몸 안에 마력이 들어오는 기분은 정말 좋더군. 대마법사의 마력은 도대체 어떤 기분이 들까? 아주 기대되는 바야."

알테리온과 제롬이 낮게 웃자 곁에 서있던 트레온 백작만 무슨 소린지 몰라 불안하게 눈알을 굴렸다.

사실 에르논이 황궁에 도착한 뒤, 제롬은 새롭게 완성된 마법진을 시험 가동해보았다. 마법 흡수를 위한 마법진 위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평민 출신 마법사 조무래기를, 마력 주입을 위한 마법진 위에는 카라볼그를 든 알테리온을 서게 하고 동시 발동의 주문을 외웠더랬다. 그 순간 마법진에서 발산되던 아름다운 빛을 그는 잊을 수 없었다. 마력 흡수를 위한 마법진 위에서 평민 출신 마법사가 공중에 붕 뜬 채 괴롭게 몸부림쳤지만 제롬이나 알테리온의 눈에는 그런 것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그보다는 그의 몸 주변에서 생긴 빛무리가 서서히 알테리온에게로 흘러들며 흡수되는 모습만이 동공을 가득 채웠을 뿐이다.

특히 알테리온은 제 몸에 흘러들어오는 마력 때문에 노화에서 일정 수준 회복되는 것을 느끼고는 무엇에도 비할 바 없는 희열을 느꼈다. 정말로 젊은 시절의 광영이 다시 찾아오는 것 같아, 그로서는 드물게 감동의 눈물까지 흘렸다.

하지만 역시나 마력이 얼마 없는 어린 마법사를 짜낸 것이다 보니 마법진의 발동은 오래지 않아 멈추었다. 몸 안에 있던 마력이 거의 극한까지 짜내어진 마법사는 몸 안에서 모든 피를 쥐어짜낸 것처럼 비쩍 말라 바닥에 힘없이 떨어졌다. 만족하며 웃는 알테리온과 제롬의 뒤에서 혀 없는 시종들이 나와 능숙하게 마법사의 시체를 치웠다.

"그때는 피추출자의 마력이 충분치 않아 감질나셨을 겁니다만, 이번에는 다릅니다. 대마법사의 마력을 추출한다 생각하니 저 역시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제롬의 말에 알테리온은 그 당시의 기분을 떠올리며 흥분감에 손을 떨었다.

"타셀이 수도로 올라온다는 소식이 들리면 곧바로 에르논의 마력부터 증폭시키게. 마력 흡수와 이식은 금방 되는 것이니, 트레온 백작은 크레인과 함께 군사들을 잘 준비시키도록 하고. 에르논을 결박할 준비는 잘 되고 있겠지?"

"예. 그는 제 발로 마법진 위에 서게 될 것입니다. 마법사들의 본성이야 저 역시도 빤히 알고 있으니 그를 꼬여낼 방법은 많습니다. 마력 증폭을 시킨 뒤에는 황실 1급 마법사 30명이 한 번에 결박 마법을 써서 그를 마력 흡수 마법진 안으로 이동시킬 것입니다. 대마법사라 해도 그 힘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보통은 1급 마법사 20명 정도도 충분하지만, 완벽을 기하기 위해 열 명을 추가 배치하였습니다."

"좋아, 좋아. 아주 좋네. 그럼 느긋하게 타셀을 기다리도록 하지. 으하하하하하하!"

알테리온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한편 에르논은 타셀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타셀이 케일런군을 친 뒤, 그들은 빠르게 승기를 잡고 있었다. 자야드 밀런이나 크리스탄 하멜은 미하일에게 대적할 수 없었다. 게다가 타셀은 지난 전투부터 선봉에 서서 자신이 검신이라 불리는 이유를 직접 보여주고 있었다. 심지어 시기적절하게 발휘하는 보호 마법 역시 상대의 전의를 상실케 만들었다. 결국 자야드는 몇 번 부딪혀보지도 못하고 퇴각을 외칠 수밖에 없었고, 격전지는 페미도르 남쪽에서부터 피말, 룩센을 거쳐 아즈렐에서 멀지도 않은 오르겐 지방까지 밀렸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이제까지 케일런군을 지탱하던 것이 루크 페레이아의 힘이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탄탄하게 조직하면 타셀군을 상대로 버티기까지는 가능하던 군대가, 총사령관이 바뀐 것만으로도 오합지졸이 되어버렸다.

[상황이 그 정도 되었다면 항복하는 귀족들이 나올 만도 한데요.]

에르논은 타셀로부터 상황을 전해 듣고 투항하는 자는 없는지 물었다. 하지만 되돌아온 타셀의 메시지에는 분노가 가득 담겨 있었다.

[당연히 있었지. 하지만 그들을 용서하거나 받아들일 생각은 없네. 죄의 경중에 따라 참수하든, 작위와 재산을 몰수해 내쫓든 할 생각이야. 그들이 저지른 짓을 용서할 수가 없네.]

에르논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케일런군의 진영으로 남하하며 백성들이 얼마나 고통스럽게 수탈당했는지, 타셀은 보았을 것이다. 작지만 따뜻하던 시골 마을이 을씨년스러운 황무지가 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황제나 2황자 쪽 귀족들이 다스리는 영지에 대한 수탈이 특히 심했지만 1황자 쪽 귀족이라 하더라도 큰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중소 귀족의 영지라면 수탈을 피할 수 없었다. 영지에 대한 영주의 지배권 자체를 무시했고, 그들에게 반발하는 귀족들 역시 베어버렸다. 귀족과 황족인 자신들이 존재할 수 있었던 시스템조차 완벽히 무시한 처사였다. 아무리 전시라 하더라도 도적들이 따로 없다 여겨질 정도였다. 그걸 타셀이 사람 좋게 웃으며 받아들여줬을 리 없었다.

[1황자가 항복할까요?]

[글쎄. 1황자가 수탈한 모든 물자를 공작성 안에 잔뜩 비축해두었다고 하더군. 이제 곧 겨울이 온다. 겨울에 전쟁을 치를 수는 없으니 그 안에 틀어박혀 버티려 할 확률이 높아. 하지만 우리는 그걸 기다려줄 시간이 없지. 한겨울이 되기 전에 황제까지 쳐야 한다.]

타셀의 메시지에 에르논은 그가 단단히 마음을 먹었음을 알 수 있었다.

[곧, 공작성을 폭파해야 할 시점이 오겠군요.]

잠시 후 타셀로부터 간결한 메시지가 마지막으로 전해졌다.

[준비하고 있게.]

에르논은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았다. 회색빛으로 내려앉은 하늘이 손에 닿을 것 같았고, 찬바람이 음산한 소리를 내며 황궁의 벽 사이를 스쳐지나갔다. 그의 보랏빛 눈동자는 전쟁터가 있을 서쪽 하늘을 바라보며 그 어딘가에 있을 카시야를 떠올렸다. 타셀군에서 어떤 역할을 맡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녀의 성격 상 절대 몸을 사리지는 않을 것이다. 타셀 쪽으로 승기가 기울고 있다고는 하지만 누군가는 죽어갈 것이다. 그게 카시야만은 아니길, 그는 간절히 빌었다.

'카시야…. 무사해라, 제발….'

에르논은 불안감을 잠재우기 위해 주먹을 꽉 쥐었다. 창문으로 들이치는 차가운 바람 속에서 왠지 그리운 향기가 나는 것만 같았다.

============================ 작품 후기 ============================

선작 1만 돌파! 감사합니다! 로판에서 선작 1만을 찍으면 평타라는 글을 어디서 본 적이 있는데, 제 글이 평타를 쳤다니! 세상에!

감사의 마음으로 연참 1회 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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