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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홍의 카르마-100화 (100/134)

00100 선전포고(1) =========================

타셀의 선전포고로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케일런이었다.

자야드는 타셀군에 제대로 된 대항 한 번 해보지 못하고 속절없이 밀려나고 있었고, 그동안 야금야금 이탈하던 귀족들과 백성들은 서둘러 남은 재물을 싸가지고는 아예 대놓고 도망가고 있었다. 하지만 케일런은 아직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아니, 포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황제에게 투항하든, 타셀에게 투항하든, 자신을 비롯한 수뇌부들의 목은 단칼에 떨어질 것이다. 이젠 죽기 살기로 대항하는 수밖에 없었다.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전하. 이제 곧 겨울입니다. 성문을 걸어 잠그고 겨울이 올 때까지만 버티면 됩니다. 성 안에는 넉넉히 쓴다 해도 2년 이상을 버틸 수 있는 물자가 비축되어 있으니 제 아무리 타셀군이라도 지치고 말 것입니다."

알반 공작의 말에 케일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그동안 엄청난 물자를 비축해 왔던 것이다. 그러기 위해 규모가 가장 큰 알리스타스 공작성을 거점으로 삼은 이유도 있었다. 일단 자신이 버티기만 하면 황제 역시 타셀을 치기 위해 지원군을 파견할 것이다. 황제로서는 타셀이 자신을 꺾고 황제에게 대항할 제 1세력이 되는 게 달가울 리가 없으니 말이다. 타셀을 무찌르고 난 황제가 곧바로 자신을 향해 칼날을 들이댈 것이라는 게 문제였지만, 그것은 그 때 가서 생각해야 할 일이었다.

"전군을 성 안으로 퇴각시켜라."

케일런은 비장하게 명령했다. 하지만 그게 그의 명을 단축시키는 일이라는 것을 그는 모르고 있었다.

"1황자가 항복을 거부했습니다."

지크의 보고에 타셀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간단히 생각하실 일은 아닙니다. 1황자군이 그동안 비축했을 물자의 양을 생각한다면 성안에서 3년까지도 버틸 수 있습니다. 그동안 황제가 가만 있을 리도 없지요. 게다가 이제 곧 겨울이 몰아닥칩니다. 우리가 보유한 물자로는 버티기 힘들 겁니다."

엔드로스가 곁에서 걱정스럽게 말했다. 타셀군은 언제나 넉넉지 않은 물자에 허덕이고 있었다. 전투에 임해야 할 병사들을 먹이는 것을 줄일 수는 없으니 전투병사 이외의 인원들의 식사가 열악해졌고, 사망자에게 변변한 옷을 입혀 묻어줄 수도 없었다. 전쟁을 끝내겠다는 일념으로 똘똘 뭉친 덕에 병사들의 사기가 높긴 했지만 추운 겨울이 닥치면 삭풍에 흩날리는 눈꽃과 함께 군사들의 사기 역시 날아가 버리고 말 것이다. 추운 지방인 데런에서 10년 동안 군사들을 훈련시킨 엔드로스이기에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사람은 추우면 안으로만 숨어들고 싶어지는 법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엔드로스의 염려를 듣고 나서도 타셀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이 저 멀리 보이는 공작성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의 청회색 눈동자가 흐린 늦가을 하늘처럼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한참 말이 없던 타셀이 낮게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참으로 모순적인 일이긴 하지만 말이네. 백성을 위해 시작했다고 생각했던 이 전쟁을 치르면서, 내가 얼마나 이기적인지를 깨달았네. 나는 우리가 지켜낸 백성들과 다를 것 없는 케일런 휘하의 죄 없는 많은 이들의 목숨을 앗아갈 테지. 내가 내세운 명분과 정확히 맞서는 짓을 하게 될 거야. 그들의 목숨을 구해내려다가는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없으니까. 그러면 승기는 케일런에게든, 황제에게든 넘어갈 테고, 훨씬 더 많은 제국민들이 또 고통에 허덕일 테니까. 그래, 더 큰 명분을 위해 죄 없는 이들의 죽음을 작은 희생으로 치부하고 눈 감아야 하겠지. 하지만 내가 승리한다고 해도 여전히 누군가에게 나는 그저 악귀나 살인귀에 지나지 않을 테지."

타셀이 약한 자의 억울함과 고통에 얼마나 마음을 쓰는지 잘 아는 그의 측근들은 타셀이 말에 마음이 초조해졌다. 타셀에게는 케일런 진영의 백성들이든, 황제 쪽의 백성들이든 가엾고 안타까운 이들이었다. 내 울타리 안의 백성들이나 다름없는 그들을 죽여야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이 그의 마음을 얼마나 괴롭히고 있을지 잘 알고 있었지만, 여기까지 와서 마음이 약해졌다간 정말로 모든 것이 무너진다. 타셀군 역시 여유만만한 상황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서로 불안한 눈빛을 주고받던 타셀의 기사들은 곧 이어진 타셀의 말에 숨을 멈췄다.

"하지만… 이럴 수밖에 없어. 신에게 용서받지 못할지라도, 나는 이럴 수밖에 없네. 모든 죄는 내가 짊어질 테니, 그대들은 부디 흔들림 없이 나아가주기를 바라네. 죽을 때까지, 아니, 죽어서도 그들에게는 내가 사죄할 테니, 그대들은 부디 칼리스토니아의 찬란한 빛이 모든 이에게 골고루 내리쬘 수 있는 그 날을 위해 힘껏 내달려주게."

짧은 정적이 흐른 후, 타셀의 뒤에 도열해있던 기사들이 일제히 "전하의 존명을 따르겠습니다!"하고 외쳤다.

차분히 감았다 뜬 그의 눈동자에는 아릿한 고통을 밀어낸 단단한 의지가 타올랐다. 그는 곧 퇴각하는 케일런군의 뒤를 더욱 바싹 추격해나가라는 명령을 내렸다.

*

제국의 상황이 불안하게 움직이기 시작하자 백성들은 더욱 종교에 의지했다. 를뤼엔의 히드레이 교 신전 역시 기도를 하러, 혹은 전화(戰火)를 피하러 몰려든 신자들로 인해 북적였다. 그런 바쁜 시기에 대신관이 잠시 자리를 비우겠다니, 신관회에서 당황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대신관님! 도대체 무슨 일로 자리를 비우신단 말입니까? 지금이야말로 우리 히드레이 교 전체를 아우를 대신관님의 지도력이 필요한 때입니다!"

신관회의 수석 신관이 잔뜩 울상을 지으며 애원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매달렸다. 하지만 아르헨은 여행 준비를 멈추지 않았다. 수석 신관의 뒤를 따라온 신관들 중 애초부터 신성 치료사 출신의 대신관을 탐탁지 않게 여기던 이가 슬쩍 노기 띤 목소리로 말했다.

"대신관님께서는 아직도 신성 치료사 시절의 버릇을 못 버리신 것 같습니다. 히드레이 교의 대신관 자리에 앉은 자는 신의 충실한 종이 되어 그 의무와 책임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의무와 책임을 다하기 위해 떠나는 것입니다."

계속 침묵을 지키던 아르헨의 입에서 터져 나온 한숨과도 같은 대답에 모두가 깜짝 놀랐다. 아르헨은 잠시 흐린 하늘의 창밖을 바라보다가 출입구를 막듯이 선 신관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오랜 수도 생활을 통해 세속적인 감정을 버린 신관들이었지만 아르헨의 미모와 마주하는 매 순간 제 눈을 어디다 둬야할지 혼란스러워지고는 했다. 그는 정말 신이 빚어낸 천사의 형상처럼 아름다웠다. 시간이 흐르면 허물어지고 썩어 없어질 외형 따위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생각하는 그들도 아르헨을 보면서는 아름다움 그 자체에서 신의 거룩함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러니 일반 백성들은 오죽하랴. 신도들 사이에서는 새 대신관이 이 난세를 구하기 위해 신이 보낸 천사라는 얘기까지 돌고 있는 실정이었다. 사제들 사이에서도 새 대신관이 히드레이 교의 부흥을 이끌어낼 것이라는 기대가 높았다.

아닌 게 아니라 아르헨이 대신관이 된 이후, 히드레이 교세가 날이 갈수록 확장되고 있었고, 그의 아름다움에 대한 소문이 국경을 넘었던 탓에 대신관을 초빙한 기도회를 열고자 하는 이웃 나라들이 늘어났다. 교세의 확장면에서 보자면 긍정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으나 늘 세속적인 것을 경계하고 살던 신관들은 '이래도 되나.'하는 일말의 주저함이 남아있었다. 그의 출신에 대한 못마땅함이 남아 그런지도 몰랐다.

잠시 아르헨의 아름다움에 넋이 나가있던 신관들은 그들의 뒤로 조용히 나타난 알리나 성녀의 모습에 다시 한 번 화들짝 놀랐다. 하지만 수석 신관은 이때다 싶어 알리나에게 읍소했다.

"성녀님! 제발 대신관님을 말려 주십시오. 대신관님의 축복을 바라는 저 많은 신도들을 두고 도대체 어디로 가신다는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알리나는 격려와 신뢰를 담은 시선으로 아르헨을 바라보았다.

"대신관께서는 주신 헤바의 명을 따르기 위해 떠나는 것뿐입니다. 아르헨. 부디 무사히 다녀오시기를 기도드리겠습니다."

"저 따위는 무사하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다만, 미욱한 제가 부디 그 분께 조금이라도 힘이 될 수 있기를, 주신 헤바의 뜻에 부족함 없이 따를 수 있기를 기도해 주십시오."

왠지 비장한 알리나와 아르헨의 대화에 신관들은 서로 당황한 시선만 주고받으며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 발을 동동 굴렀다. 그들의 애타는 마음을 알고 있던 알리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신관들을 바라보았다.

"곧 황제가 숨겨놓은 성물에 수난이 닥칠 것입니다. 헤바께서는 이미 그 일을 막으실 사도를 보내셨지만, 사도 단 한 사람의 힘으로는 역부족입니다. 그리하여 헤바께서는 사도의 힘이 될 무기들 역시 보내주셨지요. 여기, 우리의 아르헨 대신관 역시 사도의 무기가 되어주실 것입니다. 아르헨 대신관께서 사명을 다하실 수 있도록, 우리는 여기 남아 신도들을 보호하고 주신 헤바의 뜻이 이 땅에 임하실 수 있기를 기도합시다."

‘성물의 수난’이란 황제 알테리온이 신의 뜻을 거스르고 탐욕에 빠져 통치를 등한시하기 시작한 시점부터 성녀 알리나가 지속적으로 꿔온 꿈의 계시를 그들 나름대로 해석한 사건이었다. 그것은 제국 전체의 운명을 기울게 할 사건이라는 것은 분명했으나, 정확히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그들로서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더욱 걱정스러운 일이었다.

알리나의 설명에 그동안 알리나가 얘기해왔던 '성물의 수난일'이 다가왔다는 것과 그 일을 막기 위해 대신관이 떠나는 것임을 깨달은 신관들은 다들 땅에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주신 헤바의 뜻에 따르겠나이다. 주신의 첫 번째 종이신 알리나의 뜻에 따르겠나이다. 주신의 대행자이신 대신관 아르헨의 뜻에 따르겠나이다."

아르헨은 신관들에게 다가가 그들을 일으켜주었다.

"지금은 모두가 힘든 고난의 시기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분명 이겨낼 수 있습니다. 주신 헤바께서 모든 깨달음을 그 안에 안배해두셨을 테니, 신의 종인 우리들은 기쁘게 고난의 길을 걸어야 하는 것입니다. 부디 성녀님을 도와 신도들의 보호에 힘써주십시오. 저 역시, 미약한 힘일지언정 사도께 도움이 되어드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날 정오가 되기도 전에, 회색 로브를 쓴 한 사람이 말을 몰고 를뤼엔을 떠나 피엔으로 향했다.

============================ 작품 후기 ============================

진홍의 카르마도 어느덧 종반부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제 예상으로는 120~130회 내외로 완결되지 않을까 싶네요.

그런데 완결이 나면 오래 열어두지 않고 며칠 간의 말미 뒤에 출간 삭제가 될 예정입니다. 그래서 완결 기념 뭔가를 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서요, 100회차가 올라가는 날 100회 기념 Q&A를 해볼까 합니다.

혹시 진카를 보시며 궁금하셨던 사항이나 자까에게 묻고 싶었던 사항이 있으셨다면 댓글 남겨주세요. 남은 회차의 내용을 스포할 위험이 있는 질문이 아니라면 답변 드리겠습니다!^^ (질문이 많지 않으면 작품 후기에 적고 걍 넘어가고요^^;;)

+ 그녀의밤 님, 하양사슴 님, 징수니 님. 후원쿠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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