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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홍의 카르마-101화 (101/134)

00101 선전포고(2) =========================

아르헨은 그날 저녁 피엔에 도착했다. 하늘은 주홍빛이 짙어지다 보랏빛을 띠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의 아름다운 외모는 쓸 데 없이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기 때문에 그는 두건을 눈 밑까지 바싹 끌어올린 채 피엔의 뒷골목으로 향했다. 카시야가 정확히 어디 있는지는 몰랐지만 꿈에서 반복적으로 보던 곳으로 향해 그 주변을 헤매볼 생각이었다.

밤이 내려앉은 피엔의 뒷골목은 히드레이 교의 정결한 대신관이 머무르기에는 지나치게 본능이 지배하는 곳이었다. 골목은 진탕 취한 술주정뱅이들이 지르는 고함 소리와 창녀들이 풍기는 독한 향수 냄새, 시정잡배의 거친 눈초리와 일부러 사람들을 끌기 위해 흘리는 음식 냄새로 뒤엉켜있었다. 히드레이 교의 사제가 된 이후, 아픈 자들의 곁에서 알리나의 사랑을 베풀고 부정한 것들에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으며 살아왔던 아르헨은, 그러나 날 것이라 불러도 무방할 정도의 인간 밑바닥 사이를 지나면서도 놀라는 기색조차 없이 조용했다.

골목골목을 눈으로 훑으며 카시야를 찾던 아르헨은 어느 어두컴컴한 골목 안에서 조그만 여자아이가 성인 남성 세 명에게 둘러싸인 것을 목격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바닥에 엎어진 채 벌벌 떠는 아이의 행색으로 보아 분명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카시야를 찾는 일도 급하지만 히드레이 교의 대신관으로서 그런 광경을 목격하고도 못 본 척할 수는 없었다.

"분명 오늘까지 13실버를 갖고 오라고 했잖아! 누군 땅 파서 돈 빌려주는 줄 알아!"

"제, 제발 조금만 더 시간을 주세요. 오빠까지 일하다 다치는 바람에 도저히 돈을 벌 수가 없었어요."

"왜 돈을 못 벌어, 왜에! 너도 이제 열세 살 아니냐? 그 정도면 충분히 돈 벌 수 있거든?"

"저는 아버지 병수발을 들어야 해요. 아, 아버지가 많이 아프셔서…."

"그건 늬들 사정이고. 헤에…. 어디 보자. 이것도 잘 씻겨서 꾸며놓으면 꽤 잘 팔리겠는데? 아무래도 닳고 닳은 것들 보다는 어린 게 비싸게 팔리니까 말야."

맨 앞에서 위협하던 남자가 쪼그려 앉더니 여자아이의 턱을 쥐고 좌우로 돌려보며 물건 감정하듯 평가한다. 그들이 도대체 이 여자아이를 꾸며서 어디에 무엇으로 팔겠다는 것인지, 아르헨은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 아이를 놓아주십시오."

남자들은 저희 뒤편에서 울리는 목소리에 뒤돌아보았다. 그들은 지금 내가 무슨 소릴 들었나, 하는 표정이었다. 피엔의 뒷골목에서는 그 어느 누구도 다른 이의 일에 간섭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이, 거, 피엔은 처음이신가 본데, 그냥 가던 길 가쇼."

남자 하나가 손을 휘휘 내저으며 꺼지라는 태도를 보였지만 아이의 턱을 쥐고 있던 우두머리격의 남자는 생각이 달랐다.

"허, 나 참. 요새 우리가 꽤 얌전히 살았던 모양이야? 별 시답잖은 게 다 시비를 거네?"

그는 아이의 턱이 돌아갈 정도로 손을 거칠게 놓고는 저들의 앞에 선 이를 쳐다보았다. 눈 밑까지 두건을 올려 쓰고 로브를 뒤집어썼지만 체격 자체는 크지 않았다. 얼핏 봐도 선이 가늘어보여서 자신의 주먹 한 대에 나가떨어질 듯 보였다.

"빚을 지고 있더라도 인신매매로 그 빚을 갚게 하는 것은 명백한 제국법 위반이며, 신의 뜻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죄를 짓지 마십시오."

미묘하게 마음을 울리는 목소리에 우두머리를 제외한 둘은 순간적으로 얼이 빠졌지만 우두머리는 오히려 더 화가 난 듯 했다. 그는 얼빠진 제 수하들을 시켜 아르헨을 잡아오게 했다. 그리고 그들의 관심이 멀어진 사이, 바닥에서 벌벌 떨던 아이는 뒤로 슬금슬금 물러나다가 도망쳐버렸다. 하지만 남자는 그것을 알면서도 모른 척 했다.

"찌끄리는 말씀은 잘 들었는데, 그쪽 덕분에 우리는 오늘 수금을 다 못하게 됐네? 이걸 어째쓰까? 그쪽이 대신 내줄 거야?"

그는 위협적으로 말하며 아르헨의 두건을 거칠게 끌어내렸다. 순간 그의 눈이 크게 떠졌다. 수하가 아르헨이 머리에 쓴 후드까지 벗기는 바람에 그의 금빛으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까지 드러나 버리고 말았다.

"제국에는 법으로 정한 금리 이상의 고리대금업을 금하고 있습…."

"후아…! 툴라년 창관에서도 보기 힘든 미인이시구만."

아르헨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자가 감탄일지 위협일지 모를 말을 뱉어냈다. 눈을 번들거리며 혀로 입술을 핥는 그의 모습은 소름이 끼쳤다.

"야, 생각이 바뀌었다. 이런 미인은 일단 따먹고 봐야지. 망 좀 봐라."

"혀, 형님! 이거, 남잔데요?"

"푸흐흐흐. 남자면 어때? 넌 이놈보다 예쁜 년 본 적 있냐?"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는 아르헨의 멱살을 우악스럽게 잡아 벽으로 밀치고는 다른 쪽 손으로 그의 턱을 잡아 제 쪽으로 향하게 하면서 아르헨의 미모를 감상했다.

"부정으로 삶을 더럽히지 마십시오. 신께서 전부 보고 계십니다."

그의 위협에도 꿋꿋하게 타이르는 아르헨의 모습이 오히려 그를 자극했던 모양인지 남자의 눈에는 금세 욕망이 떠올랐다.

"히야…. 이거 정말 물건이네. 조금만 기다려. 그 예쁜 입으로 앙앙거리게 해줄 테니까."

그는 곧 아르헨의 로브를 벗겨내려고 거칠게 잡아 뜯었다. 아르헨은 이 상황에서 이 자에게 신성력을 쓰는 게 신의 뜻에 부합할지 고민하며 애써 로브를 쥐고 버텼다. 그때 골목 입구에 또 다른 이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 손 놔."

분명 여자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건조하고 어딘지 나른한 것이, 불량배들을 앞에 둔 여자라기엔 너무도 흔들림이 없었다. 남자가 뭐라 하기도 전에 그의 수하들이 달려들었지만 그들은 고작 몇 합 만에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제야 남자는 아르헨이 아닌 골목 입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늘따라 재수가 없으려니까…. 이건 또 뭐… 으억!"

남자는 말을 끝내기도 전에 날아온 주먹에 얼굴을 정통으로 맞고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덕분에 아르헨은 로브가 찢기기 전에 그의 손아귀에서 놓일 수 있었다. 하지만 남자도 보통 실력은 아닌지 곧바로 주먹을 휘둘렀다. 하지만 여자는 몸을 낮춰 그 주먹을 피하더니 그의 턱으로 곧게 발을 내질렀다. 정확하게 턱을 가격한 발차기에 남자의 고개가 뒤로 휙 넘어가는 것 같더니 그는 땅바닥에 뒤통수를 박으며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 그동안의 위협에 비해 싱거울 정도로 금방 끝이 나버려서 카시야는 입맛을 쩝 다셨다. 간만에 몸 좀 풀려고 했더니….

"카시야 경!"

자신을 부른느 목소리에 카시야의 시선이 돌아갔다.

"아르헨 님? 도대체 아르헨 님께서 여기에는 왜…!"

반갑게 카시야를 바라보는 아르헨에게 얼빠진 얼굴로 여길 어떻게 왔냐고 묻던 카시야가 갑자기 표정이 안 좋아졌다.

"이 새끼들이 지금 대신관님을 범하려 했단 말씀이십니까?"

금방이라도 바닥에 널브러진 남자들의 삶을 끝내줄 것 같이 흉흉해진 카시야의 기세에 아르헨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그녀의 소맷부리를 잡았다.

"제가 카시야 경을 만날 수 있도록 헤바께서 마련해주신 작은 소란이었습니다. 저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이 녀석이 아르헨 님의 멱살을 잡았던 것 같은데, 정말로 다치신 곳은 없습니까?"

카시야의 염려에 아르헨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그는 진심으로 헤바의 인도에 감사와 탄복을 금할 길이 없었다.

"대신관님께서 피엔의 뒷골목은 왜 누비고 계셨습니까?"

"카시야 경을 만나러 왔습니다."

"예? 저를요?"

카시야는 뒷골목과 정말 어울리지 않는 아르헨의 예상치 못한 대답에 순간 당황했다. 하지만 그녀는 곧 감정을 수습했다.

"그럼 일단 자리를 옮기는 게 좋겠군요. 저는 지금 아는 이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습니다만, 동행하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저는 상관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같이 만나 뵙는 게 더 좋을 것 같군요."

카시야는 여전히 의미를 알 수 없는 아르헨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알리나의 선택을 받은 아르헨이니 분명 별 뜻 없이 이러는 것은 아닐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카시야는 아르헨의 벗겨진 후드를 다시 씌워주었다.

"아르헨 님의 외모는 너무 눈에 띕니다."

아르헨 역시 그에 화답하듯 다시 두건을 눈 밑까지 올렸다.

얼마 전 발견한 맛집의 2층 구석에서 카시야를 기다리고 있던 루크는 로브를 얼굴이 보이지 않을 정도 뒤집어쓴 누군가와 함께 계단을 오르는 그녀를 보며 미간을 구겼다. 카시야가 분명 또 골치 아픈 뭔가를 달고 오는 것 같았으니까.

"그건 또 뭐야?"

루크의 퉁명스러운 물음에 대한 대답 대신 카시야는 로브를 입은 이를 위해 의자를 빼주었다. 그 공손한 태도에 루크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사람 말 무시하지 말아줄래? 이건 또 뭐냐니까?"

"말씀 좀 조심하십시오, 페레이아 경. 이분은…."

"제가 직접 인사를 드리죠."

아르헨이 부드럽게 손을 들어 카시야의 말을 끊었다. 하지만 그 태도가 전혀 기분 나쁘지 않고 오히려 겸손하다 여겨졌다. 그는 로브는 그대로 두고 두건만 끌어내려 얼굴을 드러냈다. 그 얼굴을 본 루크 역시 살짝 눈이 커졌다.

"주신 헤바의 대행자, 아르헨이라 합니다.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페레이아 경."

그 소개에 루크의 눈이 정말로 부릅뜨였다.

"대신관? 대신관이라는 말씀이십니까?"

아르헨은 난처한 듯 미소를 지었고 그 대신 카시야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루크는 카시야에 대해 뭘 더 놀라게 될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평민 출신 여기사가 이제는 히드레이 교의 대신관과도 안면이 있단다. 이게 지금 말이 되는 상황인가.

"나, 너한테 진심으로 놀라고 있어. 너, 알고 보면 굉장한 거물이라거나 그런 거 아니냐?"

그 말에 루크와 카시야가 동시에 큭큭 댔지만 아르헨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난감했다. 거물이라면 거물이랄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 아닌 신으로부터 사명을 내려 받은 사도니까. 신의 권능에 직접 몸 닿은 자보다 더 거물일 인간이 어디 있단 말인가. 하지만 아르헨은 곧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그들의 농담에 동조하는 척 했다.

"저야말로 놀랐습니다. 적군이었던 대마법사 에르논 님과 기사 루크 페레이아 경이 이미 카시야 경의 우군이라니 말입니다."

아르헨의 지적에 루크는 조금 민망해졌다.

"아, 이건 그럴만한 사정이…."

루크가 변명을 하려했지만 생각해보니 변명거리가 없었다. 아무리 주군에게서 버려졌다 하더라도 금세 적군이었던 여기사에게 붙어 그녀의 주군을 도울 일을 벌이고 있다니…. 기사도에 어긋나도 한참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다행이 때맞춰 종업원이 주문한 요리를 들고 왔다. 루크는 은근슬쩍 대답을 얼버무리며 음식을 덜어먹을 접시와 식기들을 아르헨과 카시야에게 좀 더 가깝게 밀어주었다.

종업원은 요리를 테이블에 금방 얹고는 도로 내려갔다. 아르헨이 손으로 슬쩍 얼굴을 가린 덕분에 그의 외모에 기인한 소란은 벌어지지 않았다. 루크는 이제껏 제 외모에 꽤 자신이 있었는데, 아르헨을 보자마자 자신은 범부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르헨의 외모는 '잘 생겼다'를 넘어 그저 절대적으로 아름답다고 할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만약 그가 작정하고 누군가를 유혹하려 한다면, 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자가 많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게 여자가 됐든, 남자가 됐든 말이다. 그런데 우습게도 그 많지 않을 사람 중 하나가 제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카시야는 아르헨의 외모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얼굴로 그에게 빵을 권하고 있었다. 카시야가 자신과 아르헨 양쪽 모두의 외모에 공평한 태도를 보인다는 것이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 작품 후기 ============================

내일은 휴재입니다.

그리고 조아라에서 보여지는 회차는 어제 100회를 찍었습니다만,

본편 회차만 따지자면 이번 편이 99회차입니다.

질문이 많지는 않습니다만^^;; 본편 100회차 때 Q&A 글 올리겠습니다.

* 설문 이벤트 중입니다. 당신의 최애남캐를 골라주세요~!(설문이벤트 탭을 눌러 참여해주세요.)

+ 그녀의밤 님, 후원쿠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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