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홍의 카르마-102화 (102/134)

00102 선전포고(3) =========================

"아르헨 님께서는 어쩐 일로 저를 찾아 여기까지 오신 겁니까?"

제 접시에 알감자와 채소, 정체를 알 수 없는 고기를 함께 볶은 요리를 덜면서 카시야가 물었다. 그 질문에 와인을 조금 탄 물을 마시며 목을 축이던 아르헨의 시선이 카시야에게 향했다. 알리나 성녀로부터 자신의 운명에 대한 얘기를 대충 들었다던데, 그리고 그 운명대로 험난한 길을 걷고 있는 것 같던데, 이 여기사는 심드렁하기 짝이 없다. 분명 자신이 그녀를 찾아 여기까지 왔다는 말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을 텐데도 전혀 긴장한 어투가 아니었다.

문득 과거에 그녀를 치료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많은 환자를 치료하러 다니던 아르헨이기에 자신이 치료한 이들을 일일이 기억할 수는 없지만 카시야만큼은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었다. 여성의 몸으로 보통 남자들도 견디기 힘든 중상을 입었던 데다가 그 상처가 하나같이 희귀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도저히 들여다볼 수 없었던 그녀의 무의식이 신기했고,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을 처참한 상처를 입고도 살아난 게 인상 깊었을 뿐이었는데 그 다음번 만난 그녀는 도대체 언제 마나 운용을 배웠는지, 몸속의 마나가 대거 빠져나가버린 상태였다. 그때 눈 뜬 카시야와 처음으로 몇 마디 말을 나눌 수 있었는데, 죽다 살아났는데도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그녀에게 충격을 받았었다. 그녀는 진짜 기사였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주군을 위한 임무에 몸을 던진 것이다. 마나가 거의 남지도 않은 상태로 눈을 뜨고 자신에게 치료에 대한 감사를 전한 뒤 곧바로 보고를 위해 일어나던 카시야의 단단한 눈동자에 살짝 기가 질렸더랬다.

그랬으니, 알리나 성녀로부터 그녀가 신의 사도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두 번 묻지 않고 납득했다. 그럴 만 했다. 그녀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오랜만에 다시 만나 대화다운 대화를 나눠본 카시야는 이제까지 아르헨이 만나봤던 그 누구보다 강인하게 느껴졌다. 깊은 곳까지 사람을 꿰뚫어보는 듯도 하고 아무 관심 없어 보이는 듯도 한 눈빛은 그녀의 속내를 가늠할 수 없게 했지만, 그녀의 행동에는 사람을 기만하거나 잔머리를 굴리는 등의 뉘앙스가 전혀 없었다. 그녀의 행동이 곧 그녀 자신이었다. 그는 카시야에게서 신의 모습을 느꼈다.

"…미약하나마 카시야 경의 힘이 되어드리기 위해 왔습니다."

그의 대답에 카시야는 물음표가 뜬 것 같은 얼굴로 아르헨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입을 먼저 연 것은 루크였다.

"대신관께서는 2황자를 돕기로 결정한 겁니까?"

"2황자를 돕는다기보다는, 황제를 막으려는 것이지요. 결과적으로는 그게 2황자를 돕는 게 되겠습니다만."

이번에는 카시야가 물었다.

"저번에 알리나 성녀를 뵈었을 때는 신전이 중립을 지키려 한다 했습니다. 왜 입장이 변한 것입니까?"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제가 여기 온 것은 신전의 입장이 아닙니다. 신전은 여전히 중립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요. 신전은 모든 진영의 신도들에게 공평한 사랑을 베푸는 곳이니까요. 제가 여기 온 것은 주신 헤바와 성녀 알리나께서 제게 내리신 명령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게 왜 하필 지금입니까?"

"…얼마 전, 신의 계시가 내려왔습니다. 때가 임박했다는 계시가요."

"때요? 무슨 때가 임박했다는 것입니까?"

아르헨은 다시 카시야를 지긋이 쳐다보았다.

"조만간 성물의 수난기가 도래할 것입니다. 물론 이것도 저희가 임의로 이름을 붙인 것이고 정확히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알지 못합니다. 꿈으로 전해지는 신의 뜻은 해석하기가 쉽지 않거든요."

"무슨 꿈을 꾸셨는데 그러십니까?"

"신검이 악에 물든 마법진 위에 놓여 있다가 빛에 휩싸이며 사라지는 모습이었습니다. 느낌이 좋지 않았어요. 저희는 성물이 사라져버리기 전에 반드시 회수해야 합니다."

아르헨은 카시야가 검에 찔리는 꿈은 빼고 설명했다. 예지몽은 해석이 어려우니, 그게 꼭 카시야의 죽음을 암시하는 것은 아니리라 믿고 싶었다. 굳이 그 얘기를 해서 카시야의 심기를 어지럽히고 싶지도 않았다.

아르헨의 꿈 얘기에 카시야는 곧바로 에르논을 떠올렸다. 대신관 아르헨이 예지몽에서 불길함을 느꼈다면 과연 에르논은 무사할 것인가. 카시야는 접시를 뒤적거리던 포크도 멈춘 채 에르논이 처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떠올려보고 있었다.

맞은편에 앉은 루크는 카시야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예상이 되어 한숨이 나왔다. 대신관까지 끼어들 정도의 일이라면 에르논을 걱정할 때가 아니라 제 몸 건사할 생각부터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말이다. 이 여자는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위험 속에 몸을 날릴 게 뻔하다. 그렇게 되기 전에 자신이라도 나서서 최악의 상황은 막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일단 전력을 파악하기 위해 아르헨을 쳐다보며 물었다.

"불경스러운 질문일지 모르겠습니다만, 대신관께서는 어떻게 도와주신다는 말씀이신지요?"

그 질문에 카시야 역시 생각에서 깨어나 아르헨을 쳐다보았다. 사실 아까도 불량배들에게 잡혀 더러운 뒷골목에서 험한 꼴을 당할 뻔하지 않았는가.

"대마법사 에르논의 수준까지야 되지 않겠지만, 저는 주신 헤바께 신성력을 부여 받았습니다. 목숨만 붙어있는 상태라면 대부분 치료할 수 있고, 신성 보호나 악의 정화도 가능합니다. 막상 말씀드리고 나니 별 것 아니라서 부끄럽습니다만, 그래도 꼭 카시야 경을 돕고 싶습니다."

"별 것 아니라니요? 아르헨 님의 치료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는 그 덕분에 두 번이나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온 제가 제일 잘 압니다. 신성 보호나 악의 정화가 정확히 어떤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르헨 님의 힘은 분명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단적으로는 저희 분대원들의 사기부터 하늘을 찌르게 되겠지요. 함께 해주신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그 때 카시야 쪽의 전력과 그 운용에 대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무언가를 깨달은 루크가 무겁게 입을 떼었다.

"나 방금, 별로 반갑지 않은 생각이 들었는데 말야…."

카시야와 아르헨이 동시에 루크를 바라보았다.

"아르헨 대신관께서 예지몽을 꾼 것이라면, 우리가 피엔에서 에르논이나 기다리고 있을 일이 아닌 것 같은데? 악에 물든 마법진 위에 신검이 놓여있는 걸 보셨다면서? 그럼 그건 황궁의 어딘가일 확률이 높잖아. 신검이 마법진 위에 놓였다는 건 그렇게 되기 전에 에르논이 무슨 수를 쓰지 못했다는 뜻인 거고, 에르논의 능력이 통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길 거라는 뜻도 되지 않아? 물론 그가 황제를 막는데 실패하고 피엔으로 도망쳐올 수도 있지만, 어차피 그 성물이라는 신검을 회수해야 한다면, 우리가 황궁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그런 뜻 같은데 말야."

테이블 위에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때 마침 종업원이 루크가 주문한 와인 한 병을 갖고 올라와 테이블에 놓다가 아르헨의 얼굴에 시선이 닿았다.

"오, 오와…!"

그는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으로 감탄사를 내뱉으며 홀린 눈을 했다. 그러자 아르헨이 재빨리 일어나 그의 이마에 손을 대더니 뭐라고 중얼거렸다. 아르헨이 손을 떼자 종업원은 어딘지 멍청해진 눈을 하고는 그대로 1층으로 내려갔다. 아무런 소란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것을 본 루크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뭘 어쩌신 겁니까?"

"여기서 시끄러워졌다간 어디 있을지 모르는 황제의 첩자에게 발각될지 모르는 일이니, 저를 본 기억만 살짝 지워버린 것뿐입니다."

"너무 아름다워도 문제군요. 솔직히, 다시 한 번 불경스런 말씀입니다만, 대신관께서는 그 얼굴을 타고 나셨으면 다른 직업을 생각해보시지 그랬습니까. 황제보다 부유해졌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말이죠. 아니, 생긴 것만으로도 황제가 되셨을 수도 있겠습니다."

루크의 농에 아르헨은 가볍게 웃었다. 하지만 곁에 있던 카시야는 아까 루크가 했던 말을 깊이 생각하느라 그 농담에 동참하지 못했다.

'나도 많이 무뎌졌군. 왜 루크 같은 생각을 떠올리지 못했지? 대신관이 예지몽이라 인식한 꿈이 별 것 아닐 리가 없어. 조만간 황궁으로 잠입해야 한다…. 에르논이나 신검에 별 문제가 없었으면 좋으련만. 어쨌든 아르헨 님까지 오시게 됐으니 작전을 새로 짜야겠어.'

카시야가 눈빛을 날카롭게 빛내며 곰곰이 생각에 빠진 것을 본 루크는 혀를 쯧쯧 차며 글라스에 와인을 따랐다.

"이봐! 너 혼자 땅 파고 들어가지 마. 혼자 짐 질 생각도 하지 말고. 이번 기회에 이 몸이 왜 제국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기사라 불리는지 똑똑히 보여주지. 넌 뒤에서 구경이나 하고 있어라."

말을 마치고 물잔 같은 글라스에 담긴 와인을 여유롭게 마시는 루크의 모습은 꽤나 듬직했다. 그제야 카시야도 피식 웃으며 잔을 들었다.

"대신관께서는 어디서 묵으실 생각이십니까?"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카시야가 물었다.

"아까 카시야 경과 마주쳤을 때가 막 피엔에 도착한 직후였던 터라 아직 숙소를 구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저희가 묵고 있는 여관으로 가시지요. 제가 2인실을 혼자 쓰고 있으니 저와 같은 방에 묵으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러자 루크가 서둘러 제안했다.

"저와 함께 묵으시죠. 제 방 역시 침대가 두 개 있습니다. 카시야, 넌 네가 여자라는 자각이 없는 거냐, 아니면 대신관의 입장을 생각하지 못하는 거냐? 네가 아무리 선머슴같고, 대신관이 너보다 훠어어얼씬 아름다운 분이라 하더라도, 종교에 몸담으신 분이 여자와 한 방을 썼다는 얘기가 새어나가면 무슨 소릴 듣게 될 줄이나 알아?"

"아, 그것도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군대에서 오래 지내다 보니 그런 것에 별 의식이 없어서…."

"너 설마, 사내놈들이랑 천막 같이 쓰냐?"

"분대장이 되기 전엔 그랬죠. 고향 친구 쿠론과 함께 천막을 썼습니다. 제가 속해있던 부대에는 여기사가 저 밖에 없었거든요."

그 말에 루크가 벌어진 입을 다물지도 못하고 뻐끔거렸다. 별 일 없었냐고 묻고 싶었지만 카시야라면 그 '별 일'이란 게 뭘 말하는 거냐고 되물을 게 거의 확실해서 차마 물어볼 수가 없었다. 대신관 앞에서 남녀의 그렇고 그런 상황을 묘사하기가 참으로 껄끄러웠던 것이다.

어쨌든 그런 이유로 루크는 생전 만나볼 거라 생각조차 못해봤던 히드레이 교의 대신관을 자신의 허름한 여관방으로 모시게 되었다.

"대신관님을 모시기에는 지나치게 허름한 곳이긴 합니다만…."

루크는 막상 아르헨을 데려오기는 했지만 왠지 어색한 기분이 들어 말끝을 흐렸다.

"아닙니다. 아주 괜찮은 여관인걸요. 그리고 페레이아 경 덕분에 카시야 경과 한 방을 쓰는 것을 면했습니다. 죄송하지만 당분간 신세를 지겠습니다."

"아르헨 님께서야 외모 때문에 이런 저런 유혹에 시달리셨을 것 같습니다만, 사실 그 녀석은 별 뜻이 있어 그런 건 아닐 겁니다. 너무 불쾌하게 여기지는 말아주십시오."

"아, 그런 뜻으로 말씀드린 게 아닙니다! 제가 감히 어찌…. 다만, 제가 신께 몸을 바친 자이다보니 조금 조심하는 것뿐입니다. 경께서도 이미 아시는 것 같지만, 카시야 경께서 워낙에 소탈하시다보니 저 혼자만 얼굴 붉힐 일이 많을 것 같아서요."

아르헨은 난처한 듯 웃었다.

"아아, 그렇죠. 그 녀석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녀석이죠. 미약에 취한 채 겁탈당할 뻔 했는데도 눈 하나 깜짝 않던 녀석이었으니까. 분명 대신관님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옷을 갈아입었을 겁니다."

"예에? 잠깐만, 아까 저기 뭐라고…."

아르헨은 '미약에 취한 채 겁탈'이라는 말을 들은 것 같아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루크를 쳐다보았다. 루크는 그제야 제가 말을 내뱉은 상대가 대신관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네? 아, 그게, 아, 그렇지, 이불을 더 달라고 해야겠군요.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루크는 저도 모르게 아르헨의 말을 잘 못 들은 척 얼버무리고는 이불을 더 받아온다는 핑계로 방을 나가버렸다. 아르헨의 의심하는 눈초리가 등 뒤에 따라붙는 것 같아 식은땀이 솟았다.

============================ 작품 후기 ============================

- 도짜님들... 얼굴 파는 분들이 꽤 계시군요... 갑자기 아르헨이 뜬다...;;;;

- 내일 휴재입니다.

+ 쇼쇼 님, 그녀의밤 님. 후원쿠폰 감사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