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04 선전포고(4) =========================
원래 그다지 신실하지는 않았던 루크는 자신의 방에 대신관이 있다는 사실이 어색했다. 그의 외모가 평범하기만 했어도 좀 덜했을 텐데 아르헨은 이종족이라 불러도 좋을 정도로 특별한 외모를 가졌으니 마주보고 있는 것조차 겸연쩍었다. 하지만 정작 아르헨은 모든 행동이 자연스럽기 그지없었다. 그가 보통의 다른 사람들처럼 솔을 들고 신발에 묻은 흙을 조심조심 털어내는 것을 보는 것은 굉장히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타인의 마나와 기척에 예민한 루크는 아르헨에게서 스며 나오는 독특한 기운을 감지할 수 있었다.
'저게 신성력인가….'
마치 울창한 숲속에 들어갔을 때나 느낄법한 청량한 기운이 어느새 방 안을 가득 채우는 것 같았다. 자신조차 거기에 동화되어 그동안 찾지도 않던 신의 존재를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이제 그만 잘까요?"
"네. 그럼 이제 램프를 끄겠습니다."
루크는 기름 램프의 불을 훅 불어 끄고는 침대에 몸을 뉘었다. 어색한 사이의 누군가가 곁에 있어 잠들기가 힘들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평소보다 금방 잠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그게 좋은 일은 아니었다. 또다시 세이지와 카시야가 등장하는 꿈을 꾸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꿈은 자각몽이었고, 가위에 눌린 것처럼 스스로 깰 수 없었다. 루크는 벅찬 숨을 내쉬며 속으로 욕설을 짓씹었다.
꿈에서 그는 또 세이지의 시선에서 카시야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지난번에 봤던 것보다 카시야가 훨씬 어렸다. 열여섯, 일곱쯤 되었을까. 보통의 여자아이라면 한참 풋풋한 싱그러움을 내뿜어야 할 나이인데도 카시야는 이미 서늘했다. 아니, 오히려 지난번의 카시야보다 살기는 더 강한 것 같았다. 형편없이 잘린 더벅머리는 볼품없었지만 살기를 흘리는 까만 눈동자만큼은 여전히 인상 깊었다.
그들은 서로 대화도 없이 다른 아이들과 함께 이국적인 나무와 수풀로 뒤덮인 숲속을 헤매고 있었다. 손에는 원시적으로 보이는 곡도 하나씩만 쥐고 있을 뿐이었다. 꿈속인데도 습기와 더위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이름을 알 수 없는 벌레들이 등 뒤를 기어가는 것 같았지만 아이들은 미동도 않고 몸을 낮춘 채 무언가를 기다렸다.
잠시 후, 루크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해괴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나무 상자를 매단 장대를 어깨에 메고 지나가는 게 보였다. 그 행렬은 어림잡아도 스무 명 이상은 되었다. 그때, 앞에서 숨죽이고 있던 카시야가 슬쩍 주변을 둘러보더니 까딱하고 고갯짓을 했다. 그 순간, 풀숲에 숨어있던 아이들이 일제히 그들을 향해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세이지 역시 달려 나가느라 시야가 마구 흔들렸지만, 언뜻 본 카시야의 뒷모습은 먹이를 향해 달려드는 어린 맹수였다. 그녀가 쥐고 있던 곡도가 울창한 숲 사이를 간간이 비추는 햇살에 반짝이는 것 같더니 곧 그 빛이 사람들의 목을 베었다. 세이지 역시 당황하는 사람들을 향해 무자비하게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들이 옮기던 나무 궤짝이 바닥에 떨어져 검은색의 길쭉한 철제 물건들을 쏟아냈다.
루크의 귀에는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 거친 호흡 소리, 멀리서 들리는 듯한 비명 소리가 한데 어우러져 울려 퍼졌다. 그 소리들과 정신없이 뒤바뀌는 시야 때문에 토할 것 같았다. 그 순간이었다. 상대 쪽의 한 남자가 루크,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세이지를 향해 칼을 내리쳤다. 루크는 꿈속인데도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죽는다!'
칼날이 자신을 향해 내리쳐진다는 것을 인식한 순간 눈이 감겼다. 하지만 챙! 하는 소리가 났을 뿐, 그에게 칼날은 닿지 않았다. 곧이어 '피'가 분명한 뜨거운 액체가 그의 얼굴에 흩뿌려졌다.
'뭐지?'
눈을 뜨자 그의 앞에는 카시야가 서 있었다. 자신에게 칼을 내리치던 남자는 이미 목이 반쯤은 덜렁거리는 상태가 되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가 카시야를 쳐다봤지만 카시야는 아무런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눈빛으로 그를 한 번 흘끗 쳐다봤을 뿐, 곧장 다른 이에게 달려들며 곡도를 휘둘렀다. 세이지 역시 곧 손에 힘을 주고 제 측면으로 달려오던 누군가를 향해 힘껏 칼을 가로 그었다.
'이게 뭐야…. 이, 이건, 칼리스토니아가 아니야! 저건 카시야가 맞는 건가? 여긴, 지옥인가?'
지옥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수밖에 없을 정도로 그들은 악귀 같았다. 그는 정신없이 흔들리는 시야 안에서도 끊임없이 카시야 쪽을 쳐다보았다. 근육으로 가득 차있는 것 같았지만 덩치 자체는 가녀리다고까지 여겨지는 그녀의 등이, 곡도를 망설임 없이 휘두르는 몸짓으로 능란하게 휘고 꺾이고 뻗었다.
'사람을 홀리게 만드는군….'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악귀 같은 그녀의 모습이, 숨 막힐 듯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는 아릅답다 생각한 그 의식이 자신의 것인지, 세이지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때 어디선가 청아한 음성이 들렸다. 누군가를 부르는 듯한 목소리였다.
'어디서 들리는 거지?'
루크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시야는 점점 어두워질 뿐이었다.
"페레이아 경! 페레이아 경! 정신 차리세요!"
"허억!"
루크는 번쩍 눈을 떴다. 그의 눈앞에는 달빛에 어렴풋이 비쳐 은발처럼 보이는 머리카락을 드리운 아르헨이 걱정스러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대… 대신관… 님…. 하아, 하아…."
"악몽을 꾸셨나보군요. 숨소리가 너무 거칠어서 제가 일부러 깨웠습니다."
루크는 반쯤 일으켰던 몸을 다시 털썩 뉘었다.
"하아…. 감사합니다."
거칠었던 숨을 갈무리하는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아르헨이 조용히 물었다.
"악몽을 자주 꾸십니까?"
"최근, 꾸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왜 이런 꿈을 꾸는지 모르겠어요."
"어떤 꿈을 꾸시는데요?"
루크는 말문이 막혔다. 카시야에 대한 꿈을 꾼다는 얘길 하면 아르헨이 어떻게 볼지 걱정되기도 했고, 꿈의 내용도 해괴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이다. 제대로 설명하려면 자신과 카시야 사이에 있었던 일들이나, 카시야에게 들었던 세이지에 대한 얘기를 다 털어놔야 했지만 그러기는 아무래도 껄끄러웠다. 머뭇거리는 루크를 보던 아르헨이 머릿속에 뭔가가 떠올랐는지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꿈에서 현재의 이 세계가 아닌, 마치 다른 세계의 풍경을 보는 듯하던가요?"
아르헨의 말에 루크의 눈이 커졌다.
"맞는가보군요."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아니, 그건 아무래도 좋습니다. 혹시, 이 악몽을 안 꿀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루크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만약 아르헨이 이 악몽을 그만 꿀 수 있게 해줄 수 있다면 타노버에 숨겨둔 루비 한 덩이 정도는 히드레이 교에 기꺼이 기부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르헨은 아무 말도 없이 그저 그의 눈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의 내면을 파고드는 것 같은 맑은 눈빛에 마음이 불편해졌지만 무엇에 붙들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 눈빛을 먼저 피할 수는 없었다.
"저와 함께 있으면 오히려 그 꿈을 더 꾸게 되실 겁니다. 신성력을 접하면 접할수록, 점점 더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신성력은 악을 정화하는 힘이 있다면서요? 그런데 왜 악몽을 더 꾸게 하신다는 겁니까?"
"그건 악몽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게 악몽이 아니면 뭡니까? 아, 대신관께서는 제가 무슨 꿈을 꿨는지 모르시니 그렇게 말씀하실 수도 있겠군요. 그게, 설명하자면 깁니다만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제가 모르는 어떤 이의 시선으로 일련의 사건들을 겪는 꿈입니다. 그런데 그 사건들이라는 게 하나같이 유쾌한 상황이 아니라서요."
루크는 지친 듯한 목소리로 얘기했고, 기억에 남은 잔인한 살육의 현장을 떠올리던 그의 호흡은 다시 거칠어졌다. 아르헨이 손을 들어 그의 이마에 얹고 어떤 기도문을 외우자 그의 온몸에 솟았던 식은땀이 사라지고 심장 박동이 안정되면서 호흡이 가라앉았다.
"감사합니다, 대신관님. 하아…. 단순히 꿈인데도, 이상하게 진정이 되질 않았습니다. 꿈에서 깨어서도 가슴이 너무 아프고, 그냥… 미칠 것 같기만 해서…. 여튼, 그런 꿈이니, 악몽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혹시 치료할 수 있다면 좀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아르헨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
"그건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악몽이 아닙니다."
"그럼 뭡니까? 꿈을 꾸는 내내 고통스럽습니다."
"그건…. 잊고 있었던 당신의 기억일 뿐입니다."
"예?"
루크가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
"…대신관님, 저기, 제가 아까 말을 너무 빨리 해서 잘 이해가 안 되셨나본데…"
"보통 꾸던 꿈과 확연히 다른 꿈이지요? 특히 꿈에서 느껴지는 감정이라든가 그 생생한 느낌이 말이죠."
"예! 맞습니다."
루크는 표정 관리가 안 되었다. 이 무슨 점쟁이 같은 화법이란 말인가. 하지만 그는 속절없이 아르헨의 얘기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이 세상 사람들 중 어떤 사람들은 '전생'이라는 것을 갖고 있습니다. 이번이 두 번째, 세 번째, 혹은 그 이상 새로운 삶인 사람들이죠. 그리고 보통은 전생을 완전히 잊은 채 이번 생을 살고는 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신성력에 영향을 받게 되면 꿈을 꾸는 형식으로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페레이아 경께서도 제 곁에 계셔서 전생을 꿈꾸게 된 듯합니다."
"저는… 지금 대신관께서 하시는 말씀이 잘 이해가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이 꿈을 처음 꾼 것은 그냥… 카시야랑 술 먹고 들어왔던 밤이었거든요."
"카시야 경은 신의 선택을 받으신 분이거든요. 당연히 그 분께도 신성력이 깃들어 있습니다."
"예? 그건 또 무슨 개소, 아니, 그게 아니고, 지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자세한 것은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만, 몇 백 년에 한 번씩, 헤바께서 손수 선택하고 내려주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카시야 경이 바로 그 신의 선택을 받은 분입니다. 신의 선택을 받으셨으니 당연히 그 분의 몸에는 신이 닿은 흔적, 그러니까 신성력이 깃들어 있을 수밖에요.“
루크는 방금 전 꾼 꿈보다 지금이 더 혼란스러웠다. 아르헨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이 외려 더 꿈같다. 입을 벌린 채 흔들리는 눈동자를 감추지 못하는 루크를 마주보던 아르헨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혼란스럽긴 하실 테지만, 사실 어찌 보면 이해 못 할 일도 아닙니다. 왜, 어떤 사람은 농부나 양치기가 되고, 어떤 사람은 기사가 되고, 어떤 사람은 왕이 되지 않습니까? 카시야 경은 그 중에 이 세계를 파괴로부터 지키고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는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지요. 힘들고 고통스러운 길을 걸으실 그 분에게는 제가 받은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큰 신성력의 축복이 내려져 있습니다.“
그 말에 루크가 버럭 화를 냈다.
"개같은 소리 하지 말라고 해요. 왜 하필이면 그 녀석이 힘들고 고통스러운 길을 걸어야 합니까? 도대체 무슨 기준으로 사람을 골랐답니까? 예? 축복? 축복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이 정도면 저주입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으르렁거렸다. 자꾸만 안타깝고 애달픈 기분이 드는 그 여자가 왜 또 힘들고 고통스러운 길을 걸어야 한다는 것인지, 신이라는 작자가 눈앞에 있다면 달려들어 한 방 먹여주고 싶었다.
갑자기 화를 내기 시작한 루크의 앞에서도 아르헨은 난처한 듯 미소 지을 뿐, 놀라거나 무례하다 지적하지 않았다. 루크가 잠잠해진 듯하자 아르헨이 조용히 말했다.
"그렇게 화내실 일은 아닙니다. 사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지 스스로 선택하지요. 카시야 경께서도 자신의 앞에 놓인 힘든 길에서 벗어나실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분은 그 길을 기꺼이 걷길 선택하신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그 분을 존경하고 그 분의 힘이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히드레이 교의 대신관이 대단한 사람이라 여길지 모르지만, 사실은 카시야 경 같은 분이 진실로 대단하신 분이죠. 신의 뜻을 직접 이루시고 본인을 희생하시는 분들이요."
"저는 그 녀석이 희생하는 꼴을 가만 두고 볼 생각 따위는 없습니다."
"저 역시, 그녀의 희생을 최소한으로 막기 위해 여기 온 것입니다."
어금니를 까득 깨물던 루크는 아름다우면서도 어딘지 슬퍼 보이는 아르헨의 미소에 이내 얼굴을 돌려 눕고 말았다. 아르헨 역시 그에게 이불을 다시 잘 덮어주고는 자신의 침대로 돌아가 누웠다.
속으로 씩씩대던 루크는 잠시 후, 뒤늦게 깨달은 어떤 사실 하나 때문에 엄청난 후폭풍에 휩싸였다.
'잠깐! 그럼, 내가 꾼 꿈이, 내 전생이라고?'
============================ 작품 후기 ============================
1. 파티가 결성되려면 탱, 딜, 힐이 다 갖춰져야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ㅋㅋㅋ
2. 출간용 외전에는 세이지 이야기, 카시야X남주의 꽁냥꽁냥 이야기, 타셀X알리시아의 꽁냥꽁냥 이야기 골고루 들어갈 겁니다.
3. 출간되면 E북으로 나올 겁니다. 처음에 다른 플랫폼에서 연재 먼저 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긴 합니다만, 어떻게 됐든 E북 출간을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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