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05 선전포고(5) =========================
루크는 벽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멍해지는 정신을 붙들려고 노력했다.
'내가… 세이지라고? 아니, 아니, 아니, 그럴 리 없어. 카시야는 분명 세이지에 대해 기억하고 있었고, 만약 세이지란 자가 나의 전생이라면 카시야가 지금 멀쩡히 기억하고 있을 리가…. 잠깐. 그러고 보니 꿈에서 본 카시야도 지금의 카시야와는 어딘지 달랐잖아. 머리카락 색이나 눈동자 색이 달랐다고. 그렇다면 그건 카시야의 전생이라는 건가? 그럼 그 녀석 역시 자신의 전생을 알고 있다는 거야? …아니, 그 전에, 전생 어쩌구 하는 말을 믿어야 돼?'
전혀 규칙적이지 않은 루크의 숨소리로, 아르헨은 그가 잠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르헨은 신의 계시를 꿈으로 꾸고 알리나 성녀의 방에 들렀을 때 그녀가 했던 얘기를 떠올렸다.
[카시야 경 주변에는 이미 그녀와 깊은 연을 맺은 이들이 그녀의 무기가 되어줄 준비를 하고 있어요. 특히 그녀와 전생에 깊은 인연을 맺었던 사람이 현재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습니다. 아마 카시야 경은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것 같군요. 그녀는 자신의 전생을 기억하고 있으니까요.]
알리나의 말에 따르자면 루크 페레이아가 바로 그 '전생에서 깊은 인연을 맺은 사람'일 것 같았다. 게다가 얼마 전까지 카시야와 적으로서 맞서던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카시야의 신변을 걱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전생에 카시야와 어떤 인연이었는지 알 수 없는 아르헨으로서는 그가 정말로 카시야에게 도움이 될 사람인지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그는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헤바께서 안배하신 일이다. 모든 일은 순리대로 흘러갈 거야.'
*
케일런군은 퇴각하면서도 그들을 추격하는 타셀군 때문에 큰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죽음으로써 타셀군을 막아내며 버틴 소수의 희생으로 대부분의 군사들은 알리스타스 공작성 안으로 퇴각해 들어갈 수 있었다. 거대한 알리스타스 공작성은 유서 깊은 알리스타스 가문이 이백 년 이상을 이어져오며 끊임없이 증축하고 보수한 철옹성이었다. 겉으로 보이는 성의 규모도 어마어마했지만 그 지하는 또 얼마나 파내었을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그 많은 병사들이 성 안으로 들어갔는데도 여유로운 것을 보면 절대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었다.
타셀은 높은 언덕에서 알리스타스 공작성을 바라보았다. 그의 곁으로 엔드로스가 다가왔다.
"조금 있으면 11월입니다. 12월이 되면 군사들에게 방한복을 지급해야 할 텐데, 준비된 방한복의 수량이 넉넉지 않습니다."
그에 타셀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공작성을 치는 데 방한복은 필요 없을 것이다. 곧바로 케일런군을 깨고 수도로 진격하겠다."
"하지만 공작성을 깨부수기가 쉽지는 않을 겁니다. 알리스타스 공작성은 철옹성으로 유명한데다 물자가 풍족하니까요. 외벽도 너무 높아서 기어 올라가는 것도 무리입니다.“
"우리 군사들이 다칠 일도 없을 것이다."
엔드로스는 이해할 수 없는 타셀의 말에 의아한 얼굴을 했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우리 군사가 아냐, 성안의 무고한 백성들이지. 다들 부디 잘 빠져나와야 할 텐데."
그때 지크가 나타나 보고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겠지만, 1황자 쪽은 전혀 항복 의사가 없습니다."
타셀은 지크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에르논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내일 오전, 공작성을 무너트릴 수 있겠는가?]
[물론입니다. 결심하셨습니까?]
[되도록이면 죄 없는 이들은 다치지 않게 하고 싶네만, 그게 가능할까?]
[글쎄요. 그거야 그 사람들 운에 맡겨야죠. 1황자와 고위 귀족들이 머무는 상층부 먼저 무너트리도록 할 테니, 그때 투항 권고를 한 번 더 해보십시오.]
[고맙네. 내일, 때가 되면 폭파 명령을 내리겠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에르논과의 의식 전달 마법을 마친 타셀은 수뇌부들만 불러 은밀히 다음 날 있을 공작성 폭파 계획에 대해 말해주었다. 엔드로스는 그제야 타셀의 태도가 이해되었다. 그들은 멀리서 공작성이 무너져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살아남은 일반 병사들에게 투항 권고를 하면 될 일이었던 것이다. 물론 최대의 적군이었던 에르논의 힘으로 그 적군을 무너트릴 수 있게 된 상황에 대해 미하일 같은 이들은 내심 탐탁지 않아 했으나 지금으로선 자존심 싸움을 할 때가 아니었다.
"만에 하나 생각지 못한 상황이 생길 수도 있으니, 일단 전군 비상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아무래도 케일런군 쪽 병사들이나 백성들 중 부상자가 많이 생길 텐데 우리 간호 막사로 다 대처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어차피 그들을 위해서라도 공작성 점거는 필요할 것 같습니다. 비축해놓은 물자도 백성들에게 풀어야 하고요. 백성들은 굶어 죽게 내버려둔 채 그렇게나 수탈을 해갔으니 도대체 얼마나 쌓아놓고 있을지…."
케일런군의 괴멸을 눈앞에 두자 직접적인 격전이 없을 예정인데도 모두들 긴장했다.
"경거망동 하는 자가 없도록 주의를 주게. 갑자기 따르던 군주가 사라지면 자포자기하는 마음에 폭주하는 병사들이 있을지도 모르네. 그들을 먼저 자극해서 좋을 것은 없으니 말야. 그럼, 내일 오전 9시까지 모든 준비를 마치도록."
회의는 긴장과 기대감이 뒤섞인 분위기에서 끝났다. 회의가 끝난 막사 안에는 타셀만이 한없이 침잠한 기분으로 착잡하게 앉아있었다. 이렇게 마음이 흔들릴 때면 자꾸 카시야가 떠올랐다.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던 건조한 눈빛이….
'그녀가 나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두 번 뒤돌아보지 않고 폭파 명령을 내렸을까? 내가 너무 나약한 걸까?'
이제는 그녀를 떠올려도 가슴이 아프거나 답답하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주던 단단한 안정감은 때때로 그리웠다. 그녀에 비하면 자신은 너무나 나약한 것 같았다. 일말의 의심이나 주저함이 없는 그녀의 눈빛을 보면 자신의 흔들리는 마음도 다잡을 수 있었는데, 지금은 가장 어려운 결정을 앞두고 있는데도 어느 한 곳 기댈 데가 없었다.
자신이 나약하다는 자책감과, 그래도 죄 없는 자들을 죽이는 것에 무뎌져서야 되겠느냐는 항변이 동시에 마음을 어지럽혔다.
그때 밖에 서있던 경비병이 알리시아의 도착을 알렸다. 알리시아의 황후 제안을 받아들인 뒤부터 그녀는 정말로 타셀을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인지, 사정이 될 때마다 찾아와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돌아갔다. 그 모습이 기특해서 그녀의 방문을 반가워하던 타셀이었지만 오늘은 별로 내키지 않았다. 내일 오전이면 자신은 대량 살상을 일으킬 사람이라는 죄책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약한 모습을 내보일 수가 없었던 타셀은 축 쳐져있던 자세를 추스르며 그녀의 방문을 허락했다. 얼굴에는 가면과도 같은 미소가 덧입혀졌다.
"오랜만이군, 영애."
"예, 전하. 그동안 격전을 치러 오셨는데, 혹시 불편한 곳은 없으신지요."
"보다시피 나는 아주 멀쩡해. 많은 이들의 목숨을 빚지고 사는 주제에 너무 멀쩡해서 탈인 것 같지만."
알리시아는 타셀의 우울한 기분을 금방 눈치 챘다. 그의 입매는 웃고 있었지만 그의 눈동자에는 짙은 괴로움이 어려 있었다.
"전하. 혹시 검은 꼬리 물새를 아십니까?"
"응? 갑자기 새 얘기는 왜 하는 거지?"
하지만 알리시아는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여전히 그의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아…. 그래, 검은 꼬리 물새라…. 내 기억이 맞다면, 겨울이 될 때 쯤 북쪽에서 남쪽으로 날아가는 철새 아닌가? 정확히 어떻게 생겼는지는 잘 모르지만 말야."
"네. 맞습니다. 겨울이 되면 무리를 지어 칼리스토니아 남쪽으로 날아가는 작은 철새죠. 그 작은 새들도 나름의 무리를 지어 생활한다고 하는데, 계절이 바뀌어 이동하게 될 때 한 마리의 우두머리 새가 이끄는 방향으로 그 무리의 모든 개체가 따른다고 합니다."
"그래? 그거 참 신기하군."
타셀은 기계적으로 대답했다. 사실 그녀가 무슨 얘기를 하든 별 상관이 없었을 것이다. 그는 지금 알리시아에게 예의바르게 대하는 것조차 피곤한 상태였으니까.
"제대로 된 방향으로 인도하는 우두머리 새의 무리라 하더라도 남쪽까지 무사히 도착하는 개체는 무리의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만큼 철새의 이동은 힘들다고 해요. 그러니 우두머리 새가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면 어찌 되겠습니까? 전혀 엉뚱한 곳으로 이동한 검은 꼬리 물새 무리는 그 해의 번식을 망치기도 한다고 합니다. 검은 꼬리 물새들에게 있어 현명한 우두머리 새의 존재가 중요할 수밖에 없는 이유지요. 그래서 그 새들은 무리가 공격받으면 우선적으로 새끼들과 우두머리 새를 지킨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새들에게 우두머리 새가 제대로 된 방향으로 인도하느냐 마느냐보다 더 중요한 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글쎄?"
"바로 우두머리 새 그 자체의 존재랍니다. 만약 우두머리 새가 남하 중에 죽어버리게 되면 나머지 새들은 공중에서 우왕좌왕하다가 더 이상 남하하지 못하고 그 지역에 눌러 앉아 버리게 된대요. 그러다 겨울이 닥치면 충분히 따뜻한 곳까지 가지 못한 그 무리는 전멸하고 마는 것이지요. 저는 검은 꼬리 물새나 인간들이나 크게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
"큰 방향을 가리키는 지도자의 존재는 무리를 지어 사는 동물들에게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물론 그 지도자가 제대로 된 방향을 가리키는 것도 매우 중요하지만, 무리의 목표를 대표하고 그들을 한 방향으로 이끌어주는 것이 지도자의 더욱 큰 존재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전하께서는 이미 그 자리에서 버티고 존재해주시는 것만으로도 많은 이들이 살아갈 수 있는 희망을 주시고 계십니다. 그러니, 목숨을 빚졌다 생각하지 마세요. 오히려 저희야말로 전하께 목숨을 빚지고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도망치지 않고 버텨주셔서, 그리고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 주셔서 감사합니다."
낭랑한 알리시아의 목소리가 타셀의 심장에 꽂혀들었다. 타셀은 도무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민망하게도 목이 매여서 계속 헛기침을 해야만 했다. 별 것 아닌 아첨이라 생각하기에는 알리시아의 눈동자가 언제나처럼 담백하게 빛나고 있었다.
타셀은 워낙에 강하고 현명한 군주라 아무도 그에게 위로 같은 것을 해줬던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도 사람이다. 아비에게 버림받고, 어미는 자신을 위해 버티다 자살했고, 힘겨운 전쟁터를 전전했고, 모두의 목숨이 그의 어깨에 짐 지워져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꿋꿋이 버티고 있는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모두가 그를 우러러보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위로 한 마디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당신의 존재 자체가 모두의 힘이 되어준다는 알리시아의 말이 타셀은 가슴이 아리도록 고마웠다. 자신이 걷는 길이 과연 옳은 길인지 끝없이 고뇌하던 그가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어차피 결정은 타셀의 몫이다. 하지만 다른 이들이 그를 믿어준다면 그는 결정의 괴로움을 감내할 수 있었다.
"…고맙네, 영애."
애써 감정을 억누르며 알리시아에게 짧게 감사를 전하는 타셀의 모습을, 알리시아는 안타까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전장에 와보니 타셀 한 사람에게 얹어진 짐이 얼마나 많고 무거운지 알 수 있었다. 이제까지는 그의 입장을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그의 비가 되기로 마음먹자 그의 고통이 무섭도록 눈에 보였다. 그는 그것을 여태껏 앓는 소리 한 번 없이 버텨온 것이다. 버티기뿐일까, 오히려 그 짐을 원동력 삼아 모두를 여기까지 이끌어왔다. 그녀는 그의 짐을 조금이나마 나눠지고 싶었다. 하지만 타셀은 아직도 자신의 앞에서조차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알리시아는 그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으려는 그가 너무 가엾고 안쓰러워서 가슴이 아팠다. 조금이라도 위로해주고 싶었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타셀의 곁으로 다가갔다.
"…영애?"
타셀의 코끝에 은은하고 달콤한 향기가 훅 끼쳤다. 눈앞에 금을 가늘게 뽑아 만든 것 같은 머리칼이 어지러이 나부꼈다. 그리고, 그의 뺨에 따뜻하고 말랑하고 촉촉한 것이 붙었다 떨어졌다. '쪽' 소리를 내면서….
타셀은 순간 정지되었던 의식을 재빨리 되찾고는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그제야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닫고는 얼굴이 새빨개진 알리시아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돌처럼 굳어있었다. 어느새 늘 어른스럽다고만 생각되던 알리시아가 딱 제 나이의 아가씨처럼 보여 귀여웠다. 타셀은 피식,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미소 짓다가 어물어물하는 알리시아의 턱을 살짝 당기고는 그대로 그녀의 핑크빛 입술에 키스했다. 알리시아가 놀라서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지만 타셀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를 사랑하지 않음에도 올바른 방향으로 쓰일 권력을 얻기 위해 그와의 혼인을 선택한 영애, 그가 다른 여자를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을 알았으면서도 '그 마음을 접지 않아도 좋으니 대의를 위해 나와 혼인해달라'던 영애, 그 누구도 침범하지 않던, 아니, 모른척하던 그의 약한 부분을 스며들듯 침범해 따스한 위로를 건네는 영애.
그저 당돌하고 용기 있다고만 생각되던 그 영애가, 지금 이 순간, 흔들리던 그의 마음을 지탱해주었다.
충동적으로 마주 댄 입술이 생각보다 훨씬 더 연하고 달았다. 입술만 잠깐 맛보려고 했는데 어느새 혀가 얽혀들었다.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이성은 정신 차리라고 그에게 계속 외쳐대고 있었지만, 늘 건조한 대기와 흙먼지 맛만 보던 혀에 푸딩처럼 부드럽고 말캉한 감각이 닿자 도무지 그만둘 수가 없었다. 그것은 알리시아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어느새 그녀는 타셀의 소매를 꼭 붙들고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달콤한 감각에 취해있었다. 아득해지는 정신을 추스를 생각도 없이 물기를 머금은 접촉음을 흘리던 두 사람의 귓가에 갑자기 경비병의 목소리가 꽂혀들었다.
"전하. 엔드로스 루벤 아나클리프 경께서 방문하셨습니다."
그 말에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화들짝 놀라 몸을 떼어낸 뒤 전혀 다른 곳을 바라보며 허둥거렸다.
"자, 잠깐, 아니, 드, 들라 이르라."
타셀의 허락에 천막 안에 들어선 엔드로스는 직감적으로 공기 중에 떠도는 야릇한 분위기를 읽어냈다. 만약 타셀과 함께 있던 사람이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는 '그러고 보니 제가 깜빡한 게 있군요! 금방 갖고 오겠습니다.'라며 자리를 비켜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새빨개진 얼굴로 바닥만 쳐다보고 있는 여인이 다름 아닌 제 딸 알리시아라는 것을 깨달은 엔드로스는 고집스러운 표정으로 의자를 빼내어 앉아, 그를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하는 타셀을 싸늘한 시선으로 쏘아보았다.
"알리시아는 보고가 끝났으면 이만 돌아가 봐도 좋을 것 같구나."
엔드로스의 말에 알리시아가 벌떡 일어나더니 제대로 된 인사도 없이 서둘러 막사를 빠져나갔다. 타셀은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가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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