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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홍의 카르마-106화 (106/134)

00106 선전포고(6) =========================

"오늘은 별로 몸이 좋지 않군요."

늘어지는 에르논의 목소리에 그의 상태를 살펴보러 왔던 크레인이 화들짝 놀랐다. 에르논의 컨디션을 최상으로 끌어올리라는 명을 받은 그로서는 몸이 좋지 않다는 에르논의 말만큼 무서운 것이 없었다.

"예? 어, 어째서…! 혹시, 불편하셨던 점이라도 있으십니까?"

"으음. 어제 하도 많이 먹으라고 권하셔서 제가 과식했던 것 같습니다. 속이 부대껴요. 오늘 오전은 침대에 누워 푹 쉬고 싶습니다만, 그래도 될까요?"

"아, 무, 물론입니다! 저기… 어제 제가 식사를 더 권했던 것은 그저, 너무 소식하시는 게 아닌가 싶어서…."

"다른 분들께 크레인 님이 식사를 억지로 권했다고는 하지 않을 테니, 이제 그만 나가주시겠습니까? 좀 더 자고 싶네요."

"예, 알겠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알리스타스 공작성의 파괴를 위해 공작성에 심어둔 마법진의 발동 주문을 외우고 마력을 써야 하는 에르논은, 혹시라도 그의 곁에 종일 감시할 사람이 붙을까봐 꾀병을 부려 사람들을 다 침실 바깥으로 내쫓았다. 오전 10시경 실행할 것이라고 했으니, 이제 조금 있으면 타셀로부터 메시지가 올 것이다. 악마의 소굴과도 같은 그 성을 파괴한다는 것은 에르논에게도 굉장히 큰 의미였다. 그는 머릿속으로 케일런과 알리스타스 공작가의 나머지 일족들, 수뇌부라 불리는 주요 귀족들이 머무는 곳을 떠올렸다. 성의 주요 기둥이 되는 곳곳에 마법진을 심어 놓았으니 상층부를 무너뜨리면 하층부까지 영향이 미치겠지만, 끝까지 버티지 않고 항복한다면 성이 완전히 무너지기 전에 성안의 시종이나 하녀들은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에르논은 죄 없는 이들이 괜히 머뭇거리며 버티다가 죽지는 말았으면 좋겠다고는 생각했지만, 기본적으로 타인에게 큰 동정심을 느끼지는 못했기 때문에 만약 그들이 다 죽는다 해도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 믿었다.

에르논은 침대에 누워 초조하게 때를 기다렸다.

'왜 아무 연락이 없지? 혹시 뭐가 잘못 됐나? 10시는 한참 지난 것 같은데….'

에르논이 먼저 타셀에게 메시지를 보내봐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드디어 타셀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공작성의 상층부부터 파괴하도록.]

에르논은 벌떡 일어나 앉았다. 심장이 쿵쾅대며 요동쳤다. 공작의 어미인 그 할망구는 돌에 깔려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는 마법진을 진동시키는 주문을 외웠다. 그의 눈동자가 시린 보랏빛을 흘렸다. 마력이 꽤 드는 일이긴 했지만 에르논은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기꺼이 제 마력을 태웠다.

쿠르르르릉-

타셀은 측근들과 멀리서 공작성의 상층부가 진동하며 내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에르논에게 폭파 명령을 내리기 전 마지막 투항 권고를 했으나, 예상대로 아무도 성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잠시 후 성의 꼭대기 부근에서부터 먼지가 피어오르는가 싶더니, 뾰족하게 솟아있던 첨탑 하나가 기우뚱하고 맥없이 꺾였다.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았다.

"대마법사의 마력은 무서울 정도군요. 이렇게나 간단히 성을 부수다니…."

미하일이 질린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내가 보유한 마력은 그의 마력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 그러니 에르논은 전쟁 후에도 요주의 인물로 살아가야 할 거야. 솔직히 말하자면, 알리스타스 공작의 속박 문양이 그를 억제하고 있었던 마지막 구속구나 다름없었거든. 그걸 없애버렸으니, 이제 이 제국 내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은 사실상 에르논, 그 자이지."

그들이 평온히 에르논에 대한 얘기를 나누고 있는 와중에도 알리스타스 공작성은 뿌연 먼지 구름을 일으키며 무너져내려가고 있었다. 성의 1/3 지점까지의 상층부가 굉음을 내며 무너져 내린 후, 진동이 멎었다. 이제 다시 투항을 권고할 차례였다. 타셀은 마법으로 제 음성이 훨씬 더 증폭되게 만들며 입을 열었다.

"계속 투항을 거부하면 알리스타스 공작성은 조만간 완전히 무너진다. 투항하는 자는 죽이지 않겠다. 부상 입은 자들을 데리고 나오는 이들을 우선적으로 받아들이겠다. 항복하라!"

적막이 내려앉은 벌판에 쩌렁쩌렁 울리는 타셀의 목소리는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가 가득했다.

하지만 당장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저 고요한 가운데 성이 무너지며 생긴 먼지바람만이 성 주변을 휘돌 뿐이었다. 그때였다.

"저기! 저길 보십시오!"

누군가의 외침에 시선을 돌리자, 단단히 닫혀있던 공작성의 성문 하나가 천천히 열리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보는 쪽의 입장에서나 '천천히'일 뿐, 그 안에서 아비규환에 빠져있을 이들에게는 다급한 몸짓이었을지도 모른다.

"드디어, 성문이 열리는군요."

타셀과 그 휘하의 기사들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성문이 열리고 투항하는 사람들이 쏟아져 나올지, 혹은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의 군대가 쏟아져 나올지 알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아, 투항하는 사람들인 모양입니다!"

내려진 성문을 통해서는 질서 없이 사람들이 뛰쳐나왔다. 병사들도 있었고, 성의 시종이나 하녀들도 있었고, 그저 성 안 마을의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귀족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아마 대부분은 방금의 붕괴로 목숨을 잃거나 큰 부상을 당했을 것이다.

부상자를 데리고 나오는 이들을 우선적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약속대로, 타셀은 먼저 도착한 이들보다 그 뒤에서 누군가를 업거나 안고 오는 이들을 먼저 맞이해주었다. 그 사이 열린 성문을 통해 빠져나오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하지만 그들은 이내 그들의 이탈을 저지하려는 병사들의 무리에 가로막히거나 죽임을 당하기 시작했다. 타셀은 지크와 미하일 형제에게 눈짓했다. 이제 그들이 공작성에 침투해야 할 시점이었던 것이다.

투항한 백성들과 병사들의 관리는 갤리언 백작의 부대에 맡겨놓고 타셀은 나머지 부대를 이끌고 공작성을 향해 달려갔다. 벌떼처럼 몰려오는 타셀군을 보면서도 맞은편에서는 제대로 된 반격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명령을 내려야 할 사람들은 이미 돌무더기에 깔려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다만 도망치려는 이들을 도로 성에 가두고 내려간 다리를 올리기 위해 성문에 달린 쇠사슬을 도로 감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해자를 가로지르던 다리는 다시 서서히 올라가고 있었다. 타셀은 말에 박차를 가하며 달려들었다. 겨우 열린 성문이 도로 닫힌다면, 그는 또다시 에르논에게 폭파를 명할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죄 없는 이들이 훨씬 더 많이 죽어야 한다. 그는 최대한 헛된 죽음을 막고 싶었다. 허리를 바싹 낮추고 말이 발을 구르는 진동에 몸을 맡기던 타셀은 서서히 들리는 다리 위로 펄쩍 뛰어올랐다.

"전하!"

타셀 혼자 다리 위로 올라간 것을 본 미하일 역시 다급하게 말의 옆구리를 찼다. 타셀이 적의 손에 넘어간다면 큰일이었다. 그는 해자 근처까지 말을 몰며 타셀이 성안으로 완전히 사라지지 않기만을 빌고 또 빌었다. 그러나 그 순간 미하일은 자신의 두 눈을 의심했다. 타셀이 말 위에서 뛰어내리며 공중을 나는 듯하더니, 그의 대검을 휘둘러 다리에 연결되어 있던 쇠사슬을 잘라낸 것이다. 꿈결처럼 느리게 흘러가는 장면에, 미하일은 타셀의 검에서 흘러나오는 검기의 은은한 빛마저 눈에 보이는 것만 같았다.

파앙-!

엄청난 파열음이 나면서 다리가 한 쪽으로 기우뚱하게 기울자 다리 위에 서있던 타셀의 말은 그대로 미끄러져 해자에 빠졌다. 하지만 타셀은 재빨리 다리에 검을 박아 넣고 매달린 덕분에 다리가 도로 내려앉을 때까지 물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다.

콰앙, 하는 소리를 내며 다리의 끄트머리가 다시 맞은 편 뭍에 내려앉자 다시 일어선 타셀은 검을 다시 휘두르며 엄청난 마나를 방출했다. 태풍과도 같은 풍압의 검기에 성문 근처에 붙어있던 마지막 대항군이 한꺼번에 나가떨어졌다.

"진격! 성안의 백성들을 보호하고, 대항하는 자들은 살려두지 마라!"

"와아아아아아-!!"

함성을 지르며 뒤따라오는 타셀의 군사들을 인도하듯, 타셀은 매서운 기세로 성안을 향해 달려갔다. 쓰러져 있던 병사들은 허둥대며 허리춤의 칼을 뽑아 들었지만, 가까이 마주한 검신에게 제 칼을 마주하기도 전에 그 자리에서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그냥 휘둘러도 무시무시한 위력일 대검에 마나를 가득 실어 힘차게 휘두르자, 그 앞을 가로막은 검들은 두부 썰리듯 가볍게 부러지고 그 너머에 있는 검의 주인들 역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닫기도 전에 죽음을 맞이했다.

마침 옆에서 말을 타고 있던 기사의 머리통을 날린 타셀은 놀란 말이 날뛰어 목 없는 시체를 떨어트리자 곧바로 말고삐를 잡고 그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말은 앞발을 높이 치켜들며 놀란 울음을 울었지만 고삐를 휘어잡으며 말의 시선을 돌리는 타셀의 능숙한 태도에 곧 진정하고, 제 등에 탄 새 주인의 명령에 따라 어수선한 병사들의 한 가운데로 돌진했다.

그 사이 다리를 건넌 미하일 이하 타셀의 기사들 역시 무서운 기세로 검을 휘두르며 주변을 정리해 나갔다. 한동안 성문 근처에서부터 끔찍한 비명과 고함, 쇠붙이끼리 맞부딪치는 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졌고, 비릿한 쇠 냄새가 바람에 섞여 주변을 떠돌았다.

"위를 조심하십시오!"

누군가가 소리 지르자 타셀이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달려 나온 궁병들이 제대로 간격도 넓히지 못한 채 화살을 활에 걸고 있었다. 타셀은 저에게 달라붙어 오는 누군가를 여유롭게 쳐낸 뒤 다시 대검에 마나를 흘려 넣으며 제 머리 위에서 거대한 원을 그리듯이 돌리기 시작했다.

"발사!"

궁병을 지휘하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맞춰 핑,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화살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타셀 역시 그 순간에 맞춰 폭발적으로 마력과 마나를 발산하며 입으로는 대기를 진동시키는 마법의 주문을 외웠다. 검에서 뿜어져 나오던 검기는 대기를 진동시키는 마법과 만나 쏟아지던 화살을 무력화시킨 뒤 사방으로 날려버렸다. 내려 쏘아지던 힘을 잃은 화살은 주변으로 힘없이 떨어지며 그 어떤 살상력도 갖추지 못했다. 그리고 바닥의 모래와 먼지를 가득 담은 엄청난 바람이 그들에게 올려붙여지자, 시야를 잃은 그들은 엎어지고 넘어지며 허우적거릴 뿐이었다. 타셀이 궁병들을 무력화시키고 있는 사이, 타셀의 군사들은 저희에게 덤비는 적군을 착실히 베어 넘기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설문이벤트에서 에르논은 역시나 2위 루크를 큰 표차로 누르고 1위를 고수하고 있네요. 그래도 루크의 추격이 만만치 않아요. 매일 확인해보면서 혼자 실실거리고 있습니다.^^;;;;

+ 그녀의밤 님, 후원쿠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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