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홍의 카르마-107화 (107/134)

00107 선전포고(7) =========================

공작성 점령은 허무하리만치 쉽게 끝났다. 물론 마지막까지 제 주군을 향한 충성심을 불태우는 기사들도 있었지만 전군을 통솔하며 지휘하는 총사령관의 부재는 그들의 공격이 단발에 그치게 했고, 병사들 역시 싸우고자 하는 의지가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투항하려는 병사들에게 살해당하는 기사들마저 생겨났다.

신이 깃든 검술과 엄청난 마법을 휘두르는 타셀의 모습에 조무래기 기사들은 새하얗게 질려버리고 말았고, 승리의 의지를 잃은 일반 병사들은 부디 목숨을 부지할 수 있기만을 바라며 더 이상 타셀군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았다. 공작성을 장악한 타셀은 휘하의 기사들에게 혹시라도 살아남았을지 모르는 케일런군 휘하의 귀족들을 척살하고, 케일런의 시체를 확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만에 하나 케일런이 살아남아 도망갔어도 그가 재기하기는 어려울 테지만 말이다.

상층부가 붕괴된 공작성은, 그러나 철옹성이라는 소문답게 그 외의 부분은 멀쩡히 남아있었다. 덕분에 하층부에서 잡일을 하던 시종, 하녀, 노예들은 그나마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전하! 물자를 보관한 창고를 찾아냈습니다!"

투항한 관리인급의 시종과 함께 성을 뒤지던 기사가 급히 달려와 보고했다. 그 말에 타셀은 직접 엔드로스와 병사들을 이끌고 기사의 안내를 받아 창고로 향했다.

"이, 이게 지금… 다섯 창고 중 하나일 뿐이라고?"

문이 열린 창고 앞에서 엔드로스가 말까지 더듬으며 물었다.

늘 물자가 부족했던 타셀군에게는 공작성의 물자 창고가 중요한 전리품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백성들과 제 휘하의 귀족들을 쥐어짜냈다던 케일런의 소문을 익히 들었다 할지라도 이 정도 규모의 창고를 예상치는 못했다.

타셀과 엔드로스는 공작성에 있다는 다섯 개의 창고 중 하나를 막 열어보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규모는 실로 어마어마했다. 거대한 공동(空洞)에 빼곡히 차 있는 마른 곡식, 포도주, 육포, 햄, 말린 과일과 야채 등은 그 수량을 가늠하기가 두려울 정도의 양이었다. 이어서 방문한 두 번째 창고에는 식량과 약품이 비축되어 있었고 세 번째 창고에는 철제 무기가 한 가득이었다. 네 번째 창고에는 군사들을 입힐 의복과 포목, 의류 부자재가, 다섯 번째 창고에는 전쟁과는 별 필요도 없는 온갖 보석과 귀금속이 가득 쌓여 있었다. 특히 다섯 번째 창고는 다른 창고와는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었고 규모가 작았지만, 그 안에 쌓아둔 보물의 가치는 황궁에 쌓인 금은보화의 수준에 비견할 만 했다.

"군량이나 무기, 의복을 비축해놓은 건 그나마 이해가 되는데, 금은보화를 이렇게나 많이 쌓아둔 것은 용서가 안 되는군."

"1황자가 모든 법과 질서 체계를 무시한 채 일부 대귀족들의 힘으로 다른 귀족들을 쥐어짜낸 것입니다. 이 정도로 빼앗겼다면 중소 귀족들 중 평민 수준으로 가세가 기운 가문들이 꽤 되었을 것입니다."

"그랬겠지. 케일런은 내 쪽으로 오는 중소귀족들을 막기 위해 아예 그들을 수탈하고 내쫓아버렸던 모양이야. 어쩐지 예상보다 투항하는 귀족들 수가 적다했어."

타셀은 휘황찬란한 보물의 산 앞에서 오히려 혐오에 찬 표정을 지으며 돌아 나왔다.

"우선 부상자가 많을 테니 약품의 수급에 모자람이 없게 하라. 케일런군에도 분명 간호 부대가 있을 테니 급한 부상자들은 그들에게 치료하도록 명하고. 지하 감옥에 있는 자들 중에는 억울한 자들도 잡혀 있겠지만 진짜 죄수들도 있을 것이다. 일단은 처우를 개선해준 뒤 범죄 기록을 뒤져 죄 없이 잡혀온 자가 있다면 풀어 주거라. 투항한 병사들과 우리 병사들을 섞어 무너진 상층부의 돌더미를 치우게 하고, 시신들을 수습하게 하라."

명령을 받은 기사들이 착착 자신들의 임무를 향해 달려 나갔고, 타셀은 엔드로스와 함께 높은 성곽에 올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미하일과 지크를 위시한 젊은 기사들은 헛된 반항을 하는 잔당들을 해치우고 주변을 서서히 정리하고 있었다. 더 이상 들리지 않는 비명 소리와 싸움 소리에, 오들오들 떨던 공작성 내의 평민들은 제 집에 웅크리고 숨어 있다가 슬금슬금 바깥을 내다보기 시작했다. 멀리서는 타셀군의 후방 지원 군대가 서서히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타셀은 정신을 집중하고 에르논의 의식을 깨웠다.

[덕분에 공작성을 손쉽게 함락했다. 수고했네.]

그의 치하에 잠시 후 에르논에게서 메시지가 전해져왔다. 어딘지 피곤함이 느껴지는 의식은, 그러나 피곤함 이상으로 만족감이 가득했다.

[만약 알리스타스 공작가의 일원 중 살아남은 이가 있다면 반드시 모두 죽여주십시오. 제 바람은 그것뿐입니다.]

타셀은 그가 감내하며 버텼어야 했던 지난 세월의 깊은 한이, 알리스타스 공작가 일원들을 쉽게 죽여 버리는 것으로 풀릴지 의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복수를 위한 전쟁이 아니기도 했고, 에르논이 딱히 그 이상을 원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알았노라고 답했다.

[혹시 그 이외에도 바라는 게 있나? 자네의 공이 크니, 가능한 것이라면 들어주고 싶은데.]

공작성 내에 에르논에게 개인적으로 중요한 것이 있을 수 있으니 그가 원한다면 물건이든 사람이든 그를 위해 남겨주고자 하는 마음에서 물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에르논은 한참 답이 없더니 의식적인 느낌만으로도 불안감과 수줍음 가득한 메시지를 보내왔다.

[…카시야가 무사한지만 알려주십시오.]

타셀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어버렸다. 곁에서 엔드로스가 의아한 얼굴로 쳐다봤지만 타셀은 점점 더 터져 나오는 웃음을 막을 수가 없었다. 이 거대한 성을 완전히 무너뜨릴 수 있을 만큼 무시무시한 마력을 지닌 자가 이토록 일편단심의 순정을 지니고 있다는 게 정말 어울리지 않았다. 물론, 그 대상은 타셀도 인정할 만큼 매력적인 사람이었지만 말이다. 어쩌면 에르논의 마지막 속박은 카시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카시야 경은 무사해. 애초에 성내 진압에도 동원하지 않았으니까.]

타셀의 답신을 받은 에르논은 그제야 큰 한숨을 뱉어내며 긴장에 차있던 몸을 침대 위에 무너트렸다. 이제는 황제의 속내를 파악해야 할 시간이었다. 그는 전쟁이 끝난 평화로운 시절을 누릴 카시야를 떠올리며 주먹을 꽉 쥐었다.

*

타셀군이 알리스타스 공작성을 함락하고 케일런군에 승리했다는 소식은 곧 황궁에도 전해졌다. 예상했던 일이었지만 생각보다 너무 빨랐다. 특히 공작성이 일부 무너졌다고 하는데, 도대체 어떻게 그게 가능했는지 그 누구도 알아내지 못했다. 알테리온은 제 앞에 놓인 와인 잔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적어도 내년 봄이나 되어야 올라올 줄 알았는데, 이 기세라면 금방 아르카나의 코앞에 당도할 것 같습니다."

노기사가 그의 곁에서 고했다. 그 옆에서 트레온 백작은 눈알만 굴리며 눈치를 보고 있었고, 황실 마법사 제롬은 제 나름의 생각에 골몰하고 있었다. 정적을 깨트린 것은 알테리온이었다.

"트렌퀼리엄 왕국에서 보낸 기사들은 빠짐없이 전부 도착했나?"

"예, 폐하. 3일전, 마지막 분대원들이 도착한 것을 끝으로 약속했던 병력 3천명이 전부 아르카나에 도착했습니다."

"제롬. 에르논의 상태는?"

"얼마 전 잠깐 몸이 안 좋아졌던 것 같습니다만, 그 이후로 면밀히 관찰해본 결과, 지금은 상태가 아주 좋은 것 같습니다."

"카르고 후작! 우리의 우방 국가들에는 확실히 잘 일러두었겠지?"

"여부가 있겠습니까. 특히 국경에 맞닿은 티리엘과 바이덴이 적극적인 참전 의사를 표시하고 있습니다. 양국이 모두 데런 지방을 원하고 있다는 게 조금 문제이긴 합니다만, 그거야 전쟁이 끝나고 조율하면 될 문제입니다. 어차피 타셀 황자의 최측근인 아나클리프 백작 영지나 우리가 잘 관리하지 못하는 변방 지역을 몇 군데 떼어주는 것뿐이니, 우리로서도 큰 손해는 아닙니다."

"좋다. 타셀이 아르카나로 진격해 들어온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곧바로 에르논을 이용해 마력을 흡수하겠다. 전군을 이끌고 내가 직접 나서지. 카라볼그의 위력을 모르는 놈들이니 아마 제 눈을 의심하게 될 거다. 우리가 놈들을 칠 때 티리엘과 바이덴에서는 데런을 공격하게 해라."

알테리온의 명령에 모여 있던 그의 신하들이 부복하며 받아들였다.

에르논은 휘장 뒤에서 그들의 모든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 황제와 그의 측근들이 몰래 회의를 나누는 곳을 알아내는 데 시일이 조금 걸렸지만, 그래도 늦지 않게 그들의 계획을 엿들은 것 같아 다행이었다. 에르논이 자유자재로 공간 이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그들은 에르논의 감시에 철저하지 않았다. 그가 방에 틀어박혀 '편히 쉬고 싶으니 자리를 물러나달라.'고 하면 그의 방문 앞만 열심히 지키고 있는 식이었다.

'내 마력을 흡수하겠다고? 도대체 무슨 수로 그러겠다는 건지 우습기가, 원.'

에르논은 삐뚜름하게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쨌든 지금으로서는 외국이 전쟁에 가세한다는 것을 빨리 타셀에게 전해야 했다. 황제가 단단히 미쳤는지, 제국의 영토를 양보하면서까지 외국을 끌어들이고 있었다. 에르논은 조용히 제 방으로 공간 이동해 온 뒤, 타셀에게 메시지를 전했다.

[데런 등지의 변경 지방이 위험합니다. 황제가 티리엘과 바이덴, 트렌퀼리엄을 끌어들였습니다. 트렌퀼리엄의 병력 3천이 이미 아르카나에 있고, 바이덴과 티리엘은 전하께서 아르카나를 칠 때 데런을 공격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메시지를 받은 타셀은 올 것이 왔다 여겼다. 그 역시 가장 두려워하던 상황은 바로 외국의 참전이었던 것이다. 특히 티리엘과 바이덴이라면 서로 국경을 마주대고 붙어 호시탐탐 데런을 노리는 강대국들이었다. 그는 곧바로 엔드로스와 지크를 불렀다.

"티리엘과 바이덴이 변경 지역을 치기 위해 준비 중이라는군. 황제가 끌어들였다고 하네. 트렌퀼리엄은 아예 벌써 군사들을 지원한 모양이야."

그 말에 엔드로스가 이를 악물었다. 그로서는 티리엘과 바이덴이라 하면 이가 갈릴 만큼 지긋지긋한 놈들이었다. 나란히 데런과 붙어 어떻게 하면 집어삼켜볼까 노리고는 했던 것이다. 아다마스 산맥의 험준함이 아니었다면, 데런은 그 강대국들에게 먹혔어도 이미 오래 전에 먹혔을 터이다. 하지만 엔드로스 역시 만만한 자가 아니었다. 그는 양쪽 강대국들의 침입에 시달리면서도 그들의 특징과 약점을 면밀히 분석해왔다.

"양국 모두 오래전부터 데런을 호시탐탐 노려왔습니다. 바이덴의 경우 아다마스 산맥 남쪽 사면의 풍부한 자원을 노리고 있으며, 티리엘은 데런을 거점 삼아 남침을 하려는 흉계를 갖고 있습니다. 티리엘보다는 바이덴이 차라리 안전한 놈들이긴 하지만, 어떤 놈이 되었든 간에 데런을 얻게 된다면, 칼리스토니아에 대한 공격을 하지 않으리란 법이 없습니다. 특히 양쪽 모두 부동항이 없으니까 말입니다."

"실제로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면 참으로 오만하기 짝이 없군. 감히 제국을 가로질러 남쪽까지 닿으려 한다는 말 아닌가. "

"이미 황제로 인해 칼리스토니아 제국의 결속력부터가 많이 해이해진 상태이지 않습니까. 산맥으로 자연적인 국경이 형성되지 않았더라면, 황제의 학정에 백성들부터가 이미 외국으로 도망갔을 겁니다. 그런 사정을 저들도 이미 알고 있는 것이지요. 일단 발만 들이면 남하는 손쉬울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엔드로스와 지크의 말에 타셀은 생각에 잠겼다. 물자가 풍부한 케일런군을 큰 희생 없이 함락시킬 수 있었다는 기쁨을 누릴 새도 없이 또 다른 문제들이 치고 올라온다. 이마저도 에르논이 아니었다면 어쩔 뻔 했는가. 그 '만약'을 생각하니 절로 아찔해졌다.

"양국이 움직일 수 없도록 뭔가 조치를 취해야할 텐데, 그들의 관심을 멀어지게 할 방법이 없을까?"

타셀이 턱을 매만지며 웅얼거리자, 근처에 있던 미하일이 짜증난다는 듯이 씨부렁거렸다.

"에-이, 염병할 놈들. 여자 하나 두고 싸우는 놈팽이들도 아니고, 이거 참."

그 말을 듣는 순간, 타셀의 시선이 미하일에 가 박혔다.

"그래! 여자 하나를 두고 싸우는 사내 녀석들 같은 모양새지…. 미하일, 오랜만에 쓸모 있는 말을 했구나."

"예? 그게 무슨 말씀…. 아니, 그리고 저는 늘 쓸모 있는 말을 합니다!"

하지만 타셀이 새로운 얘기를 시작하는 바람에 아무도 미하일의 항변을 신경 쓰지 않았다.

"내가 예전에 제일 멍청한 놈들이라고 여겼던 형제가 있네. 예레프 자작가의 두 살 터울 형제였지."

"아, 예레프 자작가!"

그 이름을 들은 엔드로스와 지크는 타셀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단박에 이해했다. 하지만 미하일은 아직이었다.

"예레프 자작가의 두 아들이라면 치정 사건으로 유명하지 않습니까. 형제가 동시에 한 영애를 사랑해서, 둘이 치고 박고 난리도 아니었죠. 그 영애 앞에서 서로를 헐뜯고, 상대가 그 영애를 만나지 못하도록 온갖 훼방을 놓았다더군요. 결국 그 아가씨는 전혀 다른 집안의 남자와 결혼을 했다죠? 그런데 그 얘기를 왜…?"

타셀의 미소가 조금 더 진해졌다.

"티리엘과 바이덴을 예레프 자작가의 두 아들처럼 만들어보려고."

============================ 작품 후기 ============================

의미없는 연참입니다. 깜짝선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