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08 선전포고(8) =========================
수도는 곧 전운에 휩싸였다.
어느새 불어난 병력이 이제는 아예 대놓고 군사 훈련을 하기 시작했으며 티리엘과 바이덴의 사절이 하루가 멀다 하고 황궁을 들락거렸다. 거리를 열 맞춰 걷는 낯선 군사들의 모습에, 아르카나와 피엔 지역의 평민들은 전쟁이 코앞에 닥쳤다는 것을 실감하며 불안에 떨었다. 2황자가 1황자에게 승리했으니, 한겨울만 지나면 수도로 진격해올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대부분 맞는 얘기들이지만, 한 가지 틀린 게 있어."
루크는 고기를 꿴 꼬챙이에서 양념을 바르고 구운 고기조각을 하나 빼어먹으며 말했다. 맞은편에서 마찬가지로 고기를 빼먹던 카시야가 눈만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보통 한겨울에는 전쟁을 하지 않는 게 불문율이지만, 이번에는 어느 쪽도 겨울을 넘기려 하지 않을 거야."
카시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타셀이 케일런을 무찌르자 타셀과 황제 사이의 역학관계가 변했다. 케일런이 쌓아뒀던 물자를 타셀이 고스란히 얻게 된 지금, 시간을 끌수록 불리해지는 것은 황제다.
"12월 중순이 되면 아다마스 산맥은 도저히 군사들이 넘어올 수 없을 정도로 눈이 많이 쌓인다더군요. 바이덴과 티리엘 연합군이 데런을 공격하게 해야 하는 황제로서는 11월이 가기 전에 공격을 감행할 겁니다. 내년까지 미루려면 그 사이에 공격할 타셀 전하가 두려울 테니까요. 그렇게 서둘러 전투를 시작하면 전쟁이 한겨울 내내 지속될 수도 있겠지요."
"아마 그렇겠지. 아다마스 산맥은 벌써 추워졌을 테지만, 아다마스 협곡을 통과한다면 11월까지는 눈을 밟지 않고 데런을 공격할 수 있을 테니 말이야. 물론 그 협곡을 어떻게 통과하려 하느냐가 문제겠지만."
"반대로 황제가 데런의 공격을 내년으로 미루게 된다면 이 역시 타셀 전하로서는 절호의 기회가 될 테니 진격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거죠."
"게다가 황제는 에르논을 쥐고 있을 때 일을 치려 할 거야. 그 인간의 평소 행실을 봤을 때, 지금쯤 얼른 제 힘을 과시하고 싶어서 엉덩이가 들썩거릴걸?"
카시야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포도주를 탄 물을 마셨다.
황제는 알리스타스 공작의 속박 마법을 공유했단다. 이미 에르논이 속박 마법에서 풀려났고 알리스타스 공작이 죽었다고는 하지만, 카시야는 그들이 에르논을 대하는 태도에 역겨움을 느꼈다. 그들은 에르논을 그저 물건 취급했다. 마치 전생에서 국가와 주인들이 그녀를 그저 하나의 무기 취급 했듯이. 만약 헬라스의 저택에서 속박 마법의 술식을 찾지 못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하면 온 속이 다 뒤집어지는 것 같았다. 그 말로가 어땠을지, 자신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왠지 복잡해 보이는 카시야의 얼굴을 보며 루크 역시도 조용해졌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꿈과 전생에 대한 문제로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아르헨의 말대로 그의 곁에서 지내자 매일 세이지와 카시야에 대한 꿈을 꾸게 되었다. 시간의 흐름 따위는 무시한 순서로 마구 꿔대니 도무지 그들 관계에 대한 흐름을 감 잡기 어려웠지만, 어제는 가까스로 대충 이랬겠구나 싶은 가닥이 잡혔다. 그것은, 사실 그다지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만약 그가 꾸는 꿈들이 진짜 전생이고 실제 있었던 일들이며 카시야가 자신의 전생을 이미 다 기억하고 있다면, 그는 더더욱 카시야를 이해할 수 없게 되어버릴 것 같았다.
'어떻게 그런 변태 쓰레기 같은 놈을 다시 만났는데도 그렇게까지 침착할 수 있었느냔 말이지….'
자신이 꿨던 꿈을 되짚어보며 루크는 한숨을 쉬었다.
세이지가 자신이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는 여전히 힘들었다. 루크는 자신이 최소한 여성에 대한 매너는 나름 훌륭하게 지키고 있다고 자부해왔다. 노예였던 어머니를 학대하는 것과 다름없이 대하던 아비에게 증오심을 불태우며 자란 그는, 그때의 반발심 때문에 오히려 더 여성에게 매너를 지켰다. 그랬으니 미천한 태생이나 낮은 작위에도 불구하고 황궁에서 그를 사모하는 여인들이 그토록 많았던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외모가 반반하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세이지 카힐이라는 그 작자는 카시야를 상대로….
'아니, 그만 생각하자. 더 이상 생각했다가는 저 녀석도 눈치 채겠어.'
세이지가 카시야에게 저질렀던 일들을 떠올리면 그는 심장이 거칠게 뛰고 숨이 가빠졌다. 그가 파악하기로 세이지는 카시야를 동경하다가 짝사랑에 빠졌고 그녀만을 죽도록 원했는데, 어떻게 그런 감정을 품은 상대에게 그토록 잔인할 수 있었는지 루크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타셀 전하께서 수도로 진격하시기 전에 저에게 미리 알려주기로 하셨습니다. 우리도 그때가 되면 곧장 황궁으로 향해야 할 겁니다."
갑자기 들린 카시야의 목소리에 루크는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어, 그래. 그래야겠지."
어딘지 모르게 어색한 루크의 목소리에 카시야는 의심스러운 시선을 보냈지만 굳이 따져 묻지는 않았다.
"대신관과 함께 지내시는 건 어떻습니까? 불편하시면 저희가 묵는 여관에 모셔 와도 상관은 없습니다. 제가 다른 녀석들 방에 끼어 자도 되고."
"넌, 좀…! 하아, 아니다. 대신관이랑 같이 있다고 내가 불편한 건 없어. 워낙 조용한 양반이니까. 얼굴 때문에 밖을 나돌아 다닐 수 없으니 그 사람이야말로 답답하겠지."
"그러게요. 너무 아름다운 것도 치명적인 약점일 수 있다는 걸 그분을 보면서 알았습니다."
그 말에 루크는 묘한 궁금증이 발동했다.
"네가 보기에도 그 분이 아름다워? 마치 돌보듯 무감정한 것 같더니."
"그런가요? 이래 봬도 남들만큼의 심미안은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저도 아름다운 사람을 보면 아름답다고 생각은 합니다."
"아름답다… 에서 그 이상의 생각은 안 들고?"
"성적인 흥분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글쎄요, 그런 느낌을 자주 느끼는 건 아닙니다."
카시야의 대답에 루크는 또 말문이 막혔다. 보통은 에둘러 표현할 말을 여과 없이 내뱉으니, 귀족적인 화법을 뼈를 깎는 노력으로 몸에 익힌 그의 머리에는 그런 말에 답할 예문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살면서 카시야 같은 여자를, 아니, 남녀를 통틀어 카시야 같은 인간을 만나본 적이 없었다. 물론 카시야가 성적인 흥분을 아예 못 느끼는 게 아니라는 것도 놀라웠지만.
"…내가 말한 건 연애 감정 정도를 말한 거였는데 말야. 뭐, 설렌다거나, 반했다거나…."
"아, 그런 거라면 전혀 느껴본 적 없는 것 같습니다."
루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문득 멈췄다.
"그럼, 네가 에르논에게 느끼는 감정은 도대체 뭔데?"
"갑자기 에르논 얘기는 왜 나오는 겁니까?"
"네가 그 녀석을 싸고도는 태도는 조금 정상을 벗어났거든. 남들은 대마법사 에르논을 애초에 그리 약하게 보지도 않아. 그런데 넌 늘 그 녀석 걱정이잖아.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고."
루크의 빈정거림에 가까운 지적에 카시야는 피식 웃었지만 자신의 태도가 진짜로 이상한가에 대해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확실히 자신보다 훨씬 강한 누군가를 이토록 걱정해본 적은 없다. 단적으로 말해 타셀이나 미하일을 걱정해본 적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정상적인 컨디션일 때의 에르논은 타셀과 미하일을 뛰어넘는 강자다.
'그러고 보면 나도 외모에 편견을 갖는 건가?'
카시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확실히 타셀이나 미하일, 눈앞의 루크에 비하자면 에르논은 근육도 별로 없다 싶을 만큼 가늘었고 얼굴 또한 곱상했다. 타셀이나 루크 역시 미남자들이었지만 에르논은 남자답게 생겼다기보다는 좀 더 아르헨 계열의 미인이랄까, 여하튼 외적으로만 보자면 한 대만 툭 쳐도 쓰러질 것 같은 남자였다.
"좋은 지적이었습니다. 저 역시 사람의 외양만 보고 편견을 갖고 있었군요. 에르논이 페레이아 경 같은 체격이었다면 이렇게까지 걱정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루크는 카시야의 대답에 순순히 넘어가주지 않았다.
"글쎄. 과연 그랬을까? 에르논에 대해 네가 아는 모든 일을 다 떠올려봐. 그가 힘든 과거를 지녔다고 했던가? 나야 그게 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런 것도 다 떠올려보라고. 둘이 나눴던 대화나 눈빛이나 모든 걸 다. 그런 다음에도 똑같은 대답을 할 수 있어?"
카시야는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자연스레 에르논과의 과거를 떠올렸다. 자신과 비슷한 아픔을 겪었던 에르논이었지만 캠프 X를 나온 뒤 어느 정도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었던 자신에 비해 그는 공작성의 허름한 방에 갇혀 지속적인 학대를 당해야 했다. 큰 힘을 지녔지만 그것을 제대로 펼칠 수도 없었고, 마음 줄 이도 없었다. 그랬던 그가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자신에게 선뜻 제 마음을 내어줘 버리고는, 칭찬을 바라는 아이처럼 자신에게 예쁜 이름을 지어주고, 마나 운용법을 알려주고, 배신감을 느꼈으면서도 다시 자신에게 넘어와 주었다. 심장 근처에 지독한 속박 마법의 문양을 박아 넣은 상태이면서도, 자신을 믿고 전향해주었다. 그리고 지금은 믿음에 대해 보답한답시고 저 혼자 황궁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그런 그가 루크의 체격을 지녔다고 해서 걱정을 하지 않았을까.
"…확실히, 그러지는 않았을 것 같군요."
"그것 봐. 그러니까, 도대체 넌 에르논을 어쩌고 싶은 거냐고."
"지금으로서는 그저 무사히 구출해내고 싶을 뿐입니다. 다른 건 잘 모르겠습니다."
어딘지 당황한 감은 있지만 여전히 저 스스로의 감정에 무딘 카시야를 보며 루크는 혀를 찼다. 하지만 사실 자신조차도 카시야를 어쩌고 싶은 것인지 모르니까 피차일반일 것이다.
"너한테 연애 감정이 들게 하는 게 제국 최고의 도전 과제가 아닐까 싶다."
농담을 던지는 루크의 말에 카시야가 큭큭 댔다. 미약하게나마 남아있던 경계심을 풀고 자연스레 웃는 모습이었다. 루크는 문득 카시야가 이런 식으로 웃는 것을 처음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늘 서늘하던 눈매가 살짝 휘어지고 미소 짓는 입술 사이로 가지런한 치아가 드러났다.
'…예쁘네.'
하지만 그 생각과 동시에 꿈속에서의 카시야가 떠올랐다. 세이지가 내리친 손에 맞아 돌아가던, 얼룩덜룩 멍이 들고 피가 묻은 서늘한 얼굴이…. 순간 온몸의 피가 식는 것 같았다. 그의 입매에 걸렸던 미소가 경직되었다.
"…페레이아 경?"
"어? 아… 아냐. 얼른 먹고 일어나지. 너무 오래 노닥거린 것 같아."
그 이후 평소처럼 얘기를 나누다 헤어질 때까지 카시야는 루크의 행동에 딱히 이상한 점을 찾지 못했다. 뭔가 찜찜한 것 같긴 했지만 카시야는 이내 잡생각을 떨쳐버렸다.
여관으로 돌아오니 분대원들은 예상대로 말 잘 듣는 아이들처럼 얌전히 식사를 하고 있었다. 물론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은 그들과 섞여 식사를 하고 있던 아르헨이었다.
"아, 카시야 경! 식사 전이시면 함께 드시죠."
"아닙니다. 먹고 오는 길입니다. 혹시 이 녀석들이 난리 피우지는 않던가요?"
"아니오! 전혀요. 오히려 다들 너무도 신실하시고 선하셔서 감동했습니다."
아르헨의 말에 카시야는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짓지 않기 위해 꽤나 노력해야 했다.
"신실하고 선한 사람 눈에는 그런 것만 보이나 봅니다. 저는 천성이 험악해서 그런지 이 자식들이 날뛰는 꼴 밖에 보이지 않던데 말이에요."
그 말을 하며 카시야의 냉랭한 눈빛이 분대원들을 쓱 둘러보았다. 다들 시선을 피하기 바빴다.
아르헨은 부드럽게 웃으면서 다시 분대원들을 감쌌다.
"설마요. 모두 카시야 경과 친해지고 싶어서 그러시는 거죠."
하지만 그 말에 분대원들은 모두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분대원들이 식사를 거의 다 마칠 즈음, 카시야는 아르헨을 향해 앉은 채로 현재 황제와 타셀의 대치 상황과 외국의 참전 가능성에 대한 얘기를 전했다. 타셀이 수도를 향해 진격하겠다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모두 황궁으로 잠입한 뒤 전투를 위해 드러나있을 카라볼그를 탈취하고 에르논과 함께 황궁을 빠져나와야 한다는, 말로만 듣기에도 불가능해 보이는 작전 역시 무거운 어투로 얘기했다. 최악의 경우에는 에르논과 카라볼그만 바깥으로 공간 이동하게 하고 나머지는 그에게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근위대와 싸워야할지도 모른다. 아니, 에르논만 사라지게 만드는 것조차 쉽지 않을지도 모른다.
방금까지 웃고 떠들던 분대원들도 조용히 그 얘기를 들으며 비장한 각오를 다졌다. 황궁으로 잠입한다면, 그들은 죽음을 각오해야 했다. 분대가 전멸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누가 됐든 신검을 에르논에게 전하기만 하면, 에르논이 그 검을 가지고 멀리 사라져버리기만 하면 황제로서는 제일 믿고 있던 것을 놓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그 일을 해내야만 했다.
"반드시 성공할 겁니다. 헤바께서는 우리가 생각지 못하는 방법으로 모든 일을 조율하시니까요. 우리가 보기에는 불가능해 보이는 일일지라도, 분명 그 안에 헤바께서 마련하신 기적이 존재할 것입니다. 용감한 여러분들을 위한 축복의 기도를 올리겠습니다."
아르헨의 말에 분대원들은 모두 두 손을 마주잡고 고개를 조아렸다. 역시나 두 손을 마주잡고 눈을 감은 아르헨이 청아하고 정결한 목소리로 축복의 기도문을 외웠다. 기도문의 암송을 끝낸 그가 손바닥을 위로 하자 그의 손바닥에서 빛줄기가 솟아나더니, 신전에서 알리나의 축복을 받았을 때처럼 모두의 머리 위에 빛 부스러기 같은 것을 뿌려주었다. 거기에 닿자 일렁이던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고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분대원들 중에는 생전 처음 만나는 신성력과 축복에 감동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반드시… 잘 될 겁니다. 잘 돼야 하고요."
카시야가 낮게 중얼거렸다.
============================ 작품 후기 ============================
+ 그녀의밤 님, sodamm님. 후원쿠폰 감사합니다~!
- 내일은 휴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