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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홍의 카르마-109화 (109/134)

00109 진격(1) =========================

타셀군은 알리스타스 공작성 내를 빠르게 정리해나갔다.

케일런과 그의 비의 시신은 성 함락 이틀째에 수습되었고, 알반 공작을 비롯한 수뇌부 귀족들도 거의 죽거나 심각한 부상을 입은 채 발견되었다. 공작성의 상층부에서 고위 귀족과 황족의 시중을 들던 시종과 하녀들은 죽음을 피할 수 없었지만, 그 외의 사람들의 피해는 다행히 크지 않았다.

성안으로 밀고 들어오던 타셀군을 막기 위해 애쓰던 케일런군의 병사들 중에서도 사상자가 많이 나왔지만, 전투 자체가 크지는 않았기에 벌판에서 맞부딪친 것 보다는 피해가 적었다. 살아남은 자들은 자신들을 상대로 화풀이식 살인을 일삼거나 전쟁 포로 취급을 하지 않는 타셀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만약 반대로 케일런군이 타셀군에 승리했다면, 그들은 타셀군의 포로를 상대로 온갖 잔인한 짓을 저질렀을 것임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타셀은 굶주린 백성들에게 식량을 배급해주고, 무너진 농사 기반을 바로잡기 위해 포로와 아군 병사를 섞어 내보냈다. 포로로 잡힌 병사들에게 시킬 노역형을 대민 지원으로 대체한 것이다. 곧 겨울이라 새로 씨앗을 심거나 수확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내년의 풍작을 위해 황폐해진 밭을 새로 갈고 목책 등을 바로 세워 주며, 일손이 부족해 아직 수확을 마치지 못한 곳이 있으면 수확을 거들어주기도 하는 등, 주변 지역을 재건하는 데에도 힘을 썼다.

그렇게 아즈렐의 상황은 놀랍도록 빠르게 안정되어 가고 있었으나, 타셀로서는 전혀 여유로운 기분이 들지 않았다. 황제가 변경 지역, 특히 데런을 노린다는 것을 알았으니 한시바삐 그 대비를 해야 했다. 그러면서도 재빨리 수도로 진격해 이 기세 그대로 황제에 대한 승리를 거둬야 한다는 과제도 남아있었다.

"루벤스 경에게 군사 1천을 맡기겠소. 현재 국경을 수비하고 있는 병사들과 합치면 어느 정도 침략을 막을 수는 있을 거요. 그럴 일까지는 벌어지지 않길 바라지만…."

"목숨으로 데런을 지키겠습니다!"

엔드로스의 아들인 루벤스 아나클리프가 눈빛을 반짝였다. 하지만 엔드로스로서는 아직도 어린 애나 다름없어 보이는 루벤스가 미더울 리 없었다. 제 어미를 닮아 곱고 미려한 외모 때문에 더 그래 보이는 감이 없지는 않았지만,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모든 부모는 원래 제 새끼를 약하게 여기는 법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타셀 앞에서 그런 염려를 드러낼 수는 없는 법이라, 엔드로스는 짐짓 근엄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사실 루벤스 아나클리프 그 자체를 살펴보자면 엔드로스의 걱정과는 달리 그다지 약해빠진 기사는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나름 인정받는 기사 중 하나였으니, 엔드로스의 염려는 지나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여려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그 역시도 데런의 회색 늑대, 엔드로스 루벤 아나클리프의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인 것이다. 어릴 때부터 검에 소질이 있었고, 자신의 아버지와 설원을 누비는 기사들을 동경하며 자랐다. 특히 곱상한 외모가 콤플렉스인 덕에 남들보다 더 독하게 수련을 쌓아온 것도 있었다.

그동안 타셀을 따르며 자잘한 전공을 쌓았지만, 데런의 수호라는 막중한 책임이 맡겨진 지금, 그는 진심으로 목숨을 바쳐 지켜내겠다고 다짐했다. 한편으로는 이번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해야만 아버지로부터 진짜 기사로 인정받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있었다.

"어차피 산을 타고 넘어오진 못한다. 아다마스 산맥에는 벌써 눈이 오고 있을 테니까 말이야. 협곡의 입구 양편으로 석궁병과 궁병을 배치하고 돌을 굴려서 떨어트려라. 상대적으로 우리 쪽 병사의 숫자가 적을 테니, 모든 일은 속전속결로 이루어져야 한다. 초반에 끊어내지 못한다면…."

엔드로스는 불안해지는 마음을 억누르며 조근 조근 적군을 어떻게 섬멸시킬지 설명했다. 물론 루벤스 역시 병법과 전술 교육을 받아왔으니 모르는 내용은 아니었으나, 제 아비의 마음이 편안해질 수 있도록 묵묵히 귀를 기울였다. 그때 타셀이 다시 나섰다.

"너무 걱정 말게, 아나클리프 경. 인간의 의심과 질투심은 생각보다 힘이 세다는 것을, 자네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타셀은 티리엘과 바이덴이 데런을 치려한다는 에르논의 메시지를 받은 다음날, 국경 지역에 있는 섀도 워커들에게 한 가지 지령을 내렸다. 바이덴 부근에서는 '데런이 함락되면 티리엘에 넘어간다더라.'는 소문을, 티리엘 부근에서는 그 반대의 소문을 내게 한 것이다. 바이덴과 티리엘 연합군이 협공으로 데런을 쳐서 함락을 시킨다고 해도 상대편에 좋은 일을 해주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소문인 것이다.

타셀은 티리엘과 바이덴 양쪽 모두, 데런을 얻고자 하는 욕심보다 상대가 데런을 얻지 못하게 하고자 하는 욕심이 더 커지리라고 확신했다. 인간은 원래 남 잘 되는 꼴은 절대 못 보는 법이다. 예레프 자작가의 두 아들이 영애의 마음을 적극적으로 얻는 것보다 제 형제가 그녀와 잘 되는 상황을 방해하는 데 더 혈안이 되었던 것을 봐도 잘 알 수 있다. 그러니 그것이 하물며 국경을 맞대고 늘 경계하던 옆 나라라는데야….

"양쪽 다 군사를 보내더라도 소극적일 게 분명하네. 데런을 얻게 되면야 좋을 테지만 이제까지 없어도 잘 살아왔으니, 오히려 상대가 얻게 되는 상황을 더 경계할 게 뻔해. 특히 바이덴은 여차할 경우 티리엘을 훼방까지 놓을 수 있어. 티리엘이 국력도 조금 더 강한데다가 데런과 마주하는 국경선도 더 기니까, 데런이 티리엘로 넘어갈 경우 티리엘이 바이덴까지 진출하지 말란 법도 없지."

그리고 타셀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힘주어 이었다.

"그리고 만에 하나 티리엘과 바이덴의 연합군이 결국 데런을 치게 되더라도, 나는 회색늑대의 핏줄을 믿고 있네. 그동안 루벤스 경이 이뤄낸 공적들은 결코 우연도, 행운도 아니었어. 오로지 그의 실력이었네. 루벤스는 강하고 영리한 기사야. 반드시 데런을 지켜낼걸세."

그가 엔드로스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힘주어 잡았다. 엔드로스는 치밀어 오르는 걱정을 내리 누르며 자신의 아들에게 데런의 군권을 넘겨주었다.

루벤스가 군사 1천을 이끌고 데런으로 향한 뒤 타셀 역시 수도로 진격하기 위한 작전을 세우기에 여념이 없었다. 알리스타스 공작성은 어느새 타셀군의 거점이 된 상태였다. 그 사이 피폐해져 있던 주변 지역도 타셀군이 나눠주는 구호물자로 차츰 생기가 돌기 시작했고, 알리시아는 라몬트 자작과 함께 구호 부대를 이끌고 상처 가득한 백성들의 삶을 재건하기 위해 애썼다.

물론 모든 이들이 타셀의 뜻에 고분고분 따라주는 것은 아니었다. 한번은 헐벗은 채 먹을 것을 구걸하는 여인을 희롱한 기사들이 현장에서 알리시아에게 발각된 적이 있었다. 그들은 점령지의 여인들을 마음대로 취하지 못하게 한 타셀의 규율에 내심 반발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대행자라 여겨지는 알리시아에게도 농지거리하며 무례하게 굴었다. 그때 알리시아는 평소처럼 우아하게 지나치지 않고 곧장 그들의 따귀를 매섭게 올려붙이며 호통을 쳤다. 기사들은 따귀를 맞은 아픔보다는 음전해야할 귀족 영애가 자신들을 때리고 호통 쳤다는 사실에 놀라 당황했다. 그녀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자신을 호위하며 순찰을 돌던 기사들에게 해당 기사들을 옥에 가두라고 명했다. 타셀이 그 기사들에게 크게 노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사건 이후, 그 누구도 그녀를 온실 속에 핀 장미처럼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타셀군의 모든 이들에게 '미래의 황후'라는 이미지를 단단히 심어놓고 있었다. 처음에는 노귀족들의 텃세에 발을 동동 구르며 어쩔 줄 몰라 했던 어린 아가씨가, 지금은 비협조적인 노귀족들에게 눈을 험악하게 부라리며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물론 그 모든 것이 그녀의 뒤에 타셀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지만, 그렇다고 다른 영애들이 알리시아처럼 행동할 수 있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었다.

"경의 딸도 점점 기사가 되어가는 것 같네. 엊그제는 그녀가 '아직 귀족 영애인 주제에' 나를 등에 업고 기세등등하게 군다며 익명의 상소가 올라왔더군. 상소의 내용을 본 영애가 어디론가 달려가더니, 그날 오후에 오전의 상소를 취소하겠다는 상소가 또 올라왔네. 얘기를 듣기론 어떤 기사 놈들한테 가서 억울하면 제 앞에서 떳떳하게 따질 것이지, 기사씩이나 된 자들이 비겁하게 음해를 했다고 혼쭐을 냈다던데? 맨날 '여자 주제에'를 입에 달고 다니는 이들 치고는 심히 저열하니, 달고 있는 고추를 떼어버리라고도 했다던가?"

빙글빙글 웃으며 말하는 타셀의 맞은편에서 엔드로스는 경악한 얼굴을 수습하지 못한 채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도저히 귀족 영애의 입에서 나올 소리도 아니었고, 귀족 영애가 할 만한 몸가짐도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자신이 아무리 알리시아를 자유롭게 키웠다고는 하지만, 그런 왈패로 키운 기억은 없었다. 전쟁터에 나와 지내면서 병사들이 쓰는 상스런 말투가 입에 붙은 모양이었다.

"제… 제가… 따끔하게 혼내겠습니다."

하지만 식은땀을 흘리는 엔드로스를, 타셀은 의아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그걸 왜 혼낸단 말인가? 나는 지금 칭찬을 하는 건데. 내 비가 될 여인이라면, 그 정도는 해야지."

씨익 웃는 타셀의 얼굴에는 왠지 모를 장난기가 다분했다.

타셀은 최근 알리시아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민망한 마무리가 압권이었던 지난 번의 키스 사건은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너무 경솔했던 것 같지만, 지치고 불안한 마음을 기댈 곳 없었던 그로서는 같은 상황이 발생한다 해도 아마 또 다시 그녀에게 키스했을 것 같았다.

게다가 충동적으로 벌였던 그 키스 이후 그녀와 감정적으로 좀 더 가까워졌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알리시아는 늘 무게감을 지녀야 하는 타셀의 마음을 달래주기라도 하듯 그가 하고 싶던 말들을 시원하게 내뱉어주었고, 그가 미처 챙기지 못하던 일들을 꼼꼼히 챙겨주었다. 그러자 점잖고 말을 아끼는 타셀을 내심 우습게 보던 귀족 무리들은 알리시아에게 혼쭐이 났고, 그런 알리시아를 타셀에게 성토하면 타셀은 오히려 그들을 매섭게 나무랐다. 타셀로서는 언제 손봐야할지 벼르던 귀족들을 알리시아 덕분에 단단히 잡게 된 것이다.

알리시아에게 '권력'을 주자, 그녀는 그 누구보다 그것을 제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긴 전쟁에 지쳐있던 백성들은 어느새 알리시아를 칭송했고, 알리시아의 아름다운 외모의 후광효과로 인해 타셀군은 '천사의 편에 선 군대‘라는 이미지까지 얻게 되었다.

"그래. 권력은 그렇게 사용해야 하는 거지. 권력의 올바른 사용을 위해서라도, 내가 반드시 그녀를 황후의 자리에 올려주겠네."

호언장담하듯 자신만만한 어투와는 달리, 타셀은 미안함을 담은 눈빛으로 엔드로스를 바라보았다. 알리시아가 타셀의 비를 자청했다는 사실에 엔드로스는 거의 기절할 뻔했다고 하니, 지금 그가 하는 말 역시 달가울 리 없었다. 하지만 어차피 엔드로스가 타셀의 최측근이 된 순간부터 아나클리프 일가의 앞에는 영광 아니면 죽음이라는 두 가지 길 밖에 놓이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그가 자초한 이 상황에 대해 겸허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저 왈패를 데리고 사시려면 골치 깨나 아프실 겁니다. 어차피 이젠 무를 수도 없는 일이니, 마음 단단히 드셔야 할 분은 전하이십니다. 허허허."

그들은 그렇게, 긴장되고 불안한 마음을 너털웃음으로 달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수도로 진격할 날은 점차 다가왔다.

============================ 작품 후기 ============================

날이 추워지네요. 감기 조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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