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11 진격(3) =========================
아르카나의 입구는 수도 주변부에서 전화(戰火)를 피해 온 사람들이 입성 허가를 받기 위해 길게 줄 서 있었다.
백성들 중에서도 황제와 신검을 기억하는 자들이 꽤 있었는데, 그들은 황성에만 있으면 전쟁으로 목숨을 잃을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하고 아르카나로 몰려든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들의 입성을 막던 황제가 어느 날인가부터 갑자기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여차하면 백성들을 인질로 쓰려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카시야는 전생에서 겪었던 몇몇 독재자들을 떠올리며 말했다.
황제는 타셀이 힘없는 백성들을 아낀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반란군을 상대로 백성을 인질처럼 쓰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고 생각되었다. 뭔가가 상당히 뒤바뀐 모양새였지만 말이다.
"그렇게 되기 전에 우리가 막아야지."
루크의 말에 다들 표정이 진지해졌다.
건장한 장정들로만 스무 명이 넘는 인원이 한꺼번에 움직이면 의심스러울 게 뻔했기 때문에, 그들은 몇 명씩 짝을 지어 아르카나로 피난 온 평민인 척 하기로 했다. 지나치게 아름다운 아르헨과 황궁의 기사들에게 얼굴이 다 알려진 루크가 걱정이었는데, 아르헨이 '지금 이 상황에서의 신성력의 사용은 신께서도 허락하실 것입니다.'라며 자신과 루크의 외모를 변화시켰다. 그것을 보고 신성력은 마법과 비슷하다던 말이 떠오른 카시야는 아르헨의 예상 전력을 상향 조정할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덕분에 아르헨의 신성력이 미치는 범위에 있어야 하는 루크는 아르헨과 한 팀이 되었고 카시야 역시 그들과 함께 움직이기로 했다.
"아르카나로 입성하면 황궁의 동쪽, 칼립소 거리 끄트머리에 있는 신전으로 오십시오. 저희가 먼저 가서 신전의 신관에게 도움을 요청해놓겠습니다. 우리 인원이 머무를 방 정도는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아르헨의 말을 끝으로 그들은 시간차를 두고 아르카나의 입구를 향해 걸었다.
제국은 워낙 급격하게 몸집을 불린데다 황제가 통치를 등한시했기 때문에 제국민에 대한 관리가 거의 되어있지 않았다. 명부가 작성되어 있는 건 귀족들 뿐이었고, 각 지방의 주민들을 관리하는 건 영주의 일로 떠넘겨버린 것이다. 그랬으니 아르카나에 제국민들을 조회할 수 있는 서류가 있거나 제국민들에게 발급된 정식 신분증이 있을 리 만무했다.
아르카나 입구의 보초병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저 형식적인 확인만 하고 들여보내고 있었다. 이토록 허술한 시스템에서도 수도에 외부인들을 들이는 것은 불순분자가 섞여 들어온다 해도 상관없다 생각할 만큼 황제에게 자신 있는 뭔가가 있다는 소리였다.
"군대지. 수도에 진입한 것뿐인데 벌써부터 엄청난 인원이 모여 있는 기운이 느껴져. 황제는 허세가 아니라 진짜 엄청난 수의 군대를 준비해둔 거다."
루크의 말대로 아닌 게 아니라, 거리를 돌아다니는 병사들의 숫자가 상당했다. 그들은 손쉽게 수도로 흘러들어온 이들을 불시 검문하며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황궁은 출입자에 대한 신분 확인이 철저한 듯했다.
"황궁 안으로 잠입하는 게 쉬울 것 같지는 않군요."
아르헨이 걱정스럽게 말했지만 카시야는 멀리 보이는 황궁을 곁눈질하며 타셀이 일러줬던 비밀통로의 위치를 떠올렸다.
신전에 도착한 아르헨은 를뤼엔 신전에서부터 미리 만들어온 가짜 사제 증서를 제시했다. 마리오라는 이름의 사제 증서 아래에는 그의 신분을 보증한다는 아르헨의 인장이 찍혀있었다. 대신관이 왔다는 것이 알려지면 황제의 귀에 들어갈 것이고, 지금 이 시점에서 대신관이 아르카나에 예고도 없이 나타났다면 황제가 의심할 것이 분명하니 아르헨의 신분은 철저히 숨겨야 했다.
아르카나 신전의 신관은 꽤나 거만한 인물이었다. 아무래도 수도의 신전이다 보니 를뤼엔만큼은 아니었지만 규모가 컸고, 신자들로부터 받는 기부금이나 헌금도 상당했다. 를뤼엔의 신관회에 들지도 못하는 이가 아르카나에서 대신관 노릇을 하다 보니 제가 신이라도 된 것처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신관치고는 살집이 두둑하고 기름기가 흐르는 얼굴의 그는 아르헨이 내민 사제 증서를 앞뒤로 대충 훑어보더니 관심없다는 듯 돌려주며 말했다.
"마리오?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군요. 어쨌든 마리오 사제. 신전은 여관이 아닙니다. 도대체 어느 촌구석에서 굴러먹던 사제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런 식으로 걸인들을 모아오면 곤란합니다. 사람 스물세 명이 머물만한 방을 내달라니, 뻔뻔해도 유분수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내려 보는 눈빛에는 혐오감이 가득했다.
"하지만 히드레이 교 율법에 따르면 모든 사제 및 신관과 그들의 일행은 신전에서 머무를 수 있지 않습니까?"
아르헨은 당황한 와중에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시 요청했다. 하지만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안 되었소만, 이미 신전 내에 그대들이 머물 수 있을만한 방이 남질 않았습니다. 아르카나 내의 여관을 이용하시길 권해드리는 바입니다."
아르헨과 카시야의 얼굴에 낭패가 어렸다. 설마하니 히드레이 교 신전에서 히드레이 교 사제가 문전박대 당할 줄은 몰랐다. 그때 루크가 품속에서 작은 주머니 하나를 꺼내 끈을 풀더니 주머니 끝을 잡고 제 손바닥 위에 털었다. 뭔가가 그의 손바닥 위에 툭 떨어지는가 싶더니, 커다란 포도알 크기의 사파이어가 이내 눈부신 푸른빛을 발했다. 방금까지 그들에게 무관심하던 신관의 시선 역시 거기에 날아가 박혔다. 보석에 대해 아는 게 없는 카시야가 보기에도 귀해 보이는 것이었다. 루크는 어리숙한척하며 물었다.
"신전에 묵어 돈을 아낄 수 있게 되면 헤바 신께 헌납하려 했습니다만, 방이 없다니 아무래도 이걸 팔아서 여관을 잡아야겠군요. 제가 수도 물가를 잘 몰라서 그러는데, 이 정도 보석이면 아르카나 내의 여관에서 며칠을 묵을 수 있겠습니까?"
순간 신관의 표정이 대번에 변했다. 눈이 휘둥그레지더니만 곧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만면에 띄우는 게 아닌가.
"아, 하하. 수도 물가를 잘 모르신다면 바가지를 쓰거나 사기를 당할 수도 있으니, 이거 참…. 어쩔 수 없군요. 사정이 딱하시니 우리 신전에 머무르실 수 있도록 제가 힘써보지요."
"하지만 저기, 아까는 방이 없으시다고…."
"아아, 그건 말이죠, 제 말을 조금 오해하신 겁니다. 스물세 명이 한꺼번에 들어갈 수 있는 방은 없고, 열 명 정도씩 들어갈 수 있는 방 두 개는 마련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참으로 신실하신 신도분들인 것 같은데 바깥에서 험한 일을 당하실까봐 제가 다 걱정됩니다. 허허허."
"아, 그러시군요! 저희가 배운 게 없어 신관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질 못했던가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신관님."
루크가 능청을 떨며 신관을 상대하는 동안, 아르헨은 히드레이 교의 부패를 카시야와 루크 앞에서 함께 목격한 데 따른 수치심에 얼굴이 붉게 물들었고, 카시야는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똑같구나.'라는 생각에 무심한 눈길로 신관을 쳐다보았다.
신관은 곧장 신전의 다른 사제에게 명하여 널찍한 방 두 개를 마련해주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자꾸 루크가 쥐고 있는 사파이어 쪽을 흘끔거리는 게, 그 사파이어는 헌납되는 동시에 신관의 개인 금고에 보관될 것 같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그건 어디서 나신 겁니까?"
널찍하고 깨끗한 방에 대충 이불을 펴고 드러누운 루크를 향해 카시야가 물었다.
"뭐가?"
"아까 그 보석 말입니다."
"아아…. 그냥 내 개인적인 비상금 같은 거였지."
"비상금으로 그만한 보석을 갖고 다니는 게 정상입니까?"
"나 정도 되는 사람한테는 정상인 거야.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마."
카시야는 말문이 막혀 헛웃음 짓고 말았지만 곁에 있던 아르헨은 면목 없다며 연신 감사인사를 전했다.
"지금 이 와중에 고작 그 정도 보석 하나 던져준 게 대수겠습니까. 그것보다는 이곳 신관이 철저히 황제 쪽 인물일 거라는 게 더 문젭니다. 수상해 보이지 않도록 신경을 많이 써야겠어요."
"그가 우릴 수상하게 여기기 전에 우리가 여길 먼저 뜨게 될 겁니다. 타셀 전하께서 아즈렐을 이미 출발하셨을 테니, 황제가 곧 일을 벌일 테지요."
카시야가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반나절을 기다리자 분대원들이 전부 신전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신전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신실한 신도들인 척 곧장 기도실에서 단체 기도를 올렸고, 밤이 내려앉을 때까지 얌전히 방에서 여독을 풀었다. 하지만 밤이 되자 모두 카시야가 묵는 방으로 모여 황궁으로 잠입할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타셀 전하 말씀으로는 지금 이 신전 뒤편에 있는 숲 안에 수풀로 가려진 동굴이 있다고 합니다. 그 동굴 안으로 들어가면 바닥을 덮고 있는 나무 덮개가 있고, 그 덮개를 열면 지하통로가 드러날 거라고 했습니다. 그 통로는 과거 타셀 전하의 방이었던 곳의 화장실, 황궁 지하 1층의 창고, 황궁 정원의 눈에 띄지 않는 구석, 이 세 곳으로 이어져있다고 합니다. 에르논이 뭔가 낌새를 채면 곧바로 타셀 전하께 알릴 것이고, 그의 메시지를 받는 즉시 타셀 전하는 제게 알려주시기로 했으니 그때 곧장 진입하면 될 듯합니다."
"하지만 2황자가 반란군으로 돌아선 지금까지 지하통로가 발각되지 않고 남아있을까?"
카시야의 말에 루크가 물었다.
"전하 말씀으로는, 이 통로를 만든 이가 전하의 마법 스승이었던 대마법사 카르가스였다더군요.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잘 모르지만, 일단은 대마법사라니 일반 마법사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마력을 지녔을 겁니다. 덕분에, 황궁 내에서 언제 죽임을 당할지 모르는 타셀 전하를 위해 만들어진 이 통로는 그 정확한 시작점과 끝점을 모른다면 그 근처에 가서도 통로의 입구를 찾을 수가 없을 정도로 강력한 환시 마법이 걸려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거기에 희망을 걸어봐야죠."
다들 긴장된 얼굴로 말이 없었다. 황궁 안으로 잠입할 수 있는 통로가 있다는 것은 다행이었지만, 그 끝에서부터는 그야말로 목숨을 보장할 수 없는 일이 펼쳐지는 것이다. 아무리 개개인의 역량이 좋다고 해도, 고작 스물세 명이 황궁 안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회의가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다들 그런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어차피 전장에서 칼을 휘두르며 싸우든, 황궁에 잠입하여 신검을 찾아내는 것이든, 목숨을 담보로 한 위험한 일이라는 점에서는 똑같았으니까 말이다.
그때 루크가 정적을 깼다.
"이왕 이렇게 모였으니, 각자 유언을 한마디씩 남기도록 하지. 누구 하나라도 살아남는다면 죽은 이의 가족에게 그 유언을 전해주자고."
그의 목소리는 여상했으나, 그가 내뱉은 말은 그들이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다는 현실감을 더욱 생생히 느끼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그의 생각에 모두가 동의했다.
"에…. 제 이름은 스윈델이고요, 고향은 키렐 서쪽의 트라니에입니다. 고향에 아버지와 여동생이 있는데, 제가 죽으면… 어… 기사로서 명예를 위해 싸우다가 죽은 것에 여한이 없으니, 너무 슬퍼하지 말고 잘 살아달라고… 그렇게만 전해주십시오."
"제 이름은 마커스입니다. 고향은 키렐 근처의 토소라는 작은 마을인데, 제 가족들은 1황자의 반란군이 지날 때 다 죽었습니다. 저한테는 가족이랄 사람이, 여러분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지금 여러분에게 유언을 남깁니다. 사랑하고, 쩝…. 혹시, 서운하게 한 일이 있었다면 죄송합니다. 여러분을 만나서 정말 행복했습니다."
"흐윽…. 저, 저는, 쿨쩍, 렌들러라고 하, 합니다. 고향은, 쿨쩍, 멜빈 강 하류의 잔도르란 마을입니다. 쿨쩍, 하아…. 고향에 어머니가 계신데, 그, 그냥, 사랑했다고만… 전해주십시오."
한 사람씩 돌아가며 유언을 남기는 그 자리는 점점 숙연해졌다. 누군가는 고향의 가족에게 간단한 유언을 남겼고, 가족이 없는 이는 그 자리에 앉아있는 이들에게 인사를 했고, 누군가는 아무 말도 남기지 않겠다며 말을 아끼기도 했다.
카시야는 문득 오래된 기억이 떠올랐다. 카시야 델 로만으로서 죽은 자신이 제 3자가 되어 자신이 저질렀던 살인을 다시 겪었던 그 기억 말이다. 그 때 자신이 죽였던 이들이 마지막으로 느낀 감정들이, 지금 여기 앉아있는 분대원들이 내뱉는 말들과 거의 똑같았다.
'난… 이 녀석들과 똑같은 이들을 그렇게 죽여 왔던 거구나.'
전생에서도, 죽어서도 이해할 수 없던 그들의 그 마지막 감정이, 자신의 분대원들이 남기는 유언들을 듣고서야 비로소 이해되었다. 그들은 모두 이들과 똑같이 따뜻한 가슴을 지닌 소박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카시야는 저도 모르게 소름이 돋은 팔뚝을 쓱 문질렀다.
황궁에 들어가서도 자신은 많은 살인을 저지를 것이다. 그것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살'인'이라는 것을 더 명확히 인식할 것 같았다. 도살하듯 생명을 죽이는 게 아니라, 이들과 똑같은 '사람'을 죽이고 있다는 사실을 똑똑히 기억할 것이다.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적을 분노로 쳐다볼지언정 나무 베듯 무심하게 베어 넘기지는 않겠노라고, 카시야는 조용히 다짐했다. 살인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갖는 것, 그들의 삶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음을 의식하는 것. 그것이 그녀가 죽인 사람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일 것 같았다.
"분대장님! 분대장님 차롑니다."
누군가의 부름에 카시야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모두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르헨과 루크마저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그녀의 유언을 기다렸다.
짧은 순간인데도 그녀의 머릿속에 그녀의 전생과 현생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가족이랄 사람은 없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한 마디씩 전해주고픈 사람들이 차례로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것은 참으로 놀라운 깨달음이었다. 전생에서는 40년 가까이 살면서도 죽을 때 떠오르는 이가 한 사람도 없었는데, 현생에서는 아직 1년도 채 안 살았을 뿐인데도 여럿이 떠올랐다. 카시야는 그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곰곰이 생각했다. 그녀가 침묵하는 동안, 아무도 재촉하지 않고 조용히 기다렸다. 마침내 카시야가 머쓱한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혹시 나에 대해 묻는 이가 있다면, 날 잊어버리라고 전해줘."
하지만 그 말을 들은 루크가 피식 웃으며 소리쳤다.
"그 말은 널 기억해달라는 거랑 똑같은 말이라고!"
그리고 곁에 앉은 아르헨이 덧붙였다.
"카시야 경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경을 잊지 못할 거예요."
그들의 말에 카시야는 제 머리를 손으로 흐트러트리며 고개를 숙였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지, 정말 알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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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ㅠㅗㅠ 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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