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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홍의 카르마-112화 (112/134)

00112 진격(4) =========================

카시야가 자신의 유언을 남기고 있던 그때, 황궁에는 전령새로 쓰이는 날랜 매가 밤공기를 가르며 날아들었다. 매의 다리에 매인 조그만 통 안에는 짧은 글이 적힌 종이가 말려있었다. 그것을 빼내어 확인한 재상 카르고는 곧장 황제의 침소로 향했다.

여색을 밝히는 황제는 최근 들어 후궁 하나 들이지 않고 홀로 밤을 보내고 있었다. 아무리 자신만만해 있다지만, 그로서도 압박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타셀의 기세에 여자를 안을 마음조차도 생기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그에게 카르고의 갑작스러운 방문은 재상이 입을 열기도 전에 그가 할 말을 예측케 했다.

"폐하…."

"놈이… 출발했다던가?"

무표정한 황제가 역시나 무표정한 카르고 후작의 안색을 훑었다.

"예, 폐하. 2황자군에 있는 우리 쪽의 첩자가 날린 전령새가 방금 막 도착하였습니다. 이틀 전에 아즈렐에서 진격 명령이 떨어졌다고 하옵니다. 아즈렐에서 아르카나 근처까지 오는 데는 대군을 이끌고 있다 하여도 보름이면 도착할 것입니다. 특히 2황자 쪽은 서두르고 있으니 그보다 더 일찍 도착할 것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보름…. 보름이라…."

날짜를 곱씹으며 알테리온은 한참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설렁줄을 잡아당겨 시종을 불렀다.

"제롬을 불러라."

그 말을 끝으로 알테리온은 카르고에게 별 말도 전하지 않고 자리를 물러나라 명했다. 카르고는 잠시 당황하는 듯했으나 알테리온의 눈에 서린 이채를 감지하고는 조용히 침전을 물러나왔다. 카르고는 황제의 침실에서부터 멀어지며 제롬과 마주쳤지만 가볍게 목례했을 뿐 반가운 척하지는 않았다. 그는 날이 갈수록 눈 밑이 움푹 꺼지고 있었지만 눈빛만은 이상할 정도로 형형해지고 있었다. 그것이 황제와 비슷한 느낌을 주어 소름이 돋았다. 전혀 닮지 않은 두 사람이 가끔씩 그 눈빛 때문에 굉장히 닮았다고 여겨질 때도 있었다.

하지만 카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쓸 데 없는 생각을 털어냈다. 그에게는 곧 벌어질 전쟁의 후방을 지휘해야하는 막중한 책임이 더 급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황제가 무엇을 고민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좋든 싫든 곧 아르카나는 피비린내에 휩싸일 것이다. 누가 이기든 처참할 것이 분명한 그 승리를, 그는 그래도 자신이 몸담고 있는 황제 쪽이 얻기를 간절히 바랐다.

"부르셨습니까, 폐하."

"…타셀이 이틀 전 아르카나를 향해 출발했다."

알테리온의 말이 떨어지자 두 사람 사이를 채우는 것은 적막뿐이었다. 제롬의 푸른색 눈동자가 천천히 위쪽을 향하더니 자신을 내려다보는 황제의 탁한 갈색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감히 여쭙습니다. 황제 폐하께오서는 승리를 위해 모든 것을 걸 각오가 되셨습니까."

그 말에 알테리온이 피식 웃었다.

"네가 황실 제 1마법사 제롬이 아니었더라면, 감히 불패의 시황제에게 건방진 질문을 한 벌로 목이 떨어졌을 게다."

"황제 폐하께오서는 정말 무슨 짓을 해서라도 승리하실 것을 작정하셨습니까."

"자꾸 당연한 것을 묻는군. 패하기 위한 전쟁을 벌이는 군주가 어디 있겠는가마는, 나는 절대 승리할 것이네. 나의 카라볼그와 함께라면 말이야."

그 대답에 제롬은 그제야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그는 이제부터 황제에게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자고 제안할 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타락해서라도 승리하겠다는 황제의 강한 의지가 있어야 했다.

"이제까지 실험에 쓰였던 마법사들의 마력량은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별 것 아니었습니다. 그랬으니 황제께서 편안히 받아들이실 수 있으셨습니다만, 반대로 마법사들은 마력 추출을 버티지 못하고 죽고 말았지요. 하지만 대마법사, 그것도 마력량에 관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에르논의 마력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피라미들의 마력을 짜내어 받아들였던 것과는 달리 미리 준비가 필요할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특히 헬라스의 전례를 보더라도 대마법사의 마력은 질까지 저희와 같은 일반 마법사와 다른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무리 마력의 양이 많다 하더라도 어찌 혼자만의 마력으로 그 많은 죽음의 기사를 움직였겠습니까. 그런 고순도의 마력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강력한 신체가 필수불가결한 조건일 것이옵니다."

알테리온은 이제껏 제롬이 한 번도 하지 않았던 말을 들으며 묘하게 흥분되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 이 자는 단순히 에르논의 마력을 흡수하는 것 이외의 뭔가를 하려하고 있었다.

"빙빙 돌리지 말거라.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이냐."

알테리온이 맹수의 눈빛으로 제롬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폐하. 폐하께서 허락만 하신다면 저는 폐하를 신의 무기가 아니면 깨트릴 수 없는 무적의 신체로 만들어드리려 하옵니다. 대마법사의 마력을 다량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드리는 것이기도 하지만, 강철의 육체에 대마법사의 마력이라면, 이 이후라도 그 누가 폐하께 반기를 들겠사옵니까."

"그런 방법이 있었다면 왜 여태껏 나에게 말하지 않았는가. 설마하니 내가 그것을 겁내기라도 했을 것 같은가?"

알테리온이 진심으로 의아하다는 투로 물었다. 하지만 제롬은 잠시 뜸을 들였다. 그 방법이란, 그가 이제까지 해온 연구의 정수이자 제국법에 따르자면 최악의 범죄인 일이었기 때문이다.

"폐하…. 제국법에서는 흑마법을 절대 금지하고 있습니다. 납치와 인신매매 역시 금지하고 있고, 폐하께서 허하지 않은 살인 역시 금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그리고 너는… 그 모두를 어길 거라 말하고 있는 것이구나."

"…저를 벌하실 것이옵니까."

"정확히 무슨 짓을 하려 하느냐."

"마력을 흡수하면 노화가 어느 정도 역행한다는 것은 폐하께서도 이미 경험하여 알고 계실 것입니다. 저는 거기에 어린 아이들의 생명력 넘치는 마나를 불어넣으면 훨씬 더 젊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봉인된 악마라는 카테르 신의 신성력을 빌어오면 헤바 신의 신성력으로 보호받는 대신관처럼 피실험자의 몸도 날붙이가 뚫을 수 없게 된다는 것 역시 알아내었습니다. 다만 마나의 추출에는 일곱 살이 채 되지 않은 아이들의 생명이, 카테르 신의 신성력을 얻기 위한 기도에는 열여덟 살 이전의 순결한 처녀들의 생명이 많이… 아주 많이 필요하옵니다."

태연한 제롬의 설명에 알테리온은 서서히 웃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흐흐… 흐하하하! 그러니 네 말인즉슨, 내가 젊어지는 데다 다치지도 않는 몸이 될 수 있다는 말이렷다?"

알테리온의 귀에는 어린 아이들이나 처녀들의 생명이 사라질 거라는 말 따위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그에 따른 믿기지 않는 효과만이 세이렌의 유혹처럼 그를 홀리고 있었다. 젊음과 무쇠 같은 육체! 그 얼마나 꿈꿔오던 것이었나. 누구에게나 공평한 시간의 흐름을, 그는 이제 거스를 수 있게 된 것이다!

"네가 너를 벌할 리 있겠느냐, 제롬! 너는 지금 내게 최고의 충성을 바치는 것이도다! 짐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구나. 그래, 그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냐. 당장이라도 좋다. 네 마법진 위에 날 세워다오."

"제 연구의 가치를 알아주시니 마법사이자 학자로서 감격스러울 따름입니다. 다만… 이 마법을 거치면서 황제 폐하께서는 어느 정도의 고통을 이겨내셔야 하옵니다. 물론 그 잠깐의 고통만 이겨내시오면 폐하께서는 그 누구라도 무릎 꿇릴 수 있는 제국 최고의 지존이 되실 것입니다."

즉, 강철 같은 몸과 젊음을 얻기 위해 잠깐의 고통을 참을 수 있겠냐는 말이었다. 이렇게 길게 빙빙 돌려가며 말하는 것을 보면 따끔할 정도로 끝날 고통은 아닐 게 분명했다. 하지만 알테리온은 그래 봬도 오랜 세월 전장에서 구르던 무인이었다. 시간을 거스르는 데다 강한 육체까지 얻게 된다는데 이제 와 겁쟁이처럼 굴 생각 따위는 없었다.

"그 마법은 언제 시작인가. 그것부터 한 뒤 에르논의 마력을 흡수해야 한다 했지?"

아예 시작 날짜부터 묻는 알테리온의 말에 제롬은 감격한 듯 고개를 들었다. 그는 제 영혼을 쏟아 부은 마법의 완성을, 알테리온을 통해 확인하게 될 것이다.

"내일부터 사흘간은 처녀들의 피로 목욕을 하시고 날 것으로만 식사를 하셔야 합니다. 그 뒤 이틀간은 어린 아이들의 피로 목욕을 하시고 물 이외의 아무 것도 드시면 아니 되옵니다. 그 후 하루 동안은 제가 정화해서 드리는 갓난아기의 피를 하루 세 번 드시며 카테르 신을 부르는 의식에 참여하셔야 하옵니다. 혈향이 역하실 수 있사오나 카테르 신을 부르려면 몸에서 강렬하고 순수한 혈향이 풍겨야만 하기 때문이니 버티셔야 하옵니다."

"피냄새 따위는 25년간 실컷 맡아왔던 것이라 역할 것도 없느니라. 별 걱정을 다하는구나."

"카테르 신을 소환한 뒤로는 일곱 명의 아이들과 일곱 명의 처녀들의 목을 잘라 제물로 바친 뒤 복종의 예를 올리셔야 합니다. 그러면 자신에게 복종하는 첫 번째 종에 대한 대가로 폐하께 신성력을 내려줄 것입니다."

"호오…. 그럼 내가 황제이자 대신관이 되는 것이겠군 그래. 좋아. 전쟁에서 승리하면 국교를 바꾸자꾸나. 카테르를 모시는 종교로 말이야."

악마라 할 수 있는 신을 모시는 종교를 만들어내겠다는 생각은, 그가 그동안 히드레이 교를 제 맘대로 할 수 없었다는 불만에서 나온 생각이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제국의 권력은 황제에게로만 강력하게 집중될 수 있을 터였다.

"그것이야말로 카테르 신께서 진정 원하시는 일일 테니, 그 조건을 가지고 신성력을 얻어내도 좋을 듯합니다. 신성력을 얻은 뒤에는 어린 아이들의 마나를 폐하의 몸에 주입할 것입니다. 그것까지 다 끝나면,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열흘쯤 뒤에는 에르논의 마력을 온전히 흡수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제롬의 설명에 알테리온은 더없이 흡족해 했다.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정도로 완벽한 계획이었다.

*

[황제가 기이할 정도로 조용합니다. 그와는 반대로 황실 마법사 제롬은 왠지 신이 났더군요.]

에르논은 최근 느껴지는 이상한 기분에 타셀에게로 메시지를 전달했다.

그를 살피러 오는 제롬의 발걸음이 잦아졌다. 이제까지는 크레인에게만 거의 맡겨놓다시피 했던 에르논의 관리를 제롬이 직접 살피기 시작한 것이다.

'도살장으로 끌려가기 직전의 소, 돼지들이 이런 기분일까?'

에르논은 굉장히 기분이 나빠졌다. 마치 자신을 마력을 짜낼 재료로만 쳐다보며 그 상태를 가늠하는 제롬의 눈빛이 소름끼칠 정도로 불쾌했던 것이다.

'나중에 일이 어떻게 되든 간에 저 놈의 기분 나쁜 눈알만은 도려내고 말리라.'

에르논은 푸른색이면서도 탁하기 그지없는 제롬의 눈을 흘겨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제 온몸이 오염되는 듯 했다. 하지만 제롬은 오히려 그런 에르논의 반응이 즐겁다는 투였다.

"식사량은 좀 늘리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만, 아직도 식욕이 없으십니까? 너무 야위시는 것 같아 걱정입니다. 이렇게 마르셔서야, 나중에 알리스타스 공작께 무어라 사죄드려야할지…."

능청스러운 걱정의 말과 비릿한 미소에 욕지기가 이는 듯 했다.

"저는 원래 소식해왔고 원래 이런 체형입니다. 그러니 너무 염려 마십시오."

에르논의 새치름한 대답에 제롬은 슬슬 고양이보다 더 호기심에 약한 이 족속을 떠보기 시작했다.

"참. 혹시나 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황궁에 에르논 님을 찾아올만한 분이 계십니까?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말입니다."

그 말에 미간을 구긴 에르논이 제롬을 쳐다보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 아니라면 제가 쓸 데 없는 말씀을 드리는 것일 테지만 말입니다, 최근 낯선 자가 황궁 근처를 배회한다는 소문이 들려서요. 최근 황궁을 찾아오신 손님은 에르논 님 한 분뿐이시니, 혹시나 에르논 님을 찾아온 분이 아닌가 싶어 여쭈었습니다."

그 말에 저도 모르게 카시야를 떠올린 에르논의 표정이 일순 경직되었다. 그리고 에르논보다 연륜에 있어서는 한참 앞선 제롬이 그 표정을 놓치지 않고 포착했다. 그의 미소가 점점 짙어졌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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