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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홍의 카르마-113화 (113/134)

00113 진격(5) =========================

"그저 소문일 뿐일지도 모릅니다. 에르논 님의 손님이라면 정식으로 입궁을 요청하겠지요. 그렇지 않으면 물샐 틈 없는 황궁의 경비에 가로막힐 게 아닙니까. 저도 나이가 먹어 가는지 자꾸 쓸 데 없는 말만 느는군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불편하신 게 있다면 언제든지 크레인을 불러 말씀하십시오."

제롬은 에르논의 방을 빠져나가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에르논이 누구를 떠올리고 얼굴을 굳혔는지는 몰라도, 그에게 소중한 사람이 있는 것은 분명해보였다. 그게 누구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 사람이 진짜 황궁으로 오든 말든 상관없었다. 에르논을 유인할 수 있을 만큼 그에게 소중한 사람이 존재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는 곧장 타뮤의 서재로 향했다.

"스승님! 부르지 않으시구요. 어찌 여기까지 직접 발걸음 하셨단 말입니까."

타뮤는 제 스승을 대마법사보다도 더 위대하게 여기는 자였다. 대마법사는 타고난 게 8할이지만, 일반 마법사로 태어나 황실 제 1마법사가 되는 것은 노력이 8할이라 할 정도로 힘든 일이었기 때문이다.

"타뮤. 이제까지 네가 정신계열 마법에 얼마나 열심이었는지 잘 알고 있다. 그런 너 밖에는 할 수 없는 일이라, 내가 직접 부탁하러 왔느니라."

"부탁이라니요! 가당치 않습니다. 스승님께서는 그저 제게 명령을 내리시면 되는 분이십니다. 왜 그리 자신을 낮추십니까."

제롬이 흑마법에까지 손을 댔을 줄은 꿈에도 모를 그의 열정 가득한 제자가 존경심을 담아 제 스승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하명하십시오."

제롬은 빙긋이 웃었다. 타뮤는 다른 마법은 보통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하던 그저 그런 마법사였다. 그런데 어쩌다가 그가 정신계열 마법에 소질이 있다는 것을 제롬이 발견했고, 그의 격려에 고무되어 마법 수련과 탐구에 매진하던 타뮤는 어느덧 제롬조차 넘볼 수 없을 만큼 뛰어난 정신계열 마법사가 되었던 것이다.

'이런 날이 오려고 타뮤에게 정신계열 마법을 연구하도록 독려하게 되었던 것일까. 운명은 어찌 이다지도 재미있게 맞아 들어간단 말인가.'

제롬은 미소 지은 채 타뮤에게 한 발짝 더 다가서며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 말했다.

"자네의 재능으로 콧대 높은 대마법사를 농락해보았으면 해서 말이네. 누군지는 알 수 없으나 그에게는 꽤 각별한 사람이 있는 모양이야. 한번 떠봤더니 대번에 얼굴이 굳어지더군. 그의 머릿속에 있는 인물을 환각으로 보이게 만들 수 있는가?"

"그런 것쯤이야 닭 모가지 비트는 것보다 쉬운 일입니다. 환청도 들리게 할 수 있습니다."

"어허허허. 그래, 그래. 때가 되면 알릴 테니, 그 환각과 환청으로 에르논을 지하로 유인하면 되네. 할 수 있겠지?"

자애롭게 자신을 독려하는 제롬에게 감복한 타뮤는 고개를 숙이며 명령에 응했다. 제롬의 계획은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었다.

제롬이 나간 뒤 에르논은 달달 떨리기 시작하는 제 손을 내리누르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설마. 아니야. 아닐 거야. 그럴 리가 없지.'

좋지 않은 예감을 계속 부정하고 있었지만 제롬이 했던 말이 자꾸만 떠올랐다. 자신을 찾아 이 황궁에까지 잠입하려드는 인간은 딱 하나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여기까지 온다는 얘기는 타셀에게 들은 바가 없었다. 제롬이 제 말대로 뜬소문을 듣고 와서 지껄인 것일 수도 있는지라 곧바로 타셀에게 물어보기도 무안했다. 혹시라도 카시야가 타셀의 군대와 함께 아르카나로 오고 있는 중이라면 자신은 제가 좋아하는 여자 문제로 타셀을 귀찮게 하는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길한 기분은 내내 떠나질 않았다. 결국 해가 질 때쯤 되어서야 에르논은 큰맘 먹고 타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아니라면 정말 죄송합니다만, 혹시… 카시야가 이쪽에 이미 와 있습니까?]

그러자 곧 타셀로부터 답신이 왔다.

[그건 왜 묻지?]

[오늘 아침에 제롬이 이상한 말을 해서 그렇습니다. 혹시 저를 찾아 황궁에 올 사람이 있느냐고…. 주변에 수상한 사람이 다닌다는 얘기를 들었다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그 말 뒤에 타셀이 곧바로 '아니다'라는 답신을 주지 않았다. 뭔가 꾸물거리는 모양새가 에르논의 불안감을 더욱 부추겼다.

[미리 알리지 못해 미안하네. 카시야 경은 본인의 분대와 함께 피엔에 있다가 우리가 진격을 시작하자 아르카나로 움직였다고 들었네. 대신관 아르헨이 합류하면서 아르카나에 가야하는 이유가 생긴 모양이야. 절대 무모한 일은 하지 말라고 해뒀지만, 어쨌든 카시야 경에게는 그녀의 분대를 독자적으로 지휘할 수 있는 권한을 넘겨주었네.]

마침내 온 타셀의 메시지에 에르논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식은땀이 솟는 것 같았다. 임무에 실패하면 피엔으로 향하게 될 그를 기다리던 분대는 카시야의 분대였던 것이다. 그것만도 기가 차는데 카시야의 독자적인 결정으로 아르카나를 향해 왔다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왜 아르카나로 온 겁니까? 제가 피엔으로 가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황궁을 만만하게 봐서는 안 됩니다!]

에르논은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그런 감정은 타셀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하지만 자신의 낯부끄러운 감정을 들키는 것 따위는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자네와 나처럼 의식 전달이 쌍방으로 자유롭게 이뤄지지 못하는 상태라 내가 그녀를 일일이 통제할 수가 없네. 그리고 지금 나는 우리 군의 그 누구에게도 안전을 보장해줄 수 없어. 피엔에 머무를지, 아르카나로 향할지, 황궁으로 잠입할지는 카시야 경에게 믿고 맡길 뿐이네.]

비장한 감정이 실린 타셀의 메시지에 에르논은 온몸의 피가 식는 것 같았다.

그렇다. 자신은 황궁 내에서 편안히 앉아 있으니 제대로 못 느낄 뿐, 저 밖에는 죽음을 각오한 기사들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다가오는 중이었다. 카시야 역시 그 중 하나일 뿐이고 말이다. 카시야 역시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와 닿았다. 에르논은 자신의 인내심이 바닥나는 게 느껴졌다.

그가 굳이 제 마력을 드러내지도 않고, 같잖은 황제와 황실 마법사의 말에 고분고분 따르는 척 하는 이유는 그저 신검을 확보하고 옥새와 온전한 황궁을 그대로 받아내기 위함이었다. 게다가 2황자가 승리해야 할 전쟁에서 1황자군의 병력이었던 그가 더 눈에 띄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도 있었고 말이다. 하지만 고작해야 신검을 어떻게 해보려고 마법사를 쥐어짜나 싶었던 황제가 자신의 마력을 짜내려 한다는 계획을 알고 나서부터는 가만있기가 영 힘들어지고 있었다. 제 3자가 아니라 관계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황제가 제 휘하의 건방진 마법사와 짜고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에르논 입장에서야 다 뒤집어엎어 버리면 그만일 일이었다.

'황제든 황실 마법사든 그냥 싹 쓸어버릴까? 신검 따위야 황제가 죽으면 어차피 무용지물이 될 것이고, 황궁의 보물이나 기밀문서 좀 사라지면 어때? 나한테야 아무 상관없는 일인걸.'

보랏빛 눈동자를 차갑게 빛내며 고민하던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동안 카시야에게 어른스럽게 보이려고 지나치게 몸을 사리고 있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원래 전장에서는 상대편에 닥치는 대로 분풀이하고, 뒷일 걱정은 손톱만큼도 안하던 그였기 때문이다.

'다 죽여 버리자. 2황자는 와서 황궁만 접수할 수 있게 만들어주면 되겠지.'

에르논은 황제와 황비, 황태자, 황실 마법사들과 주요 지도부를 전부 죽여 버리자고 마음먹고는 가볍게 고개를 돌리며 몸을 풀었다. 신검과 황궁의 보물 따위는 도망치는 놈들이 갖고 가든 말든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지금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카시야의 안전뿐이었다.

'그럼 황제부터 찾아볼까?'

하지만 에르논은 제롬과 황실 마법사들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그들 중 누구도 에르논과 일대일로 맞붙을 수는 없겠지만, 1급 황실 마법사들이 작정하고 힘을 한데 모아 제압한다면 에르논이라 하더라도 그 힘을 이겨낼 수는 없었다. 아무리 에르논이 공작과의 속박 마법에 종속되어 있다고 생각했어도, 황궁에서 그 외의 안전장치도 없이 공격 마법의 정점에 서있는 그를 황궁 내로 불러들였을 리 없는데 말이다.

에르논은 '내가 마음만 먹으면 저 따위쯤은….' 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사실 황제와 황비, 황태자의 처소 근처에 쳐진 보호 마법은 그의 공격 마법으로도 함부로 깰 수 없을 만큼 견고했다. 그리고 에르논은 그 사실을, 지금 깨닫고 있었다.

'이… 이럴 수가….'

황제의 침실로의 공간 이동이 시전 중에 가로막힌 것이었다. 그와 함께 제롬에게는 황제의 처소에 쳐놓은 결계에 침입 시도가 있었다는 사실이 전해졌다.

"우리 대마법사님께서 슬슬 본색을 드러내시려고 하나 보구나. 크흐흐흐."

예상대로의 전개에 제롬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

타셀군이 아르카나로 진격하는 사이, 황제 쪽의 카르고 후작은 티리엘과 바이덴에 데런을 치도록 요청했다. 티리엘과 바이덴 연합군이 데런을 치는 것으로부터 타셀과 황제의 격전이 시작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티리엘과 바이덴 연합군의 사정은 그 사이 굉장히 미묘해진 상태였다.

"칼리스토니아의 황제가 티리엘에게 데런을 떼어주기로 이미 약속을 했다고 합니다. 우리에게는 별 쓸모도 없는 땅을 조금 떼어주고 쫓아낼 생각인가 봅니다. 하긴, 칼리스토니아 입장에서 보면 티리엘에서 얻어낼 게 더 많으니 말입니다."

"흥! 누가 그 꼴을 가만 두고 볼까봐? 괘씸하긴 하지만, 데런을 함께 치겠다고 해놓고 빠지면 분명 그걸 꼬투리 잡아서 바이덴으로 쳐들어올 수 있으니, 적당히 후방에서 따라가는 척만 하자고. 그리고 데런에서 티리엘을 공격하면 우리도 티리엘을 함께 친 다음에 퇴각하는 척 돌아와버리자."

"좋은 생각이십니다!"

바이덴에서는 칼리스토니아의 황제를 돕겠다고 결정한 것을 이미 후회하고 있는 중이었다. 티리엘까지 참전할 줄은 몰랐는데 티리엘 역시 데런을 노리고 군사를 내어주기로 했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던 것이다. 티리엘이 데런을 얻는 것만큼은 반드시 막아야 하는 바이덴으로서는 이 기회에 아예 티리엘의 군사를 치기로 작정한 상태였다.

바이덴의 참전이 영 찜찜한 것은 티리엘 역시 마찬가지였다. 안 그래도 티리엘의 반 밖에 안 되는 크기의 국가가 티리엘과 맞먹는 수준의 국력을 보유하고 있으니, 국경을 맞댄 나라로서 불안하기 그지없었는데, 그 놈들이 데런까지 먹으려고 수작을 부리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티리엘 역시 이번 기회에 바이덴의 군사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기로 마음먹었다. 이 상황에서는 데런을 얻는 것보다 바이덴이 데런을 얻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더 중요했다.

열심히 양국에 상대국이 데런을 얻기로 이미 약속되었다는 소문을 퍼 나르던 섀도 워커들은 양국의 감정이 점차 악화되자 이번에는 상대국을 비방하는 선동을 이어갔다. 이제 양국은 데런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동안 서로를 경계하며 쌓아오던 감정이 점차 심한 반감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 상태의 티리엘-바이덴 연합군이 아다마스 협곡을 통해 데런으로 향하게 되었지만, 연합군은 출발부터 어느 쪽 사령관이 총 지휘를 맡게 될 것이냐를 두고 싸우기 시작하여 협곡의 중간쯤 다다랐을 때에는 공공연히 크고 작은 싸움들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그때, 협곡의 양쪽 절벽 위에서 뿌우-, 하는 뿔피리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데런 방위군이다! 협곡 중앙을 비우고 최대한 양쪽으로 붙어라!"

누군가가 소리치자마자 절벽 위에서는 바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바위가 굴러 떨어지면 절벽에 바짝 붙어 선다고 해도 피해가 아예 없지는 않을 테지만, 협곡 중앙에 있다가 바위에 깔려 죽는 것보다는 나았다. 하지만 이때부터 티리엘-바이덴 연합군 사이에서 싸움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앞서가던 티리엘 군대가 저들만 재빨리 양옆으로 피하고 뒤따라오던 바이덴군에는 아무런 신호를 주지 않았던 것이다.

절벽에서 떨어져 내리던 바위 공격은 얼마 후 멎었지만 티리엘군의 사망자가 열 명 남짓인데 반해 바이덴군의 피해는 그 몇 배가 되자 바이덴의 총사령관의 눈이 뒤집혔다.

"이 더러운 잡종들이!"

동쪽의 타누안족과 서쪽의 아구나족 혼혈이 많은 티리엘을 잡종이라 부르며 바이덴군의 장군들이 칼을 휘두르기 시작하자 안 그래도 예전부터 자신들을 '잡종'이라 비하하는 바이덴이 고깝던 티리엘 병사들이 맞대응하기 시작했다. 협곡 안은 금방 피 튀기는 전장이 되고 말았다.

"지금 우리끼리 싸울 때인가!"

티리엘의 제정신 박힌 사령관이 외쳤지만 티리엘이 데런을 친다는 핑계로 저희들을 공격했다 여기는 바이덴군으로서는 그 외침까지 가증스럽게 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끼리의 싸움을 루벤스는 절벽 위에서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타셀 전하께서는 인간의 추악한 내면을 어찌 이리도 잘 꿰고 계신단 말인가. 쯧쯧. 모두 상황을 주시하다가 저들의 싸움이 끝날 때 즈음 다시 바위를 굴려 공격하고, 진로와 퇴로 양쪽 모두 막은 뒤 남은 것들을 마저 전멸시켜라! 감히 회색 늑대의 땅을 넘본 대가는 톡톡히 치르게 해줘야지."

타셀의 예상대로 티리엘과 바이덴 연합군은 데런 땅을 밟아보지도 못한 채 아다마스 협곡을 무덤 삼게 되고 말았다. 우스울 정도로 허무한 행태였지만 황궁에서 인간들의 추악한 내면을 너무나 오래 경험해왔던 타셀에게는 그저 예상대로의 결말이었을 뿐이었다.

============================ 작품 후기 ============================

에르논. 사회의 쓴 맛을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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