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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홍의 카르마-114화 (114/134)

00114 진격(6) =========================

티리엘-바이덴 연합군이 데런을 공격하기 위해 아다마스 협곡에 진입했다는 소식은 알테리온이 피 목욕을 마치던 날 전해졌다. 이미 그의 목욕물을 위해 수십명의 처녀들과 어린아이들의 목숨이 사라진 이후였다. 황궁은 예민한 후각을 지닌 이들이라면 비릿한 쇠 냄새를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멀쩡한 사람이었다면 구역질이 나 참을 수 없을 핏물 안에서 만족스럽게 몸 구석구석 피 냄새를 배이게 하던 알테리온은 제롬이 가져온 데런 공격 소식에 잠깐 눈길을 줬을 뿐, 더 이상의 관심은 보이지 않았다. 티리엘-바이덴 연합군이 데런을 점령한다면 좋은 일이고, 그렇지 않다 해도 두려울 일은 없었다. 그는 제가 진짜 신이라도 되는 의식을 치르는 양 한껏 거만해져 있었다.

에르논은 그 사이 강한 결계가 쳐지지 않은 곳은 다 돌아다니며 황제를 찾고 있었다. 자신이 침범할 수 없는 결계가 황궁 곳곳에 쳐졌다는 사실을 깨달은 뒤, 에르논의 머리는 차갑게 식었다. 자신이 최고가 아니라는 사실이 오히려 그에게 대마법사의 면모를 드러내게 만들었다. 마법에 관해서는 천재적인 머리가 두텁고 복잡한 결계의 술식을 더듬어 복기하면서 황궁 마법사들의 수준을 대략적으로 파악하고 자신이 움직일 수 있는 반경을 계산해냈다. 황궁에는 의외로 1급 마법사들이 꽤 많이 있는 것 같았다. 결계 역시 열 명이 넘는 1급 마법사들이 제각각 걸어둔 결계 마법이 뒤엉켜 함부로 해제할 수 없도록 만든 것이었다.

‘늙은 여우가 꽤나 머리를 썼군.’

가는 나뭇가지라도 여러 개가 모이면 굵은 나뭇가지보다 꺾기 힘든 것처럼 황궁 내에 강력하게 걸린 마법들은 결계처럼 1급 마법사들의 마법이 여러 겹 겹쳐 대마법사라는 위험 요소를 대비하고 있었다. 물론 그들도 대충 예상은 했겠지만 대마법사를 완벽히 막을 수는 없었다. 그는 그나마 레이어가 적은 마법은 조금 시간을 들여서라도 깔끔하게 해제해버리고 자신이 움직일 수 있는 영역을 넓혔다.

이미 황후궁에 들어앉은 멜라니아 황비는 곧 산달을 앞두고 있었고, 어린 황태자 유리카데온 역시 황궁 깊은 곳에 꼭꼭 숨겨져 황태자 교육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황제는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언젠가부터 귀족들을 소집한 회의마저 카르고 후작이 황제를 대신하여 주재하고 있었다. 그들의 회의 내용을 타셀에게 착실히 보고하면서도 과연 황제가 없는 회의 내용이 믿을 만 한 것인가에 대해 타셀과 고민해야했다.

'도대체 어디에 숨은 거지? 설마 황궁을 빠져나갔을 리는 없고…. 그렇다면 역시 지하…?'

황제의 처소 근처에 잠복해 보았지만 황제가 있다면 분명 여러 사람들이 분주하게 들락거려야 할 황제의 처소 앞은 인영이 뜸했다. 다른 후궁들의 처소에 나타나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아직 가보지 않은 지하에 있을 확률이 점점 더 높아지는 것이었지만, 지하 역시 황제의 처소에 맞먹는 결계가 쳐져있었다. 다른 게 있다면, 황제의 처소에 쳐진 결계는 바깥으로부터의 침입을 막는 결계였고, 지하에는 그 안의 것이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결계였다. 물론 결계를 무력화시키는 조건을 충족시키거나 결계가 뚫린 곳을 통해 누군가는 드나들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모르는 상태로 그 결계 안에 침입한다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다.

에르논은 결계를 미처 치지 못한 구멍이 하나쯤은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갖고 황궁의 내외를 부지런히 살피다가 아주 구석진 곳의 덧문을 통해 피 칠갑된 아이들의 시체가 빠져나오는 광경을 목격하고야 말았다.

성벽과 가까운 후원의 그늘에 숨어 결계의 범위를 파악해보려고 하던 그때, 거기에 달려있는 줄도 몰랐던 나무 덧문이 덜걱거리기 시작했고, 에르논은 황급히 이파리가 무성한 근처의 나무 위로 공간 이동해 몸을 숨겼다. 덧문이 열리자 비릿한 피 냄새가 훅 끼치더니, 곧이어 검은 옷을 입은 남자들이 나오고, 그 중 두 명이 어디론가 뛰어가 수레를 끌고 왔다. 에르논은 태연히 그들이 하는 모양새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피 냄새와 수레를 연관시키면 성 안에서 죽은 누군가의 시체를 실어 나르려 한다는 것쯤은 파악이 가능했다. 하지만 그게 아직 열 살도 채 되지 않은 것 같은 아이들의 시체일 줄은, 에르논조차도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엄지와 검지만으로도 잡을 수 있을 만큼 가녀린 아이들의 손목과 발목이 아무렇게나 수레 밖으로 삐져나와 덜렁거렸다. 고사리 같은 손가락들이 힘없이 오그라든 채였다. 피가 튀지 않은 곳의 살색이 새하얗다 못해 회색을 띄고 있는 게 소름끼쳤다. 그때 시체를 나르던 이들 중 하나가 욕지기를 참지 못하고 근처로 뛰어가 토하기 시작했다.

"우웨에에엑! 으웨엑! 으흑, 으흑…."

"저 미친놈이! 씨발, 너 지금 뒈지려고 작정했냐? 얼른 이리 오지 못해?"

"으흐흑…. 처녀들 시체까지는 참았는데, 아이들 시체는 도저히…!"

그가 엎드려 눈물 흘리는 동안 덧문 안쪽에서 누군가 나오더니 그를 향해 곧장 걸어갔다. 그리고 그게 그나마 양심이 조금 남아있던 그 남자의 마지막이었다. 덧문 안쪽에서 나온 남자의 서슬 퍼런 칼날 아래, 방금까지 토하며 울던 남자의 머리통이 데굴데굴 굴렀다.

"쓸 데 없는 말과 행동을 하지 말라고 했다. 나머지는 얼른 이 놈의 시체까지 수레에 실어서 밖으로 내쳐라."

그는 방금 사람을 죽인 자 같지 않게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하더니 갑자기 뭔가를 느꼈는지 뒤로 홱 돌았다.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근처의 나무로 향했다.

"왜, 왜 그러십니까?"

그의 뒤에서 방금 죽은 남자의 시체를 치우려던 사람이 물었다. 하지만 그가 쳐다보는 나무 위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치워라."

그러나 남자의 시선은 아직 흔들리고 있는 나뭇가지에 고정되어 있었다.

끔찍한 광경을 훔쳐보다 들키기 전에 가까스로 제 방까지 공간 이동해 온 에르논은 가쁜 숨을 내쉬었다.

'처녀들의 시체? 그럼 아까의 그 아이들 이전에는 처녀들까지 희생되었다는 말인 거지? 바로 이 황궁 안에서 말이야…. 황제가 미친 줄이야 알았지만, 설마 흑마법에까지 손을 대다니…!'

에르논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처녀나 아이들의 피가 다량으로 필요한 마법에 대한 지식이 좌르륵 나열되어 있었다.

제국에서는 왕국이었던 시절부터 '제물'로 인간을 바치는 마법, 즉 사람의 목숨을 희생시킨 마법은 전부 흑마법으로 분류해 엄격히 금지하고 있었다. 사실 그것은 칼리스토니아뿐만 아니라 세계 모든 나라에서 금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흑마법에 대한 욕망을 가진 마법사들은 끊임없이 있어 왔고, 호기심 왕성하던 에르논 역시 어린 시절에 흑마법 서적을 찾아 몰래 읽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 간략하게나마 흑마법의 기본 구조를 알 수 있었는데, 악마의 힘을 빌려오는 흑마법에서는 노인의 피, 일반인의 피, 순결한 처녀의 피, 어린 아이의 피, 갓난아기의 피 순으로 '생명력'이 높다고 보고 있었다. 그리고 큰 생명력을 제물로 바칠수록 큰 힘을 얻을 수가 있었다. 처녀와 아이들의 피를 쓴 게 확실한 아까의 그 상황을 보자면, 황제는 아마 갓난아기도 희생시켰을 확률이 높았다.

'내 마력을 흡수하려던 것 이외에도 흑마법을 이용한 다른 계획이 있었던 것인가….'

황제가 흑마법에 손을 댔다면 더 이상은 몸을 사릴 수 없었다. 빠져나올 수 없는 결계 안에 갇혀 도저히 이겨낼 수 없을 만큼의 군대를 맞이하게 된다고 해도, 뭔가를 해야만 했다. 흑마법으로 얻을 힘은 보통의 방법으로 얻는 것보다 훨씬 더 클 것이 뻔했다. 악마의 힘에 지배받는 제국을 보려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니다. 그는 타셀에게 메시지를 전했다.

[황제가 흑마법을 이용한 뭔가를 꾸미고 있는 것 같습니다. 더 큰 일이 벌어지기 전에 제가 직접 부딪쳐야 할 것 같습니다.]

부지런히 아르카나를 향하는 말 위에서 에르논의 메시지를 받은 타셀은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별 것 아니라는 듯한 뉘앙스의 메시지였지만 사실 그게 목숨을 걸겠다는 말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대마법사가 목숨을 걸어야할만한 상황이 발생했다는 말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타셀이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현재 황궁 내에는 에르논 밖에 없는 상황인데다 타셀로서도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다. 잠깐 카시야가 떠올랐지만 그녀와 그녀의 분대가 황궁으로 들어간다고 과연 에르논의 힘이 되어줄 수 있을지, 혹 미끼나 인질이 되어버리지는 않을지 걱정되어 카시야에게 에르논을 도우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어려웠다. 타셀은 걷는 말에 박차를 가해 아르카나로 내달리고 싶은 심정을 꾹 참고 부디 몸조심하라고, 행운을 빈다고 답신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뒤따르는 그의 군대를 큰 소리로 독려했다. 이제는 정말 일 분 일 초가 시급했다.

에르논은 그날 저녁 자신의 방에 있던 감시자들을 전부 죽였다. 그 안에는 그동안 짜증났던 크레인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시간이 없는 관계로 비명을 지를 틈도 주지 않고 순식간에 죽일 수밖에 없는 게 조금 아쉬웠지만 크레인 대신 황제와 제롬을 괴롭게 죽이자 다짐하며 속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그 다음으로는 돌아다니며 설치해둔 진동 마법진 중 황후궁 쪽의 것을 발동시켰다. 현재 황궁에 황제 다음으로 철저히 지켜야할 이가 있다면 황태자와 황비였으나, 그 중 임신하고 있어 더 특별한 보호가 필요할 황비의 처소를 무너트려 조금이라도 많은 병력이 그쪽으로 움직여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우르릉, 거리는 소리가 저 멀리서 들리더니 곧이어 바깥이 시끄러워졌다. 분명 난리가 났을 것이다.

에르논은 눈을 크게 뜨고 쓰러져있는 크레인의 시체를 내려다보다가 조용히 방 밖으로 나섰다. 낮에 보았던 나무 덧문 쪽이 결계가 쳐지지 않은 구멍일 수도 있겠지만 난장판을 벌이기로 마음먹은 에르논은 개구멍 따위에 연연하지 않기로 하고 당당히 제 방문 앞에 뻗은 복도를 걸었다. 살아 돌아올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길이었지만, 무슨 짓을 해서든 황제를 막아야 한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자각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누군가에게 발각되더라도 곧바로 마법을 써서 죽여 버릴 작정이었다.

하지만 그런 작정이 무색해질 정도로 복도는 쥐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았다. 조용해도 너무 조용했다. 그가 이상함을 느낄 때쯤, 저 멀리 복도 끝에서 누군가의 인영이 가로질러가는 게 보였다.

'어?'

에르논의 심장이 갑자기 뛰기 시작했다.

'서, 설마…. 아닐 거야. 아직 황궁으로 침투했을 리가….'

찰나였지만 그는 알 수 있었다. 짧은 머리의 늘씬한 그 인영은, 그가 매일 밤 꿈에서도 그리던 이의 모습과 너무도 닮아있었으니까.

에르논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카시야가 황궁에 침투했다면 얼른 도로 나가게 만들어야 했다. 성 안에 있다가는 제가 일으킨 마법에 되려 카시야가 다칠 수도 있었다.

"엇! 누, 누구냐!"

복도에서 마주오던 병사가 들고 있던 창을 겨누며 물었다. 하지만 그와 그의 동료는 에르논의 손짓 한 번에 그 자리에서 고꾸라졌다.

'카시야! 카시야! 너 아니지? 내가 잘못 본 거지?'

에르논은 널브러진 병사들의 시체를 넘어 카시야가 사라졌음직한 방향으로 내달렸다. 그때 아래쪽으로 향하는 계단 입구에서 그녀의 뒷모습이 보였다. 괜히 큰 소리로 불렀다가는 카시야가 위험해질까봐 에르논은 서둘러 달려가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금방 달려가면 카시야를 붙들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자꾸 조금의 시간차로 그녀를 붙들 수가 없었다. 계단 아래쪽으로는 가볍게 계단을 내달리는 발소리가 타닥타닥 울리고 있었다.

'이 바보 같으니! 어쩌자고 여기까지 들어온 거야!'

에르논은 이제 그가 뒤쫓는 모습이 카시야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발소리 역시 자신이 기억하는 그녀의 발소리와 똑같았던 것이다. 그는 타셀에게 마지막으로 메시지를 보냈다.

[카시야가 황궁 안으로 침투한 것 같습니다. 제가 뒤쫓고 있으니 전하께서는 그녀에게 제가 뒤따라가고 있다고 전해주십시오!]

그가 지하의 결계를 뚫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

[카시야 경! 황궁 안으로 침투했나? 에르논이 자네의 뒤를 쫓고 있으니 그와 접선하는 편이 나을 것 같네.]

카시야는 저녁식사 후 자리를 깔다가 타셀의 메시지를 받고 그대로 온몸이 굳어버렸다. 자신은 아직 황궁 근처의 신전에 머무르고 있는데 에르논은 누굴 보고 자신이라 여겼다는 것인가.

"카시야 경?"

이불을 깔다가 돌연 멈춘 카시야를 보며 아르헨이 조심스레 그녀를 불렀다. 하지만 카시야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루크의 시선 역시 카시야를 향했다.

"카시야! 왜 그래, 갑자기?"

그러자 카시야가 이불을 도로 개키기 시작하며 말했다.

"황궁으로 잠입해야 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에르논이 지금 저를 뒤쫓아 황궁 지하로 내려가고 있다는군요."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넌 여기 있는데."

"제 말이 그 말입니다. 에르논은 도대체 무엇의 뒤를 따라가는 것일까요."

그제야 아르헨과 루크의 눈이 커졌다.

그들의 곁에서 얘기를 듣고 있던 분대원들이 재빨리 펴려던 이불을 도로 한쪽 구석에 쌓고는 옆방에 있는 분대원들을 부르러 나갔다. 그들은 곧 가지고 온 무기들을 몸 안에 숨겨 무장한 채 카시야의 방에 모여들었다. 하지만 어둠이 깔리는 시각에 갑자기 신전을 떠나겠다고 한다면 누구라도 의심할 터였다. 그때 아르헨이 나섰다.

"그러고 보니 히드레이 교의 대신관이라는 자가 신전에 머무르는 값을 치르지 않은 것 같군요. 왠지 번잡해질 것 같은 밤이니, 신전에 머무르는 이들에게 평온한 휴식의 축복을 내리도록 할까요?"

그리고 이어진 그의 기도문 암송이 끝나자 기이할 정도로 신전 내부가 조용해졌다. 그 큰 신전에 머무르는 그 많은 이들을 전부 잠재워버린 것이었다.

"대신관님의 전력을 확실히 상향 조정해야겠습니다."

카시야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모두를 이끌고 신전 뒤편에 펼쳐진 숲 속의 어둠으로 녹아들어갔다.

============================ 작품 후기 ============================

1. 깝깝하고 조마조마한 상황이 좀 더 이어지겠지만, 기다려주시어요. ㅠㅗㅠ

2. 독자님들 중에 비엘러 계신가요? 그렇다면 알립니다. 차교님이 돌아오셨어요! 만세!

3. 진카가 네웹소에서 베스트리그 포텐업에 선정되었습니다. 참 신선한 경험을 다해보네요.^ㅁ^

+ 그녀의밤 님, jina201님. 후원쿠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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