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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홍의 카르마-115화 (115/134)

00115 진격(7) =========================

밤의 숲은 굉장히 깜깜했다. 아르헨이 밝혀주는 어슴푸레한 빛으로 조심조심 숲길을 걸었지만 덩굴이나 돌부리에 걸려 휘청거리는 이들이 생겼다. 하지만 그 누구도 소란을 피우지 않고 다시 일어나 카시야를 뒤따를 뿐이었다.

"정말 잘도 숨겨놨군."

카시야가 타셀이 일러준 곳의 무성한 나무 덩굴을 걷어내자 동굴의 입구가 드러났다. 루크가 감탄한 대로 거기에 동굴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이라면 절대 알아챌 수 없을 만큼 꼭꼭 숨겨져 있었다. 입구는 엎드려 기어야 겨우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작아서 도대체 얼마나 저 굴 안을 기어야 하는 걸까 걱정될 정도였는데, 카시야는 머뭇거리지도 않고 먼저 그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하지만 조그만 입구는 눈속임용이었는지, 동굴 안은 루크가 서 있어도 괜찮을 만큼 충분히 컸다. 하나씩 기어들어온 모두가 동굴이 품은 크기에 놀랐다. 하지만 카시야는 그들이 감탄할 시간을 충분히 주지 않았다. 지금 이 시간에도 에르논은 도대체 정체가 무엇인지 모를 것의 뒤를 쫓아 지하로 내려가고 있으니까.

동굴의 길이는 그다지 길지 않고 가로 막혀있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의 눈에는 지하 통로를 덮고 있다는 나무 덮개는 보이지 않았다.

"어, 어디로 들어가야 된다는 겁니까?"

스윈델의 물음에 카시야가 바닥에 엎드려 구석구석 더듬기 시작했다. 그러자 덜걱, 하는 소리가 나는 것 같더니, 거기에 있는 것을 왜 못 봤을까 싶을 정도로 선명하게 나무 덮개의 윤곽이 드러났다. 대마법사의 환시 마법이라더니, 알고 들어온 게 아니라면 찾을 수도 없을 정도였다. 타셀이 대마법사 아래에서 마법을 배웠던 것은 황제가 그에게 더 이상 교사를 붙이지 말라고 명한 열여덟 살 이전이었을 텐데, 그렇다면 걸어둔 지 최소 8년도 더 된 환시 마법이 여태 이토록 강력하게 유지되고 있다는 것은 타셀의 마법 스승이 얼마나 그를 위했는지 알게 하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지금 카시야에게는 그런 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감탄사 한 번 뱉지도 않고 나무 덮개를 들어 올려 지하로 이어진 통로를 따라 몸을 밀어 넣었다. 그 자리의 어느 누구도 카시야가 이렇게 조급해 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분대원들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겨우 내리누르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지하 비밀 통로 역시 허리를 굽히지 않아도 될 만큼 높이가 높았다.

"우리는 지하 창고 옆으로 이어진 출구를 통해 나갈 겁니다. 출구로 나가면, 곧바로 격투가 일어날지도 모르니 모두 무기들 확인 잘 하시고."

카시야의 말투는 무심했지만 거기에는 평소보다 날카롭게 벼려진 긴장감이 얼핏 감돌았다. 그리고 그녀의 뒤를 따르는 모두는 통로로 진입했을 때부터 느껴지던 기묘한 냄새가 황궁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피 비린내라는 확신이 들 정도로 진해지고 있다는 사실에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동굴 입구에서 지하 창고 출구까지는 빠른 걸음으로 15분쯤이 걸렸다. 출구에 달린 문을 조심스레 밀고 들어가자 컴컴한 방이 드러났다. 그 방의 문을 열자 또 문이 보였는데 그 문을 열어야 성 안으로 진입하는 것이었다. 문틈이 벌어진 사이로 가만히 바깥을 살피던 카시야는 기감을 넓혀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문을 열고 황궁 지하 복도에 발을 디뎠다.

목숨이 위험할 때 도망칠 수 있게 마련한 통로니 인적이 드문 곳으로 연결해뒀겠지만, 출구의 주변은 정말 개미 새끼 한 마리 얼씬하지 않는 것처럼 조용했다. 오른쪽으로는 창고들이 줄지어 있는 복도가, 왼쪽으로는 더 지하로 이어진 계단이 펼쳐져 있었는데 벽에 붙어 복도를 밝히는 램프가 없었다면 아무도 관리하지 않는 곳이라 여겼을 것이다.

"들어오긴 했는데, 어디로 가야 하지?"

루크의 질문이 아니라 하더라도 카시야 역시 충분히 고민스러웠다. 그녀는 무작정 오른쪽으로 걸음을 옮겨보았다. 복도의 끝 쪽에 또 계단이 이어져있는 것 같았고, 이 복도에 붙어있는 나무 문짝 안은 보나마나 오랫동안 아무도 찾지 않는 잡동사니들이 쌓여있을 게 뻔했다. 카시야는 다시 뒤돌아 일행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바로 그 때였다. 자신의 왼손 집게손가락에 있는 반지가 조금 움직인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은 것이.

카시야는 착각했나 싶어 왼손을 몇 번 쥐었다 폈다 해보았다. 그리고 다시 발걸음을 옮기는데 이번에는 착각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반지가 떨려왔다. 제 손에 있는 반지를 다시 살피는 카시야의 모습을 본 아르헨이 걱정스럽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아뇨, 그게…. 방금, 반지가 조금 떨린 것 같아서 말입니다."

"반지가요?"

"네. 알리나 성녀님께서 주신 묵주 반지입니다만…."

그 말을 들은 아르헨이 그녀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가까이 들여다 살폈다. 그의 얼굴에 알듯 말듯 한 미소가 스쳤다.

"귀한 선물을 받으셨군요. 이 반지는 알리나 성녀님의 신성력을 빌려올 수 있는 물건입니다. 아마 카시야경의 염원에 따라 신성력이 발휘되었을 텐데, 이제까지 반지로 인한 신기한 일을 겪어보신 적이 없으신가요?"

아르헨이 진지하게 물었지만 카시야는 알리나 성녀나 아르헨이 신성력을 쓸 때처럼 반지에서 빛이 터져 나왔던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사실 반지의 존재를 잊고 있기도 했고 말이다. 그러다 눈앞에 어떤 장면이 퍼뜩 떠올랐다. 자신은 그동안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 닥칠 때마다 버릇처럼 이 반지를 만지작거렸었다. 헬라스 저택에서 어떻게 책을 찾을지 고민하던 때에도, 분대원들이 에르논을 받아들여줄 수 있을지 걱정하던 때에도, 방금 어느 쪽으로 발길을 향해야할지 초조하던 때에도 말이다.

"그러고 보니… 곤란한 상황에서는 늘 이 반지를 만지작거렸던 것 같군요. 그럼 신기하게도 일이 잘 풀리곤 했습니다만, 그게 이 반지 덕분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아마 반지 덕분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지금도 반지의 신세를 져야할 것 같네요."

카시야는 다시 제 반지를 쳐다보았다. 반지는 명확히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쪽으로 그녀를 이끌고 있었다.

"어차피 알고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으니, 일단 반지를 믿어보기로 하죠."

그리고는 지하로 향하는 계단을 조심스레 따라 내려갔다. 아니나 다를까, 지하로 내려갈수록 피 냄새는 진해졌다. 냄새에 이미 어느 정도 마비된 코일 텐데도 진하게 풍겨오는 피 냄새를 모른 척하기란 쉽지 않았다.

"이 정도로 피 냄새를 풍기려면 도대체 몇이나 죽여야 하는 걸까?"

전장에서 사람을 베는 게 일이었던 루크조차도 경험해보지 못한 진한 피 냄새였다. 독특한 것은 피 냄새에 더불어 익숙하게 풍겨야 할 시체의 썩은 내는 맡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표현이 이상하다면 이상했지만, '신선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오로지 순수한 피의 냄새라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 기분이 안 좋았다. 냄새만 맡아도 피바다가 연상되었기 때문이다.

"전원 무장. 전방에서 사람이 다가오고 있다."

낮고 조용하게 깔리는 카시야의 목소리에 분대원들은 일사분란하게 품속이나 허리춤에서 무기를 꺼내 들었다. 카시야는 손을 들어 제 뒤의 사람들에게 움직이지 말라는 신호를 보내고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 나갔다.

"헉, 누, 누구냐! 정체를 밝…! 응? 계집이잖아?"

마침 재수 없게 그 근처를 살피던 경비병 둘이 맞은편에서 태연히 걸어오는 카시야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용하고 어두침침한 지하의 좁다란 복도에서 마주친 무표정한 여자의 모습은, 귀신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부자연스러운 것이었다. 하지만 그래봤자 여자라는 생각에 반쯤 경계심을 푼 경비병들은 짐짓 위압적인 체했다.

"뭐하는 계집이냐! 여기가 어디라고 멋대로 돌아다니는 거야!"

하지만 카시야의 표정이 전혀 달라지는 것도 없고 오히려 저희 둘을 번갈아 쳐다보며 뭔가를 가늠하는 것 같아서 그들은 미간을 구겼다. 행색을 보아하니 절대 귀족은 아닌데, 낮은 직급이기는 해도 기사의 칭호를 받은 저희들 앞에서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는 모양새가 기분이 나빴다. 안 그래도 며칠째 햇빛 구경도 못하고 피 냄새로 가득한 지하에 처박혀 있어서 미칠 것 같았는데, 아무도 없는 곳에서 마주친 ‘약자’는 그들의 억압된 폭력성을 이끌어 내기에 충분했다.

"이게, 감히 누굴 똑바로 쳐다봐?"

한 병사의 손이 카시야의 뺨을 향해 휘둘러졌다.

하지만 그의 손은 허공을 갈랐을 뿐이고, 낭창하게 뒤로 허리를 젖혀 그 더러운 손을 피한 카시야는 어느새 양손에 쥔 팔치온을 아래서부터 위로 힘껏 올려쳐 두 사람의 아랫도리에서부터 턱 끝까지 깔끔하게 베어버렸다. 마나를 실은 덕에 두꺼운 뼈까지 쉽게 가르고 빠져나온 칼끝이 카시야의 몸 뒤편으로 핏방울을 흩뿌렸다. 물론 병사들의 몸에서 터져 나온 피가 그 뒤를 따라 진득하니 쏟아져 나온 것은 물론이었다.

"휘유. 봐주질 않는군."

카시야가 어떻게 대응하나 지켜보던 루크가 즉사한 두 병사를 내려다보며 카시야의 가차 없는 처분에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루크를 지나치던 스윈델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한 번에 죽여주다니, 자비를 베푸신 거죠."

그들이 반쯤 농담하며 카시야를 뒤를 따르는데도 카시야의 표정은 전혀 풀어지지 않았다.

*

"카시야! 카시야!"

에르논은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서도 최대한 목소리를 억누르며 카시야를 불렀다. 하지만 제 한참 앞에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카시야는 뒤를 돌아보지는 않은 채 점점 지하 깊은 곳으로 향했다. 에르논은 서둘러 그녀가 사라진 곳으로 공간 이동을 했다. 분명 방금 뒷모습을 보았으니 손에 잡힐만한 거리에 그녀가 있어야 하는데 공간 이동을 해도 그녀는 어느새 저 멀리 달아난 채였다.

꽤 오랜 시간을 쫓았는데도 그녀와의 거리는 좁혀지기는커녕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았다. 홀린 듯 그녀의 뒤를 쫓던 에르논도 한참 전부터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고는 있었다. 하지만 함정일까 싶으면서도 혹시 모를 만에 하나라는 가능성 때문에 그녀의 뒤를 쫓는 것을 그만둘 수 없었다. 대신관이 합류했다던데, 혹시 대신관으로부터 신성력을 부여받은 카시야가 자신처럼 공간 이동을 하고 있는 것이라면? 분대원들이 다 함께 들어왔는데 카시야 혼자 살아남은 것이라면? 어딘가 다친 거라면? 그녀가 두리번거리면서 애타게 찾는 게, 혹시 자신이라면…?

에르논은 머뭇거리다가 다시 아랫입술을 꽉 물고 발걸음을 옮겼다. 주변을 살피며 언제라도 공격을 할 수 있게 손에 마력과 마나를 모은 채 카시야가 사라진 방향으로 겨우 내달려 고개를 돌린 순간, 그의 눈이 크게 부릅떠졌다.

무엇에 쓰이던 공간인지는 모르겠으나 광활하다고 할 만큼 넓은 홀 한가운데 카시야가 쓰러져 있었던 것이다. 어두운 와중에도 그녀가 쓰러진 돌바닥에 배인 진득한 액체가 조명으로 타오르는 횃불의 불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더라도 피인 것 같았다. 그 순간 에르논의 이성이 잠시 마비가 되었다.

"카시야!"

하지만 그가 달려가 그녀의 몸에 손을 대려는 순간, 아까까지는 보이지 않았던 거대한 마법진에서 빛이 나기 시작하고 방금까지 쓰러져있던 그녀의 몸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에르논의 손에 닿은 것은 차가운 돌바닥뿐이었다. 주변을 둘러보자 거기에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마법진이 발하는 빛 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제기랄!'

불길하던 예감대로 자신이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에르논은 욕설을 짓씹으며 마법진 바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역시나라고 해야 할지, 마법진의 가장자리에는 마치 투명한 벽이라도 세워진 양 바깥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콰서스!"

에르논의 눈이 빛나며 그의 손에서 뻗어나간 마력과 마나의 덩어리가 그 투명한 경계에 강하게 부딪쳤다. 분명 마법진의 경계가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이 정도의 경계라면 무너트릴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에르논은 피식 웃으며 더 큰 마나와 마력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때 홀의 2층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력이 모자라 힘드시다죠? 스승님께서 에르논 님의 마력을 충분히 채워드리라 하셨습니다. 기분 좋아지실 거예요."

고개를 들자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어떤 남자가 기분 나쁜 미소를 흘리며 무언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마법진에서 새어나오던 빛이 강하게 발현되었다.

"윽, 커헉!"

자신의 몸속을 흐르는 마력이 진해지는 게 느껴졌다. 이렇게 강제적으로 마력이 증폭되는 것은 처음 겪는 일이었지만 아까 그 남자의 말과는 달리 전혀 기분 좋은 게 아니었다. 더군다나 이미 100%에 가깝게 마력이 채워져 있던 그에게 마력 증폭이란 온몸을 태우는 듯한 고통을 선사했다. 마력폭발을 할 때나 느꼈던 열기가 온몸을 달궈 뇌가 익어버리는 것 같았다.

"으아악!"

에르논이 비틀거리며 소리를 지르자 그를 내려다보던 검은 로브의 남자가 킥킥대며 웃었다.

"사실 이게 마법진의 첫 시동이라서 기분이 좋을지 나쁠지는 알 수 없었는데, 보아하니 그다지 좋은 것 같지는 않군요. 앞으로의 연구에 참고하겠습니다. 하지만 조만간 뽑아낼 마력이니, 괴롭더라도 잠깐만 참으십시오."

그의 조롱은 이미 에르논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눈앞이 보랏빛으로 어룽거리는 것 같았고, 귀에는 웅웅거리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이건 진짜 위험했다. 잠깐 방심하는 순간 마력폭발이 일어날 것 같았다.

============================ 작품 후기 ============================

1. 에르논... 괴롭혀서 미안한데, 아픈 김에 좀만 더 아프자.

2. 많은 로판 주인공이 자기가 쓴 소설에 빙의되는 것처럼, 이러다 제가 에르논으로 빙의된다면 제 자신이 미워질 것 같군요. 아니, 사실 이 소설의 누구로 빙의돼도 개고생하는 건 마찬가지네요. 아이코, 얘들아. 미안하게 됐다.

3. 1덤 님> 넹. 포텐업 선정되었슴다.^-^)v

+ 그녀의밤 님. 후원쿠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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