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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홍의 카르마-116화 (116/134)

00116 진격(8) =========================

피 냄새에 절여질 대로 절여진 알테리온의 눈앞에는 공포로 발발 떠는 어린 아이 일곱 명과 아름다운 처녀 일곱 명이 결박당한 채 무릎 꿇려져 있었다. 그들은 이미 끊임없이 흐르는 눈물에 얼굴이 다 젖은 채였지만 바닥에 박힌 정에 이어진 밧줄로 꽁꽁 묶인 상태라 옴짝달싹 할 수 없었다.

"으아아아아앙, 엄마아! 엄마아아!"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제발! 제발…. 제바알…."

"끼아아아아악!"

자신들의 앞에 있는 낮은 제단 위에 날이 잘 세워진 검이 놓여있는 것을 본 그들의 입에서는 제각각 두려움과 절망에 찬 비명이 터져 나와 방 안을 울리고 있었다.

"제롬. 시끄러운데 재갈이라도 물리지 그랬나."

알테리온이 짜증난다는 표정으로 묻자 제롬이 씩 웃었다.

"카테르 신을 불러내기에는 이렇게 공포와 비탄이 가득한 편이 더 좋기 때문에 일부러 안 한 것이옵니다. 하나씩 벨 때마다 조금씩 조용해질 테니 잠시만 참아주십시오."

제롬이 달래자 알테리온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까딱거리더니 제단 위에 놓인 검의 손잡이를 그러쥐고는 묶여있는 처녀들의 뒤쪽으로 가 섰다.

"시작해라."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카테르 신을 부르는 기도문을 한 구절씩 읊을 때마다 처녀들부터 하나씩 베시면 됩니다."

알테리온이 심드렁하게 코 옆을 긁적이며 또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앞에서 얼굴이 빨개지도록 비명을 지르는 이들과는 정반대의 여유로운 태도였다. 그리고 곧 제롬의 입에서는 절망의 기도문이 읊어지기 시작했다.

"황제를 위해 죽을 수 있다는 것은 크나큰 명예란다. 기쁜 마음으로 죽음을 받아들이도록."

이를 드러내며 웃은 알테리온은 위로일지 조롱일지 모를 말을 지껄인 뒤, 가장 오른쪽에 앉아 있던 처녀의 목을 쳐냈다. 그것은 정말 순식간이었다. 방금까지 비명을 지르며 울던 처녀의 머리가 칼날이 내지른 방향으로 툭 떨어지더니, 머리를 잃은 목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며 몸이 허물어졌다.

그 모습을 본 나머지 이들은 더욱 소리 높여 비명을 질러댔다. 이미 정신을 놓아버린 이는 차라리 운이 좋은 것이었다. 아이들은 오줌을 지렸고, 어떤 처녀는 미쳐버린 듯 괴상한 소리를 질러댔다. 하지만 처녀의 목이 떨어짐과 동시에 그들 주변의 마법진에 서서히 빛이 어리기 시작한 것을 본 알테리온은 희열에 들떴다. 제롬이 그 다음 구절을 읊기 시작하자 그는 한 발짝 옮겨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방금 들었어?"

반지가 이끄는 대로 미궁 같은 지하를 따라 내려가던 카시야 일행은 문득 멈춰선 루크의 말에 숨소리마저 조용히 죽였다. 분명, 어디선가 비명소리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꽤 많은 수의 경비병들을 죽인 다음이었다. 반지가 이끄는 방향으로 향하면 향할수록 더 많은 병사들이 튀어나왔다. 그것은 그들이 제대로 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확신을 주기도 했다. 그리고 이제 들리기 시작한 비명에 그들은 정확한 방향을 가늠할 수 있었다.

급해진 마음에 내달려 비명소리에 가까워지자 방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많은 경비병들이 칼을 빼드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침입자다!"

경비병들이 달려드는 동시에 루크의 대검이 공기를 가르고 그 사이로 미끄러지며 빠져나간 카시야가 그 뒤에 있던 병사들의 다리를 잘라냈다. 분대원들 역시 저마다 자신 있는 무기를 꺼내 하나씩 처리하는 동안 아르헨은 그 곁에서 마법 공격을 시전하던 마법사들을 막았다.

루크는 카시야에게 호언장담한 게 허풍이 아니라는 것을 직접 보여주었다. 그가 휘두르는 검의 위력은 무시무시할 정도였다. 꾸역꾸역 밀려드는 병사들을 광풍과도 같은 검기로 날려버리고 가차 없이 검을 내질러 별로 힘도 들이지 않는 것처럼 여유롭게 여럿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가 다 처리하지 못한 이들의 목숨은 카시야가 양손에 쥔 팔치온을 들고 검무를 추듯 움직이며 처리했고, 카시야가 놓친 이들은 분대원들이 처리했다.

카시야는 루크의 위력을 놀라워했고, 분대원들은 카시야의 위력을 놀라워했다. 그리고 그 모두는 자신들의 뒤에서 끊임없는 생명력의 축복으로 그들의 체력을 지켜주고 있는 아르헨에게 경외감을 느꼈다.

제롬이 바깥의 소란을 눈치 챈 것은 절망의 기도문 열 번째 구절을 읽고 있을 때였다. 알테리온이 세 번째 아이의 머리를 칼로 쳐낸 뒤 언뜻 들린 날붙이가 부딪치는 소리에 제롬이 잠깐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무슨 일이냐?"

눈부시게 밝은 빛을 내고 있는 마법진 안에서 알테리온은 점점 젊어지고 단단해지는 자신의 육체에 황홀경을 느끼다 갑자기 끊긴 기도문의 운율에 벌게진 눈을 돌려 제롬을 쳐다보았다.

"방해꾼들이 침입한 모양입니다. 서두르셔야겠습니다."

그 말에 알테리온이 짐승처럼 으르릉 거리는 소리를 냈다. 다급해진 기도문 소리에 역시나 여유가 사라진 칼날이 네 번째, 다섯 번째, 여섯 번째 아이의 목을 차례로 쳤다. 하지만 그들이 서둘렀음에도 불구하고 단단히 잠긴 문 앞에 누군가가 몇 번 제 몸을 부딪치는 것 같은 소리가 나더니 이내 '쾅!' 하는 굉음을 내며 마법으로까지 보호해 둔 철문을 쓰러뜨리고 말았다. 시야마저 진동하는 것 같은 충격 사이로 서로를 확인한 그들은 양쪽 모두 경악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루…크 페레이아…!"

먼저 아는 척을 한 것은 알테리온이었다. 그는 제가 뽑아 키워두니 홀랑 1황자 쪽으로 붙어먹은 황실 기사단의 젊은 검귀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두가 제 머릿속에서 제 눈앞에 펼쳐진 끔찍한 상황을 파악하려 마비가 되어 있을 때, 아르헨이 재빨리 정화의 기도문을 외우며 손 안에서 밝은 빛을 뿜어 피 냄새 가득한 방 안을 물들였다. 그것은 거의 대마법사와 비견할만한 강력한 신성력이었고, 제롬은 자신의 야망을 꺾은 이가 히드레이 교의 대신관이라는 것을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빌어먹으으을!!!"

제롬이 이를 바드득 갈며 아르헨을 향해 공격 마법을 시전했지만, 워낙에 강한 신성력의 보호를 받는 대신관에게는 그 어떤 것도 먹혀들지 않았다.

제롬은 분노 때문에 속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이미 오래 전에 불살라져 몇 장 남지 않은 금서의 페이지들을 모아 거기에 자신의 뼈를 깎는 노력과 오랜 연구로 재현해낸 카테르 신 강림 의식이 성공 직전에 파훼되어 버렸으니, 진심으로 대신관에게 살의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붉게 빛나던 마법진은 물을 뿌린 모닥불처럼 차게 식어 요요할 정도로 아름답던 그 모습을 잃어버렸으니, 카테르 신을 완전히 불러내는 것은 실패한 것이다. 하지만 열여섯 명 목숨 어치의 카테르 신성력을 받은 알테리온은, 제롬이 계획했던 만큼은 아니더라도 마력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 무리는 전혀 없을 만큼 강해져있었다. 그는 급한 대로 강한 결계를 친 뒤 루크를 향해 검을 휘두르려는 알테리온을 말렸다.

"폐하! 지금 저 조무래기들이 급한 게 아닙니다! 어차피 카테르 신을 완전히 부르는 것은 실패했으니 후일을 기약하기로 하고, 지금은 빨리 마력을 흡수하러 가야 합니다."

그 짧은 사이에도 제롬의 결계는 아르헨의 신성력에 서서히 금이 가고 있었다.

알테리온은 루크를 매섭게 쏘아보다가 몸을 돌렸다. 제롬은 정말 악마와 같은 흉흉한 눈빛을 한 알테리온을 데리고 미리 준비해둔 공간 이동 마법진 위에 가 섰다. 그리고 마법진이 발동하는 순간 결계가 부서졌다.

"놓쳤어! 어디로 향한 거지?"

루크가 다급하게 카시야를 찾았다. 그녀의 반지에 의지해 황제가 움직인 곳을 찾아야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카시야는 아까부터 딱딱하게 굳어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눈치 챈 루크가 그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아…!"

살아남은 아이가 단 하나…. 꽁꽁 묶인 채 기절도 못하고 넋이 빠진 아이 곁에는 방금 목이 잘려 아직 뜨끈한 피를 쏟고 있는 시체 열여섯 구와 그 곁에 아무렇게나 떨어져있는 머리가 열여섯 개 있었다. 처참한 장면이었다. 얼어붙어있던 이들 중 가장 먼저 발걸음을 옮긴 것도 카시야였다. 그녀는 곧장 묶여 있는 아이에게로 다가가 또다시 비명을 지르기 시작한 아이를 꽉 묶고 있는 밧줄을 끊어주고, 제멋대로 경련하는 아이의 몸을 붙든 채 가볍게 뺨을 때렸다.

"정신 차려."

낮고 차갑게 울리는 카시야의 목소리에 아이는 벌벌 떨기는 했지만 더 이상 소리 지르지는 않았다. 아마 극도의 공포가 목소리마저 막아버렸는지도 모른다. 몸은 사시나무 떨리듯 벌벌 떨리고 있었으니까.

"널 데리고 여기서 나갈 거다. 하지만 여기서 나간다고 해도 살아남을 수 있을지 말지 장담하지 못해. 그따위로 벌벌 떨고 있다가는 이번에야말로 죽게 될 거다. 그러니, 정신 바짝 차려."

아직 여덟 살을 넘겼을까 말까한, 방금 곁에서 자신을 뺀 다른 아이들이 무참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본 아이에게 좀 더 다정히 말해줘도 좋을 법 했지만 카시야는 그러지 않았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 상황에서 '걱정하지 마라, 넌 이제 살았어!' 따위의 기대감을 심어줬다가는 아이의 긴장이 풀려 애먼 칼날에 금방 죽어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그녀는 조금 잔인해보여도 일단은 최대한 이 아이를 움직이게 만들고자 했다. 그리고 그녀의 감정을 느낄 수 없는 목소리는 아이에게 방금까지의 상황이 마치 꿈이었던 것처럼 느껴지게 만들어, 정말로 곧 죽을 것 같던 아이를 비틀거리나마 걷게 만들었다.

"가자. 마력을 흡수한다고 했어. 이번엔 에르논이 위험하다."

점점 더 차갑게 가라앉는 카시야의 목소리가 피 칠갑된 방 안에 울렸다. 분대원들 중 힘이 좋은 마커스가 아이를 들쳐 업자 그들은 다시 빠르게 복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황제는 카테르 신 강림 의식을 방해받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게 틀림없다. 그런 생각을 했었더라면 의식을 치르던 그 방 앞의 경비병이 지금 마력 흡수를 위한 홀 앞에 세워진 수만큼은 있었어야 했으니까. 혹은, 그에게 마력의 흡수가 훨씬 더 중요한 일이었을 수도 있고 말이다.

반지가 떨리는 방향을 향해 달리던 그들은 경비병들로 빼곡히 둘러싸인 거대한 홀을 발견했다. 그들이 도착한 것은 그 홀의 3층에 있는 수많은 아치형 입구 중 하나였고, 맨 밑바닥에는 원으로 된 세 개의 마법진이 삼각형을 이루며 그려져 있었다. 별로 좋지 않은 상황이라는 것은 금방 파악할 수 있었다. 그 세 개의 마법진 중 하나가 이미 빛을 발하며 발동하고 있었는데, 그 안에는 이미 바닥에 쓰러진 에르논이 어떻게든 벗어나보려고 바르작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제기랄…!"

카시야는 짧게 이를 갈았지만 이내 맞은편의 루크와 아르헨을 향해 눈을 마주치고는 작게 속삭였다.

"아르헨 님. 저희가 저 아래층까지 내려가는 동안 엄호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어떻게 내려가겠다는 거야?"

묻기는 아르헨에게 물었는데 루크가 끼어들었다. 카시야는 별 대답도 없이 허리춤에 매어 놓은 로프를 꺼내들었다.

"네가 밧줄 타고 내려갈 동안 저기 깔린 마법사들이 널 가만 둔다든?"

"그러니까 엄호를 부탁드리는 겁니다."

"정신 차려! 내려가면? 저 대마법사도 뚫고 나오지 못하는 마법진을 네가 무슨 수로 뭘 어쩌게? 개미떼처럼 깔려있는 병력은 눈에 보이지도 않아? 개죽음하러 들어온 거냐?"

루크가 험악하게 쏘아붙였다. 그는 카시야가 에르논을 보더니 이성이 마비된 것 같다고 생각하며 기묘한 불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전생에서 수많은 '불가능한 미션'에 투입됐던 카시야에게 지금 이 상황은 또 하나의 미션일 뿐이었다.

"황제가 하는 짓을 구경만 하려고 들어온 것도 아니잖습니까."

평소보다 날카롭게 벼려진 에메랄드 빛 눈동자는 일말의 흔들림도 없었다. 루크는 이제 그녀가 멋대로 적들 앞에 뛰쳐나갈까봐 조마조마해지려는 참이었다. 그때였다.

콰앙-!!

무언가 엄청난 에너지가 그들을 덮쳤다.

아치의 벽 뒤에 바싹 붙어 몸을 숨기고 있었으니 망정이지, 정면으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더라면 크게 다쳤을 수 있겠다 싶을 정도의 폭발이었다. 그 순간 카시야는 뭔가 익숙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전혀 기억나지는 않는데 언젠가 마주쳐본 적 있는 폭발의 느낌이랄까.

'마력 폭발!'

바닥에 납작 엎드려 머리를 감싸고 있다가 조심스레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카시야는 황급히 에르논이 쓰러져있던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마법진의 빛은 약하게 사그라들고 있었지만, 에르논의 몸 주변에는 보라색의 빛무리가 둥실둥실 떠다니는 것 같았다. 그는 여전히 뭔가를 괴로워하고 있었는데 그 때 맞은편 멀리에서 아까 들은 기억이 있는 목소리가 울렸다.

"결박의 주문으로 제 2 마법진까지 끌고 와라! 어서!"

제롬의 목소리였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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