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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홍의 카르마-117화 (117/134)

00117 진격(9) =========================

"에르논이 마력 폭발을 일으켰군."

카시야와는 다른 편을 살피고 있던 루크가 나직하게 말했다.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방금까지 촘촘히 홀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이 돌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카시야가 그들의 피해를 알 수 없었던 것은 그들로부터 신음소리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이 죽는 줄도 모르고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마법사들은 2층의 난간 뒤에 숨어있었던 데다 에르논이 이상 증상을 보이자마자 가까스로 펼친 보호 마법으로 그나마 멀쩡한 것 같았지만 여전히 불안정하게 비틀대는 에르논을 보며 다들 긴장한 얼굴들이었다.

방금 제롬이 소리친 덕분에 정신 차린 마법사들은 일사불란하게 주문을 외우며 에르논을 향해 두 손을 뻗었다. 거기서 뻗어나간 빛줄기가 에르논의 몸을 얽어매더니 몸부림치는 그를 천천히 두 번째 마법진 위로 옮겨나갔다. 그리고 그 곁에 있는 다른 마법진을 향해 알테리온이 천천히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의 손에는 한 눈에 보기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검이 들려있었다.

"성물이에요!"

아르헨이 작은 목소리로 경악했다. 그가 꿈에서 본 '악에 물든 마법진'과 '성물'이라는 조건이 채워졌다는 것은 곧 성물이 저 마법진 위에서 사라질 위험에 처할 것이라는 말이었다. 그러기 전에 성물을 탈취해야 하지만, 방금의 어마어마한 마력 폭발에서도 상처조차 입지 않은 알테리온에게서 어떻게 카라볼그를 빼내올 것인가는 그로서도 알 길이 없었다.

그 사이 카시야는 로프를 풀어 바로 앞에 있는 난간에 재빨리 걸었다. 그 모습을 본 분대원들 역시 똑같이 로프를 난간에 걸고 루크가 말릴 새도 없이 3층 아래의 바닥을 향해 벽을 타고 내려갔다. 마법사들이 에르논을 결박 하느라 이쪽에 힘을 쓸 수 없고, 지키고 섰던 병사들이 전멸한 지금이 유일한 기회였다. 루크 역시 욕설을 내뱉으며 로프를 난간에 걸었다. 아르헨은 신성 보호의 기도문을 외우며 낙하하는 일행들이 공격받을 것을 대비하고, 만에 하나 줄을 놓쳐 바닥에 떨어지더라도 큰 충격을 받지 않도록 손썼다.

멀리서 아까 자신의 숙원 사업을 망친 이들이 또 다가오는 것을 본 제롬의 눈이 뒤집혔다.

"이 버러지 같은 것들이!"

제롬은 무어라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양팔을 벌리고 그들을 향해 손을 내뻗었다.

"조심하세요!"

에르논의 외침이 아니더라도 카시야 일행은 자신들의 앞을 향해 쇄도하는 뱀의 아가리들을 보고 있었다.

"비켜!"

팔치온을 꺼내드는 카시야의 팔을 잡고 제 뒤로 밀친 루크는 전방의 땅바닥에 검을 쾅 내리치며 엄청난 검기를 뿜어냈다. 검을 휘두르며 만들어냈던 검기와는 비교할 수 없는 마나의 압력에 제롬의 마나가 밀렸던지, 허공에서 실체화하며 다가오던 뱀의 머리는 파스스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마나를 수련하는 카시야는 방금 루크가 꽤 많은 마나를 방출해버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 에르논은 속절없이 두 번째 마법진 위까지 거의 다 끌려가 있었다.

"루크! 황제를 맡아주십시오! 대원들은 2층의 마법사들을 방해하고! 아르헨 님! 뒤를 부탁드립니다!"

사라지는 뱀의 형상 사이를 뚫고 제롬을 향해 달려가는 카시야의 외침에 모두가 어금니를 꽉 물고 자신에게 배정된 적을 향해 달려갔다.

"제롬! 어서!"

"이, 이이익!"

알테리온이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루크에 대항할 준비를 하면서도 제롬을 향해 재촉했다. 하지만 제롬으로서도 아주 난감한 상황이었다. 마력 추출을 위한 마법진 위에는 에르논만, 마력 주입을 위한 마법진 위에는 알테리온만 올라서야 하는 상황인데 지금은 에르논도 마법진에 아직 닿지 못했고, 황제가 서있는 마법진 위에는 자칫하면 루크까지 올라설 판이었다. 그 사이 저에게는 이렇게 혼란스러운 상황인데도 차갑게 빛나는 녹색 눈의 괴물이 달려오고 있는 것이다. 마력 흡수와 주입을 위한 마법진을 발동시키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력과 마나 역시 필요했기 때문에 큰 힘을 쓸 수는 없었던 제롬은 급한 대로 자잘한 공격 마법을 펼쳐 카시야를 막아보고자 했다.

그 사이 알테리온과 루크 역시 강철 검을 맞부딪치며 대치하기 시작했다. 젊음과 힘을 얻게 된 알테리온은 루크가 놀랄 정도로 강했다. 25년간 정복전쟁을 벌였던 과거가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그는 몸소 보여주고 있었다. 상대의 검을 유혹하듯 끌어들이다가 갑자기 방향을 바꿔 비어있는 틈을 노리는 대범한 검술은, 오랜 실전으로 몸에 익은 노련함이 아니라면 따라 하기도 위험할 정도였다. 루크가 아니었더라면 이미 옆구리나 팔 한 쪽이 금방 베였을 것이다. 두 사람은 치열한 접전을 벌이며 마법진의 가장자리 선을 어지러이 밟았다.

자신을 막기 위해 배리어를 만들어 버티면서도 알테리온과 루크가 밟고 서있는 자리를 끊임없이 흘끗거리는 제롬을 눈치 챈 카시야는 고개를 돌려 루크에게 소리쳤다.

"마법진 안으로 움직이십시오!"

자신의 생각을 읽힌 제롬은 이를 바득 갈며 오른손을 쥐어 마나로 이루어진 검날을 만들어냈다.

"망할 년! 계집 주제에 건방지게 구는 것도 여기까지다. 죽어라!"

그는 있는 힘껏 푸르스름한 마나의 검으로 카시야를 찌르려 했다. 보통의 검으로는 마나 자체로 이루어진 검을 쳐낼 수도 없으니, 제롬은 곧 이어 제 앞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질 카시야의 얼굴을 잔뜩 기대했다.

파앙-!

하지만 그의 기대가 무색하게 그의 푸른 마나 검은 '보통 검' 앞에서 강한 파공성을 내며 사라져버렸다.

"뭐, 뭐야! 이럴 리가!"

들고 있던 팔치온 두 개를 X자로 겹쳐 자신에게로 날아드는 마나의 검을 파훼시킨 카시야가 엇갈린 검 뒤에서 눈을 빛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쩍 벌린 채 공기 중으로 흩어진 제 마나 덩어리의 파편을 눈으로 쫓던 제롬은 엇갈려있던 팔치온이 펼쳐지는 순간 뒤쪽으로 날아갔다. 몸 앞에 쳐둔 보호 마법 덕분에 팔치온에 부딪혀 날아간 것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이미 몸이 3등분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네, 네 년…. 마나를 쓸 줄 아는 구나…!"

말로 뱉어내면서도 믿기 힘든 일이었다. 황실 기사단 내에서도 마나를 검에까지 흘려 넣어 쓸 줄 아는 이가 많지 않았다. 그런데 건장한 그들과 비교했을 때 늘씬하기까지 한 여자가 쌍검을 자유자재로 휘두르고, 거기에 마나까지 쓸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 그지없었다. 바닥에 쓰러진 자신을 향해 곧바로 달려와 쉬지 않고 자신이 친 보호막을 내리치는 카시야를 보며 제롬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마법진을 발동할 최소한의 마력과 마나는 남겨두어야 하는 제롬으로서는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할지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그때, 2층의 마법사들에게 달라붙던 그녀의 분대원들이 마법에 밀려 바닥으로 떨어질 듯 난간에 매달려 있는 게 눈에 띄었다.

"네 부하들 꼴을 보거라! 어리석은 네 뒤를 쫓다가 저렇게 죽는구나!"

"으아악!"

때마침 바닥으로 추락한 분대원이 소리치자 제롬 역시 그것 보라는 얼굴을 하고 제 앞의 카시야를 다시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는 오로지 자신을 죽이려고 작정한 듯 계속 되는 칼날 밖에 볼 수 없었다. 이 여자는 제 부하가 죽는다고 해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사실에 마른 침이 꼴깍 넘어갔다. 점점 쇠해가는 마나 때문에 보호막에 금이 가고 있었다. 그는 이번엔 아니면 말고 식으로 에르논을 향해 마나 검을 내던졌다. 그것은 어떤 이유가 있어서라기보다는 무엇이든 해보려던 몸짓의 결과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가 던지는 마나 검을 따라 카시야의 시선이 움직였다.

"에르논!"

뒤를 돌아보자 에르논은 어느새 마법진 위까지 끌려가 쓰러져 있었다. 하지만 제롬이 던진 마나 검은 그의 몸에 닿자마자 펑, 하는 소리를 내며 파훼되어버렸다. 카시야가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던 그 사이, 제롬은 재빨리 몸을 움직여 카시야의 칼날 앞에서 벗어난 뒤 다시 그녀의 목을 겨눠 마나 검을 내질렀다. 그 순간 자신을 부르던 그리운 목소리에 반응하던 에르논의 눈이 반짝였다.

"데…테르…익스플로시오!"

넘치는 마력은 일직선으로 제롬을 향해 쏘아졌다. 하지만 눈앞이 흐린 탓에 그를 정확히 맞추지 못하고 저 멀리 날려버리는 것에만 겨우 성공한 채 에르논은 다시 제멋대로 쿵쾅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괴로워했다. 또다시 마력 폭발을 일으킬 것 같은 느낌 때문에 미칠 것 같았다. 마력 폭발을 일으켜야 상태가 괜찮아질 테지만, 지금 폭발하면 카시야까지 그 자리에서 죽어버릴 게 뻔했기 때문이다. 마력 폭발로 그녀를 두 번 죽일 수는 없었다.

"에르논! 정신 차리십시오!"

흐려지려는 의식을 뚫고 카시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왔냐고, 제 정신이냐고 타박하고 싶은데 가쁜 숨을 쉬는 것 밖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카시야는 에르논을 부축하고 마법진 밖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무엇이 되었든 그가 이 마법진 위에 있으면 안 될 것 같았다. 흘끗 황제 쪽을 쳐다보니 그는 루크와 검을 맞대느라 마법진 밖으로 완전히 빠져나온 상태였다. 2층에서는 분대원들이 단검을 휘두르며 마법사들을 해치우려 하고 있었지만 그들 역시 약한 마법사들은 아닌지 보호 마법을 펼치며 간간이 공격까지 하고 있었다. 2층에서 떨어진 분대원 하나는 어디가 부러졌는지 제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지만, 멀리서 아르헨이 생명력의 축복을 쏘아 보내주는 중이라 죽지는 않을 것 같았다. 축 늘어진 에르논이 꽤 무겁기도 했거니와 분대원들이 묶어두지 못한 몇 명의 마법사들이 다시 결박 마법을 쏘아 보낸 탓에 에르논을 마법진 밖으로 꺼내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때 부축한 에르논이 뭐라고 웅얼거렸다.

"에르논! 에르논! 정신 차리셔야 합니다! 이 마법진 밖으로 벗어나야 해요!"

"도… 망가…. 터지… 터질 거…."

"에르논?"

괴롭게 끅끅 거리던 에르논이 갑자기 고개를 뒤로 확 젖히더니 무언가를 참아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게 느껴졌다. 도대체 무엇이 그를 이렇게 괴롭히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카시야는 처음으로 무력감을 느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고작 마법진 안으로 끌려들어가는 그의 몸을 잡고 버티는 것뿐이라는 것이 무섭도록 절망으로 다가왔다. 더욱 막막한 것은 어느새 도로 마법진 안으로 들어간 알테리온과 에르논을 보고 제롬이 어떤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에르논, 제발 힘내요! 제발!"

절망스럽게 에르논의 귓가에 속삭이던 카시야의 음성은, 그러나 에르논에게 금방 터질 것 같은 제 마력을 다른 쪽으로 쏟아낼 수 있는 힌트를 주었다. 제 귓가를 간질이던 숨소리에 '바람'을 연상시킨 에르논이 거대한 회오리를 일으키는 마법을 시전한 것이다.

"이미테…스…벤티!"

가까스로 외운 주문이 끝나는 동시에 그의 몸에서는 엄청난 바람이 뿜어져 나왔다. 마력 폭발만큼 많은 마력과 마나를 소비하면서도 마력 폭발만큼의 살상력은 없어서 거의 쓰지 않던 주문이었는데, 지금 이런 상황이 되자 자신이 그 주문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감사했다. 하지만 그것은 마력 폭발만큼의 살상력을 갖추지 않았을 뿐, 보통의 마법사들로서는 꿈도 꿀 수 없을 만큼의 강력한 공격 마법이었다. 마법을 시전한 에르논 본인은 물론 카시야며, 2층의 마법사들과 분대원들이며, 루크와 알테리온까지 휩쓸려 넓은 홀의 여기저기로 날아갔다. 그 와중에도 이미 시동 주문이 읊어진 마법진에서는 서서히 빛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제 손이 에르논을 놓치고, 제 몸이 불가항력에 밀려 공중에 붕 떴다는 것을 인지했지만 카시야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홀 안을 휘도는 바람은 적아를 구분 짓지 않고 모두를 휘날렸다. 아르헨은 카테르 신 강림 의식에서 살아남은 아이를 붙들고 가까스로 신성 보호막을 칠 수 있었지만 그 외의 모든 이들은 가을바람에 휘도는 낙엽들처럼 홀 안 여기저기로 날리다가 부딪혔다. 가공할 위력의 회오리바람은 곧 가라앉았다.

"흐윽…. 쿨럭…!"

카시야는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충격에 여기저기가 아픈 몸을 겨우 들어 올리며 고개를 들었다. 아찔한 정신 때문에 눈앞에 펼쳐진 장면이 제대로 머릿속에 인식되지가 않았다. 왠지 기묘한 빛만이 어른거리는 것 같아 제가 헛것을 보나 싶어졌다. 다만 청각은 별 문제가 없는지, 주변에서 콜록거리며 신음을 흘리는 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재수가 없다면 자신의 분대원들 중에서도 방금의 회오리바람 때문에 목숨을 잃은 이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머리를 부딪쳤나…? 왜 이렇게 어지럽지? 얼른 일어나서… 빨리… 에르논을 피신시켜야 하는데….'

빙빙 도는 정신을 붙들어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자꾸만 몸도 휘청이고 눈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일렁이는 빛무리만이 점점 밝아져오고 있었다.

'뭐지?'

카시야는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빨리 에르논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때, 귀를 찢는 것 같은 비명이 들렸다.

"카시야!!!!"

그 비명과 함께 엄청난 충격이 그녀의 명치를 꿰뚫었다.

============================ 작품 후기 ============================

고구마 구간이 답답하실 것 같아, 3연참 갑니다!

+ 그녀의밤 님. 후원쿠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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