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18 진격(10) =========================
아르헨은 자신의 꿈에서 봤던 최악의 상황을 눈으로 확인하고야 말았다. 그것은 분명 순식간에 일어난 일임에도 굉장히 천천히 흐르는 장면처럼 보였다.
에르논이 주문을 외우기 직전, 황제에게 밀리던 루크가 온힘을 다해 황제의 검을 내리쳤고, 순간 황제의 손에서 빠져나온 카라볼그는 회오리에 휩쓸려 홀 안을 휘돌다가 에르논이 끌려가던 마법진 위에 떨어졌다. 에르논에게서 튕겨져 나온 카시야는 역시나 홀의 공중을 몇 번 빙그르르 날며 여기저기 부딪히다가, 황제가 밟고 섰던 마법진 위로 떨어졌다.
"아… 안 돼…!"
아르헨이 뭘 어찌하기도 전에, 이미 발동하고 있던 마법진은 제 안에 새겨진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기 시작했다. 마력을 흡수하는 마법진 위에서 카라볼그가 또다시 붕 떠오르더니 점점 하얀 빛이 되어갔던 것이다. 꿈에서처럼 그대로 사라지는 건가 했는데, 그보다 더 안 좋은 상황이 발생했다. 검 형태의 하얀 빛무리가, 맞은편 마법진에서 비틀거리며 일어난 카시야의 가슴으로 순식간에 날아가 박혔던 것이다.
"카시야!!!!"
아르헨은 카라볼그가 날아가기 시작하자 저도 모르게 카시야의 이름을 부르며 벌떡 일어났다. 꿈에서 카시야의 가슴을 찔렀던 희끄무레한 검. 그것은 꿈이라서 흐릿하게 보였던 것이 아니라 미래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던 것이었다!
검에 박힌 카시야가 내뱉은 "커헉!"하는 소리가 아르헨의 귀에까지 들린 듯 했다. 검이 날아와 박힌 그대로 뒤로 넘어가 널브러진 카시야의 몸은 바닥에 부딪힌 충격에 한 번 튕기고는 그대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신검은 그녀에게 박힌 이후 서서히 공기 중에 산란하듯 사라져버렸다.
"이럴 리 없어…. 이럴 리가…."
신의 사도인 카시야가 성물인 신검에 의해 죽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꾼 예지몽이 한 치의 변경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그대로 현실화되어버린 것이다. 아르헨은 굳어있던 두 다리에 힘을 주어 정신없이 아래층을 향해 뛰었다. 살려야 했다. 목숨만 붙어있기를, 제발 아직 헤바의 곁에 다다르지만 않았기를 간절히 빌며 끝도 없이 이어지는 것 같은 계단을 내달렸다. 자신의 뒤로 조그만 아이가 넘어지고 비틀거리면서도 뒤따라오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할 수 없었다.
아르헨이 홀로 들어서서 카시야를 향해 내달릴 때쯤엔 다른 이들도 서서히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특히 카테르 신의 신성력을 부여받은 알테리온은 확실히 어느 한 구석 다친 곳도 없이 멀쩡히 일어섰다. 제 주변에 루크가 없음을 확인하자마자 그는 자신의 카라볼그부터 찾았다. 하지만 분명 확실한 존재감을 갖고 눈에 띄어야 할 카라볼그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다시 제롬을 찾았다. 제롬이라면 어디 있는지 알 것 같았다. 널브러진 이들이 많아 찾기 어려울 거라 생각했던 제롬은 의외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벽에 머리를 박고 피를 흘리며 죽어있는 꼴이긴 했지만 말이다.
"으으윽…. 으아아아아악!!"
자신이 꿈꿔오던 날이 완전히 망가졌음을 깨달은 알테리온이 분노에 찬 괴성을 질렀다. 거기 살아남은 모두를 다 죽여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젊어진 뇌가 빠르게 이성적인 판단을 이끌어냈다. 어차피 중요한 적은 그들이 아니었다. 지금쯤 타셀이 아르카나 코앞까지 다가왔을 것이다. 카라볼그를 부활시키려던 계획이 어그러진 지금으로서는 최대한 빨리 작전을 짜고 군사를 동원해 타셀을 막아내야 했다. 여기서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곧장 몸을 돌려 홀을 빠져나갔다. 그가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던 카르고 후작은 30대처럼 젊어진 알테리온에게 깜짝 놀랐지만 젊은 시절의 그 모습 그대로였기 때문에 그가 알테리온이 아니라는 생각은 조금도 할 수가 없었다. 알테리온은 카르고에게 1개 부대 병력을 지하의 홀로 내려 보내고, 성으로 침투한 적들을 전멸시키라는 명을 내렸다. 창밖에는 이미 동이 터오고 있었다.
"나는 반역자 무리를 처단하고 오겠다."
카라볼그는 잃었지만 그래도 타셀을 능가하는 강한 육체를 얻은 알테리온이, 젊은 시절 그 모습 그대로, 아니, 그것보다는 좀 더 광기가 번들거리는 모습으로 복도를 가로질렀다.
"카시야 경! 카시야 경!"
카시야를 부르며 그녀의 몸을 흔드는 아르헨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치료를 위해 서둘러 손 댄 그녀의 몸에서는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마치 통나무 위에 손을 얹은 것처럼 단단한 실체는 느껴지되 그 안은 전혀…. 그것은 시체 위에 손을 얹었을 때 느끼던 감각과 소름끼치리만치 똑같아서 아르헨을 절망시켰다.
"대… 신관…, 흐윽!"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홱 돌리자 어딘가에 부딪혀 다리가 부러진 듯 바닥을 기고 있는 루크가 보였다. 아르헨은 다시 한 번 미동도 없는 카시야를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루크를 향해 달려갔다. 산 사람이라도 살려야 했다. 방금 알테리온이 계단 쪽으로 몸을 돌려 사라지는 것을 봤으니, 곧 그들을 죽이기 위한 병사들이 들이닥칠 것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무엇을 위한 치료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봐야 했다.
그는 카시야가 누워있는 쪽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루크의 이마에 손을 얹고 치료를 시작했다. 카시야 생각에 자꾸 집중이 흐트러지려 했지만 아르헨은 마음을 독하게 먹고 카시야에 대해 포기했다. 이미 생명의 빛이 꺼져버린 것은 인간일 뿐인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군사들이 닥치기 전에 하나라도 많은 아군을 살려야 했다. 루크의 치료가 끝나고 나서는 곧장 근처에 있는 카시야의 분대원에게 달려갔다. 빨리 치료를 하려니 신성력 소모가 심했지만 그는 제 몸에 무리가 오는 것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비척비척 일어나 카시야를 향해 다가간 루크는 멍한 눈빛으로 카시야를 내려다보았다. 왠지 자주 보는 것 같은 그녀의 창백한 얼굴이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
"하…! 지켜주겠다고… 다짐했는데…. 이번에는 꼭… 지켜주겠다고…."
거친 숨을 내쉬던 그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주변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 혼자 평온한 얼굴을 하고 누워있는 카시야의 얼굴을 더 볼 수가 없었다. 그저 미칠 것 같아서, 숨이 너무 막혀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시선 끝에, 팔꿈치로 바닥을 밀며 가까스로 몸을 일으키려는 에르논이 걸려들었다.
"씨이발 새끼!"
그가 곧장 에르논을 향해 달려가 비틀거리는 에르논의 멱살을 잡고 들어올렸다. 뒤로 넘어가려던 보랏빛 눈동자가 겨우 자신을 불태울 듯 노려보는 파란 눈동자와 마주쳤다.
"…페, 페레…이아 경?"
"오오냐, 이 개새끼야! 이 빌어먹을 새끼야! 왜 하필 그때 폭주를 해서!"
벽에 그를 몰아붙이고 멱살을 흔들어대는 루크의 힘에 에르논은 또다시 기절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루크의 눈에 어린 분노가 심상치 않았다. 에르논은 이제까지 루크가 이렇게 이성을 잃은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아직 널뛰는 듯하는 심장 쪽에 힘을 주어 작은 타격 공격을 일으키고는 저를 붙들고 있는 페레이아를 몇 걸음 뒤로 물러서게 만들었다.
"콜록, 콜록! 하아…. 하아…. 갑자기 나타나서 뭐하는 짓입니까?"
에르논은 여전히 벽에 기댄 채 숨을 고르며 루크를 노려보았다.
"뭐하는 짓? 나야말로 네 놈한테 묻고 싶다. 도대체 왜, 너 하나 구하자고 여기까지 온 카시야를 죽여버렸는지!"
"…뭐?"
에르논의 얼굴이 엄청난 정적에 빠져들었다. 숨을 멈춘 듯, 커다랗게 떠진 눈도, 자그맣게 벌어진 입도,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머리카락도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그랬을 터이다. 그런데, 왜 검귀라 불리는 저 남자의 눈가가 젖은 듯 보이는 것일까.
에르논의 고개가 천천히 움직였다. 서 있는 이가 거의 없는 넒은 홀에서, 다른 이들보다 작은 몸집의 누군가가 반듯이 누워있는 게 눈에 띄었다. 숨쉬기를 잊고 있었던 폐가, 이번에는 점점 빠르게 쥐어 짜이기 시작했다.
"아, 아냐…. 아니야. 아니야…."
무엇이 아니라는 것인지, 에르논은 계속 아니라고만 하며 그쪽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가까워질수록 꿈에서 하도 봐서 눈에 익은 누군가의 모습이 점점 선명해졌다. 늘씬하면서도 탄탄하게 짜인 몸, 하얀 얼굴, 밤색의 짧은 머리카락…. 하지만 그 누군가는, 제가 가진 아름다운 녹색 눈동자를 보여주지 않았다. 봉긋하게 솟은 가슴이 오르내리질 않았다. 마치 정물과도 같이 꼼짝하지도 않고 차가운 돌바닥 위에 누워있을 뿐이었다.
"카…시야."
제가 꼭 살리고 싶었던 단 한 사람의 이름이 흐느낌처럼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침입자들을 척살하라!"
멀리서부터 들려오던 수많은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마침내 살아있는 이들을 전부 죽이라는 목소리가 홀 내에 쩌렁쩌렁 울렸다. 황제군의 제복을 입은 병사들이, 이미 죽은 제 동료들의 시체를 밟고 넘어서서 순식간에 홀을 감쌌다. 이미 둘러선 이들의 숫자만 해도 질릴 정도로 많았는데,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발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어느새 눈가를 훔친 루크가 카시야가 누워있는 곳을 향해 다가오더니 그녀를 안아 올리고는 아르헨이 분대원들을 치료하고 있는 한쪽 벽으로 다가가 도로 뉘였다. 에르논은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루크를,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루크에게 들려 옮겨지는 카시야의 뒤를 따랐다.
"죽을 때 죽더라도, 황제 새끼 군대는 한 놈이라도 더 죽이고 가야겠지."
카시야를 바닥에 눕히며 그녀의 이마에 짧게 입 맞춘 루크는 살아서 빠져나갈 희망을 버렸다. 다만, 제 가장 소중했던 다짐을 지키지 못한 슬픔과 분노를 이제부터 쏟아낼 작정이었다. 그 사이, 아르헨의 치료를 받은 분대원들 역시 주변에 널린 황제군의 시체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분대원 중 다섯 명은 이미 숨이 끊어져 아르헨이 살려낼 수 없었지만, 나머지는 뼈가 부러지거나 타박상 정도의 부상 밖에 없어 빠르게 치료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홀을 감싼 병력을 보니 치료한 보람이 없어졌다.
그때 루크를 알아본 부대장이 목소리를 높였다.
"이게 누구신가! 배신자 루크 페레이아 아닌가! 누가 근본 없는 노예 새끼 아니랄까봐 황실 기사단의 명예도 내팽개치고 폐하를 배신하더니, 결국 이렇게 개죽음을 당하게 되시는군 그래!"
하지만 루크로부터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대꾸는 물론이거니와 미간을 찡그린다든가 불쾌해한다는 표정조차 없었다. 그저 제가 든 검의 날이 얼마나 상했는지 확인해볼 뿐이었다. 그 태연한 모습에 부아가 치민 부대장은 문득 그가 지키듯 막아선 등 뒤에 시선을 보냈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알 수 없었지만 눈부시게 아름다운 사람이 하나, 그리고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지만 봉긋한 가슴께가 여자인 게 분명한 사람이 또 하나였다. 여자로 보이는 인물 둘을 제 뒤에 숨긴 것을 보면 그들이 루크의 약점인 게 분명해보였다. 부대장은 비릿하게 웃으며 다시 루크를 향해 으름장을 놓았다.
"네 놈들은 깡그리 다 죽인 뒤 효시할 목 빼고는 짐승 먹이로 던져주고, 뒤쪽에 있는 여자 둘은 지하 감옥의 굶주린 놈들한테 던져주마. 그 놈들은 시체든 아니든 여자이기만 하면 기뻐할 테니까 말야. 크크크큭."
루크를 자극하려던 그 말에 눈이 돌아간 건 에르논이었다. 그의 손에서 새빨간 화염구가 어느새 크기를 키우는 것 같더니, 순식간에 부대장을 향해 쏘아졌다.
"으악, 으아아악!"
부대장의 비명과 함께 지하의 홀에서는 격전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루크와 에르논의 위력을 모르는 이들이 마구잡이로 덤벼들었지만 방금 부대장의 말 때문에 분노로 눈이 뒤집힌 에르논이 시원스레 마력 폭발을 일으키자 황제군은 확실히 바싹 긴장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끝날 것 같던 침입자 척살이, 왠지 상대편에 의한 일방적인 학살이 되지 않을지 두려워진 것이다.
마력 증폭으로 인해 일으켰던 마력폭발 보다는 규모가 작아서 사망자의 숫자는 아까보다 적었지만 에르논의 위력을 깨닫기에는 충분했다. 그것뿐만 아니라 소문의 검귀 루크 페레이아가 휘두르는 검은 상상 이상의 위력이었다. 멍하니 정신을 놓고 있으면 아차 하는 순간 목이 달아날 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