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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홍의 카르마-119화 (119/134)

00119 재림(1) =========================

초반에는 에르논과 루크에 의한 일방적인 학살이라고 해야할만한 상황이 벌어졌다. 한순간이나마 루크는 잘만 하면 이것들을 다 죽이고 여기서 빠져나갈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가졌을 정도였다. 하지만 황제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들을 전멸시킬 마음을 먹은 것인지 지하로는 병사들이 꾸역꾸역 밀려 내려왔다. 게다가 정신을 차리고 일어난 황제 쪽의 마법사들이 보호마법을 시전했기 때문에 에르논의 공격마법의 위력 역시 반감되고 말았다. 홀을 감싼 병사들을 다 죽였나 싶었는데 어느새 새로운 인력으로 대체되어 처음과 똑같은 상황이 되자 에르논의 눈에도 얼핏 절망이 스쳤다. 그들의 앞에는 황제군의 시체가 수북이 쌓여있었다. 양쪽은 잠시 서로를 노려보며 조용한 대치 상황을 맞았다.

에르논의 마력과 마나는 그 사이 착실히 닳아 이제는 바닥이 드러나려 하고 있었다. 그의 하얀 머리카락이 얼굴과 목덜미에 찰싹 달라붙을 정도로 땀을 흘리는 것을 보고 루크는 에르논의 한계가 다가왔음을 깨달았다. 물론 루크 역시 검기를 날릴 때마다 훅훅 빠지는 마나를 느꼈기 때문에 아까부터는 검에만 실어 휘두르고 있는 상태였다. 그의 눈이 다시 홀을 빽빽이 채운 인의 장막을 훑었다.

'이건 못 이겨….'

루크가 마른 침을 삼키며 검의 손잡이를 고쳐 쥐었다. 그리고는 제 옆에서 가쁜 숨을 뱉어내는 에르논을 낮게 불렀다.

"에르논."

그의 부름에 에르논이 피로와 의아함이 뒤섞인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마력과 마나가 얼마나 남은 것 같습니까?"

"…글쎄요. 마지막으로 마력 폭발을 일으키면 이 징그러운 놈들의 1/3 정도는 죽일 수 있으려나…."

"그 정도라면 공간 이동으로 어디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그건 왜요?"

"…카시야와 대신관을 데리고 피엔까지 이동할 수 있겠습니까?"

에르논이 루크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는 여기서 죽을 마음을 먹은 것이었다.

"…공간 이동 마법은, 함께 이동하는 사람이 둘 이상이 되면 굉장히 위험해집니다. 나 이외의 사람이 어디에 착지할지 정확한 계산이 제곱으로 어려워지니까요. 지금 상황에서 저 이외의 둘…. 후우…."

여러 명에 대한 공간 이동 마법은 마력과 마나의 소모도 소모지만 그의 머릿속에서 자신 이외의 인물에 대한 정확한 계산이 이루어져야 했기에 어려운 일이었다. 보통의 마법사 중에는 저 혼자의 공간 이동마저도 하는 이가 드물었다. 대마법사라서 자신 이외의 한 명까지 이동을 시킬 수 있는 것이었는데, 거기에 한 명 더 추가를 한다는 것은 뇌에 과부하가 걸릴 만큼 복잡한 일이었다. 에르논 자신이 죽을 수도 있을 만큼 말이다.

"해 보시죠. 여기서 죽든 공간 이동하면서 죽든 결국 죽을 거라면, 그래도 저 두 사람의 시신이 능욕 당하는 것만이라도 피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페레이아 경은요? 제가 사라지면, 저들은 공격을 쏟아낼 겁니다."

"그래요. 오래 버틸 수는 없겠지요. 그러니까, 그 사이에 얼른 움직이시죠."

두 남자의 눈빛이 얽혀들었다. 에르논이 괴로운 듯 어금니를 꽉 물었다. 이 모든 게 자신 때문에 벌어진 비극 같다는 생각을 떨치기 어려웠다. 자신이 차라리 성에 오지 않았더라면, 혹은 성에 오자마자 황제를 죽였더라면, 카시야의 환영에 속지 않았더라면, 증폭된 마력을 제 안에 담아 버텼더라면….

물론, 어떤 상황도 에르논이 잘못 한 일은 없었고, 그는 최선을 다했다. 그가 예상치 못하고, 어쩔 수 없었던 상황이 벌어져버린 것뿐이지만 루크 페레이아에게 뒤를 맡기고 도망쳐야 한다는 사실이 그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의 말이 맞았다. 자신이 여기서 버티고 있어봤자 지금 저 정도의 숫자라면 분명 머지않아 그들의 일행은 죽는다. 그렇다면….

"내 평생 당신에게 빚을 질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내가 당신을 위해 이러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거 똑똑히 기억해두십시오. 나야말로 카시야에게 갚아야 할 빚이 있어서 이러는 거니까. 결국, 다 갚지도 못하고 이렇게 돼버렸지만. 놈들이 우리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 채기 전에 얼른 움직이십시오."

에르논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뒤를 돌아 거의 다 써버린 신성력에 몸을 벌벌 떠는 아르헨과 차게 식어가는 카시야의 곁에 가 앉았다.

"우리 셋은 여기서 공간 이동해 나갈 겁니다. 성공할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에르논의 설명에 아르헨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나… 나갈 수 있다면, 저 말고 이 아이를…."

그제야 에르논의 눈에 작고 마른 아이가 눈에 띄었다. 에르논으로서는 이 상황에서 웬 어린 아이가 여기 있나 싶었지만 우는 것도 잊고 넋이 나가 있는 아이를 보니 뭔가 사정이 있겠구나, 짐작이 갔다.

"하지만…."

에르논이 아이와 아르헨을 살피는 중, 에르논의 이상 행동을 지켜보고 있던 황제군이 뭔가 낌새를 챘는지 다시 공격을 시작하려 했다.

"놈들은 이제 지쳤다! 반역자를 처단하라! 칼리스토니아를 위하여!"

누군가가 외치며 병장기가 부딪히는 소리가 홀 안을 울리던 순간이었다.

카시야가 눈을 떴다.

"…어?"

얼굴을 쓸며 아르헨을 두고 저 아이를 선택해야할지 에르논이 고민하는 사이, 아르헨의 부릅떠진 눈은 자신이 보고 있는 게 믿기지 않아 깜빡거리는 것도 잊고 있었다.

"부, 분명…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는데…."

"예?"

아르헨의 중얼거림에 에르논이 아르헨을 쳐다봤다가 그의 시선이 박힌 곳을 향해 저 역시 시선을 내렸다.

"카… 카시야!"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아름다운 에메랄드 빛 눈동자가 천천히 굴러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에르논과 아르헨을 쳐다보기만 했을 뿐, 입을 열지도 않았고 미소 짓지도 않았다.

그 사이에도 루크는 부지런히 자신에게 달려오는 병사들을 후려쳤다. 쇠끼리 맞부딪히는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그 소리에 반응한 것인지 카시야가 몸을 일으켰다. 신검에 찔리기 전에는 분명 비틀거리던 그녀의 몸이, 마치 아무렇지도 않은 듯 조그만 흔들림조차 없었다. 에르논과 아르헨은 그저 멍하니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모습을 따라 고개를 쳐들며 바라볼 뿐이었다. 하지만 그 다음 순간, 그들의 시야에서 카시야가 사라졌다.

"으아아악!"

"저, 저, 저게 뭐야!"

갑자기 뜸해진 공격에 거친 숨을 쉬며 눈가를 따라 흐르는 땀을 잠깐 훔친 루크는 다시 고개를 흔들어 아득해지려는 정신을 붙들고 앞을 노려보았다. 그런데 그 잠깐 사이, 분위기가 반전되어 있었다. 어디선가 날아와 툭 떨어진 황제군의 시체가 놀란 얼굴 그대로 굳어 루크를 바라보았다. 그가 당황한 눈을 들자, 거기에는….

"카시야?"

카시야냐고 물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분명 그녀의 외형이었지만, 그녀의 몸놀림은 이제까지 봐왔던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훨씬 빠르고, 훨씬 강하고, 훨씬 무기물 같았다. 그녀의 손에 잡힌 거대한 검이 홀 안의 황제군을 무참히 도륙하고 있었다. 검에 맺힌 새하얀 빛이 새빨간 피분수 사이를 빠져나오며 또 다른 희생자를 찾아 일말의 자비도 없이 달려들었다.

"이… 이게 도대체…."

자기도 모르게 칼을 내린 루크는 엄청난 속도로 시체의 산을 쌓아가고 있는 카시야의 모습을 눈으로 쫓았다. 그 뒤의 에르논과 아르헨, 그들 주변에서 열심히 싸우다 다친 카시야의 분대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쳐다보지 않을 수 없을 정도의 기이하고도 신비한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카시야의 움직임은 인간이라 할 수 없었다. 그녀를 공격하려는 이가 어디서 어떻게 튀어나올지 이미 다 알고 있는 듯, 모든 움직임이 물 흐르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살육의 신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지금 카시야의 모습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소름이 돋을 만큼 완벽한 살육의 현장이었다. 루크가 재빨리 고개를 돌려 아르헨을 쳐다보았다.

"아까는… 분명, 죽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루크의 질문에 아르헨 역시 흔들리는 눈동자로 그를 마주보았다.

"분명, 그녀는 죽었었습니다.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어요. 지금 이건… 저도 처음 보는 상황이라…."

모두가 이해되지 않은 눈빛을 어지러이 주고받을 때, 곁에 가만있던 아이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아까… 아까는 하얀 칼에 찔렸는데… 하얀 칼은 없어졌다가 새로 생겼어요."

그 말에 아르헨의 머릿속에 설득력 있는 하나의 가설이 떠올랐다.

"성물이… 카시야 경의 몸에… 동화된 것 같아요."

그들은 다시 시선을 돌려 카시야를 찾았다. 그녀는 그 사이 시체의 산 사이를 훌쩍 뛰어올라 이쪽으로 걸어오는 중이었다. 제국군의 병사가 전멸한 것은 아니었다. 2층과 3층에 있던 병사들은 제일 아래층에서 자행되는 잔인한 도륙의 현장을 향해 차마 발을 못 떼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이라면, 삶을 갈망하는 생명이라면, 내려가자마자 죽을 게 분명해 보이는 그 곳에 발을 들일 수 없는 게 당연했다. 그들은 잠깐 사이 아군을 백 명 가까이 갈라버린 여자가 태연히 자신의 일행들에게 다가가는 모습을 그저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홀 안에는 기이한 정적이 가득 찼다.

"카… 카시야…."

에르논이 엉거주춤 일어나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하지만 무심한 듯 해보여도 늘 어떤 이야기나 감정의 파편을 느낄 수 있었던 그녀의 눈동자가 지금은 완벽히 타인 같았다. 카시야는 그들 사이로 걸어가더니 주변을 쓱 훑어보고는 순간 하얀 빛을 뿜어냈다. 엄청난 어지러움이 그들을 정신 차리지 못하게 만들었다. 눈을 감아도 하얀 빛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밝은 빛이 그들을 감싸는 것 같더니 곧 어두워지며 방금 느끼던 것과는 전혀 다른 공기의 냄새가 훅 들이켜졌다. 천천히 눈을 뜬 그들은 자신들이 어떤 허허벌판 위에 이동해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미 사망한 분대원들의 시신까지 모두 함께였다.

제일 놀란 것은 에르논이었다. 스물네 명의 공간 이동이라니, 도저히 자신의 머리로는 계산이 안 되는 일이었다. 이것은 마법이 아니었다. 성물이라는 신검에 깃든 어마어마한 신성력이 그녀에 의해 자유자재로 휘둘러지는 것 같았다.

"카시야는… 어떻게 된 겁니까."

에르논이 불안한 눈을 하고 아르헨을 쳐다보며 물었다.

"저도, 확실히 알지는 못하겠습니다. 어쨌든 아까 우리를 여기까지 이동시킨 것은 신성력이 맞습니다. 엄청나요. 이렇게 거대한 신성력은 저도 처음 보는 것이라…. 카시야 경은 공간 이동을 하는 와중에 저의 신성력도 채워주셨고, 다친 이들의 몸까지 치료하셨어요. 기적이라고 밖에는 할 수가 없어요."

카시야가 무언가를 기다리듯 남서쪽을 향해 보고 선 그 사이, 도대체 뭐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스윈델은 겨우 정신을 수습하고 분대원들을 살폈다. 사망자는 다섯이었고 나머지 열다섯은 아까까지 만신창이였지만 공간을 이동해오는 사이 왠지 멀쩡해져 있었다. 그는 저 멀리 선 카시야가 왠지 더 이상 카시야라 부르면 안 될 이 같았지만 그래도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분대장님께 보고 드립니다. 사망자는 알케르트, 렌들러, 레오, 재스퍼, 하레스로 총 다섯 명이며 나머지는 전부 무사합니다."

동료를 잃은 슬픔을 꾹 내리누른 목소리에 카시야의 고개가 그쪽으로 천천히 돌아갔다. 하지만 얼음과도 같은 그녀의 무표정에 괜한 짓을 했나 싶어진 스윈델이 침을 꿀꺽 삼켰다.

"…아직 시간이 좀 있으니, 무덤을 만들어 줘라."

갑자기 떨어진 카시야의 목소리에 모두가 그녀를 쳐다보았다. 에르논은 눈물까지 글썽이고 있었다. 그가 기억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다시는 못 들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피어올랐던 그 목소리가 지금 이 벌판에서 울린 것이다.

스윈델 역시, 이상해진 카시야라 하더라도 아직은 카시야라는 확신을 했다. 아까 황궁의 홀에서 아르헨이 얘기하던 것처럼 신검이 카시야를 완전히 잠식한 것이라면 이런 말을 했을 리가 없다. 저희 같은 눈에 띄지도 않는 평민 기사 따위, 신검이라 해도 무덤을 만들라 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옙! 알겠습니다!"

스윈델은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지도 않고 카시야를 향해 대답한 뒤, 자신의 동료들에게 돌아갔다. 살아남은 열다섯 명의 동료들은 죽은 동료들을 위해 언덕의 양지바른 곳을 파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헥헥~ 3연참 달렸으니, 목요일쯤 올게요.

즐거운 한 주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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