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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홍의 카르마-120화 (120/134)

00120 재림(2) =========================

남쪽을 향해 서서 먼 곳을 보고 있는 카시야의 의식은 사실 아까부터 죽음 이후 겪었던 것과 같은 기묘한 감각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에르논의 마법 때문에 홀 안을 날아다니다 바닥에 떨어져 정신없던 와중에 하얗게 밝아져오던 빛, 누군가 자신을 비명처럼 부르짖던 목소리, 명치에 가해지던 날카롭고 강한 충격…. 그 이후 잠시 그녀의 의식은 암전에 빠졌었지만, 어디선가 ‘칼리스토니아를 위하여!’라는 고함이 들리는 듯하더니 머릿속이 갑자기 환해졌다. 하지만 정말 이상했다. 분명 자신의 몸이고 자신의 의식인데 마치 누군가가 자신을 대신 움직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꿈 속에서 제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몸에 빙의해 그가 하는 짓을 구경만 하는 느낌이랄까. 저 스스로는 아무런 생각도 없고, 아무런 의지도 없었는데 눈앞에는 희한한 광경이 펼쳐졌다. 방금까지는 없었던 것 같은데 제 손에는 보통 때라면 들지도 못할 정도의 거대한 검이 들려 있었고, 황제군의 병사들이 그 검에 의해 순식간에 살해당하며 시체의 산을 이루기 시작했다.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지? 내가 정말 꿈을 꾸고 있나?’

기묘했지만 기분은 꽤 괜찮았다. 쓰러지기 직전까지 느끼던 온몸의 통증도 사라져 있었고, 모든 감각이 예민하게 끌어올려져 있었다. 마약에 취한 듯 모든 것을 다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 아니, 그것은 거의 당연하다 싶은 확신에 가까웠는데 어쨌든 그런 정신적 고양감이 중간 과정 없이 그대로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에 전달되어 에너지를 폭발시키고 있었다.

누군가가 옆에서 기습을 한다는 것조차 너무나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그것도 그가 기습을 하고자 마음을 먹기도 전에 말이다. 그리고 머리에서는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대응이 당연스럽게 떠오르고, 몸은 그 생각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따랐다. 자신을 희롱하려던 녀석들을 신나게 패던 때 느꼈던 것의 몇 배나 되는 카타르시스가 뿌듯하게 느껴졌다.

한참 신나게 몸을 쓰고 났더니 더 이상 죽일 이가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조금 현실감같은 게 들었지만, 의식은 여전히 뭔가 이상한 상태였고 카시야 본인도 그런 상태를 자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스스로가 뭘 어찌 하기도 전에 머릿속에서는 또 당연하다는 듯이 무언가가 몸을 움직이는 명령을 내렸다.

‘아, 맞아. 에르논은 무사한가? 다른 이들도 무사한지 확인해야 하는데….’

제 몸이 발걸음도 가볍게 한 쪽 벽을 등지고 선 일행들에게 향하자 카시야는 반가운 기분이 들었다. 눈으로 대충 훑어보니 에르논과 루크, 아르헨은 무사했다. 분대원들 중 몇 명이 사망한 것 같았지만 전멸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고 들어온 황궁이기 때문에 분대 단위로 생각하자면 성공적이었다.

‘이제 타셀 전하가 올 길목에 가서 기다리면 되겠구나.’

카시야는 어느새 자신의 몸에 깃든 다른 의식과의 경계가 흐릿해지고 있었다. 지금 자신이 하는 생각이 자신의 생각인지, 다른 무언가의 생각인지 알 수 없었다. 역시나 또 당연하게 모두를 데리고 타셀이 다가오고 있는 지역 부근의 언덕으로 공간 이동하면서도, 자신이 이런 일을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별 위화감도 못 느꼈다. 마치 원래부터 할 줄 아는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은 감각이었다.

싸늘하지만 맑은 공기가 폐에 가득 채워지자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현장도 딱히 나쁘다는 느낌은 아니었지만, 계속 피 냄새를 맡다보니 정신이 이상해지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카시야는 남쪽 먼 지평선을 바라보고 섰다.

‘저 부근에서 나타나겠지. 타셀 전하가 오시면 루크에 대해서 먼저 설명을 잘 드려야겠어. 미하일 경이 검을 들고 설치는 거 아닌가 몰라.’

오랜만에 만날 타셀과 미하일의 얼굴을 떠올리며 카시야는 속으로 조금 웃었다. 보나마나 타셀은 걱정스러운 얼굴을 할 것이고, 미하일은 루크에게 눈을 부라릴 것이다. 모든 게 눈앞에 그려지는 듯해서 그리운 기분이 들면서도 유쾌했다.

그때 스윈델이 조심스레 자신의 곁에 선 느낌이 들었다.

“분대장님께 보고 드립니다. 사망자는 알케르트, 렌들러, 레오, 재스퍼, 하레스로 총 다섯 명이며 나머지는 전부 무사합니다.“

스윈델은 의연한 척하려 한 듯 했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슬픔이 잔잔히 깔려있었다. 카시야는 죽은 다섯 명의 얼굴을 떠올렸다. 다들 순박하고, 잔꾀 없고, 거칠면서도 따스한 사람들이었다. 전생에서도 온갖 군대에서 제 밑으로 사병들을 거느리던 카시야였지만, 이번 생에서 맡게 된 이 작은 분대야말로 처음으로 자신이 거느리고 있다는 애착을 가졌던 조직이었다.

"…아직 시간이 좀 있으니, 무덤을 만들어 줘라."

카시야는 일렁이는 마음을 내리누르고 겨우 입을 열었다. 스윈델은 씩씩하게 옙! 하고 대답하며 물러났지만 카시야는 방금 대답하면서 또다시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왠지 말하고 행동하는 게 완전히 내 뜻대로 되질 않는 것 같은데…?’

실제로 그랬다. 스윈델에게도 뭔가 더 얘기하고 싶었는데, 꿈 속에서 달리려고 해도 잘 달려지지 않는 것처럼 말을 하려고 해도 엄청난 저항이 느껴졌다. 무덤을 만들어주라는 말을 하는 것만도 엄청난 힘이 들었다. 제 의식을 당연히 받아들이던 감각에 균열이 생겼다.

‘이상해. 뭔가 이상한데, 정확히 뭐가 이상한지 모르겠어….’

갑자기 혼란스러웠다. 그러는 와중에도 무의식적으로 남쪽 먼 곳으로 계속 시선이 가 박혔다. 이제 곧 자신의 주군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평소 타셀을 대할 때 느끼던 것보다 훨씬 더 큰 기대감이 솟아났다.

그때 자신의 뒤에서 에르논의 목소리가 들렸다.

“…에텔.”

그는 어딘지 초조한 목소리로 그가 붙여준 이름을 불렀다. 속으로 왠지 웃음이 났다.

‘뭘 그렇게 불안해하고 있어요? 황궁에서는 빠져나왔으니 얼굴 좀 펴요.’라고 그에게 말한 줄 알았다. 눈꼬리도 살짝 접으며 미소를 지었다고도 생각했다. 그런데 자신의 뒤에서 불안감을 드러내고 있는 그의 기척은 여전했고, 자신의 시선 역시 남쪽 지평선에 박힌 그대로였다.

‘어…?’

에르논에게 말을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실제로 입을 열어 목소리를 낼 수 있는지 잊어버린 것 같았다. 아까 스윈델에게는 어떻게 말을 했더라…? 일단, 입을 열어야 하는 건가? 목소리는 어떻게 냈었지? 카시야는 머릿속이 하얘지는 것 같았다. 확실히, 지금 자신은 뭔가 많이 이상하다. 하지만 일단 에르논에게 무슨 말이라도 먼저 해주고 싶었다. 그가 너무 불안해하지 않도록, 지금 자신은 여기 있다는 걸 알려줘야 했다.

“…듣고 있으니, 말씀하십시오.”

이 짧은 말을 하는 데 온힘을 다했다. 간신히 건넨 그 말에 에르논이 기뻐하는 기색이 확 와닿는다. 하지만 그는 곧 심각한 얼굴을 하고 다시 물었다.“너… 괜찮은 거 맞아? 내가 누군지 알겠어?”

그 말에 카시야는 남들에게도 제가 이상하게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떻게 해야 자신이 그들을 다 기억하고 있고, 멀쩡한 정신으로 상황을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당황과 혼란이 머리를 잠식하자 몸은 또다시 제가 아닌 다른 의식에 의해 움직였다. 에르논을 다시 등지고 또 남쪽 지평선만 하염없이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가 괴로운 듯 고개를 떨구고 있다는 것을 보지 않고도 알 수 있는데, 그를 향해 돌아설 수가 없었다. 제 몸을 통제하고 있는 어떤 힘이 점점 더 남쪽을 향해 집중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다를까, 아까까지 그저 고요하기만 했던 지평선 근처가 뿌옇게 흐려지면서 스멀스멀 군대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자 가슴이 제멋대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정말 뜬금없었다.

"저게… 뭐지?"

에르논의 얼빠진 목소리에 루크가 다가왔다. 그 역시 눈을 가늘게 뜨고 저 멀리에서부터 이쪽을 향해 가까워지는 흙먼지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흙먼지는 점점 사람들의 형상을 띄기 시작했다. 펄럭이는 검은 깃발이 보일 때 쯤, 루크가 나직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2황자군인 것 같군."

예전에는 특별한 문양을 쓰지 않던 타셀군이 이번에는 검은 바탕에 금색실로 수놓아진 사자의 문양이 들어간 깃발을 높게 쳐들고 있었다.

"그리고 카시야는, 2황자군이 올 것을 기다린 것 같고 말이야."

확실히 그랬다. 카시야는 타셀을 만나기 위해 이곳으로 이동해 온 것이었다. 그 생각이 들자 문득, ‘내가 그걸 어떻게 알고 있었지?’하는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그 의문은 이내 사그라들고 말았다.

2황자군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안 분대원들은 다들 일어서서 정렬했다.

*

"전하! 전방에 누군가가 있습니다. 위험하니 여기서 멈춰 기다려주십시오. 제가 먼저 가서 확인해보겠습니다."

미하일이 진군을 멈추게 하고 뛰어난 기사들 몇과 함께 전방을 향해 달렸다. 이쪽을 보고 서있는 사람들은 마치 그들이 오는 것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점점 다가갈수록 미하일은 자신이 지금 신기루를 보고 있는지 의아해졌다.

"이, 이게…."

거기에 서있는 사람들의 조합은 기이했다. 반가운 얼굴들과 함께 전혀 반갑지 않은 얼굴도 하나 끼어있었는데 다들 그 반갑지 않은 하나에 대해 거리낌 없는 태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제일 반갑게 저를 맞아야 할 카시야가 자신을 분명 보고 있으면서도 무표정했다.

루크를 발견한 미하일 휘하의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들었다. 하지만 미하일은 단번에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들을 막았다. 그는 말에서 뛰어내려 카시야 앞으로 걸어갔다.

"카시야! 야, 인마. 오랜만이면 반가운 척 좀 해라. 우릴 기다린 거냐?"

"……."

"어이! 왜 이래? 그 사이 내 얼굴 까먹은 건 아니지?"

"……."

"…카시야?"

다시 한 번 불러도 응답이 없자 그제야 미하일의 얼굴이 그 옆에 서있던 에르논에게 돌아갔다.

"얘 왜 이래?"

그런데 에르논 역시 두 눈 가득 슬픔만 머금고 고개를 돌려버린다. 그 뒤에 기립해있던 카시야의 분대원들도 어딘지 착잡한 표정을 짓는다. 고개를 돌리니 아무렇게나 주저앉은 루크가 보였다. 언제나 전장에서 검을 맞대던 그가 이렇게까지 허탈해 보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눈앞의 미하일을 향해 투지를 불태우는 것도 아니었고, 당황한 것도 아니었고, 증오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깊은 한숨을 쉬는 것 같은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그의 옆에는 여전히 눈부시게 아름다운 아르헨이 어떤 아이 곁에서 슬픈 눈을 하고 있었다.

"뭐야? 뭐라고 누가 설명 좀 해봐."

그때 말발굽의 진동이 느껴지더니 그들의 뒤로 타셀이 나타났다.

"카시야 경!"

타셀 역시 놀란 눈으로 카시야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카시야가 타셀의 앞에 고개를 빳빳이 든 채로 말했다.

"검은 사자, 타셀 칸 아마리스. 신탁에 따라 그대를 나의 새로운 주인으로 받아들이고 승리를 약속하겠습니다. 대신 그대는 탐욕을 경계하고 초심을 잊지 마셔야 할 것입니다."

카시야가 내뱉은 뜻밖의 선언에 그녀의 뒤에 서있는 무리 사이에서는 쩡 하고 얼어붙는 듯한 경직이 느껴졌다. 타셀과 그의 뒤에 서있는 기사 무리 역시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감히 평민 여기사 주제에 황자의 앞에서 저렇게 건방진 자세라니,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카시야 경?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가?"

타셀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어깨에 손을 댔다. 그런데 그녀의 몸에 닿은 손에서부터 시작해 믿을 수 없을 만큼 청량한 감각이 타셀의 전신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것은 처음 느껴보는 감각이었다. 오랜 진군으로 피곤했던 몸 곳곳이 가뿐해지면서 시야가 확 맑아졌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뱃속에서부터 끓어오르고, 여기서부터 아르카나까지 달려가도 지치지 않을 것 같은 활력이 몸 전체에 넘쳐흘렀다.

"이건… 도대체 뭐…."

타셀이 놀라고 있을 때, 아르헨이 그들의 곁으로 다가왔다.

"제 2황자이신 타셀 칸 아마리스 전하를 뵙습니다. 지금 이 상황에 대해 궁금하신 것이 많으실 줄 압니다. 저희가 알고 있는 것을 아뢰겠습니다만, 일단 저희도 짐작만 할 뿐 정확한 상황은 잘 모릅니다."

아르헨은 카시야를 한 번, 다시 타셀을 한 번 쳐다본 뒤 크게 숨을 들이켜고 황궁의 지하에서 있었던 일들을 차분히 설명했다. 생각보다 얘기가 길어졌지만, 그래도 꼭 해야만 하는 이야기들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카시야 경의 몸에 신검이… 깃들었다는 말입니까?"

"네. 저는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신검이 그녀의 자아를 잠식한 건지, 아니면 그녀의 자아가 남아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 상태가 언제까지 지속될지, 그리고 만약 신검이 그녀의 몸에서 사라진다면 그때에도 그녀가 살아있을지… 그것 역시 잘 모르겠습니다."

착잡해 보이는 아르헨의 눈빛이, 그가 지금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님을 알게 해주었다. 하긴, 히드레이 교의 대신관이 거짓말을 해야 할 이유도 없었지만 말이다.

그때 카시야가 또다시 타셀에게 한 발짝 더 다가가더니 그의 목을 끌어안으려는 듯 손을 뻗었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모두가 놀랐지만, 카시야가 좀 더 빨랐다. 그녀는 자신의 손을 타셀의 뒷목에 얹었다.

"나의 눈을 통해 전장을 바라보십시오."

카시야가 타셀에게 속삭였다.

타셀은 자기도 모르게 카시야를 끌어안을 뻔 했지만, 순간 눈앞에 펼쳐지는 환영에 온몸이 굳어버렸다. 카시야가 뒷목에 손을 대자마자 그는 하늘을 나는 새의 시선으로 아르카나 근처에 펼쳐진 황제군의 진영을 내려다볼 수 있었던 것이다. 단순히 그들을 보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황제군의 전 진영 중 어디가 약한지, 어디가 강한지, 누구를 도발하면 흥분시킬 수 있는지, 누가 투항의 유혹에 넘어올 것인지까지 빠르게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카시야의 손이 뒷목에서 떨어지자 타셀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다시 카시야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대는… 누구인가."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이 세계의 변화를 일으키는 광포한 힘이자 절대자의 의지입니다."

타셀은 이제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었다. 눈앞의 카시야는 카시야이되 신검 카라볼그였다. 그에게는 단 한 번 구경해 볼 기회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검이, 지금 제 앞에 제가 아끼던 기사의 모습을 하고 서 있었다. 아니, 어쩌면 자신은 카시야가 눈 뜨던 그날부터 사실은 카라볼그를 마주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언제나 강했고, 언제나 흔들림 없이 아름다운 사람이었으니까. 신검과 너무나 어울리는 모습 아닌가.

하지만 이런 식으로 그녀의 의식을 차지하고 앉은 검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신검을 얻게 되었다는 기쁨 따위는 전혀 들지 않았다. 카시야를 잃었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훨씬 더 컸다.

타셀의 시선이 천천히 그 뒤에 있는 루크에게 가 닿았다.

"페레이아 경까지, 카시야 경이 회유했다고…?"

"개인적으로 빚이 좀 있어서 말입니다."

루크는 타셀이 마음만 먹으면 바로 목이 달아날 수 있는 상황인데도 태연했다.

타셀은 다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한 번 쳐다보았다. 어느새 오전도 반이 지나간 듯한 하늘은 파랗게 맑았다. 자기 자신이 유난히 작게 느껴질 정도로 파랗고 광활한 하늘이었다. 신은 언제나 저기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던 것인가.

타셀은 다시 카시야에게 눈을 맞추더니 입을 열었다.

"여기 있는 모두를 우리 군의 일원으로 여기겠다. 황궁에서 격전을 치르고 겨우 살아 돌아온 이들이니, 말을 내주고 후방으로 빠지게 배려해주어라."

타셀의 명에 미하일의 부하들이 재빨리 되돌아가 말들을 이끌고 왔다. 하지만 루크는 후방으로 빠질 생각 따위가 없었다.

"전하께서 허락하신다면, 황제군을 베어 넘길 수 있는 영광을 함께 누리고 싶습니다만."

"건방지기 짝이 없구만. 이 자리에서 모가지가 떨어져도 시원찮을 놈이, 뭐가 어쩌고 어째?"

루크의 말에 미하일이 험악하게 눈을 부라리며 으름장을 놓았다. 그런 미하일을 타셀이 말리기도 전에 카시야가 입을 열었다.

"검은 사자의 오른편에 미하일 탈리온 메레디스와 엔드로스 루벤 아나클리프, 왼편에 나와 루크 페레이아를 세우십시오. 알테리온 타노스 에반 아마리스의 전력은 현재 검은 사자를 훨씬 웃도는 수준이며, 카테르 신성력을 부여받은 그의 몸은 일반적인 강철 검으로 상처 입힐 수 없으니 검은 사자가 명을 내리면 내가 처리하겠습니다. 단, 검은 사자는 알테리온과 맞부딪혀 그에게 남은 마력의 전부를 완전히 받아와야 합니다. 그것은 내가 도울 수 없는 일이지만, 마력을 전부 받아오게 된다면 분명 스스로도 느낄 수 있을 것이며, 그 순간 그대는 나를 완전히 통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감정한 목소리가 기묘하게 주변인들의 이목을 끌었다. 왜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의 말에 집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절대적인 진리를 말하는 것 같은 느낌에, 아무도 질문조차 하지 못했다.

"아버님이 왜 제국을 그토록 쉽게 완성하셨는지 이제 좀 알 것 같군."

그의 뒤에서 전쟁의 신이 훈수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작품 후기 ============================

이상하다... 분명 오래 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왜 벌써 목요일이 온 거죠?

+ 그녀의밤 님, jina201 님, 말것냥 님. 후원쿠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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