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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홍의 카르마-121화 (121/134)

00121 재림(3) =========================

카시야가, 아니, 정확히는 카라볼그가 조언한대로 기사들이 타셀의 좌우에 자리 잡고, 황궁에서 살아남은 아이를 대신 들쳐 업은 카시야의 분대원들은 대열의 후미로 빠졌다. 아르헨과 에르논은 선봉의 바로 뒤를 따르는 열에 끼었다. 잠시 어수선해졌지만 병사들의 동요는 금방 가라앉았고 타셀은 다시 진군을 명했다.

타셀은 무표정하게 앞만 바라보는 카시야를 흘끔댔다. 그 사이 일어난 일들을 그녀의 입으로 직접 듣고 싶다는 욕구가 일었지만 지금으로서는 요원한 일 같았다. 그렇다고 필승의 검이라 들었던 카라볼그가 제 옆에 있다고 믿기에도 어려웠다. 카라볼그에 대한 내용을 여러 방면으로 모아봤지만, 황제가 그 검과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다는 목격담은 단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불확실성의 집대성 같던 이 전쟁이, 더욱 더 혼란스러워지는 것 같았다.

카라볼그의 전설이 진실이라면 자신은 이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다. 어제까지는 승리한다고 해도 저 자신의 능력과 제 휘하의 기사들 덕분이라 여겼을 타셀은 카라볼그의 존재가 문득 두려워졌다. 검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그 검을 통해 승리한 이후의 자신이 어떻게 될지 몰라 무서웠던 것이다. 아무리 증오스럽다 해도 자신이 알테리온의 핏줄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자신 역시 그처럼 탐욕스럽고 오만해지는 게 아닐까. 어릴 때부터 아비처럼은 되지 말아야지, 몇 번이고 다짐하며 자신의 몸가짐에 늘 날 선 경계를 하고 있던 타셀이었지만 아비가 소유했었던 검이 제 곁에 와 있다는 것 자체가 자꾸 자신이 아비의 길을 따라 걷게 되는 것 같아 소름이 돋았다.

"과욕과 오만도 오점이지만, 지나친 고민과 겸양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믿는 것을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마치 타셀의 머릿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듯 카시야가 말했다. 믿을만한 상관이 제 등을 툭툭 치며 격려하는 것 같은 기분에 타셀은 괜히 멋쩍어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계속 예전의 카시야가 그리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닷새 후, 타셀의 군대는 팔라딘 평원에 도착했다. 팔라딘에 닿기 전 하루 동안은 전군을 푹 쉬게 해서 전력을 높이고, 카라볼그의 눈으로 적군을 파악한 정보를 갖고 다시 작전을 짜기도 했다. 하지만 하루가 다르게 차가워지는 기온은 긴 여유를 부리지 못하게 했다.

팔라딘 평원을 지나면 그 너머에는 아쉬르 숲이 있고, 그 숲을 지나 좀 더 가다보면 피엔과 아르카나가 있었다. 저 멀리, 푸른 깃발이 나부끼는 곳에 황제군이 새까맣게 도열해있는 게 보였다.

"생각보다 숫자가 많은 것 같군요."

미하일이 징그럽다는 듯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전장의 짐승이라 불리는 이가 의외로 담력이 약하군."

때를 놓칠세라 루크가 약을 올렸고, 또 미하일이 으르렁거리며 험악하게 대응했다. 하지만 최후의 전투를 앞에 둔 이들에게는 그마저도 긴장을 눌러보려는 발악으로 보일 뿐이었다.

타셀은 말 옆구리를 가볍게 차서 몇 걸음 앞에 가 섰다. 팔라딘 평원에는 차가운 바람만이 휘돌고 있을 뿐이었지만, 곧 있으면 이 평원에는 적군과 아군을 가리지 않은 뜨거운 피가 뿌려질 것이다. 그는 뒤를 돌아 자신의 군대를 바라보았다. 멀리 있는 황제군에 비하자면 2/3 정도의 병력이었다. 하지만 아즈렐에서부터 다들 이 빌어먹을 전쟁 하나 끝내자고 이를 악물며 따라온 이들이다. 그나마도 케일런이 악착같이 모아둔 물자가 아니었다면 이곳에 번듯한 검 하나 들고 오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이 경악했던 케일런의 행태가 거꾸로 도움이 되었다는 게 아이러니하면서도 낯부끄러웠지만, 어쩌면 이것 역시 헤바가 안배해두었던 일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케일런의 물자가 아니었더라면 황제의 전력을 본 뒤 하얗게 질렸을 테니까.

"칼리스토이아의 용감한 백성들이여! 우리는 오늘 이 팔라딘 평원에서 칼리스토니아의 영광을 되찾을 위대한 전투를 치를 것이다. 그대들뿐만 아니라 나 역시 죽음을 각오하고 나의 모든 것을 걸어 부딪치겠다. 그리고 나를 믿고 따라준 그대들의 충심 역시, 죽더라도 절대 잊지 않겠다."

전군을 향해 마법으로 키워진 목소리가 또렷이 울려 퍼졌지만, 그 목소리는 위압감이 넘친다기보다는 비장하면서도 따뜻했다. 거기 있는 모두는 지금 타셀이 느끼는 긴장, 설렘, 흥분, 두려움, 기쁨, 슬픔, 고마움, 미안함을 전부 느낄 수 있었다. 그 어떤 지배자도 저희들에게 품어주지 않았던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주는 타셀을 향해, 이름 없는 민초들은 제 아랫배에서부터 솟구치는 열의를 힘껏 담아 "검은 사자 군단 만세! 칼리스토니아를 위하여!" 하고 외쳤다. 아르헨은 어느 쪽 편도 들지 않겠다는 신전의 입장을 살짝 눈감아버리고는, 2황자군의 모두를 향해 생명력의 축복을 내렸다.

투지 넘치는 2황자군의 함성을 들은 황제군 역시 어수선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곧 전투가 시작될 거라는 신호나 다름없었다.

"작전은 어제 고지한 것과 변동 없다. 각자 자신의 부대를 이끄는 부대장을 따라 흐트러짐 없이 싸움에 임해주기 바란다."

타셀은 이내 투구를 쓰고 황제군이 드글거리는 전방을 노려보았다.

그때, 알테리온이 한발 앞서 호기롭게 외쳤다.

“이 세상 천지에 어디 감히 부모를 죽이러 득달같이 달려드는 자식이 있단 말인가! 심지어 제 형까지 죽여 놓고는 그 두 눈이 광기에 젖어 후회도 모르는 것 같구나. 이제까지 네가 저질러온 모든 일이 패륜에 지나지 않지만 부모의 사랑은 하해와 같으니, 지금이라도 네 반인륜적인 범죄를 사죄하고 스스로 무릎 꿇는다면 너그럽게 용서해 주겠다!”

그의 말은 그저 도발에 지나지 않았다. 세상 천지에 제 아들 둘을 죽이려고 벌여온 짓을 모르는 이가 제국 내에 아무도 없는데, 그는 여전히 타셀을 괴수 취급했다.

“악마인지 뭔지의 요사한 마법으로 젊어졌다고는 하는데, 머리는 여전히 노인인가 봅니다. 노망난 말을 다 하고 있네요.”

미하일이 코웃음 치며 비아냥거리자 주변의 기사들 역시 다들 쓴웃음을 지었다. 한때 이 넓은 영토를 큰 피해도 없이 정복했던, 자신들이 충성을 바쳤던 위대한 군주는 어디 있는가. 저런 탐욕에 물든 마귀를 주군이랍시고 모시고 있었던 자신들이 가여웠다.

역시나 삐뚜름한 미소를 짓고 있던 타셀이 전진해나가며 화답했다.

“이 칼리스토니아 제국의 더 많은 부모 자식을 살려야겠기에 패륜인줄 알면서도 칼을 빼든 이 아들을, 그 하해와 같은 마음으로 용서해주시지요. 단 한 번도 당신의 아들이기를 바란 적은 없었지만 말입니다.”

타셀의 미소는 거기까지였다. 그는 자신의 대검을 뽑아들었다.

“전군 전진! 칼리스토니아를 위하여!!”

“우와아아아아아!!”

쩌렁쩌렁 울린 타셀의 출정 명령에 이어진 함성이 팔라딘 평원을 진동시켰다. 곧 정신이 멍해질 정도의 말발굽 소리가 우레같이 울리고 검은 사자 군단이 두 눈에 안광을 흘리며 평원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반역자를 처단하라! 칼리스토니아를 위하여!!”

황제군에서 역시 출정 명령이 떨어졌다. 하지만 양 진영이 위하려는 ‘칼리스토니아’는 그 의미가 전혀 다른 듯했다.

콰앙-!

제일 먼저 맞부딪친 것은 양 진영의 최정예들이었다.

제국의 다섯 손가락이라 불리는 기사는 타셀, 미하일, 루크를 포함해 구귀족이자 타셀의 검술 스승이었던 알론조 백작, 황제군의 총사령관 자리에 있는 반아이크 백작이었다. 루크가 알론조 백작을, 미하일이 반아이크 백작을 맡아 젊은 혈기와 노련함의 대결을 펼치고 있을 때 타셀은 저 멀리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황제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사방에서 병장기가 맞부딪치는 소리와 고함 소리, 비명 소리가 뒤섞여 귀는 이미 먹먹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서로를 노려보는 눈빛만은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타셀의 머릿속에는 자신이 기억하는 가장 어린 시절부터의 그 온갖 수모와 설움이 차례로 스쳐지나갔다.

‘저 작자는 자살한 어머니의 유해마저 내팽개쳤었지. 죽어서도 모욕당한 내 어머니의 한은 어떻게 풀어드려야 하나….’

아무리 이 제국을 위해 결심한 전쟁이라 하지만 타셀도 인간이었다. 황제를 향한 개인적인 원망과 증오가 그 결심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는 제 목에 걸린 어머니의 유품 반지를 떠올렸다. 늘 두려움과 불안에 떨며 지냈던 탓에 손가락마저 얼마나 가늘었는지, 반지는 너무나 작았다. 그게 또 그녀의 가녀린 체구와 늘 입맛 없어 하던 모습과 그녀가 느끼며 살아야 했던 불안, 그녀가 겪으며 살아야 했던 고통을 떠올리게 해 분노가 일었다.

“당신의 목을 벤 다음에는 내 어머니의 유골을 키렐에서 가져와 황족 납골당 맨 앞에 놓아드려야겠어.”

타셀은 검의 손잡이를 쥐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카라볼그에 의하면 그는 강철 검으로도 벨 수 없고, 신체적 능력의 모든 면에서 자신을 상회한다고 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접 맞부딪쳐야 한다고도 했다. 그것은 타셀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피해를 입든 상관없이 그는 자신이 쓰러뜨려야 할 하나의 상징이었다.

“검은 사자여. 지금입니다.”

시끄러워서 아무것도 들리지 않던 게 거짓말인 것처럼, 카시야의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그와 동시에 타셀은 저가 탄 흑마의 옆구리를 걷어차며 전방을 향해 달렸다. 알테리온 역시 이쪽을 보며 달리기 시작했다. 알테리온의 만면에 자신만만한 미소가 기분 나쁠 정도로 짙어져있었다.

“하아!”

타셀이 검을 쥔 팔뚝에 마나를 흘려 넣었다. 괴물 같을 정도로 많은 마나가 향이라도 흘리는 듯 일렁대며 그의 몸 전체를 감쌌다. 바로 코앞에 낯설 정도로 젊어진 알테리온이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다가오는가 싶더니 서로 내리친 검이 굉음을 내며 부딪혔다.

끼기기기긱-

검을 마주대고 한 치의 물러섬도 허용할 수 없는 힘겨루기를 하다 보니 황제가 얻은 카테르 신성력이라는 것의 위력을 알 것 같았다. 이제까지는 그 누구도 자신과 이런 식의 겨루기를 해서 이겨내는 자가 없었다. 기본적인 힘도 힘이지만 타셀에게는 남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마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알테리온은 마나를 끌어올린 타셀에게 전혀 뒤지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을 버티는 타셀을 놀랍다는 듯이 쳐다보았을 정도였다.

“네 놈이, 힘을 숨기고 있었다는 소문은 익히 들었다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구나. 약아빠진 녀석.”

이를 드러내며 웃는 알테리온의 얼굴에는 여유가 넘쳤다.

“자, 이것도 막아보련?”

뭔가 오싹한 기분이 드나 싶었는데 알테리온이 검을 쥐지 않은 손을 들어 타셀의 검을 맨손으로 붙잡고는 맞대던 검을 떼어냈다. 강철 검으로도 상처 입히지 못한다는 말이 뜻하는 바를 제대로 알 수 있었다. 두 손으로 맞잡은 검을 놓을 수도 없고,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칼날을 막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알테리온은 조무래기를 보는 눈빛으로 낄낄대더니 그대로 타셀의 옆구리를 향해 검을 박아 넣으려 했다.

“아이기스!”

“……?”

이번에는 타셀이 빙긋 웃었다. 어린 시절부터 수련해왔던 보호 마법을 이토록 통쾌하게 써본 저이 없었다.

“네 놈…. 마법을…!”

알테리온의 얼굴이 엄청난 분노로 얼룩졌다. 자신이 잃어버린 마력이 바로 타셀에게 있었다.

“네 놈이었구나! 내 마력이 사라진 원인이! 하필이면 빌어먹을 년의 새끼에게 가다니! 절대 용서치 않겠다!”

알테리온의 눈이 시뻘겋게 물드는 것 같았다. 카테르 신성력의 붉은 기운이 그의 몸 주변에 넘실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분노하기는 타셀 역시 마찬가지였다. 제가 받아오고 싶어서 받아 온 마력도 아니거늘, 끝까지 어머니를 욕보이는 이 짐승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끓어오르는 분노에 그의 마나가 반응하며 거무스름한 오라를 만들어냈다.

============================ 작품 후기 ============================

감기 조심하세요. 쿨쩍;;

+ 그녀의밤 님. 후원쿠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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