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22 재림(4) =========================
그 사이 양 진영은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타셀 측은 에르논까지 데리고 있었지만 황제쪽의 황실 마법사 군대 역시 만만치는 않았다. 에르논이 거대한 화염을 내리 쏟았지만 황실 마법사 한 부대가 만든 보호막은 그 열기를 막아낼 수 있었다. 에르논은 작전을 바꾸어 개별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것은 과거 타셀을 대적했던 이후 떠올린 방법이었는데, 개개인을 무작위로 빠르게 공격해 보호 마법을 펼칠 시간조차 주지 않는 것이었다. 역시나 개별 공격은 황실 마법사 군대를 당황시키기에 충분했다. 언제 누구에게 뻗어나갈지 모르는 마법의 비수가 에르논 주변의 병사들부터 차례로 쓰러트리기 시작했다.
루크는 한 때 ‘전설의 기사’로 불렸던 알론조 백작의 빼어난 검술에 내심 놀라고 있었지만, 알론조 역시 그저 노예 출신이라 무시했던 루크의 뛰어난 무위에 놀라고 있는 중이었다. 알론조는 루크를 보며 만약 평화로운 시대였다면 가르치는 보람이 있는 기사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가, 그가 이미 제국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기사임을 떠올리고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누가 누굴 가르친다고….’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는 한 발자국도 물러설 수 없었다. 이것은 기사로서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다.
물론 에르논과 루크, 알론조 백작이 아니더라도 적군과 맞붙은 모든 이들이 검이나 창 한 자루에 제 목숨을 걸고 있었다. 광활하게 펼쳐진 하늘이 보기에는 정말 하잘 것 없는 이유 때문에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내팽개치고 있는 것 같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의 신념에 따라 기꺼이 목숨을 걸 수 있는 것. 그게 신이 만들어낸 최고의 불확실성인 '인간'이라는 존재의 흥미로운 점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불확실성에 의해 또 하나의 역사가 새롭게 탄생하려 하고 있었다.
콰앙-!!
타셀과 알테리온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전장에 또 하나의 굉음을 울렸다. 힘에서도 밀리고, 제 검으로는 그에게 상처 하나 낼 수 없었지만 타셀은 보호 마법을 영리하게 이용해 알테리온에 대적하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힘겨루기가 되는 이 상황은 타셀의 마력이 동나는 순간 싱겁게 끝나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 그와 마주했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초조함이나 긴장 대신 희열인지 놀라움인지 알 수 없는 감정이 떠올랐다.
‘카라볼그가 말했던 게 이거구나!’
알테리온과 검을 맞부딪치는 횟수가 늘면 늘수록 자신의 마력이 진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보호 마법을 쓰면 쓸수록 마력이 사라져야 하는데, 검을 맞부딪칠수록 진해지는 마력에 오히려 보호 마법이 한층 더 단단해졌다.
채앵!
기기기기긱-
검과 검이 이가 갈릴 것 같은 쇳소리를 내며 비벼지는 와중에도 폭발적으로 차오르는 고양감 때문에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한 순간만 한 눈 팔아도 목이 날아갈 게 빤한 상황이라 집중하기가 힘들었지만 타셀은 이를 악물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명을 내리십시오, 검은 사자여.]
머릿속에 울리는 카시야의 목소리가 등에 소름을 돋게 만들었다. 방금까지 아찔하던 눈앞의 상황이 갑자기 느리게 흐르기 시작했다. 얼마나 느렸는지, 제 머리칼에서 떨어지는 땀방울이 공중에 떠 있는 모습을 가만히 구경하고 있어도 될 정도였다.
그리고 카시야의 어깨를 잡았을 때 느꼈던 기분이 또다시 온몸을 휘감았다. 모든 게 다 가능할 듯한 엄청난 에너지가 전신을 내달리면서 실패라고는 손톱만큼도 떠올리지 않는 자신감이 차올랐다. 그는 카라볼그가 말했던 ‘완벽한 통제’가, 사실은 그와 카라볼그의 정신적 연결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는 이제 카라볼그를 제 수족처럼 움직이는 데에 그 어떤 위화감도 느끼지 않았다.
타셀은 여전히 천천히 움직이는 눈앞의 장면에서 황제의 뒤쪽에 시선을 두었다. 머릿수로 밀어붙이려는 듯 엄청난 수의 용병이 창과 칼을 들고 자신의 병사들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자신의 병사들에게 저 칼끝이 하나라도 닿게 하고 싶지 않다, 그 생각을 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생각이면 충분했다.
가만히 서 있던 카시야가 두 팔을 양 옆으로 뻗는 것 같더니 그녀의 양 손에 카라볼그를 반으로 쪼갠 듯한 검이 스르르 나타났다. 그녀의 주변에서 싸우던 병사들은 그제야 거기에 그녀가 서있던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곧 그녀는 타셀의 시선이 닿는 그곳을 향해 달리기 시작하며 밀려드는 적군을 향해 신검의 예리한 칼날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카시야의 손에서 뻗어 나온 두 개의 검은 그녀가 내지르는 방향으로 휘어지듯 스쳐 지나며 뜨거운 피를 팔라딘 평원에 뿌렸다.
"저건 뭐지? 여자? 지금 내가 헛것을 보나?"
달려오던 트렌퀼리엄의 용병이 저 앞에서 믿을 수 없는 속도와 힘으로 황제군을 괴멸시키고 있는 단 한 명의 인물에게 시선을 고정시키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무엇이 되었든 간에 자신은 앞으로 밀고 나가 저 괴물과 싸워야 했지만, 그녀의 코앞까지 다가간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는 자신이 곧 죽을 것임을 깨달았다. 누군가가 그녀를 향해 창을 찔렀지만 창끝은 그녀의 목 바로 옆을 지나갔을 뿐이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방금 죽을 뻔했다는 공포심에 당황할 법도 한데, 그녀는 마치 창이 그리로 올 줄 알았다는 듯 그 어떤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그 사이 그녀가 쥔 칼날이 가볍게 창대를 자르고 그대로 전방에 반원을 그리며 목 없는 시체들을 만들어냈다.
우락부락한 남자 병사들 사이에서 하얀 빛을 은은히 내뿜는 쌍검을 들고 춤을 추듯 유려하게 움직이는 카시야의 몸놀림은 시선을 잡아끌었다. 물론 거기에 정신이 팔린 황제군의 목도 순식간에 떨어져나갔다.
알테리온이 이상함을 느낀 것은 그로부터 타셀과 다섯 합 정도를 더 나눴을 때였다. 아까부터 타셀에게서는 기묘한 여유로움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와 자신 사이의 대치에서 자신이 좀 더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게 달라진 것도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자신에게 상처 하나 내지 못하고 있었고, 조그만 틈만 생긴다면 그는 저에게 죽으리라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타셀의 눈빛은, 분명히 뭔가가 달라져 있었다.
"마, 마녀다! 2황자가 마녀를 풀어놨다!"
누군가의 마지막 비명이 알테리온의 귀에 꽂힌 건 바로 그 때였다.
'마녀?'
그럴 리가 없었다. 악마에 가까운 무언가가 나타난다면 그것은 카테르 신에게 신성력을 부여받은 자신에 의한 것이어야 했지, 순진해빠진 헤바나 모시는 저쪽에서 나타날 일이 아니었다. 그는 고개를 돌렸다. 그 사이 타셀의 검이 그의 목 언저리를 내리 찍었지만 금강석 같아진 그의 몸에는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테리온의 눈은 화등잔만 해졌다.
"저건 또 뭐야?"
쌍검을 휘두르는 여자 하나가 제 뒤편을 완전히 초토화시키는 중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주 오랫동안 카라볼그를 들지 못했던 데다 방금 제 몸에 남았던 마지막 마력까지 사라져버린 알테리온은 카시야 자체가 카라볼그임을 알아보지 못했다. 하긴, 젊은 시절 들었던 카라볼그는 푸른빛을 뿜어냈었으니, 하얀 빛을 내뿜는데다 두 개로 쪼개진 검 따위가 기억에 있을 리 없다.
"흥! 히드레이 교의 성기사쯤 되나보지? 계집 성기사라는 점이 꽤 구미가 당기는군. 저 년은 살려뒀다가 내가 친히 카테르 신의 위대함을 가르쳐줘야겠구나."
알테리온은 전장 한가운데에서조차 변태 같은 망상을 떠올렸는지,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타셀을 쳐다보았다. 그 와중에도 타셀은 끊임없이 그에게 검을 휘둘렀지만 일반 강철 검은, 그것이 마나를 둘렀다 하더라도, 그에게 전혀 타격을 주지 못했다.
알테리온은 타셀의 쇄도를 코웃음 치며 한 팔로 걷어내더니 카시야를 향해 말머리를 돌렸다.
그 때, 그는 타셀이 카시야를 향해 내달리는 자신을 따라오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 의문을 가졌어야 했다. 카시야를 향하는 자신의 뒤에서 타셀이 살짝 미소 지었음을 알아차렸어야 했다. 방금까지는 어딘지 모르게 여유를 띠었던 그 눈이, 이 전쟁이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증오에 가득 찬 살기를 품었다는 것을 깨달았어야 했다.
타셀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인간 알테리온을 끝내버리겠다고 마음먹은 순간, 지치지도 않고 적군을 베어내던 카시야가 칼날을 휘돌려 전방에 있던 이들을 쓰러드리고 한 순간의 주저함도 없이 뒤를 돌아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알테리온에게 마주 달려갔다. 알테리온은 그녀에게 다가갈수록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고는 있었지만 기사들 중에 최고라는 타셀의 검에도 긁힌 상처 하나 없는 자신의 새로운 육체에 자신만만해 있었다.
"마음이 바뀌었다. 네 년의 시체는 카테르 신의 재단에 제물로 바쳐주마!"
알테리온이 제 검을 쳐들었고, 카시야는 양 손에 나눠 쥐고 있던 검을 하나로 합치는 것 같은 행동을 취하더니 이내 그녀의 오른손에는 하나 된 카라볼그의 위용이 드러났다. 그제야 알테리온은 제 눈을 의심했다. 그것은 어떻게 보아도 카라볼그였다. 하얀 빛을 흘리는 카라볼그는 너무도 낯선 동시에, 너무도 익숙한 절대자의 향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지금도 손에 잡힐 듯 생생한 과거의 영광, 필승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어떻게…?'
카라볼그는 아무나 들 수 있는 검이 아니었다. 신탁에서도 타셀을 그 다음 주인으로 지칭하는 것 같았는데 전혀 낯모르는 여자가 검을 휘두르고 있다는 것도 이상했다. 신탁이 틀렸다는 말인가, 저것이 카라볼그가 아니라는 말인가.
짧은 시간 동안에도 알테리온의 머릿속에서는 여러 가지 가정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러는 와중에도 시시각각 카라볼그를 든 여자는 자신에게 가까워져오고 있었다.
말을 탄 자신을 향해 두 다리로 달려오는 상대는 공격하기가 훨씬 쉬웠지만, 어찌된 일인지 이 여자는 어디를 베거나 찔러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빈틈이 전혀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녀가 자신을 향해 어떻게 칼을 휘두를지는 수도 없이 많은 경로가 떠오르는 것이다.
카앙-!!
바닥에서부터 뛰어올라 믿을 수 없는 속도와 힘으로 자신의 목을 향해 다가오던 카라볼그를 가까스로 막은 알테리온은, 검기에 목이 베인 말이 쓰러지며 팔이 흔들린 탓에 카라볼그의 날이 자신의 뺨을 살짝 베고 지나가게 허락하고 말았다. 재빨리 몸을 틀어 쓰러지는 말에서 뛰어내린 알테리온은 뭔가가 따끔한 느낌에 뺨을 쓸어보고는, 피가 묻은 제 손바닥에 놀라 잠시 굳었다. 저 여자가 휘두르는 검, 카라볼그는 자신의 몸을 벨 수 있었다!
두려움이 손끝에서부터 번져 온몸을 잠식해가는 듯했다.
"이, 이건 말도 안 돼. 겨우 계집인 주제에, 이럴 리가 없다. 네 이 년! 정체가 뭐냐!"
알테리온이 혼란스러운 얼굴로 다시 자신을 향해 몸을 돌린 카시야를 바라보며 소리 질렀다.
단 한 번도, 태어난 이래 단 한 번도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느껴본 적 없던 알테리온이었다. 생애 최초로 느끼는 두려움이 늘씬한 여자가 휘두른 검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그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생존 본능 자체는 이 상황이 굉장히 위험한 것임을 깨닫고는 쉴 새 없이 '도망치라'는 경고음을 울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오만함은 자신의 생존 본능이 알리는 경고조차 가뿐히 무시해버리고 말았다.
"감히 이 몸에 상처를 내? 감히이이이!"
알테리온은 두려움을 잊기 위해서인지 분노를 가장해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카시야는 무감한 표정으로 타셀의 명에 착실히 따라 그를 향해 달려갔다.
우우우웅-
카라볼그에서 엄청난 검성이 울리기 시작하고, 검을 감싸고 있던 하얀 빛이 점점 더 눈부시게 일렁였다.
[나의 아버지에게, 편안한 안식을-.]
타셀은 그 하얀 빛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한순간에 고통 없이 죽음을 선사하는 것. 그것이 그나마 자식이라는 굴레 안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배려였다.
써걱, 하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팔라딘 평원 내에서는 여전히 난전이 펼쳐지고 있었지만, 타셀과 알테리온의 주변에 있던 이들은 전부 행동을 멈추고 그 광경을 눈에 담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엄청난 빛이 터져 나왔으니까.
평원 한 가운데서부터 침묵이 퍼져나갔다. 그리고 그 침묵의 중심에서, 황망한 표정을 지은 알테리온의 상체가 그 아래 달린 몸체와 살짝 어긋나며 스르르 밀려 떨어졌다. 곧이어 칼날에 양분된 심장에서 엄청난 피가 쏟아져 그 주변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그의 몸통을 베고 지나간 카라볼그는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채 여전히 하얀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마… 만세! 타셀 전하, 만세!"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누군가가 재빨리 만세를 불렀다. 알테리온이 죽었으니 황제군 역시 이 사실을 빨리 알아야 검을 떨굴 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다들 그 생각에 동의했는지, 우렁찬 목소리로 '타셀 전하 만세'를 외쳤다.
"만세! 2황자 전하가 이겼다! 만세!"
"황제가 죽었다!"
침묵의 중심이었던 곳에서 다시 만세 물결이 퍼지기 시작했다.
황제가 죽었더라도 유리카데온을 앞세운 황제파가 항전을 계속할 법도 한데, 용병이 반을 차지하는 황제군은 일시에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성검 카라볼그를 쥔 카시야의 위력은, 그에게 덤비는 것이 그저 자살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해주었던 것이다. 아직 패전을 인정하지 못하고 주변의 병사들을 독려하는 황제파의 기사들이 있었지만 카시야가 카라볼그를 땅에 내리치며 거대한 검기를 만들어 후려치자 더 이상의 반항이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았던지 바닥에 주저앉아 그저 뜨거운 눈물만 흩뿌릴 뿐이었다. 개중에는 마지막 투지를 불사르며 타셀에게 달려들던 기사도 있었으나, 그는 타셀의 검에 기사의 명예를 지킨 죽음을 맞이했을 뿐이다.
"끝났군."
타셀이 조용히 말했다.
만세 소리가 울려 퍼지는 전장에서, 그 목소리는 오로지 정신 자체가 연결된 카시야만이 들을 수 있었다.
“고마웠다. 그대가 아니었다면 이길 수 없었겠지.”
카시야가 검기를 날리던 카라볼그의 힘을 갈무리해 타셀 앞에 섰다. 타셀이 하고 싶은 말은 감사 인사 따위가 아님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더 이상 신검의 힘에 기대지 않겠다. 앞으로의 모든 일은, 바로 나, 그리고 나의 충실한 신하들의 힘으로 일구어 나갈 것이다. 거기에서 발생하는 모든 결과의 책임은 내가 질 것이다."
신검을 갖게 된 이후 저 역시 아비처럼 탐욕스러워지면 어쩌나 고민하던 타셀이 내린 결론은 그것이었다.
악마의 힘을 얻은 황제를 베려면 필요했기 때문에 카라볼그의 힘을 빌렸지만, 실제 경험한 신검의 힘은 가공할만한 위력이었다. 이런 힘을 계속 쥐고 있으면, 아무리 조심하려 해도 그 힘에 기대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말란 법이 없을 것 같았다. 그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드러내며 누군가를 위협할 수도 있을 것이고, 나태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힘'은 결국 그 힘의 주인까지 집어삼키고 말 힘이었다. 그는 카라볼그를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니까… 이제 그만 카시야 경을 돌려줘."
그리고 그 포기가 가능했던 것은, 성물이라는 그 검보다 평민 여기사 카시야가 훨씬 더 소중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전쟁을 이길 수 있었던 이유인지도 모르는 그녀를, 위험한 힘의 그릇으로 쓰고 싶지는 않았다. 절대로.
[주인의 명을 받듭니다.]
카시야가 카라볼그를 땅에 푹 박아 넣으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다시 타셀을 바라보고는 성물로서의 마지막 말을 남겼다.
[당신은 당신이 옳다고 믿는 길을 따르십시오.]
타셀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성물이 깃든 이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카시야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그리고는 스르르 눈이 감기더니 그녀의 몸이 옆으로 무너졌다.
============================ 작품 후기 ============================
1. 지난 회차에 수정이 조금 있었습니다. 루크가 알론조 백작을, 미하일이 반아이크 백작을 맡아 싸우는 것으로요.
2. 오늘 제 친구에게 협박받았습니다. "카시야 돌려내, 이 자식아!" 라고요.-_-
(뉘예, 뉘예~)
+ 그녀의밤 님, 후원쿠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