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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홍의 카르마-123화 (123/134)

00123 시작(1) =========================

카시야는 키 작은 노란 들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벌판에서 눈을 떴다.

'…여기가 어디지?'

하늘은 새파랗게 맑고, 부드러운 바람에는 싱그러운 향기가 배어있었다. 그녀는 하얀 날개를 가진 나비가 팔랑 팔랑 날아다니는 것을 멍하니 눈으로 쫓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벌판이 드넓게 펼쳐져 있었고, 주변은 울창한 숲으로 감싸여있었다. 어디선가 들리는 새소리와 개울물소리가 마음을 편안히 가라앉혀 주었다. 하지만 시선이 닿는 그 어디에도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내가 또 죽었나?'

이런 평화로운 기분을 느꼈던 기억을 잊을 수야 있나. 죽음 이후 겪었던 편안한 기분이 떠오르며, 지금이 그때와 굉장히 비슷하다는 것을 깨달은 카시야는 자신이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죽은 것인가 싶었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지금 이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풍광 때문이기도 하지만, 여기에서 눈뜨기 전의 상황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 때문이기도 했다. 기억해보려고 애를 썼는데, 뭔가 어렴풋한 느낌만 남아있을 뿐 정확한 기억은 나지 않았다. 재미있는 것은, 그 이전 생, 즉 카시야 델 로만일 때의 기억은 난다는 것이었다.

'결국 다 꿈이었나? 뭔가… 개고생을 했던 것 같기는 한데 말야….'

개고생을 했었던 것 같기는 한데, 왠지 그리운 듯한 느낌도 들었다. 카시야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개울물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겨보았다. 아까 눈앞을 팔랑거리며 지나갔던 흰 나비가 그녀를 이끌듯 앞서 날았다. 일으킨 몸의 어디에서도 통증이나 불편함이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가벼운 느낌이라 기분이 좋았다.

숲 안도 나무가 울창한 것에 비해 밝았다. 나뭇잎 사이사이로 비치는 햇빛이 숲 속을 반짝거리게 만드는 것 같았다. 카시야는 금방 개울가에 도착했다. 개울물은 너무 맑고 투명해서 그냥 입을 대고 마셨는데도 시원하고 달았다. 개울물을 손에 담아 세수도 하고는 개울가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상해…. 언젠가 이런 개울가에서 누군가와 앉아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그래, 맞아. 저쯤 있는 나무에 말 두 마리를 매어놓았었고 말이야. 분명, 모닥불도 피웠던 것 같고…. 그런데 그게 누구였더라…?'

뭔가 기억 날듯 말듯한데, 제대로 떠오르는 게 없으니 답답했다.

카시야는 다시 일어나 정처 없이 걸었다. 이 평화로운 세계는 사람 하나 없어도 무섭다거나 기괴하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고 그저 편안하기는 했지만, 가만 앉아있기는 왠지 지루했기 때문이었다. 한참 숲을 걸으며 오랜만에 긴장감을 푼 여유를 만끽하던 카시야는 숲 안에 군락을 이룬 보랏빛 라벤더 꽃무리를 보며 감탄했다. 그녀는 손끝으로 라벤더 꽃대를 쓰다듬으며 연약한 꽃잎이 주는 간질거리는 느낌에 미소를 짓다가 문득 손을 멈추었다.

'…내가 분명 보라색의 뭔가를 예뻐했던 것 같은데, 그게 뭐였지? 보라색…. 그래, 분명 보라색이었는데….'

기억을 애써 떠올리려 해도 쉽지 않았다.

그때, 언제 나타났는지 한 사람이 그녀의 곁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나이는 얼마나 되는지도 알 수 없었지만 신기하게도 전혀 놀랍거나 두렵지 않았고, 그저 당연스러웠다. 그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저에게 해를 끼칠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그냥 알 수 있었다.

"기분은 좀 어때?"

그는 마치 카시야를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친근하게 물었다. 카시야 역시 별 경계심 없이 대답했다.

"좋습니다. 이렇게 평화로운 기분을 느껴보는 것은 지난 번 죽음 이후 처음이네요."

"음. 그랬겠구나. 너는 너무도 힘든 삶을 살았으니까."

"뭐, 나쁘진 않았습니다. 남들 눈에는 어떻게 비쳤는지 모르겠지만, 그냥 살면서 크게 제 삶이 원망스러운 적은 없었습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카시야를 바라보았다.

"현명한 아이로구나. 이번에는 네가 원하는 대로 해주마. 이 안온한 세계에서 지내고 싶으냐? 아니면, 다시 돌아가겠느냐?"

돌아가겠느냐는 질문이 지난 죽음에서 자신을 돌려보내던 목소리를 떠올리게 했다. 그 목소리에 눈 떴을 때, 어땠더라? 아…. 전쟁터였던 것 같아…. 어렴풋이 피비린내와 시체 썩는 냄새가 났던 기억이 떠올랐다. 진저리나는 죽음의 냄새였다. 미간을 찌푸리고 고개를 젓는 그녀의 모습을 본 상대방은 다시 물었다.

"네가 원한다면 영원한 안식으로 인도해주마."

그의 말이 끝나자 울창하던 숲은 어느새 사라지고 따뜻한 하얀 빛으로 가득한 공간이 눈앞에 펼쳐졌다. 따뜻하고도 애정이 어려 있어서 눈물이 날 것만 같은 그런 편안함이었다. 카시야는 저도 모르게 그를 따라 몇 걸음 걸었다. 그때, 흰나비가 눈앞을 팔랑거리며 스쳐 지나갔다. 카시야가 걸음을 멈추자 앞서 걷던 이가 뒤돌았다.

"아…. 감사하긴 하지만, 제가 아무래도 뭔가를 잊어버린 것 같습니다. 뭔가… 중요한 것 같은데… 기억이 안 나요. 하지만 저는 그걸 되찾아야 합니다."

"아까 말했다시피, 네가 원하는 대로 다 들어주마. 하지만 잘 생각하렴. 어차피 집착이자 미련일 뿐, 되찾아도 대단치 않은 것일 수 있단다."

카시야는 곰곰이 생각하듯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라벤더처럼 아름다운 보랏빛의 무언가가 자꾸만 거슬렸다.

"대단치 않대도 별 상관은 없지 않겠습니까? 그저, 확인해보고 싶습니다. 뭐가 이토록 나를 붙들고 있는 것인지…. 죽음은 다음번에 받아들이도록 하지요."

카시야는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는 것이 '죽음'을 뜻하는 것임을 어느샌가부터 깨닫고 있었다. 그럼에도 고민되었다. 평온한 안식의 유혹은 고통으로 가득한 삶 따위는 두 번 쳐다보고 싶지 않을 만큼 달콤한 유혹이나 다름없었으니까. 하지만 지난번엔 신의 의지로 다시 살아났다면, 이번에는 정말 자신의 의지로 살아보고 싶었다. 저를 제멋대로 돌려보냈던 신에게 조금 복수하고 싶은 마음도 사실 없지는 않았고 말이다.

앞서 있던 이는 그녀의 모든 생각을 다 알고 있다는 듯 피식 웃었다. 카시야 역시 그에게 마주 웃어보였다.

"다음 만날 날을 기약해야겠구나."

그의 부드러운 음성이 울리면서 시야가 점점 환한 빛으로 가득 차는 것 같더니, 과거에도 한 번 느낀 적 있었던 달갑지 않은 감각이 서서히 깨어났다. 가볍고 편안했던 온몸에 신경이 하나하나 연결되는 감각은 마치 온몸이 납덩이처럼 무거워지는 느낌 같았다. 곧이어 어떻게 이걸 잊을 수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익숙한 허리와 어깨의 통증이 서서히 느껴졌다. 하지만 카시야는 지난번과는 달리 편안한 마음으로 그 고통을 받아들였다. 이번에는 자신의 선택이었으니까.

"…만, 이제… 쉬… 언제까지…."

"괜…. …제발 그냥 놔…."

아직 완벽히 깨어나지 못한 청각 때문에 웅웅대듯 띄엄띄엄 들리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서서히 정신이 들었다. 따끔따끔한 눈을 조금 떠 깜빡거려봤지만 시야는 금방 또렷해지지 않았다. 하지만 확실히 점점 맑아지고 있었다.

"카시야!"

누군가가 자신을 반가운 목소리로 불렀다.

'아, 분명 아는 목소린데…. 누구였지?"

카시야는 아직 몽롱한 의식을 뒤지며 목소리의 주인을 떠올리기 위해 노력했다. 그때 눈앞에서 흰나비가 팔랑거리며 라벤더 꽃을 향해 날아가는 것 같은 환영이 스친 것 같았다. 점점 또렷한 상을 맺기 시작하는 시야에 처음 나타난 것은 그녀가 그토록 떠올리고 싶어 했던 '보랏빛의 예쁜 것'이었다.

"…에… 르논."

잘 돌아가지 않는 혀를 놀려 겨우 그 이름을 내뱉자, 그 예쁜 보라색 눈동자에 물기가 어렸다.

"…어. 나야. …잘 잤어?"

자신이 찾으려 했던 것이 마침 제 눈앞에 있다는 것은 꽤 안도감이 들었다. 왜 에르논을 찾으려 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지만, 아마 정신을 차리고 나면 떠오를 것 같았다. 힘이 없고 온몸이 쑤시는데다 정신조차 또렷하지 못했지만, 지금 이 남자를 안심시켜줘야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기억보다 그의 얼굴이 많이 수척해진 탓이었다. 카시야는 입꼬리를 끌어당겨 미소를 그려보았다.

"예…. 제가… 꽤… 오래 잔 것 같은데… 얼마나… 잤나요?"

“한 달이 좀 넘었지, 아마.”

생각보다 훨씬 오랫동안 자고 있었던 모양이다. 카시야는 그 시간 자체에 놀랐다기 보다는, 그 사이 허약해졌을 신체 능력이 걱정되었다. 또 몸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는…?”

“황궁 안의 특별실이야. 우리의 전쟁 영웅을 위한 새 황제 폐하의 배려이지.”

“아…! 맞아. 승리했나보군요.”

“너 혼자 다 해놓고는 무슨 소리야? 그때 네가 황제 먼저 죽여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황제군이나 용병들 모두 네 칼에 다 죽었겠지.”

에르논이 고개를 쳐들어 눈물을 삼키고는 마치 어제도 그녀와 잡담을 나눴다는 것처럼 여상하게 말했다.

그때 그녀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이들이 작은 소란을 만들며 나타났다.

"야! 카시야! 정신 좀 드냐?"

"깨어날 줄 알았다. 그래, 그렇게 죽어버릴 놈이 아니지."

"아…. 미하일 경…. 페레이아 경."

우스운 일이지만 그들이 그리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죄송하지만 환자는 극도로 안정을 취해야 합니다. 모두 나가주세요."

에르논이 방금 들어온 미하일과 루크를 내쫓듯 몰아냈다. 카시야는 돌아오길 잘했다는 생각에 피식 웃었다가 다시 까무룩 잠이 들었다.

하지만 카라볼그의 현신이었던 여기사가 드디어 정신을 차렸다는 소식은 금새 황궁 안을 달궜다.

그 사이 타셀군과 칼리스토니아에는 많은 일이 벌어졌다.

알테리온이 쓰러진 이후, 팔라딘 평원은 빠르게 정리되었다. 카라볼그를 땅에 박아 넣고 타셀에게 마지막 인사를 한 뒤 정신을 잃은 카시야는 죽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산 것도 아닌 상태였는데, 그녀의 상태에 민감하던 에르논이 귀신같이 나타나 그녀를 안아 올렸다. 그리고는 일단 그녀를 안전한 곳으로 데리고 가있을 테니, 상황을 마무리하면 알려달라며 눈앞에서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어차피 그들이 갈 곳은 피엔의 툴라 밖에 없다는 것을 타셀도 알고는 있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카시야를 안전한 곳으로 보낸 타셀은 땅에 박힌 카라볼그를 빼내고 하늘높이 치켜 올려 황제의 죽음을 전 평원에 울릴 정도로 쩌렁쩌렁 선언했다. 그리고 전장의 상황을 갈무리한 후 트레온 백작이 지키고 있는 황궁으로 향했다. 황태자인 유리카데온과 황후나 다름없는 황비 멜라니아를 쥐고 있던 트레온 백작이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으로 유리카데온만이 이 제국의 적통 계승자임을 선포했지만, 그 상황에서 그의 말에 수긍할 사람은 많지 않았다. 타셀은 더 이상 미적거릴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몇 안 되는 황실 기사단을 내세워 성문을 걸어 잠그려는 트레온 백작을 봐주지 않고 쓸어버렸다. 멜라니아 황비 역시 유폐해버리고 싶었지만, 극도의 스트레스로 그녀가 조산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일단은 시녀들을 붙여 그녀의 방에 가두었다. 아직 어린데다 심약한 유리카데온도 일단 연금해두었지만 나이만 조금 차면 작은 제후국의 부마로 보내버릴 생각이었다.

타셀의 내각 장악 역시 빠르게 진행되었다. 구귀족들은 어떻게든 반항하려 하는 쪽과 재빨리 타셀에게 붙으려는 쪽으로 양분되었지만, 이미 구귀족들의 군대는 팔라딘 평원에서 태반이 사라져버린 데다 그들의 뒷배라 할 수 있던 알테리온이 단칼에 베여 죽었다는 소식에 구귀족들의 반항은 오래 가지 못했다.

타셀의 군대가 점령한 황궁과 아르카나 곳곳에서는 며칠 간 비명 소리와 피 냄새가 끊이지 않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않았다. 다행이 백성들은 타셀에게 우호적이었기 때문에 민란 같은 것은 발생하지 않았고, 국경 수비도 큰 문제가 없었다. 타셀은 자신의 충신들과 함께 황실 내부 정리를 마무리하고 공신들의 공적을 파악해 봉작과 포상을 내리기 위한 준비를 했다. 문제는, 일등 공신이나 다름없는 카시야가 계속 의식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포상을 위한 자리 마련이 늦춰지고 있었다. 대관식과 혼인식도 신하들에게 공적에 맞는 포상을 내린 뒤 진행하겠다는 타셀의 고집에, 결국 제국의 모든 행사가 늦춰지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카시야가 눈을 떴다는 소식은 타셀 뿐만 아니라 황궁 내의 모든 이에게 기쁜 소식이었다. 궁내부 관리들은 재빨리 행사 준비부터 시작했다.

"전하! 카시야 경이 깨어났다는 소식을 들으셨나요?"

예비 황후로 궁내에서 바쁘게 지내고 있던 알리시아가 타셀의 집무실에 들이 닥치자마자 한 소리였다.

"음. 안 그래도 가보려던 참인데 함께 가시겠소?"

"네! 정말, 정말 다행이에요. 정말 눈을 떠서 다행이에요."

황궁에 도착한 뒤 카시야 먼저 찾았던 알리시아는 그녀가 혼수상태에 빠졌다는 것을 알고는 거의 쓰러질 뻔했다. 그녀의 침대 맡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자신이 여는 살롱에 꼭 와주겠다 하지 않았느냐고, 빨리 일어나라고 조르면서 하염없이 떨어지는 눈물로 침대 시트를 흠뻑 적시고 말았었다. 이틀에 한 번 꼴로는 꼭 가서 이런 저런 말도 걸고, 눈물도 조금 흘렸는데 하필 자신이 가지 않은 날에 눈을 떴었다고 하니 발이 동동 굴러졌다.

마음이 급하기는 타셀도 마찬가지였다. 눈을 떴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달려가고 싶었지만, 이제 이 제국을 책임져야하는 자리에 올랐으니만큼 결정을 내려줘야 하는 일이 끝도 없이 쌓여만 갔으고, 급한 일은 다 확인을 해줘야만 자리를 뜰 수 있었던 것이다. 그나마 알리시아가 방문해주었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다면 꼬장꼬장한 서기관이 이렇게 빨리 보내줬을 리가 없다.

둘은 긴 시종, 시녀 줄을 끌고 카시야가 머무르는 방으로 행차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들어선 방 안에는, 언제나처럼 카시야의 침대 곁에 붙박이로 앉은 에르논이 먼저 보였다. 하지만 그의 표정마저 평소와는 비교할 수 없이 밝았다. 그리고 누워있던 이가 침대 헤드에 갖다 둔 푹신한 쿠션에 기대 앉아있었다.

"카시야 경!"

알리시아가 먼저 그녀를 향해 뛰어갔다. 황후가 될 몸이 혹여나 치맛자락을 밟아 넘어져 다치기라도 할까봐 시녀들이 기함했지만, 알리시아든 타셀이든 지금 제 몸 다치는 게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제가 누군지 알아보시겠어요? 저예요. 알리시아."

혹시나 저를 기억하지 못할까봐 눈물까지 글썽이며 알리시아가 바싹 붙어 앉았다.

"물론 기억합니다. 알리시아 아나클리프 영애. 아, 이제는 호칭이 달라졌을 것 같군요."

기억과 똑같이 낮고 무덤덤한 목소리가 반갑게 공기를 울렸다.

"카시야 경. 무사히 깨어나 정말 다행이네. 자네가 잘못 되는 줄 알고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몰라."

"폐하. 아, 이거, 울림이 좋네요. 폐하. 정말로 칼리스토니아의 황제 폐하가 되셨군요."

"자네 덕분이지. 내 일생에 자네를 만났던 것이 지금 이 자리에 있게 된 이유라 해도 될 것 같네."

카시야가 또 미소를 지어보였다.

"자네 얼굴을 보자마자 이런 말하는 게 자네로서는 뜬금없겠지만, 이미 논공행상에 대한 얘기가 거의 다 진행된 상태라서 이 얘기부터 해야겠네. 어쨌든 난 자네에게 백작 작위를 내리려 하네. 평민이 봉작되는 경우 미들 네임으로 무조건 '델'이 붙게 되어 있고 성은 황제가 내리거나 본인이 원하는 성을 쓰기도 하는데, 혹시 원하는 성이 있다면 말해보게. 며칠 고민해 봐도 좋고."

서둘러 카시야에게 작위를 내려주고픈 욕심에 타셀은 살짝 들뜬 마음으로 성(姓)에 대한 얘기를 거론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카시야는 왠지 허탈한 듯 웃다가 입을 열었다.

"로만…. 로만으로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로만? 무슨 의미가 있나?"

"…아뇨. 그저, 익숙한 듯해서요."

"음? 뭐, 좋네. 그럼 백작으로서의 자네의 이름은, 카시야 델 로만이 되겠군."

"푸흡…."

타셀이 다시 한 번 그녀의 이름을 확인하자 카시야는 또 터져 나오는 웃음을 막지 못하고 큭큭댔다. 주변의 모두가 어리둥절해했지만, 카시야 본인은 그저 이 상황이 신의 장난처럼만 여겨져서 웃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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