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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홍의 카르마-124화 (124/134)

00124 시작(2) =========================

카시야가 전생의 이름을 현생에서도 쓰게 되는 사실에 웃음을 터트리고 있는 사이, 황궁 연무장에서는 기사들이 잔뜩 모여 미하일과 루크의 대련을 구경하고 있었다. 제 1황자가 반역을 일으키기 전에도 황실 기사단의 최고를 놓고 다투던 이들이지만, 그때는 서로 경쟁심에 기반한 자존심 싸움이 대단했기 때문에 웬만하면 대련은 하지 않았다. 자칫 흥분하면 큰 사고가 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랬던 그들이 서로를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닌 목적으로 검을 맞댔으니, 검을 사랑하는 기사라면 꼭 구경하고 싶은 진기한 장면이었다.

카앙-!

서로의 검이 부딪치며 어느 하나가 부러지지는 않았을까 싶은 소리를 냈다. 그들이 절묘한 경로와 믿을 수 없는 힘으로 검을 찌르고 휘두르는 모습 하나하나에 그들을 동경하는 기사들 사이에서는 환호나 탄식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정신을 최대한 집중하고 검을 맞대는 두 사람에게는 그 어떤 소리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 두 사람의 자존심에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는 몰라도 지켜보던 심판이 무승부를 선언하며 대련이 끝났다. 지켜보던 기사들은 아쉬워했지만 다들 좋은 대련을 보여줘서 감사하다며 깍듯이 인사하고는 삼삼오오 자리를 떴다.

미하일과 루크는 대련을 시작할 때부터 이때까지 한 마디도 나누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 사이의 날 선 경계심은 어느새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루크가 1황자의 총사령관이었다 해도 어쨌든 덕분에 카시야나 에르논이 황궁에서 살아나올 수 있었기 때문에 타셀은 루크를 자신의 신하로 받아들였고, 거기에 따른 이의는 불허한다고 못박아놓았다.

"…궁금한 게 있는데."

먼저 입을 연 것은 미하일이었다. 루크는 물을 마시며 눈알로만 미하일 쪽을 쳐다볼 뿐이었다.

"넌, 아니, 페레이아 경은 도대체 뭣 때문에 카시야한테, 아니, 카시야 경한테 넘어간… 다기보다는 손을 잡은 거야… 요?"

타셀이 미하일에게 이젠 황궁에 돌아왔고 전시가 아니니 예법을 지키라고 한 통에 미하일은 제멋대로 움직이려는 혓바닥 단속에 미칠 지경이었다. 루크는 미하일이 말을 마치고 작게 욕설을 내뱉는 모습을 지켜보며 피식 웃었다.

"그 녀석한테 안 넘어간 사람이 있던가? 그리고 듣기 더 거북스러우니까 그냥 하던 대로 말하기로 하죠, 우리."

그 말에 미하일은 간만에 반갑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긴, 그러고 보면 그래. 안개 숲에서 죽다 살아나온 이후로는, 누구든 그 녀석한테 다 넘어간 것 같단 말이지. 폐하도 그렇고, 너나 에르논도 그렇고, 알리시아 님도 그렇고, 처음에는 마녀니 악마니 하던 그 녀석 분대원들도 그렇고."

"자긴 아닌 척 하고 있네. 듣기로는 맨 처음 그녀석 칭찬을 해댄 건 너라고 들었는데."

"누가 아니랬나, 뭐. 난 그냥 한 눈에 좋은 기사를 알아본 것뿐이야! 너나 에르논처럼 흑심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고."

미하일은 '흑심'이라는 부분에서 타셀 얘기는 쏙 빼버렸다. 타셀이 카시야에게 어떤 마음을 품었었는지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알리시아라는 예비 황후가 있는 상황에서 괜히 그런 얘기를 꺼내면 안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흑심이라…. 하긴, 그랬는지도 모르지. 정말 정신 차리기 힘들 정도로 반했었거든."

루크는 '전생에서부터'라는 말은 빼고 말했다.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봐도, 전생과 현생을 분리해서 생각하려고 해봐도, 자신은 마치 저주처럼 또다시 카시야에게 반해버리고 만 이후였다. 그녀가 카라볼그를 휘두르는 뒷모습에 전생의 그녀의 모습이 겹쳐져서 얼마나 소름이 돋았는지 모른다. 몇 번을 다시 태어나더라도 그녀를 사랑하게 되어버릴 것 같았다.

"그런데 왜 과거형이야? 지금은 아니란 소리야?"

루크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가 씁쓸해졌다.

"그럴 자격이 있어야 말이지. 개인적으로 빚이 좀 있어서 그거라도 갚고 싶었는데, 내가 뭘 어쩌기도 전에 혼자 알아서 척척 해내버리는 통에 김샜지."

미하일은 그가 말한 '개인적인 빚'이라는 게 어떤 건지 궁금했지만, 루크가 그것까지 말해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 마음이란 게 그렇게 쉽게 접히는 건가?"

"접기 힘들면 어쩔 건데? 그 녀석이 신경 쓰는 남자는 아마 에르논 뿐일걸? 도대체 왜 대마법사씩이나 되는 인물을 걱정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 말에 미하일이 낄낄대며 맞아, 맞아 하고 맞장구를 쳤다.

"그 자식 의외로 취향이 병약한 도련님 스타일인가 봐."

"…혹은, 에르논을 통해 저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일 수도 있고."

"응? 둘이 어느 부분이 비슷하다고?"

"아냐. 그런 게 있어."

루크는 알쏭달쏭한 표정을 짓는 미하일을 뒤로 하고 연무장을 벗어났다.

미하일에게는 카시야에 대한 마음을 접었다는 식으로 얘기했지만, 사실 지금도 창백한 얼굴의 카시야나 그 곁에 붙어있는 에르논의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 한 쪽이 아린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생각해보았을 때, 카시야가 이토록 각별한 태도를 보이는 사람은 에르논이 유일했다. 자신은 지금처럼 친우로 대해주기만 해도 감사하다는 생각을 해야 할 판이었다.

그래도 좋았다. 전생에 그녀를 그토록 괴롭혔던 벌이 그녀를 사랑한다는 말조차 내뱉지 못하고 그 뒤를 지켜야 하는 것이라면, 그녀의 행복을 빌어주는 것에 족해야 하는 것이라면, 고작 그 정도의 것이라면, 루크는 기쁘게 받아들이겠다고 다짐했다. 황궁의 그 습하고 기분 나쁜 지하 돌바닥에 미동도 않고 쓰러진 그녀의 모습이 마지막인 것보다야 훨씬 나은 벌이었으니까.

에르논은 여러모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카시야가 전장에서 쓰러진 뒤 보였던 그의 절박한 행동에 그가 얼마나 카시야를 사랑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카시야가 그런 그를 사랑하는 건지, 동정하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제 곁에 둘 사람으로 에르논을 선택했다면 거기에 토를 달 생각도 없었다.

"하아…."

한겨울의 새파란 하늘에 루크가 뱉어낸 뜨거운 숨이 하얀 김이 되어 피어오르다가 흩어졌다.

'난 여전히 이기적인 거야. 그 상황에서 에르논처럼 행동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

아련한 눈빛은 카시야가 쓰러졌던 당시를 회상했다.

카라볼그를 땅에 박아놓고 쓰러진 카시야를 향해 제일 먼저 달려간 것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타셀이 아니라, 먼 곳에서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에르논이었다. 그는 재빨리 카시야가 있는 곳까지 공간 이동해서 쓰러진 그녀를 맥이 뛰는지부터 확인했다. 애타게 카시야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녀의 뺨을 쓰다듬으면서….

아마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에르논이 그녀에게 특별한 마음을 품었다는 것 정도는 바로 알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에르논은 남들의 시선 따위는 전혀 관심 없는 듯했다.

"전하! 카시야의 맥이 너무 약합니다. 저는 카시야가 여기서 죽게 내버려 둘 수 없습니다. 전장을 무단이탈했다고 벌하셔도 좋습니다만, 저는 일단 카시야를 안전한 곳으로 옮겨야겠습니다. 상황이 정리되면 알려주십시오. 카시야를 데려가겠습니다."

그는 차마 그녀에게 손을 뻗을 수 없는 타셀을 대신해 카시야를 안아 들고는 피엔의 툴라에게로 공간 이동해버렸다.

타셀은 그런 그를 탓하지 않고 황궁까지 완전히 장악한 뒤에야 에르논에게 연락했다. 그리고 에르논은 약속대로 카시야를 데리고 나타났던 것이다. 그 사이 에르논은 마치 죽을병에 걸린 사람처럼 야위어있었다. 타셀이 마련해준 특별 게스트룸에 카시야의 간호를 위한 침실이 만들어지고 황궁의와 간호 인력이 파견되었지만, 에르논은 카시야의 곁에서 절대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아마 카시야가 그대로 죽었더라면 에르논의 목숨 역시 어떻게 됐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런 그가 진정한 것은 타셀로부터 돌려받은 성물 카라볼그를 를뤼엔의 신전에 갖다놓고 온 아르헨이 예의 그 놀라운 신성력으로 카시야의 몸을 치료해 준 이후였다. 아르헨의 신성 치료 이후 카시야는 빠르게 회복했고 그 치료를 받은지 사흘 후에 카시야가 눈을 떴던 것이다.

에르논의 '눈에 그대로 보이는 애정'은 귀족들 사이에서는 천박한 일이나 낯부끄러운 일로 여겨지는 태도였기 때문에 애초부터 그를 못마땅해 하던 이들은 그 태도를 꼬투리 잡아 에르논 자체를 폄하했다. 애정을 드러내더라도 귀족적인 언어와 드라마틱한 몸짓으로 표현해야만 그나마 로맨틱하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에르논처럼 '날 것 그대로'의 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교양 없다고 여겼다. 그리고 공식석상에서는 알리스타스 공작의 아들로 행동해야 했던 에르논 역시 귀족 예법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 그가 그 모든 예법과 시선을 잊어버릴 정도로 카시야에게 매달려있었던 것뿐이다. 그가 얼마나 카시야에게 애절했는지, 흰 속눈썹에 조그만 물방울을 매달고 보랏빛 눈동자를 카시야의 잠든 얼굴에서 떼어내지 않는 그 모습에 덜컥 마음이 설레더라는 기사까지 있었다. 그 발언을 미하일에게 들킨 이후 카시야가 있는 방의 호위 임무에서 배제되어버리고 말았지만.

어쨌든 카시야가 눈을 떴다. 어디 이상해진 데도 없고, 자신이 카라볼그의 현신이었던 상황 외에는 거의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 모든 게 다 잘 됐어."

루크는 또 쓸데없이 착잡해지려는 마음을 추스르고 황궁 쪽으로 향하는 발걸음에 속도를 더했다. 조만간 있을 포상식에서 제대로 된 포상이나 얻어내야겠다고 유쾌하게 생각하면서 말이다.

*

카시야는 또 설핏 잠이 들었다가 깬 참이었다.

오랜 혼수상태 기간 동안 몸이 많이 쇠약해진 탓인지, 아니면 몸에 저 아닌 다른 무언가가 들어왔다 빠져나간 탓인지, 눈 뜬 이후에도 자꾸 힘없이 잠들어버리고는 했다. 그동안은 이제 일어나 몸 좀 움직이고 싶다는 자신의 의견을 타셀부터가 단칼에 잘라 불허했기 때문에 꼼짝없이 누워있었지만, 이제는 잘 먹어서 살도 좀 올랐고 전보다 멀쩡하게 눈 떠 있는 시간도 길어졌으니 무슨 일이 있어도 내일부터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야겠다 마음먹었다. 눈을 뜨면 늘 옆에서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에르논의 표정이 안쓰럽기도 했고 말이다.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에르논. 아마 단기간 내로는 죽지 않을 거라 생각하니까요."

카시야는 또 미간에 걱정을 잔뜩 얹어두었던 에르논에게 피식 웃으며 말을 건넸다.

"거, 걱정이 아니라… 자는 얼굴이 너무 못생겨서 나도 모르게 인상이 찡그려진 모양이야."

카시야가 잠에서 깰 때마다 자신에게 죽을 상 좀 짓지 말라고 했던 게 떠올라 아무 말이나 주워섬겼다. 하지만 곧 제가 무슨 말을 내뱉었는지 깨닫고는 더욱 당황하기 시작했다.

"아…, 그러니까 평소보다 못생겼다는 거지, 진짜 못생겼다는 말은 아니고…. 아니, 못생겼다기보다는 그냥 얼굴이 좀 부어서…. 그러…니까, 어제 먹은 음식이 너무 짰나 생각했다는 말이지. 짠 음식을 먹고 자면 얼굴이 붓는다고 하길래…."

뇌에서 제대로 정제되지 않은 말이 마구잡이로 튀어나오고 있었지만 상황을 개선시키기는커녕 점점 손쓸 수 없을 만큼 엉망진창이 되고 있었다. 물론 에르논의 머리에서만 말이다.

카시야는 당황해서 주절거리는 에르논을 재밌다는 듯 바라보다가 큭큭 웃었을 뿐이다.

"그런데…. 에르논이 머무르는 방은 어딥니까? 폐하께서 당장 머물 곳이 없는 이들에게 황궁의 방들을 나눠줬다고 하시던데, 늘 여기에 계시니 말입니다."

"…왜? 내가 여기 있는 게 싫어?"

"음? 싫고 좋고를 따지는 게 아니라, 저는 그저 당신이 머무르는 방이 어딘지 물었을 뿐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내 방 놔두고 왜 여기서 죽치고 앉아있느냐는 말 아냐?"

"흐음…. 뭔가 제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받아들이시는 것 같습니다만."

"그게 아니면 뭔데? 그래, 네가 이렇게 된 게 다 나 때문이기는 해. 정말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하지만 내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네가 죽은 줄 알았을 때는 정말이지 나도 제 정신이 아니었고…."

"아니, 아니. 제가 지금 그런 얘기를 하는 게 아니라…."

"뭐라고 해도 못 나가! 또… 또 네가 내 손 닿지 못하는 곳에서 쓰러지는 모습을 보게 될까봐… 불안해 미칠 것 같으니까."

그저 '네 방은 어디냐'를 물어보려던 카시야는 굉장히 엄청난 고백을 들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그리고 왠지 제가 잘못한 것도 없이 비난을 받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더 이상 에르논의 말에 토를 달지는 않았다. 그저 놀리듯 한 마디를 덧붙였을 뿐이다.

"그렇게 제가 좋습니까?"

어차피 답이 다 나와 있는 것 같아 놀리려고 던진 질문이었는데, 뜻밖에 에르논은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얼어붙어버렸다.

============================ 작품 후기 ============================

카시야의 풀 네임은 여기저기 많이 썼는데...;; 임팩트가 상당히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목요일까지 못올릴 것 같아서 미리 연참 올립니다~~

+ 그녀의밤 님, sodamm님, 징수니 님. 후원쿠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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