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25 시작(3) =========================
"어… 그, 그게…."
양 볼을 붉게 물들인 채 시선을 맞추지 못하는 에르논의 모습은, 타인에게 무심한 카시야가 보기에도 꽤나 귀엽게 여겨졌다. 하얀 머리카락과 희고 매끄러운 피부 때문인지, 마치 보라색 눈을 가진 흰 토끼가 부끄러워하는 것 같았달까.
"귀엽네요."
카시야는 무언가가 뭉근하게 내장을 휘젓는 것 같은, 그럼에도 전혀 불쾌하지는 않은 기분이 들어 저도 모르게 불한당이 순진한 아가씨를 희롱하는 투로 귀엽다는 말을 내뱉고 말았다. 에르논의 두 뺨에 화르륵 불이 붙은 것은 두말 할 필요도 없었다.
"너…, 너…! 그, 그게 뭐야! 아가씨는,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게 아냐!"
"저야 뭐 귀족 영애가 아니니까요. 왜요. '아가씨'스럽지 않으면 절 싫어하실 겁니까?"
어째 점점 더 희롱조가 되어가는 카시야였다.
하지만 에르논 역시 연약해빠진 남자가 아니었다. 이런 감정이 처음이라 당황했지만, 카시야의 말투처럼 농담조로 받아들이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낯빛을 싹 바꾸고 진지한 표정을 하며 카시야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널… 두 번이나 죽을 뻔하게 만든 주제에 염치없다 생각할지 모르지만, 난… 너 없으면 죽어. 네가 있으니까 사는 것뿐이야. …좋아하고 있어.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어. 내 마음을 받아달라고 억지 부릴 생각은 없지만, 적어도 농담이라고 생각하지는 말아줬으면 좋겠어."
에르논이 말을 마치자 그 큰 방이 정적에 휩싸여 벽난로의 장작이 타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카시야는 당황해하지도, 미간을 찡그리지도, 그렇다고 뺨을 붉히지도 않고 그저 에르논의 보랏빛 눈동자만 가만히 들여다 볼 뿐이었다. 그 침묵이 무엇을 뜻하는지 몰라 에르논이 거의 혼자 미쳐버릴 즈음이었다.
"……!"
에르논의 눈이 커질 수 있는 만큼 활짝 커진 채 온몸이 경직되고 말았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자신의 턱을 잡은 손이라든가, 뜨끈한 콧김이 느껴질 정도로 다가온 카시야의 얼굴이라든가, 제 입술 위에 짓눌려진 또 다른 입술이라든가…. 게다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입술을 맞대다가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한 얼굴로 잠시 그 입술을 뗀 카시야가 에르논을 향해 낮게 말했다.
"입 좀 벌려볼래요?"
그게 도대체 뭘 위한 요구인지 전혀 납득되지 않아 "어…?"하고 되묻는 찰나, 카시야는 "옳지."하며 다시 그의 입술에 제 입술을 마주 대더니 벌어진 입 안으로 뜨겁고 말캉한 혀를 넣어 그의 혀를 건드렸다. 그때부터는 에르논 역시 제 정신이 아닌 채로 그녀의 뒷목을 단단히 잡아 받친 뒤, 혀와 혀가 뒤얽히는 게 이렇게나 황홀감을 줄 수 있는 행위였다는 것을 깨닫는 데 시간을 할애했다.
사타구니에서 오금까지 저릿해지고 머릿속에서는 그 어떤 언어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이때껏 알지 못했던 흥분감이 불꽃놀이처럼 터질 뿐이었다. 과거에 안았던 그 어떤 여자들과의 관계에서도 지금 이 입맞춤보다 더 큰 황홀경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마침내 카시야가 입술을 뗄 때쯤에는 더 달라붙고 싶은 아쉬움을 억눌러야 했다.
"이런 주제에 뭐가 안 받아줘도 괜찮다는 말입니까?"
카시야는 지금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아 눈가까지 붉히고 있는 에르논의 눈꺼풀을 손가락으로 살짝 쓸었다. 하지만 조금 정신을 차린 에르논은 이제 카시야가 무서워질 지경이었다.
"너… 카시야 맞지?"
"왜요. 난 키스도 못할 줄 알았습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그랬다. 에르논이 떠올리던 망상 속에서의 카시야는 애정이니 스킨십이니 하는 것에는 영 어설퍼서 하나부터 열까지 자신이 조심조심 가르쳐줘야 할 상대였던 것이다. 하지만 노련한 카사노바처럼 제 혼을 쏙 빼놓은 지금의 카시야는 어쩐지 너무 위험하게 느껴져 심장이 마구 뛰었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는 에르논을 향해 카시야가 또 큭큭대며 웃었다.
"저도 사람인지라, 아주 가끔… 정욕 같은 걸 느낄 때가 있죠. 그걸 느껴본 대상이 누구였을 것 같습니까."
낮고 느릿하면서도 도발적인 그녀의 질문에 에르논은 입까지 벌리고 가쁘게 숨을 쉬었다. 그의 멍청해진 얼굴이 카시야의 만족감을 채워주었다. 그녀는 에르논의 입술에 다시 한 번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추고는 느른하게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나, 난… 장작! 장작 좀 더… 갖고 올게."
에르논이 벌떡 몸을 일으키고는 쏜살같이 방 밖으로 나가버렸다. 장작 따위야 시종에게 갖고 오게 하면 될 일인데 말이다.
카시야는 그의 뒤꽁무니를 바라보며 미소 짓다가 에르논에게 처음으로 야릇한 감정을 느꼈던 순간을 떠올렸다.
사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부터 그의 외모에는 시선이 갔다. 사람의 외모에 정신을 빠트리거나 휘둘리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눈이 달리고 멀쩡한 정신을 가진 이상 취향이라는 것은 존재했다. 그의 외모는 꽤나 자신의 취향이었다. 남창 따위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보통 인물이 아니라는 것 때문에 그가 꼬여내는 대로 따라가기는 했지만 거기에 그의 외모가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하기에는 솔직히 단언하기 어려웠다.
어쨌든 그에게 거짓으로 충성을 맹세하고 그의 방에 따라가 며칠 지내보니, 그에게 심정적 동요가 일어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전생을 자꾸만 떠올리게 하는 그의 인생도 그렇지만, 마치 따뜻한 헝겊 인형에라도 달라붙으려는 아기 고양이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인간으로서 결여된 부분이 많다는 것은 그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고 있었는데, 그런 저가 보이는 대응조차도 따스함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그가 안타까웠다.
성에 있다가 케일런군이 있는 전장으로 향하던 중 마지막 밤을 보냈던 마을에서였다. 그가 제 명치에 있는 검은 문양을 보여줬을 때, 새하얀 피부 위를 지져놓은 듯하던 그 문양을 보고는 저도 모르게 그의 몸에 손을 댔다. 처음에는 그저 문양을 더 확실히 기억해두기 위해 한 번 더 보여달라던 것뿐이었는데, 그의 상처받은 눈빛과 선명한 쇄골과 흰 피부에 대조되는 흉측한 문양을 보자 그의 몸을 쓰다듬어주고 싶다는 욕구가 확 끼쳐 올라 자기도 모르게 손을 대고 말았다.
스스로도 조금 당황했었다. 남의 살과 맞대어지는 기억 중 좋았던 기억이 없었던지라 저에게 그런 욕구가 생기리라고는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말 신기했던 게, 그의 하얀 목덜미를 물어봤으면 하는 생각이 떠오르더란 것이었다. 세이지가 자신을 안으면서 제 몸에 멍을 만들어놓는 게 그의 뒤틀린 정복욕의 발현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그렇다면 자신도 에르논에 대해 뒤틀린 욕망을 갖고 있는 것인지 궁금해졌었다.
그 다음은 타셀군 진영에서 그가 조심스레 자신의 마나 코어를 찾던 때였나. 제가 먼저 마나 코어를 찾아달라고 부탁한 것이었지만, 미세한 떨림이 느껴지는 그의 손끝이 가슴께를 더듬던 순간, 왠지 굉장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나름 포커페이스를 유지했지만 만약 그때 미하일이 막사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상황이 순식간에 어색해졌을 수도 있었다.
그때까지 동물적인 본능에 가까운 야릇한 감정을 별 것 아닌 것이라 여겼지만, 그것은 생각 외로 대단한 감정이었다. 그 감정의 파편 때문에 자신은 스스로도 납득되지 않을 만큼 에르논의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으니까. 그가 대마법사라 불린대도, 공격 마법의 정점이래도 자신에게 있어서만큼은 깨지기 쉬운 예술품이나 가냘픈 아기고양이 같은 이였다.
그리고 그와 나눈 입맞춤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달콤하고 기분이 좋았다.
두 번째의 죽음을 거절하고 돌아오며 카시야는, 이번 생만큼은 다른 누구의 도구도 아닌 나 자신이 되자고,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되도록 다 해보자고 다짐했었다. 그리고 그 다짐의 첫 번째 대상이 에르논이었다. 다행이 그가 먼저 자신을 좋아한다고 고백해주었으니 출발이 좋았다. 하지만 자신이든 에르논이든 인간관계, 특히나 남녀 관계에는 서투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니, 앞으로도 계속 좋으리란 법이 없다.
'노력해봐야겠지….'
카시야에게도 에르논은 처음으로 '갖고 싶다'고 생각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좋아 한다 고백 받고, 갑작스레 한 입맞춤도 싫다 소릴 듣지 않은 덕에 카시야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편안하게 몸을 이완시켰다. 에르논이 뭐라고 하며 장작을 가져올지 기대하면서 말이다.
*
궁내부 관리들은 새해를 맞이하기 전에 공신들에 대한 봉작과 포상을 마무리하기 위해 매일같이 이어지는 야근도 불사하며 일에 매달렸다. 내전으로 인해 사라진 귀족 가문도 많았고, 힘의 균형점도 완전히 뒤바뀐 상황인데다, 처벌 대상 귀족들의 범위가 애매해서 타셀이 황궁을 장악한 이래 궁내부 관리들은 끊임없이 고민해왔다.
제 1황자파 또는 황제파라는 이유만으로 모두를 죽이지는 않겠다는 타셀의 의지가 꽤 많은 이들을 살렸는데, 살아남은 반대파에게 어떤 불이익을 줄 것인가도 고민거리였다. 무엇보다도 제 1황자군이나 황제군과는 달리 평민 출신 기사들이 많이 합세했던 타셀군이었기 때문에 새로이 봉작되는 평민이 많아진다는 것도 그들의 골머리를 썩게 했다.
하지만 그것은 관리들의 일일 뿐, 타셀은 이번 기회를 통해 귀족들의 특권 의식이 약화되고 평민들이 한층 더 성장하기를 바랐다. 이름 내에 '델'이라는 호칭이 들어가는 귀족들을 무시하는 관습도 싹 뜯어고칠 생각이었다. 칼리스토니아의 귀족이라면 태어날 때 부여받은 이름과 어머니 쪽의 성, 그리고 아버지 쪽의 성이 합쳐지는 형태의 이름을 가져야 하는데, 평민 출신은 끼워 넣을 성이 없기 때문에 일괄적으로 '델'이라는 호칭을 중간에 끼워 넣게 되어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귀족 사회에서는 누가 평민 출신 귀족인지 금방 알아볼 수 있었고, 평민에서 귀족으로 신분 상승이 된 자가 많지 않다보니 은연중에 따돌림을 당하곤 했던 것이다. 하지만 금번 봉작에서는 대규모의 신분 상승이 이루어질 터였다.
특히 황제를 직접 베어 타셀군의 승리를 결정지은 것이 ‘평민’ 출신 ‘여’기사라는 점은, 타셀에게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요소였다. 카시야에게 큰 짐을 지우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평민 출신으로서는 이례적으로 높은 작위와 영지를 받게 될 것이다. 그래야만 했다. 평민이라는 한계, 여성이라는 한계를 깨부술 수 있다는 상징이 되어줘야만 했다. 처음 카시야에게 이런 설명을 했을 때, 그녀는 작위는 받을 수 있지만 영지만은 참아달라고 부탁했었다. 드넓은 영지를 잘 관리할 자신이 없을 뿐더러, 어디에 메여있고 싶지 않다고 말이다. 그런 그녀를 설득한 것은 알리시아였다. 도대체 뭐라고 구워삶았는지는 모르지만 알리시아와 얘기를 마친 카시야가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몇 가지 단서 조항이 붙기는 했지만 그 정도는 못 들어줄 것도 아니었다.
"작위와 영지를 받아달라고 부탁해야 하는 사람도 있군."
타셀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포도주를 한 모금 머금었다. 곁에서는 알리시아가 그와 함께 식사 중이었다. 타셀은 문득 고개를 들어 알리시아에게 물었다.
"뭐라고 설득한 거지? 영지는 정말로 받을 생각이 없어보였는데 말야."
그 말에 알리시아가 빙긋이 웃었다.
"사람을 설득할 때는 그 사람이 걱정하고 있는 요소를 제거해주면 되지 않겠습니까. 우선 능력이 뛰어난 관리인을 여럿 보내준다고 했고요, 둘째로는 영지의 정확한 의미를 알려주었지요. 영지 내에서는 제국법에 어긋나지만 않는다면 카시야 경이 원하는 사회를 만들어도 된다고요.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미르바하라 산포도 와인을 매년 스무 병씩 보내준다고 했어요."
"뭐? 내가 했던 말이랑 크게 다르지도 않은데 어떻게 설득을…. 카시야 경이 날 싫어하나?"
타셀의 투정 같은 말투에 알리시아가 까르르 웃었다.
"아마 미르바하라 산포도 와인이 제일 큰 이유일걸요?"
두 사람은 카시야라면 정말 그것 때문에 수락했을 수도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봉작과 봉토는 황제만이 할 수 있다는 제국법에 따라 대관식을 먼저 치르고, 그 날 전쟁 공신에 대한 포상까지 이루어지기로 한 덕분에 황궁은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갔다.
12월 31일에 대관식과 포상식이, 1월 1일은 새해맞이 성축연이 있을 예정이었기 때문에 도심에는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데 대한 기대감이 날로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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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시야는 아무래도 플러팅의 귀재인듯....